Chapter 610 - 610화. 범인은 이호연이었습니다. (19)
따뜻한 햇빛이 창문을 통해 스며들었다.
"으으음…."
감은 눈 앞이 밝아진다.
백아영은 몸을 웅크리며 천천히 눈을 떴다.
아무리 성녀라도 아침에 일어나는 건 힘들었다.
특히 온몸을 짓누르는 피로를 떨쳐내기가 힘들었다.
벌써 며칠 연속으로 무리해서 마력을 사용했다.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뼈가 시린 것 같았다.
그나마 백아영이 가진 치유의 마력 덕분에 최소한의 활기는 가질 수 있었다.
"하으, 잠들어버렸…. 응?"
천천히 의식을 각성한 백아영이 느낀 건 침대 시트의 부드러움이었다.
백아영의 마지막 기억은 분명 테이블이었다.
꾸벅꾸벅 졸면서 우리 여보를 기다리다가 깜박 잠들었는데, 왜 침대에 있는거지?
자신도 모르게 침대로 걸어온걸까.
"… 아?"
눈을 뜬 백아영은 옆에 누워있는 남자를 보고 눈을 깜박거렸다.
이호연.
어젯밤 기다리다 잠든 남자가 자신의 옆에서 자고 있었다.
"…."
백아영은 눈을 찌푸렸다.
마지막 기억은 분명 테이블이었다.
근데 왜 여보가 여기 누워있지?
설마 그 뒤에 무언가 한 건가?
머리에 가득 차있던 잠을 지워낸 백아영은 자신의 복부를 쓰다듬었다.
뜨거운 밤을 보낸 다음 날 아침에 느껴지는 특유의 아픔이 없었다.
다행히 야한 짓을 했는데 기억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휴우. 다행이다.
기억하지 못하는 섹스였다면 얼마나 아까웠을까.
"그럼 여보는 왜 여기 있는 거지?"
백아영은 이호연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입가에 작은 미소를 띄고 잠든 그는 평화로워 보였다.
다행히 오늘은 악몽에 시달리지 않는 것 같다.
"… 우리 여보. 호연이."
자는 모습도 어찌 이렇게 사랑스러울까.
백아영은 멍하니 이호연을 바라봤다.
꾹.
유혹을 참지 못하고 그의 뺨을 부드럽게 찔렀다.
이호연은 잠시 움찔거리긴 했지만, 잠에서 깨어나진 않았다.
"이렇게 보는 게 아니라 좀 더 감동적인 만남을 해야 했는데…."
일이 끝난 뒤에 기다리던 여보와 포옹.
응급실에 찾아온 여보를 모두에게 소개하며 행복한 웃음.
피곤한 몸을 이끌고 사무실에 갔더니 기다리던 여보와 뜨거운 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계획이 있었지만, 기다리다 지쳐 잠든 후 만나는 건 계획에 없었다.
'… 일단 다시 자야지.'
이호연이 일어나질 않으니 자신도 좀 더 잘 생각이다.
먼저 일어나는 것도 신혼 부부 같아서 좋았지만, 오늘은 그와 함께 아침을 맞이하고 싶었다.
"하음."
백아영은 조심스럽게 침대에 누운 뒤 이호연에게 달라붙었다.
바로 옆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체온.
백아영은 그 체온을 조금 더 느끼기 위해, 꼬물거리면서 이호연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
스르륵-
"…."
자연스럽게 눈이 떠졌다.
침대에서 눈을 뜬 이호연은 오늘따라 상쾌한 기분을 느끼며 일어났다.
하품을 하고 기지개를 켜려는데, 무언가 팔에 걸렸다.
고개를 돌리자 잠든 백아영이 자신의 팔을 끌어안고 있었다.
입을 뻐끔뻐끔거리는 게 꿈에서 식사라도 하는 걸까.
"해가 중천인데 아직도 자고 있어."
"아므네므느…."
살짝 열려있는 백아영의 입에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따뜻한 입 안의 통통한 혀를 건드릴 때마다 입을 우물거리는 모습에 웃음이 나온다.
귀여운 반응을 보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좀 더 괴롭히게 된다.
"아므므… 스읍. 헉."
이호연의 팔을 끌어안고 꿈틀거리던 백아영이 팟- 하고 눈을 떴다.
눈을 깜박거리며 주변을 둘러보던 백아영은 이호연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울상을 지었다.
"여보, 보고 싶었어요. 흑."
"나도 보고 싶었어요."
백아영은 이호연의 가슴에 안겼다.
함께 아침을 맞이하는 거다. 일어나자마자 품에 안겨있다보니 가슴이 진정되는 느낌이다.
"프랑스까지 갖다오느라 고생 많았어요."
"아영 씨가 약을 챙겨준 덕분에 마음 편하게 갖다올 수 있었어요."
"약이 다 떨어졌죠? 흑. 더 챙겨줬어야 했는데. 미안해요…."
"이렇게 늦을 줄은 나도 몰랐는데요 뭘."
쓰담쓰담.
이호연은 백아영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흑흑. 소리가 들려오고 가슴 부근에 습기가 느껴진다.
아무래도 진짜 우는 모양이다.
'근데 왜 안 놀라지?'
눈을 뜨자마자 옆에 사람이 있으면 보통 화들짝 놀라지 않나?
아니면 너무 놀라서 눈물도 나는 건가.
'뭐 어때.'
크게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백아영이 기뻐하는 걸 보니 자신도 기뻤다.
"근데 오늘은 출근 안 해도 괜찮아요? 벌써 10시에요."
"으응. 어제 늦게까지 일해서 오늘은 오후에 출근이에요. 여보."
"아하…."
그럼 좀 더 여유롭게 있어도 되겠네.
이호연은 백아영을 끌어안고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굳이 잠을 자지 않아도 누군가에게 안긴 채 눈을 감으면 마음이 편해진다.
"어제 응급실을 보니까 일이 바빠 보이던데, 몸은 괜찮아요?
"아… 으응. 괜찮아요. 여보."
"얼굴은 피곤해 보이는데… 너무 무리하지 말아요. 아영 씨가 노력하는 건 제가 제일 잘 아니까."
백아영은 여전히 예뻤지만, 왠지 초췌해 보였다.
그녀의 성격상 분명 무리하면서 일하고 있겠지.
"여보… 사랑해요. 으으. 안아줘요."
백아영은 이호연의 가슴에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이호연의 말 한마디에 피로가 눈 녹듯 사라진다.
"응응. 우리 여보만큼 예쁘고 착한 사람이 어딨어."
칭찬 한마디에 강아지처럼 얼굴을 비비는 백아영을 보니 고마울 따름이다.
가장 늦게 보러왔으니 칭찬이라도 더 해줘야지.
"흐으응."
"귀엽기도 하고, 어른스러울 때도 있고. 항상 저를 챙겨주는 것도 아영 씨가 최고예요."
아무리 열심히 해도 안 되는 건 있다.
그럴 때마다 곁에 있어 주는 히로인들이 있으니 힘을 낼 수 있는 거다.
특히 백아영은 욕심을 부리는 것 같으면서도 자신의 할 일은 잘 하는 게 참 보기좋았다.
"헤헤. 여보…."
더욱 달라붙는 백아영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이호연은 이내 표정을 굳혔다.
지옥의 문은 지금 이 시각에도 영역을 넓히고 있다.
이런 평화로운 일상도 얼마 남지 않았다.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하니까 기분이 나빠진다.
"… 아영 씨."
"으응. 여보."
이호연의 분위기가 바뀐 건 백아영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이호연에게 안긴 채 그의 말에 집중했다.
"지옥의 문은 알고 있죠? 앞으로 엄청난 일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아요. 무슨 일이 있어도 아영 씨는 지킬 테니까. 아영 씨는 아영 씨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해주세요."
백아영은 전투계 능력자가 아니다.
그녀의 힘으로 자신의 몸을 지킬 수 없는 만큼, 위험한 상황이 되면 이호연이 가장 먼저 챙겨야 한다.
"여보…!"
"나중에 천천히 설명해줄게요."
백아영은 이호연의 말을 들으며 가슴을 두근거렸다.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여보와 함께라면 극복할 수 있다.
그런 자신감이 샘솟았다.
그리고 그 첫걸음은, 2주 만에 만난 이호연과 뜨거운 관계를 가지는 것이다.
"여보오. 흐으읏. 여보만 있으면 다 할 수 있어."
"응응. 고마워. 여보."
"말로는 부족해요. 여보의 사랑이 필요해…."
"… 안 늦을까요?"
스마트 워치를 보자 시간은 10시 정도.
오후 업무라고 했는데 제때 출근할 수 있는 건가?
"여보. 여보의 사랑을 줘…."
"…."
이미 말로는 안 통하네.
헛웃음을 지은 이호연은 마력을 움직여 햇빛을 가리는 커튼을 쳤다.
*
덜렁덜렁.
나는 백아영이 챙겨준 약봉지를 가지고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일어나자마자 백아영과 섹스는 힘들었지만, 2주만에 만난 그녀를 내버려둘 수도 없었다.
'아영 씨한테도 대충 설명했으니… 검은 기둥 부수는 데 집중해야겠어.'
검은 기둥에 대한 설명도 끝냈으니 백아영도 어느정도 사정을 이해해줄거다.
"아무도 없어?"
현관문을 열었는데도 인기척이 느껴지지가 않는다.
이미 점심이 지난 시간이라 다들 일어나있을 줄 알았는데, 날 맞이하는 건 텅 빈 거실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른 방을 둘러봤지만, 역시 자고있는 사람은 없었다.
"다들 바쁜가 보네."
개인적인 일을 하러 갔거나, 훈련장에 있겠지.
방금까지 백아영과 몸을 섞고 왔으니 혼자 있는 것도 그렇게 나쁘진않았다.
쫄쫄쫄-
정수기에서 물을 받은 뒤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창문을 열고 폐로 스며드는 맑은 공기를 느끼며 약봉지를 하나 깠다.
악몽을 꾸는 주기가 길어지고 있었지만, 가끔씩 꾸는 악몽은 여전히 고통스러웠다.
이런 거라도 챙겨 먹어야지.
그래도 백아영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꿀꺽.
약을 삼킨 뒤, 나는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아무도 없는 거실에서 시원한 바람을 느끼고 있다 보니 머리가 차가워지는 기분이다.
'검은 기둥을 부수고. 지옥의 괴수들을 처리한다. 그리고… 마왕까지 토벌해야 해.'
기억을 하나씩 되짚었다.
원작 게임의 마지막 에피소드인 마왕의 습격.
지옥의 괴수들이 창궐하고 악마 대공들이 각국을 습격하고, 혼란한 틈에 한국을 덮치는 마왕을 막아내는 게 게임의 엔딩이다.
'이제와서 의미가 있나 싶지만… 훈련 시간이라도 더 늘려야 하나.'
난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검은 기둥을 부수는 건 훈련이나 마찬가지다.
지금도 피치 못할 사정이 없다면 하루에 몇 시간은 명상과 마나 훈련에 사용하고 있다.
'차라리 명상의 시간을 늘려서 새로운 마법이라도 고안하는 게 낫지.'
쯧. 난 입맛을 다셨다.
프랑스에서 고안했던 '현월의 전당.'
자신의 주변 공간을 꿈으로 덮을 수 있는 마법.
그것만 사용할 수 있었으면 상황이 훨씬 좋았을텐데.
마법적 성취를 이루긴 했지만, 그런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는 건 아쉬운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임솔 교수님과 대련에서 사용했던 마법도 다시 써봐야 하는데.'
상대의 마력을 지워내는 마법.
그것도 다시 한번 고민해볼 필요가….
"야! 왜 사람이 부르는데 대답을 안 해!"
그때, 내 명상을 깨는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허리에 손을 얹은 채 눈을 찌푸리고 있는 릴리아나가 보였다.
"… 릴리아나?"
"내가 몇 번이나 불렀는데. 왜 무시하는 거야! 사람이 부르면! 아니, 서큐버스가 부르면 대답을 해야지! 그게 인지상정이야!"
나는 고개를 돌려 스마트 워치를 확인했다.
백아영의 약을 챙겨 먹고 잠깐 눈을 감은 것 같았는데, 벌써 30분이나 지나있었다.
"미안해. 릴리아나. 잠시 생각을 좀 하느라."
"흥.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건 서큐버스를 무시하는 행동이야."
"미안미안. 치킨 사줄 테니까 화 풀어."
"크흐흠. 흐응…. 그렇다면 한 번 쯤 봐줄 수 있어."
명상에 너무 집중한 모양이다.
난 가벼운 스트레칭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쿡. 쿡.
"왜 그러는데. 말로 해 말로."
릴리아나는 아직 용건이 끝나지 않은 듯 내 허리를 찌르고 있었다.
"무릎 위에 앉을랭."
"… 왜?"
"안돼?"
"안되는 건 아니지."
오히려 고맙다.
릴리아나의 가벼운 몸이 허벅지에 올라가있으면 기분이 좋거든.
"으음. 그러고보니 레베카랑 스카웃이 훈련하고 있더라."
"또? 이따가 한 번 가야겠네."
"나랑 게임 좀 하고 가. 요즘 안 놀아줬잖아!"
"그래그래. 근데 거기 앉으면 내가 화면이 안 보이는데."
"넌 너무 잘하니까 이렇게 해야해."
이호연은 불만을 말하는 대신 릴리아나의 배에 손을 둘렀다.
부드러운 엉덩이의 감촉이 허벅지에 그대로 느껴진다.
역시 여기 앉히는 건 기분이 좋구나.
"자, 시작할거야. 공정한 경기니까 기록으로 남길게."
"마음대로 해."
어차피 뭐라고 말해도 릴리아나가 그렇게 마음먹으면 해야한다.
대충 몇 판 져주면 그만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