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09 - 609화. 범인은 이호연이었습니다. (18)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밤.
이호연은 조용한 아카데미의 밤길을 걸었다.
걸음걸이는 느긋했지만 생각을 정리하며 걷다 보니 주변 풍경을 둘러볼 정신은 없었다.
'하룻밤 자고 올 생각이었는데… 쫓겨나 버렸네.'
이호연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적당히 문수린의 일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뜨거운 밤을 보내고, 침대에서 같이 기분 좋게 잠드는 게 자신의 계획이었다.
이왕이면 수린 누나를 끌어안은 채 잠들려 했다.
'근데 잔업을 8시간이나 하는 사람이 어딨어.'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귀를 의심했다.
하루 밤 새는 건 익숙하다며 잔업을 처리한 다음에 곧바로 출근이란다.
좀 당황스럽긴 했지만, 이호연도 체력은 자신 있었다.
자신도 하루 밤 새는 정도는 익숙하다.
그래서 수린 누나의 잔업이 끝날 때까지 같이 깨어있을 생각이었다.
[… 호연아. 옆에서 계속 보고 있을 거야?]
[네. 저도 누나랑 같이 노력할게요. 아니면 도와줄 일이라도 있어요?]
[아니야. 호연이는 집에 가서 자도 괜찮아.]
[그럴 순 없죠. 수린 누나만 고생하는 걸 내버려 둘 순 없어요. 제가 일이 끝날 때까지 옆에 있을게요.]
[….]
한 시간 정도 조용히 문수린의 작업을 구경하고 있는데, 뜬금없이 집에서 쫓겨났다.
네가 있으면 도저히 집중을 못 하겠다는 이유였다.
"오늘은 계속 누나랑 있으려 했는데… 벌써 괜찮아진 건가?"
아직 마음이 불편하긴 하다.
자신에게 안긴 채 울던 문수린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났다.
문수린의 상처를 조금 더 보듬어줘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에 오늘은 문수린과 있으려 했다.
하지만 자신을 내보낼 때 부끄러워하던 걸 생각하면 자신이 바라보는 것 때문에 일에 집중을 못 하는 모양이다.
일을 도와주는 건 부담이고, 혼자 침대에서 자는 건 바라보는 것 만큼 신경쓰인다고 한다.
그럼 어쩌겠어. 나가야지.
수린 누나가 그렇게 느낀다면 어쩔 수 없다.
"시간이 많이 늦었네."
이호연은 스마트 워치를 확인했다.
원래 오늘 밤은 백아영을 보러 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문수린의 기숙사에 따라가면서, 백아영에게 일이 있으니 답장이 없으면 먼저 자라는 내용의 메시지를 보냈다.
"아직 일이 안 끝난 건가?"
보내놓은 메시지에 답장이 없다.
이호연은 잠시 고민하다가 집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돌렸다.
집으로 돌아가서 쉬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백아영도 빨리 보고 싶었다.
아까 만났던 백아영의 얼굴을 생각하면 더 챙겨주고 싶기도 하고.
이호연은 걸음 속도를 높이며 응급실로 향했다.
"… 네? 퇴근했다고요?"
"1시간? 아니 2시간 정도 된 것 같습니다. 성녀 님이 많이 피곤해보이셔서 먼저 퇴근하셨어요."
"아… 그렇군요."
응급실 근무자 한 명을 붙잡고 백아영을 찾았는데, 이미 퇴근했다는 말에 힘이 쭉 빠진다.
퇴근했는데 왜 답장은 안 보낸거지?
"이호연 생도도 성녀 님 치료 예약이셨나요? 제가 알기로는 지옥의 마력 중독자들 때문에 급한 환자가 아니면 미뤄졌다고 들어서요. 예약 시간을 확인해드릴까요?"
"괜찮습니다. 고생하세요."
이호연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 응급실을 빠져나왔다.
응급실에 없다면 사무실로 찾아가면 되겠지.
백아영은 응급실 업무가 바쁠 때마다 사무실에서 묵고 일어나자마자 출근한다.
아마 오늘도 그렇지않을까.
'내 주변 사람들은 다들 열심히 사는 것 같네.'
특히 백아영은 사람을 도와주는 걸 좋아하다보니 자기 체력 이상으로 무리하곤한다.
퇴근하기 전 모습이 아주 피곤해 보였다고 하니 더 걱정이다.
가서 얼굴이라도 봐야겠다.
"… 급증한 환자의 원인이 지옥의 마력이 문제라고 했었지."
몸에 지옥의 마력을 억지로 흡수한 환자들을 지옥의 마력 중독자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사실 이호연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나쁘지 않은 일이다.
일반인에 가까운 능력자까지 지옥의 마력에 접촉하며 부작용이 생겼다는 말은, 지옥의 마력이 존재한다는 걸 많은 사람이 알았다는 뜻이다.
지옥의 마력에 대한 인식이 아예 없을 때와 비교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내일부터는 검은 기둥을 부수러 다녀야 하는데.'
물론 아픈 머리는 나아지지 않았다.
해결할 일이 너무 많았다.
먼저 지옥의 괴수들이 움직이기 전에 한국에 있는 검은 기둥을 전부 부숴야 한다.
검은 기둥이 지옥의 괴수들에게 힘을 준다는 심증은 있지만, 물증은 없다.
물증을 만들기 위해선 결과로 증명해야 한다.
지옥의 괴수가 습격할 때 프랑스와 한국만 안전하다면 자신의 이론이 맞다는 뜻이다.
아이리스 길드와 마법사 협회가 위협을 알려도 사람들이 말을 듣질 않으니, 그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다.
'노력은 해보겠지만…. 맞다. 높은 사람들도 만나봐야하는데.'
일정을 생각하며 걷다 보니 백아영의 개인 사무실 앞까지 도착했다.
똑똑똑.
노크해도 대답이 없다.
이호연은 문에 귀를 대고 마력을 집어넣었다.
인기척은 없었지만, 사무실 안에서 일정한 숨소리가 느껴졌다.
띡띡띡띡.
이호연은 사무실의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었다.
불이 켜진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자 바로 보이는 사람의 형체.
응접용 테이블에 엎드린 백아영이 쿨쿨 자고 있었다.
겉옷을 벗지도 않은 모습을 보니 잘 생각이 없었는데 잠든 모양이다.
이호연은 깔끔하게 정돈되어있는 사무실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미안해요. 여보."
그녀의 성격상 아무리 피곤해도 여기서 잠 들리는 없다.
아마 날 기다리다가 잠들었겠지.
여러모로 미안한 일이 많다.
신경 쓸 사람은 너무 많고, 할 일도 많다 보니 몸이 하나로는 부족하다.
하지만 불평할 순 없다.
지옥의 문을 막은 뒤 마왕을 잡기 전까진, 이런 패턴으로 살아야겠지.
'… 마왕을 죽이면 괜찮아지려나.'
이 세계가 게임이라는 인식은 거의 없어지긴 했지만, 현재 이호연은 내기의 신에게 보증받은 내기에 참여하고 있다.
『메인 퀘스트 : 모든 히로인을 공략하고 게임의 엔딩까지 살아남으시오. 할 수 있으면. 실패 페널티 : 죽음』
메인 퀘스트를 떠올릴 때마다 눈앞의 보이는 상태창이 그 사실을 다시 상기시킨다.
게임의 엔딩은 마왕을 죽이는 것.
그럼 마왕을 죽이면 어떻게 되는 걸까.
이호연은 내기의 신이 해준 말을 중얼거렸다.
"… 히로인을 11명이나 공략했으니 엔딩을 보면 이 세계의 신을 죽이고 여기서 사는 것도 꿈이 아니라고 했었지."
그럼 마왕에게 죽으면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건가?
히로인을 10명만 공략했으면 어떻게 되었던 거지?
"… 쯧."
이호연은 혀를 차고 겉옷을 옷걸이에 걸었다.
또 쓸데없는 생각이 머리를 채운다.
어차피 뒤져줄 생각은 없으니 이런 생각은 안 하는 게 낫다.
스르륵-
이호연은 마력을 일으켜 백아영의 몸을 살포시 들어 올렸다.
저렇게 자면 허리 아프다.
침대에 눕혀줘야지.
*
다음 날 아침.
아침부터 유동인구가 많은 카페의 구석 자리.
두 여자는 마주 보고 앉은 채 커피를 홀짝였다.
둘 다 지나가는 남자라면 한 번쯤 흘깃할 정도의 미모였지만, 상급 결계가 둘을 감싸고 있었기에 시선을 받는 일은 없었다.
평범한 사람도 아니고, 아이리스 길드의 한국 지부장이라면 이 정도 일은 간단했다.
아이리스 길드의 한국 지부장 강효린.
아카데미의 객원교수를 하고있는 그녀는 아카데미가 복구될 때까지 할 일이 없었다.
홀짝-
강효린은 눈앞에 앉은 친구를 스윽 살폈다.
새하얀 피부와 길게 뻗어있는 금발, 깔끔한 스타일의 정장.
"요즘 뭐가 잘 안되나 봐? 표정이 안 좋아 보여."
스칼렛.
아이리스 길드에서 나온 뒤 프리랜서로 활동하는 동갑내기 친구다.
"그냥 개인적인 일이야."
강효린은 스칼렛의 표정을 살폈다.
스칼렛은 날카로운 인상과 다르게 귀여운 성격의 친구였다.
남의 일엔 눈치가 빠르면서 자신의 일은 의외로 못 숨긴다.
탁-
강효린은 눈앞에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얼굴부터 '나 힘들어요~.', '고민 있어요~.' 하고 있잖아. 그렇게 얼버무리지 말구 알려줘."
"…."
찌릿.
스칼렛이 눈을 찌푸리자 강효린은 내려놓았던 커피잔을 들고 고개를 돌렸다.
흠흠. 오늘의 날씨는 좋네. 같은 말도 빼먹지 않았다.
'이걸 때릴 수도 없고.'
스칼렛은 이쪽을 슬쩍 바라보는 강효린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가끔씩 미친 짓을 하긴 하지만, 그래도 자신을 걱정해주는 친구다.
… 돈을 많이 주는 고용주이기도 하고.
이번 일은 굳이 숨길 필요가 없는 일이니 말해도 되겠지.
스칼렛은 커피를 한 입 마시고 말을 이었다.
"지옥의 마력. 알지?"
"응. 알아. 요즘 난리잖아. 아하, 알겠다."
강효린은 그제서야 눈치챈 듯 친구에게 눈을 찡긋했다.
스칼렛이 하는 고민이라고 해 봤자 이호연에 관한 거겠지.
"이호연 생도 때문 맞지? 검은 기둥을 부수는 걸로 전 세계에서 평생 먹을 욕을 다 처먹고 있던…. 아니, 미안해. 남자친구 욕 그만할게. 그런 눈으로 보지 마."
"그게 아니라, 반발이 그렇게 심했나?"
"응. 사실 그렇게 논란이 될 주제인가? 싶기도 한데… 틀딱들은 원래 변화를 싫어하잖아. 자기 자리가 위태로워지는 것도 싫어하고. 뉴스에서만 난리고 일반인들은 그게 뭐야? 같은 느낌이지."
스칼렛은 눈을 찌푸렸다.
왠지 구린 냄새가 난다.
직감에 불과하지만, 권력자들이 입을 모아 동의하는 안건은 보통 문제가 생긴다.
'이런 정보를 놓치고 있었다니.'
최근 지옥의 마력을 익히는 데에 집중하다 보니 정보에 어두워졌다.
세상은 그 정도로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이 일에 대한 건 이호연에게 꼭 전해야지.
"하아… 아무튼, 비슷하긴 한데. 그 일은 아니야."
스칼렛이 고민인 건 자신의 재능과 지옥의 마력이었다.
지옥의 마력에 익숙해지기 위해서 매일같이 노력했지만, 아직도 깨닫지 못했다.
남다은이나 레베카가 벌써 익숙해진 것에 비하면 너무 느린 속도였다.
"지옥의 마력은 왜? 이제 아이리스 길드도 나왔으니 그럴 필요 없잖아."
스칼렛의 고민을 들은 강효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냥. 어딘가엔 도움이 될 거 아니야."
"그게 무슨 소리야. 네가 목적도 없이… 아하. "
강효린은 입꼬리를 올리며 실실 웃기 시작했다.
그녀가 아무 이유 없이 저 정도로 노력할 리가 없다.
아닌 척하더니 결국 그거구나.
"아아. 역시 사랑을 위해 길드까지 떠난…."
"… 슬슬 가야겠네. 일정이 생각났어."
"오늘 아무것도 없는 거 아는데 어디가려고! 미안해."
"진짜 바빠."
스칼렛은 남은 커피를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효린과 대화에서 딱히 얻어낼 건 없어 보이고, 쓸데없는 대화를 할 시간에 지옥의 마력에 익숙해지기 위해 훈련해야 한다.
"남자 하나 때문에. 으휴."
스칼렛이 나간 뒤, 혼자 남은 카페에서 강효린은 고개를 저었다.
물론 그 남자가 잘생기고 능력도 좋고 미래도 창창하긴 하지만….
"얼굴은 진짜 잘생겼지."
차가운 스칼렛의 마음을 녹여버린 남자다.
여자가 좀 많긴 해도 그 정도 얼굴이면 평생 뜯어먹고 살 수 있다.
"잘생기고 능력 있는 연하남…. 좀 부럽네."
카페에 남은 강효린은 괜히 커피를 쪽쪽 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