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 야겜에 빙의했다-608화 (608/648)

Chapter 608 - 608화. 범인은 이호연이었습니다. (17)

뜨거운 관계가 끝난 뒤.

이호연에게 안긴 문수린은 색색 숨을 내쉬며 여운을 즐겼다.

신음을 얼마나 질러댔는지 목이 메어오는 것 같았다.

'힘들어….'

이호연과 섹스는 기분 좋고 황홀했지만, 그만큼 피로했다.

마치 훈련장에서 훈련을 끝냈을 때처럼 '드디어 끝났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 호연아. 침대 옆에 물통 좀 줄래?"

"이거요?"

"고마워어…."

탁-

이호연의 손에서 물통을 채간 문수린은 고개를 돌리고 물을 꿀꺽꿀꺽 삼켰다.

몸 안으로 들어오는 시원한 수분감이 문수린의 머리를 식혀줬다.

"후우."

문수린의 입술 옆으로 한 줄기 물방울이 또르르 떨어진다.

가슴 위로 떨어진 물방울이 흘러내리는 섹시한 모습을 보니 또 몸이 움찔거렸지만, 이호연은 고개를 저었다.

자신은 인내심을 배운 지성인이다. 섹스할 때마다 상대가 기절하는 걸 볼 순 없다.

따악-

욕정에 빠지는 대신 손가락을 튕겨 '클린'을 사용했다.

물을 한 바가지 흘린 것 같은 침대 위가 뽀송뽀송하게 변했다.

이호연은 문수린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방을 둘러봤다.

"누나, 이건 요즘 읽는 책이에요?"

침대 옆 서랍장 위에 올려져 있는 책 한 권을 들어 올렸다.

방 안에 있는 내 사진을 제외하고 그나마 대화 주제로 꺼낼 수 있는 게 이거밖에 없었다.

독서는 누가 물어도 무난하게 대답할 수 있는 1순위 취미니까.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

어린 시절에 대부분 한 번은 읽어보는 책. 

읽지 않았더라도 이름은 들어봤을 유명한 책이다.

"하아, 응…? 아, 맞아."

"저도 어릴 때 읽어봤던 거 같은데."

별생각 없이 책을 펼쳐서 스르륵 넘겼다.

어린아이의 시선에서 세상을 본 동화 같은 걸로 기억한다.

"호연이도 읽어봤구나?"

"네. 주인공이 어린애였고. 음… 잘 기억은 안 나네요."

고개를 갸웃거리는 이호연을 보며 문수린은 미소를 지었다.

어릴 때 읽은 책의 내용을 기억하지 못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나도 잘 기억은 안 나. 그냥 가끔 읽는 거거든."

문수린은 이호연의 손에 있던 소설을 받았다.

그녀는 항상 어른스럽다는 평가를 받지만, 혼자 있을 땐 어린이 추천 도서를 읽는 걸 좋아했다.

[어린 왕자]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

같은 소설들.

그것들은 사춘기를 일찍 맞이한 문수린이 어린 시절을 추억하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어릴 때 재밌게 봤던 책들도 어른이 되고 나서 보면 전혀 다른 감상을 남긴다.

어린 시절은 돌아오지 않는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때의 감성을 되살릴 순 없었다.

문수린은 그걸 알면서도 소설을 읽었다.

문수린의 성장기는 어두웠다.

정확히 말하면 어둡게 추락했다.

마인에게 살해당한 어머니. 

그 어머니를 쫓기 위해 집을 나간 아버지.

하루아침에 꽃밭이었던 삶이 무너졌다.

병원에 입원 중이라던 어머니는 이미 차가운 묘비 아래에 잠들어있었고, 100 밤만 자면 데리러 온다고 말했던 아버지는 1000 밤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밤마다 베개에서 눈물을 훔쳤다. 그녀는 살아남기 위해 억지로 강해져야 했다.

철이 들고나서부터 아버지와 어머니의 빈 자리를 메우기 위해 노력하고 또 노력했다.

이제는 아무도 문수린을 고아라고 무시하지 않는다.

그녀는 빅토리아 아카데미의 학생회장이라는 자리에서 모두에게 존경받았다.

그럼에도 아버지를 잃은 어린 소녀의 마음 한구석은 여전히 썩어 문드러져 있었다.

이제는 적응했다고 생각했다. 

아쉬운대로 이런 소설을 읽어봐도 바뀌지않았다.

시간이 지난 이상 그때로 돌아갈 방법은 없었으니, 어쩔 수 없이 감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오늘.

이호연 덕분에 마음을 연 아버지의 사과를 받고, 똑바로 마주보고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문수린의 생각은 조금 바뀌었다.

아버지와 나눈 진실한 대화는 곪아버린 문수린의 과거를 치유했다.

상처나기 전으로 돌아갈 순 없다. 그래도, 상처에 약을 바를 순 있었다.

"… 흑."

갑자기 감정이 복받쳤다.

인지하지 못한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자신이 울고 있다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한 문수린은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그러나 닦아내도 닦아내도 계속 흘러나오는 눈물을 막지 못하고, 뒤늦게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 누나. 울어요? 잠시만, 왜? 수린아?"

이호연은 흐느끼는 문수린을 안아주고 그녀의 등을 쓸어내렸다.

약간 당황스럽다.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에 슬픈 추억이 담겨있나?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이 정도로 서럽게 우는 걸 보면 분명 뭔가 있는 거다.

이호연은 문수린을 달래면서 상태를 확인했다.

★ 히로인 상태창 

[문수린] 

- [ 호감도 : 100 ] ( + 1.0 )

- [ 성욕 : 80 ] 

- [ 식욕 : 60 ] 

- [ 피로도 : 70 ] 

현재 상태 : 동화책을 보던 어린 시절의 상처가 떠오름. 문성민과 대화를 생각하니 감정이 복받쳐 오름.

[호감도 100 달성 시 이호연에 대한 의존이 심해짐]

"…."

어린 시절 기억은 당연히 문성민에 관한 일이겠지.

문수린의 과거는 이호연도 알고 있었다.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잃은 소녀의 슬픈 사연.

지금은 상처가 아물었지만, 흉터는 여전히 남아있었다.

'장인어른을 만나면서 상처와 마주 본 건가.'

이호연은 그녀를 더욱 강하게 안았다.

잠깐은 더 힘들 수도 있다. 하지만 결국은 훌훌 털어낼 거다.

문수린은 강한 소녀니까.

"수린 누나는 강한 사람이에요. 분명 다 털어낼 수 있을 거예요."

"… 고마워. 호연아."

문수린은 조심스럽게 이호연을 올려다봤다.

편안한 미소를 지어주는 그의 얼굴을 보니 왠지 가슴이 먹먹해졌다.

첫 만남부터 이상하게 신경 쓰이던 남자.

이호연, 그와 만난 게 문수린에겐 전환점이었다.

"뭘 그런 걸로. 제가 더 고맙죠."

문수린은 이호연의 미소를 보며 눈을 질끈 감았다.

계속 흘러나오는 눈물을 막아야했다.

'호연이도 분명 힘들 텐데.'

이호연은 천애 고아였다.

사춘기를 일찍 겪은 문수린처럼, 그도 정서적으로 불안정할 게 분명했다.

그런데도 항상 강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 사람을 만났다는 게 문수린에게는 축복이었다.

"호연아, … 그거 기억해?"

"어떤 거요?"

"아빠가 다 나으면 호연이 비밀을 말해주기로 한 거."

"… 기억하죠."

가짜 가짜 던전에 대한 걸 고백했던 날. 

그날 문수린이 아버지가 건강을 회복하면 자신에게 다른 여자들의 관계에 대한 진실을 말해달라는 부탁을 했었다.

"오늘 아버지를 잡아준 것만으로도 너무 고마워…. 난 호연이만 있으면 돼. 그냥, 그냥 내게서 떠나지만 않았으면 해… 비밀 같은 건 듣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이호연은 자신의 품에 안겨 얼굴을 비비는 문수린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 비밀 같은 건 없다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괜히 소설책 이야기를 꺼내는 게 아니었는데.

갑자기 이렇게 울어버리니까 이호연도 왠지 기분이 이상했다.

상태창에도 나오듯 문수린은 자신에게 의존한다.

그래서 매일매일 일정을 메시지로 보고하라는 말도 했었지.

'하아.'

이호연은 고개를 돌린 채 슬쩍슬쩍 이쪽을 바라보는 문수린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거짓말할 때는 눈을 피하는 습관을 없애는 게 좋아요. 수린 누나."

"… 내가 그런 습관이 있었어? 몰랐어."

이호연의 말을 들은 문수린은 눈을 크게 떴다.

학생회장이라는 자리에 있으며 그런 습관이 있다는 걸 몰랐다면, 큰 실책이다.

"편안한 사람 앞에서만 나오는 거 아닐까요? 공적인 자리에서는 못 본 거 같아요."

"…."

문수린은 그제서야 자신이 고개를 돌리고 있는 걸 인지했다.

어쩐지 할아버지는 예전부터 자신이 거짓말하는 걸 바로 알아챘다.

그런 이유였구나.

"사실 비밀이랄 것도 없어요. 누나도 다 알잖아요. 제가 다른 여자들과 많이 친한 거."

"그건 알고 있었어."

자신이 다른 여자들과도 깊은 관계라는 것.

문수린에게 고백할 때부터 그녀도 다 알던 사실이다.

숨긴 사실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자신은 게임에 빙의했고, 메인 퀘스트때문에 히로인들을 놓칠 수 없다는 것. 

그렇지 않으면 세계가 멸망한다는 것.

당연히 이런 정보를 말 할 생각은 없다.

수린 누나가 아니더라도, 히로인들이 쓸데없는 걸 신경 쓰게 하고 싶진 않았다.

"제가 말재주가 없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절대 누나를 떠나지 않을게요. 저 능력 있는 거 알죠?"

"… 응."

"다음 학생회장도 제가 할게요. 그리고, 음. 전문 경영인이 생기면 만날 시간도 늘어날테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몇 번이나 느꼈지만, 나쁜 남자 이호연도 눈물을 흘리는 여자에게는 약했다.

눈앞의 여자가 울면 달래주라는 공식이 유전자에 박혀있는 기분이다.

"괜찮아. 호연아."

"제가 안 괜찮아서 그래요. 누나는 원하는 거 없어요?"

"그럼, 호연이한테 도움이 되려면 뭘 해야 할까?"

"누나는 학생회장 일을 열심히 해주면 되죠. … 아."

생각나버렸다.

빅토리아 아카데미의 힘을 빌려 비상사태를 선포하는 작전은 폐기했지만, 그 대신 문수린에게도 검은 기둥을 부수는 걸 부탁해야 한다.

괴수들이 움직이기 전에 프랑스와 한국에 있는 검은 기둥을 전부 부술 생각이었으니까.

최대한 많은 히로인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도와줬으면 하는 일이 있어요. 누나."

어떻게 말해야 할까 잠시 생각했지만, 굳이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히로인들에게 무언가 숨기는 것도 이제 지쳤다.

자신이 아는 대로, 전부 솔직하게 말하면 되겠지.

학생회장실에서 봤을 때는 설명하지 않았던 자세한 이야기.

지옥의 문에서 나올 괴수들을 대비해 검은 기둥을 부숴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이호연의 말을 들은 문수린은 눈물을 닦아냈다.

아직 이호연에게 안겨있었지만, 그녀의 눈은 똘망똘망했다.

"호연이는 그렇게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하는거지?"

"네. 확률이 높다고 생각해요."

"알겠어. 그럼 빅토리아 아카데미도 호연이의 계획에 전력으로 협력할게."

문수린은 큰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보를 어디서 얻었는지. 확실한 근거는 있는지.

중요한 건 하나도 묻지 않았다.

오히려 이호연이 놀랄 정도였다.

"누나. 너무 무리하진 않아도 돼요. 아이리스 길드나 마법사 협회가 주도할 테니, 거기에 동의만 해줘도 충분하거든요."

아이리스 길드는 아이린과 엘리스가 있으니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고, 마법사 협회의 아서 협회장은 자신 덕분에 마법사 협회를 차지했다. 이 정도는 억지로 도와줄 거다.

그에 비해 빅토리아 아카데미는 아이리스 길드와 마법사 협회와는 다르다.

교육기관인 만큼 엮여있는 곳이 많았기에, 문수린 혼자서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게 더 힘들 거다.

"안돼. 호연이가 하고 싶은 건 다 도와줄거야."

문수린은 고개를 저었다.

이호연이 검은 기둥을 부수는 이유를 몰랐을 때도 그를 지원할 생각이었는데, 이유까지 알았으니 망설일 필요는 없다.

호연이가 문수린에게 피해가 올만한 일을 추진하진 않을테니까.

"… 알겠어요."

이호연은 문수린의 표정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도와준다는 걸 억지로 거절하는 것도 마음을 무시하는 거다.

수린 누나도 자신이 할 수 있으니까 도와준다고 한 거겠지.

"하으음."

문수린은 이호연의 품에서 벗어나 기지개를 쭉 켰다.

한껏 울고 나니 마음이 더 편해진 기분이다.

시계를 보니 이제 11시를 넘어가는 시간이었다.

"엄청 늦은 줄 알았는데, 아직 12시도 안 됐네?"

"해질 때쯤에 기숙사로 들어왔으니까요. 오늘은 엄청 많이 하지도 않았고."

"그럼 잔업이나 해야겠다."

"… 지금요?"

"호연이한테 조금이라도 더 도움이 되려면 열심히 해야지."

이럴 시간이 없다.

자신의 트라우마를 없애준 이호연을 도와주기 위해선 잠을 줄여서라도 일해야 한다.

"음…."

주섬주섬 옷을 챙겨입는 문수린을 보며 이호연은 입맛을 다셨다.

장난이 아니라 진심이었나 보네.

조금 더 누워있으면서 편하게 쉬려고 했는데 느닷없이 잔업이라니. 

'뭐… 누나가 그게 좋다면야.'

사람마다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은 전부 다르다.

문수린은 일로 푸는 타입이겠지.

이호연은 침대에 걸터앉아 그녀가 일하는 걸 구경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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