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02 - 602화. 범인은 이호연이었습니다 (11)
텅 빈 협회장실은 침묵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자리에 앉아있는 학회장은 입을 꾹 다문 채 서류를 바라보고 있었다.
서걱- 서걱-
서류를 정리하며 무언가 필기하는 소리가 가끔씩 들려왔다.
헌터 협회의 협회장은 업무 시간에 딴짓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확실하게 집중해서 일을 끝내야 다른 게 손에 잡히는 성격이었다.
그는 성실한 성격과 인맥 덕분에 협회장이라는 자리에 올랐다.
"… 뭐라고?"
그때.
돌연히 눈을 부릅뜬 협회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개 주제에 주인을 물어뜯으려 하다니, 버릇을 고쳐줘야겠구나! 내가 누군지 알고 있는 것이냐!"
협회장은 충혈된 눈으로 허공에 대고 삿대질을 시작했다.
그는 업무에 집중할 때 누군가 말을 거는 걸 굉장히 싫어하기에, 협회장실 근처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도 협회장은 말을 이어갔다.
"아니, 아니… 이래선 안 돼. 시간이 부족해. 시간을 끌란 말이다. 더 확실하게. 더…!"
협회장은 벽을 보며 목소리를 높이고 화를 냈다.
방 안을 서성거리다가 괴상한 몸짓을 하기도 하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가끔씩은 부드럽고 사색적으로 말하기도 했다.
"히익, 히이익…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
그는 이내 고개를 푹 숙였다.
낯선 정보가 강제로 머릿속을 채워온다.
꿈을 꾸는 것 같이 멍해지고, 자신이 지금 무슨 일을 하는지 망각한다.
"… 아."
할 일이 생각났다.
허공을 멍하니 응시하던 협회장은 몸을 돌려 방 바깥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조용해진 협회장 실 안에, 조용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곳도 저곳도 쓰레기들뿐이구나. 한국이라고 특별한 건 없었어."
접대용 소파에 앉아있던 한 남자가 일어났다.
협회장은 끝까지 눈치채지 못했지만, 마에스트로는 처음부터 이곳에 있었다.
스윽-
마에스트로는 협회장의 명패를 들어 올렸다.
승천하는 용이 그려져 있는 협회의 마크.
용이 들고 있는 붉은 진주는 이 자가 협회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다는 걸 알려준다.
동시에 방금 본 광경을 떠올린다.
자신의 세뇌는 정신력이 약한 자일수록 강하게 작용한다.
협회장이라는 남자의 정신력이 겨우 저 정도였다.
마에스트로에게 인간은 이런 존재다.
"결국 모두가 하수인에 불과해."
인간은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산다고 착각하지만, 결국 세상의 흐름을 따라가고 있다.
대부분의 인간은 더 큰 것을 바라보고 움직이는 몇몇 인간의 하수인에 불과하다.
중요한 몇몇 개체를 빼면 살 가치가 없는 쓰레기들이다.
… 그리고 그건 자신도 마찬가지다.
마에스트로는 이미 세계 곳곳의 고위 인사들을 세뇌했다.
그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세계에 혼란을 가져올 것이고, 인간들이 뭉치지 못하게 만들 거다.
"쓰레기들이라도 시간 끌기 정도는 할 수 있겠지."
인간에게 많은 기대를 하진 않는다.
마왕님이 힘을 되찾을 때까지 바람막이 역할만 해줘도 충분하다.
자신의 대척자인 이호연을 막기 위해.
그리고 계획보다 빠르게 강림한 마왕님을 위해서.
마에스트로는 본인이 해야 할 일을 했다.
'마왕님을 위해서…. 인가.'
마에스트로는 창문 바깥으로 보이는 도시를 내려다봤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인간 세상은 재앙에 휩쓸리게 되겠지.
판데믹이 인간들에게 심어준 두려움이 폭발하는 날이다.
마에스트로는 그것을 위해 살아왔고, 미래가 눈앞까지 다가왔다.
…그렇다면 이제 자신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마에스트로는 조용히 창문 밖을 바라봤다.
*
학생회장실.
이호연은 자신의 어깨에 몸을 기대고 있는 문수린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문수린은 이야기를 끝낸 지금도 걱정이 많아 보였다.
"너무 걱정하지 마. 수린아."
"호연아, 으응…."
두근거리던 심장과 헐떡거리던 숨이 안정적으로 변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문수린의 눈이 다시 총기를 되찾았다.
말하는 내내 계속 끌어안고 있었더니 문수린도 조금 진정한 것 같았다.
이호연은 안심하며 그녀를 꽉 안아줬다.
"아무튼 그 일은 좀 귀찮겠네. 말해줘서 고마워요."
문수린이 해준 말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세계 곳곳에서 자신의 행보를 의심하는 사람이 생겨났다.
그중에서는 검은 기둥을 부수기 시작해서 벌을 받는 거라고 종교적인 믿음을 가지는 사람도 있었다.
꼭 종교적인 접근이 아니더라도,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었다고 어느 정도 동조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확실히 문수린이 걱정할 정도로 귀찮은 일이었다.
'검은 기둥을 부수는 걸 문제 삼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네.'
검은 기둥은 어느 나라에서도 귀찮은 돌덩이 취급을 받고 있었으니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도 보이는 대로 무턱대고 부수진 않아서 다행이네.'
이호연이라고 아무 생각도 안 한 건 아니다.
아무리 검은 기둥이라도 자기 나라에 있는 것이니 소유권을 주장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프랑스와 한국에 있는 검은 기둥만 부쉈다.
두 나라는 문제가 생겨도 아이리스 길드와 빅토리아 아카데미의 힘을 빌려 해결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이런 노력을 했음에도 문제가 생겼다.
"이상한 놈들이 들러붙었네요. 너무 걱정하진 마세요."
"호연이가 걱정되니까 그렇지. 꽤 많은 사람들이 의심하고 있다고 들었어."
"그래도 누나는 절 믿죠?"
"당연하지. 무슨 일이 있어도 호연이 편이야."
문수린은 이호연의 손을 잡았다.
지금 그녀가 살아가는 이유는 이호연이다.
그 사실을 방금 한 번 더 자각했다.
이호연의 품에 안겨있는 동안, 하루동안 받았던 스트레스가 전부 녹는 기분이었다.
2주만에 본 이호연의 얼굴이 서운했지만, 그에게 안긴 채 힘들었던 일을 얘기하는 것 만으로도 화가 풀리는 것 같았다.
이제는 그가 없는 삶을 상상할 수가 없었다.
"일단 그런 말 하는 사람들은 무시해주세요."
"무시하라고?"
"… 네. 생각하는 게 있거든요."
이호연은 문수린을 안아주며 생각했다.
검은 기둥을 부쉈다는 이유로 자신을 의심하는 미친놈들이 존재한다.
자기 살길을 없애버리는 답답한 놈들이긴 하지만, 자신은 이런 상황에서도 효율적인 방법을 생각해야한다.
'지옥의 괴수들에게 힘을 주는 건 검은 기둥이 맞을 거야.'
검은 기둥.
그 정도로 강한 지옥의 마력을 뿜어내는 구조물이 아무 이유 없이 존재할 리가 없다.
아직 지옥의 환경이 구현되지 않은 지구에서 괴수들이 활동하려면 검은 기둥에서 지옥의 마력을 받아야 한다.
자신이 생각해도 꽤나 가능성이 높은 가설이라고 생각한다.
'검은 기둥을 제대로 부수진 못하겠지만… 비상사태를 선포하는 건 쉬워질 수도 있겠어.'
원래는 아이리스 길드와 마법사 학회, 빅토리아 아카데미까지 동원해서 위험성을 알릴 생각이었다.
전세계적인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방어진을 구축해야 하니까.
하지만 그런 계획을 쓰기엔 시간이 너무 부족해졌다.
괴수들의 습격은 길어도 일주일, 짧으면 며칠이다.
이기적인 인간들이 눈 앞의 이득을 버리고 며칠만에 연합하긴 어렵다.
사람들이 현실을 파악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게 무엇일까.
바로 목 밑까지 다가온 칼이다.
사람들은 위기가 눈앞까지 들이닥쳐야 움직인다.
그리고 괴수들은 전 세계가 두려워할 위기에 적합하다.
이호연이 검은 기둥을 부순 나라는 두 곳이다.
한국과 프랑스.
프랑스에 있는 건 일주일간 대부분 작살내놨고 한국에 있는 것도 며칠이면 처리할 수 있을 거다.
이호연의 가설이 맞다면, 검은 기둥이 없는 지역의 괴수들은 제대로 된 힘을 내지 못한다.
즉 한국과 프랑스의 피해가 이상할 정도로 적겠지.
이호연은 검은 기둥을 대놓고 부수고 다녔으니 그 이유가 밝혀지는 건 시간문제다.
사실이 밝혀지면 모두가 자신에게 매달리는 상황이 되겠지.
'아예 답이 없는 게 아니라, 방법이 있는데 안 하고 있는 거라면 화가 날거야.'
아이리스 길드의 공작까지 합치면 여론을 바꾸는 건 어렵지않다.
눈에 보이는 대비 효과를 주면서 사람들을 뭉칠 수 있다.
"… 하아."
다만 이 계획의 문제점은 많은 피해자가 나와야 한다는 점이다.
실제로 엄청난 피해가 있어야 그 위험성을 직시할 수 있다.
그 사실이 이호연의 기분을 더럽게 만들었다.
"호연아. 내가 도울 수 있는 건 도울게. 너무 혼자 고민하지는 마."
쓰담쓰담.
문수린은 이호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자신이 갑작스럽게 꺼낸 말 때문에 호연이가 고민이 많아 보였다.
이럴 땐 누나로서 좋은 모습을 보여야지.
한편 이호연은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문수린을 보며 피식 웃었다.
조금 전까지 떨고 있던 사람이 강한 척하는 모습이 참 귀여웠다.
"… 사랑해요. 수린 누나."
"나, 나도 사랑해. 호연아."
이호연은 문수린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부드러운 촉감이 볼을 감싸니까 왠지 마음도 편안해진다.
'그나저나 협회장이 그렇게 나선 건 의외네.'
수린 누나가 말하길, 협회장이 이상할 정도로 적대적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호연이 아는 헌터협회의 협회장은 그럴 사람이 아니다.
원작에서도, 그리고 실제 이 세계에서 느꼈을 때도.
협회장이 자신의 의견을 관철할 정도로 강직한 사람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근데 협회장님은 의외네요. 그럴 사람이 아닌 줄 알았는데."
"우리 할아버지처럼 노망이라도 난 걸까?"
"… 크흠. 아무튼 이상하긴 해요."
문수린이 대표하는 빅토리아 아카데미는 단순한 교육기관이 아니다.
세계 최고의 아카데미라는 상징성은 엄청났고, 아카데미 졸업생은 세계 곳곳에서 요직을 차지하고 있다.
심지어 전력도 무시할 수 없었다.
세계에서 가장 강한 마법사를 둘이나 데리고 있었고, 교수나 다른 학생들도 충분히 강했다.
그런데 감히 수린 누나에게 대놓고 꼽을 주다니.
하루아침에 사람이 이상해졌다.
자신의 위치를 아는 인간이 갑자기 태도를 바꾸었다면, 보통 둘 중 하나다.
'그럴만한 뒷배를 얻었거나… 조종당하고 있거나.'
이호연은 눈을 찌푸렸다.
누군가 그를 지원할 가능성은 적었다. 국내에선 협회장의 뒷배를 서줄 만한 사람이 없고, 해외에서 작업을 쳤다기엔 지금 협회장에겐 얻을 게 없다.
그렇다는 건 협회장이 조종당한다는 것.
'… 마에스트로.'
최근 조용하다 싶었는데. 귀찮은 일을 꾸미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건 한 번 확인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