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00 - 600화. 범인은 이호연이었습니다 (9)
남다은을 훈련장 바깥으로 내보낸 뒤.
이호연은 정면에서 쏟아지는 지옥의 마력과 마주했다.
"치킨-. 치킨-."
가벼운 말투와 장난스러운 단어와 다르게 릴리아나의 마력은 파괴적이었다.
닿는 것만으로 피부에 소름이 돋았다. 가시로 몸을 쿡쿡 찌르는 것처럼 따가웠다.
"에이잇!"
콰아아앙-
릴리아나가 손을 휘젓는 것만으로 엄청난 압력의 마력이 이호연에게 부딪쳤다.
그녀를 바라보던 이호연은 룬의 결계에 마력을 쑤셔넣으며 중얼거렸다.
"개안, 심(心)."
이호연의 눈동자가 금빛으로 빛나고, 한 순간에 시야가 뒤집힌다.
보이지 않던 것들이 이호연의 눈에 들어온다.
이호연은 자신을 집어삼킬 기세로 쇄도하는 지옥의 마력을 노려봤다.
분명 강대한 마력이지만, 그 곳엔 질서와 규칙이 없었다.
마법이라고 부르기엔 조약한.
'덩어리'라고 불러야 할 것 같은 마력.
'마력을 무슨 야구 방망이 휘두르듯 쓰고 있어.'
아무리 위험한 흉기라도 갓난아기가 쥐고 있다면 그 힘을 발휘하기 전에 손쉽게 빼앗을 수 있다.
이호연은 마력을 끌어올리며 영역을 전개했다.
"마천궁 전개."
주변에 가득 찬 지옥의 마력을 허공에 붙잡았다.
영역 내부라면 어떤 마력도 이호연에게 저항할 수 없다.
그것이 마천궁이었다.
"블러드 비트 없이 이 정도면… 어디 가서 맞을 일은 없겠어."
도핑도 없는데 이렇게 강한 마력 감응이라니.
아마 다른 마법사들이 보면 놀라며 뒤로 자빠지지않을까.
"으으읏. 뭐하는 거야! 으…!"
릴리아나는 낑낑대며 다시 마력을 일으켰다.
하지만 규칙없이 마력을 쏟아내봤자 결과는 같았다. 금방 이호연에게 제압당했다.
몇 번의 공방이 오간 후.
릴리아나는 글썽거리는 눈으로 이호연을 노려봤다.
"이, 이이익! 뭐하는 거야! 정정당당하게 승부해!"
저 억울해보이는 표정을 보니 승부는 이미 끝난 것 같다.
아무리 마력이 강해도 단순히 마력을 방출하는 것으론 자신을 이길 수 없다.
딱-
이호연이 손가락을 튕기자 묶어놨던 마력이 전부 릴리아나에게 돌아갔다.
그녀는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광경을 보던 이호연은 개안을 해제하고 물었다.
"릴리아나. 단순히 마력으로 찍어누르는 거 말고, 마법은 못 써?"
"마법? 수면 마법은 가능해. 아니면 감정 조절 같은 거?"
"네 마력으로 수면 마법을 쓰면 못 깨어날 것 같은데."
감정 조절도 딱히 필요 없다.
이호연에게는 감정 증폭이라는 더 좋은 마법이 있다.
아니, 전투에서 제대로 쓸만한 건 없나?
그래도 서큐버스잖아.
지옥에서 전장을 휩쓸던 릴리아나 칼리오페의 모습은 이호연의 기억에 박혀있었다.
그 반의 반만 해도 전투에 도움이 될 텐데.
"전투에 사용할 수 있는 건 없어?"
"그냥 마력으로 때리는 게 더 강할걸?"
금제에 손상이 가며 힘은 돌아왔지만 기억은 돌아오지 않았다.
릴리아나는 강한 마력을 가지고 있어도 사용법을 몰랐다.
루시퍼와 전투에서도 그랬다.
세세한 마력 컨트롤이나 마법보단 단순히 마력을 쏟아붓는 게 더 강했다.
"서큐버스의 비기 같은 건 못 쓰는 거야?"
"으, 으음… 매혹이라도 해볼까?"
"… 아니. 괜찮아. 그건 최후의 수단으로 남기자."
매혹, 어쩌면 전투에 도움이 될 지도 모른다.
상대방의 공격 의지를 꺾는 마법은 전투에 도움이 될 수 있다.
릴리아나의 마력을 쏟아붓는다면 그 효과도 대단하겠지.
'근데 지금 맞는 건 좀 그렇단 말이지.'
이호연이 정신 조작 마법에 면역인 이유는 그가 가진 특전 '뚜렷한 정신력'때문이다.
그게 없는 지금은 매혹을 맞고 버틸 자신이 없다.
이호연은 아직도 악몽을 꾸고 있다.
눈 앞에 적이 서있는 게 아니라면, 당분간은 '뚜렷한 정신력'을 의식해서 사용하지않으며 마음을 다잡을 생각이다.
"근데 효과가 있냐 없냐는 제쳐둬도, 매혹으로 싸우는 건 마음에 안드네. 다른 놈들이 너를 좋아하는 거 아니야."
"으응? 질투인가? 헤헤. 이래서 인기 많은 서큐버스는 힘들구나~."
스르륵-
해맑은 웃음을 지은 릴리아나는 마력을 거두고 이호연의 팔에 매달렸다.
"항상 감사하면서 살라구."
"당연히 고맙지. 릴리아나."
"헤헤. 그럼 오늘 저녁은 치킨이야."
릴리아나는 이호연의 팔에 얼굴을 비비기 시작했다.
킁킁 냄새를 맡기도 하는 게 마치 강아지 같았다.
"맞아. 릴리아나. 요즘 한가해 보이던데 너도 레베카 씨나 도와줘."
"레베카? 임신을 도와주는 거라면 할 수 있엉."
"그런 건 아니고. 검은 기둥을 부수는 거야."
"검은 기둥 그거? 요즘 레베카가 보던 뉴스에 맨날 나오던뎅."
"응. 그걸… 아니다. 직접 보여줄게. 실습하러 가자."
설명하는 것보다 한 번 보여주는 게 빠르겠지.
어차피 오늘도 검은 기둥을 부수러 다닐 생각이었다.
겸사겸사 히로인들이 지옥의 마력에 얼마나 적응했는지 눈으로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너무 부족하다 싶으면 직접 가르쳐야 할 테니까.
"실습?"
릴리아나는 귀찮아 보이는 단어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
불길한 마력을 쏟아내는 검은 기둥.
이호연은 그 앞에서 마력을 일으켰다.
몸 안에 지옥의 마력을 받아들이며, 익숙하게 마법진을 그렸다.
'이클립스.'
이윽고 손에 나타나는 검은 태양.
이호연은 검은 기둥의 뿌리를 향해 이클립스를 날렸다.
콰아앙-! 쿵-!
엄청난 굉음과 함께 터져나오는 먼지와 파편들.
거대한 기둥이 쓰러지며 지진이 난 것처럼 바닥이 울린다.
이호연은 답답한 제약이 풀린 걸 느끼며 마력을 갈무리했다.
검은 기둥을 부수는 건 몇 번이나 해왔던 반복 작업이었기에 이제 눈 감고도 할 수 있다.
"우와-. 대단행."
짝짝짝.
영혼 없는 박수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
이호연은 멍하니 미소를 짓고있는 릴리아나를 바라봤다.
"넌 서큐버스라서 괜찮구나."
"응. 괜찮은뎅."
"역시 우리 릴리아나는 재능이 있다니까."
쓰담쓰담.
강아지를 쓰다듬 듯 릴리아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릴리아나는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대로였다.
그녀는 검은 기둥이 부서지기 전부터 마치 제약이 없는 것처럼 이호연과 비슷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 곳은 한국의 도시 대전.
서울 근처에 있는 검은 기둥은 거의 처리했고, 서울부터 아래로 내려가며 기둥을 부수는 중이었다.
"애기 아빠. 대단하네?"
검은 기둥의 잔해를 날려버리자 레베카가 가장 먼저 다가왔다.
그녀는 릴리아나처럼 코 앞까지 다가오지 못하고 중간에 멈춰버렸다.
아직 적응의 시간이 필요한 모양이다.
"레베카 씨. 몸은 괜찮아요? 부담이 있진 않고?"
"나는 괜찮지만, 아이한테 좋지 않은 영향이 갈 거야. 위험한 작업이겠어."
레베카가 고개를 저을 때마다 붉은 머리칼이 휘휘 흔들린다.
이호연은 쓴 웃음을 지으며 레베카를 달래줬다.
"아직 아이는 없잖아요. 레베카 씨."
"하지만 언제 생길지 모르는걸. 언제나 긴장을 유지해야 해."
"알겠어요. 오늘 밤에 노력해볼 테니까 레베카 씨도 노력해주세요."
"릴리아나. 뭐 하고 있어? 15분 뒤에 대전 근교에 있는 검은 기둥으로 이동하자. 애기 아빠도 따라와."
척- 척-
레베카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앞장서서 걸어갔다.
결국 저 말을 원했던 거겠지.
… 저 사람도 릴리아나랑 다를 게 없구나.
자신감 있는 걸음걸이의 레베카를 본 릴리아나가 이호연을 툭툭 치며 말했다.
"레베카도 나처럼 배고픈가 봐. 빨리 끝내고 치킨이나 먹자."
"그래그래. 네 말이 맞는 것 같다."
이호연은 릴리아나의 머리에 묻은 잔해를 털어주고 바깥으로 걸어 나왔다.
남다은과 스칼렛이 있는 곳이다.
그녀들은 지옥의 마력에 익숙하지 않아서 레베카 보다 먼 곳에 대기하고 있었다.
"고생했어. 호연아."
다가온 남다은이 이호연의 어깨를 툭툭 털어준다.
이호연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니야. 다은아, 어때? 적응할 수 있을 것 같아?"
"으응. 버틸만 했어. 나도 릴리아나 씨처럼 노력해볼게."
주먹을 쥐고 파이팅하는 남다은을 보니 걱정이 눈 녹듯 사라진다.
역시 히로인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건 좋은 방법이었다.
"고생하셨습니다. 호연 님. 오늘도 세계 평화를 위해 노력하셨군요."
"스칼렛, 얼굴이 괜찮아 보이네? 걱정했는데 다행이다."
스칼렛의 상태가 안 좋아보여서 데려올까말까 고민하다가 결국 데려왔는데, 의외로 별 거 없어보였다.
잠시 기분이 안 좋았던 건가?
"여성에게 그 날의 컨디션을 묻는 건 실례입니다."
"…."
컨디션이 안 좋아보였던 게 진짜 그런 거였어?
혹시 모르니까 다음에 제대로 물어보자.
눈치없다고 욕을 먹는 게 사고치는 것보단 낫다.
"다들 가자. 오늘은 이 주변을 돌아볼 생각이야. 레베카 씨가 먼저 갔으니까…."
크흠. 헛기침을 한 이호연은 레베카의 뒤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우우우웅-
그 순간, 릴리아나의 바지 주머니에서 붉은빛이 터져 나왔다.
지옥의 태양이 폭발한 것 같은 강렬한 붉은 빛.
불길하면서도 기분 나쁜 빛은 주변을 비추며 빛의 웅덩이를 만들어냈다.
"릴리아나!"
이호연은 곧바로 개안을 발동하며 마천궁을 전개했다.
정체 모를 사태에 릴리아나를 구하고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호연의 걱정은 기우에 그쳤다.
"아, 아아악! …으응? 뭐야."
릴리아나는 깜짝 놀라긴했지만, 이내 자신에게 피해가 없다는 걸 알았다.
그녀는 이호연의 걱정이 무색하게 별거 아니라는 듯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릴리아나?"
잠시 후.
이호연은 릴리아나 손에 있는 붉은 마법구를 볼 수 있었다.
────[ 붉은 마력구 ]────
▶ 최상 등급
▶ 불길한 마력이 담긴 마력구
▶ 의식이나 제사에 사용되는 물건으로 추정된다.
불길한 마력이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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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마력구?"
이건 미국에 갔을 때 마법사 에이든의 집에서 훔친, 아니 빌린 마도구였다.
장물로 팔려 했지만 지옥의 마력때문에 받아주는 곳이 없어서 방에 묵혀놨던 기억이 있다.
그 마도구가 지금 붉은 빛을 내뿜고 있었다.
처음보다 못했지만, 여전히 놀랄 정도의 빛이었다.
'마왕의 신전에 들어갈 수 있는 출입증이라고 했었지.'
기억을 되짚은 이호연은 알베도에게 들었던 정보를 떠올렸다.
그때는 별생각 없이 넘겼던 정보인데, 이제 그 정체가 궁금해졌다.
"릴리아나. 이건 왜 들고 온거야?"
"모르겠어. 이게 왜 내 주머니에 들어왔징? 그냥 집 구석에 던져놨던 거 같은데."
"… 설마."
이호연은 미간을 찌푸렸다.
마왕의 신전에 들어갈 수 있는 출입증이 갑자기 빛나기 시작했다.
그 말은 즉, 지구와 지옥의 연결이 완전히 끝났다는 뜻 아닐까?
이호연은 몸을 엄습하는 불안감에 입술을 씹으며 아이리스 길드에 연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