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 야겜에 빙의했다-595화 (595/648)

< 595화 > 범인은 이호연이었습니다 (4)

벌떡-

이호연은 식은땀을 흘리며 몸을 일으켰다.

"… 아, 시발. 또 이러네."

쿵쾅거리는 심장과 혼란스러운 머리.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은 이호연은 방금 악몽을 꾸었다는 걸 깨달았다.

2주 정도 잘 잤는데 오랜만에 악몽을 꿨다.

프랑스에서 일정이 길어지면서 백아영의 약을 안 먹어서 그런가?

아니면 어제 히로인들을 다 못 봐서 그럴지도 모른다.

불안함은 사소한 틈을 비집고 들어오니까.

'그래도 예전보다 낫긴한데….'

심할 때는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고 뼛속까지 악몽에 사로잡힌 기분이 든다.

하지만 오늘은 잠시 심호흡하는 것 만으로 악몽을 떨쳐낼 수 있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옆에서 자고 있는 임솔의 모습이 보였다.

임솔을 보니까 조금이나마 마음이 편해지는 기분이었다.

역시 우리 교수님은 참 예쁘다니까. 임솔의 예쁜 얼굴도 악몽을 떨쳐내는 데 도움이 되는 게 분명하다.

"으음…."

이호연이 일어나자 임솔도 뒤척이기 시작했다.

이제 곧 교수 님도 눈을 뜨겠지.

흠흠!

이호연은 목을 가다듬고 표정을 고쳤다.

막 일어난 임솔이 자신을 보고 놀랄 텐데, 이런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으면 안 되지.

지금 이 순간, 한 번의 장난을 위해 임솔 옆에서 잔 거다.

이내 임솔이 부스스 눈을 떴다.

이호연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솔아. 좋은 아침."

그리고 눈을 뜬 임솔은 손을 뻗어 이호연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호연아. 일어났네?"

"…… 어, 네. 일어났습니다."

뭐지.

생각한 반응하고 너무 다른데.

이호연은 당황한 표정으로 임솔에게 물었다.

"솔아, 왜 안 놀라? 눈뜨자마자 날 보면 깜짝 놀랄 줄 알았는데."

"일어나자마자 우리 제자 얼굴이 보이는데 기분이 좋아야지. 왜 놀라야 해?"

"…."

이 사람 갑자기 왜 이래.

내 얼굴이 다 붉어질 거 같다.

아니, 실제로 좀 뜨거워진 거 같다.

안돼. 이래선 안 된다.

상남자 이호연이 칭찬 한마디로 부끄러워하다니.

"크흠. 흠! 솔아. 아침부터 예쁘네."

"고마워. 으으음-. 난 먼저 일어날게. 정신 차리면 나와."

기지개를 켠 임솔은 가뿐하게 침대를 빠져나왔다.

침대 위에 멍하니 앉은 이호연은 입맛을 다셨다.

"쩝."

장난이 통하지 않아서 왠지 서운했다.

그래도 뭐. 일어나자마자 임솔 교수님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꽤 좋았다.

이호연은 침대에 걸터앉아 몸 상태를 점검했다.

자신은 회복력이 워낙 좋다 보니 오래 잠을 잘 필요가 없다.

"근데 왜 이렇게 오래 잔 거야?"

3시간만 자도 쌩쌩해지는데, 6시간 넘게 잤으니 평소보다 2배는 잔 거다.

임솔의 침대가 잠이 잘 오는 건가? 좀 부드럽긴하던데.

파앗-

마력 컨디션도 좋다.

이호연은 손안에 피어나는 마력을 갈무리하며 몸을 일으켰다.

스마트워치가 알려주는 시간은 새벽 2시.

잠을 자고 일어났다기엔 애매한 시간이지만, 우리 교수님은 연구에 빠졌다 하면 10시간씩 틀어박히는 게 기본이라 밤낮의 구분이 없으신 분이다.

게다가 나도 3시간 정도만 자면 되니까 밤낮을 신경 쓰지 않는다.

이거 완전 천상 커플이네.

사무실로 나오자 교수님이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소파에 가서 앉았더니, 말을 하지도 않았는데 눈앞에 주전자가 날아왔다.

"커피로 괜찮아?"

"네. 근데 교수님이 커피도 드시네요? 저도 같은 거로 먹을게요."

이호연은 커피잔에 각설탕 5개가 들어가는 걸 보고 뒤늦게 후회했다.

홀짝-

'잠 깨는 데는 최고네.'

너무 달아서 머리가 아플 정도다.

대체 이걸 어떻게 마시고 있는 거야?

이호연은 조용히 잔을 내려놓고 임솔을 바라봤다.

"요즘 마법 연구는 어떠세요?"

"항상 똑같지. 우리 제자 덕분에 연구할 마법이 끝없이 생기거든."

"좋은 제자를 두셨네요."

"응. 그러고보니 우리 제자는 고민 없어?"

"갑자기 고민이요?"

"혹시나 해서. 제자의 고민을 들어주는 건 스승의 일이니까."

갑자기 저런 걸 묻는 임솔이 어색하긴 하지만… 새벽 감성인가?

이런 날도 있는 거겠지.

마침 임솔에게 부탁할 게 있었으니 오히려 좋다.

"안 그래도 요즘 고민인 게 있었어요."

이호연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검은 기둥 부수기.

어제 말 못 했으니 지금이라도 말해야지.

"지옥의 문에 관한 거야?"

"지옥의 문? 비슷하긴 한데요. 좀 달라요. 검은 기둥이거든요."

"검은 기둥? 아… 그것 때문에 요즘 제자 이름이 자주 들리던데."

지옥의 마력을 뿜어내는 검은 기둥.

임솔도 아카데미의 교수로서 형식적으로나마 조사를 한 적이 있었다.

최근 이호연이 검은 기둥을 부수고 다니는 것도 알고 있다.

뉴스에서 난리를 치기도 하고, 마법사 협회에서도 말이 많이 나왔다.

"최근에 제가 검은 기둥을 부수고 다녔거든요."

"마법사 협회에서 듣긴 했어. 우리 제자 대단하네."

"네. 근데 검은 기둥 부수기를 교수님이 도와줬으면 좋겠어요. 저 혼자서 부수기엔 너무 많거든요."

"검은 기둥을 부순다니…?"

임솔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자가 검은 기둥을 부수고 다니는 건 알고 있지만, 그걸 자신에게 부탁하는 이유는 뭐지?

자신에겐 그걸 부술 능력이 없는데.

"검은 기둥을 부수는 마법을 개발한 거야? 나한테 알려줘서 같이 하려고?"

"그런 건 아니에요. 저번에 지옥의 마력에 대해 이상함을 느꼈잖아요. 제가 그걸 연구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지옥의 마력에 대한 연구가 다시 진행되고 있어요."

"그래. 마법사 학회에서도 본 것 같아. 나도 다음에 한 번 연구해볼 생각이었어."

"관련 연구를 하면서 알아낸 건데, 지옥의 마력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다룰 수 있으면 검은 기둥 주변에서 느껴지는 두통이 없어지더라고요."

"신기한 사실이네. 그것도 학회에 보고한 거야?"

"아이리스 길드에만 슬쩍 말해놨어요. 어차피 일반인 중에 가능한 사람은 없을 거예요. 그래서 교수님한테 부탁하는 거거든요."

임솔은 이호연의 말에 미소를 지었다.

'가능한 사람이 없어서 자신에게 부탁했다.'

참 듣기 좋은 말이었다.

이호연과 임솔은 똑같은 천재 마법사니까.

남들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걸 우리는 할 수 있다.

즉 동질감을 느끼는 게 참 기분 좋았다.

"호연이가 그렇게 말한다면 도와줘야지."

"휴우. 고맙습니다."

"고마울 게 뭐가 있어. 우리 제자랑 나 사이인데."

"그쵸. 그래도 고마운 건 고마운 거니까요. 아, 어깨라도 주물러드릴까요?"

이호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임솔의 뒤로 다가갔다.

사실 임솔의 성격과 호감도를 생각해보면 거절할 이유가 없긴 하다.

자신도 그걸 알면서 부탁한거다.

'그래도 고마운 건 고마운 거니까.'

하지만 거절당할 일이 없다고 당연하게 부탁하는 건 지양해야 한다.

임솔도 그녀의 시간과 노력을 사용해주는 거다.

이호연은 자리에 앉아있는 임솔에게 다가가 어깨를 주물렀다.

"제가 지옥의 마력 특훈도 해드릴 수 있어요. 교수님 혼자서도 검은 기둥을 부술 수 있을 정도로 올려드릴게요."

"생각보다 급한 일인가 봐?"

"제 생각엔 검은 기둥이 지옥의 문과 관련이 있거든요."

"지옥의 문…."

지옥의 문이라는 말을 듣자, 임솔은 자면서 괴로워하던 이호연의 모습을 떠올렸다.

이호연을 괴롭게하는 무언가가 지옥의 문에 있다.

자신은 제자를 위해 검은 기둥을 부숴야한다.

"네. 아, 맞아. 그러고 보니 아서 협회장님이랑 대화는 해봤어요? 검은 기둥에 대한 일은 제가 처리했지만, 다른 도움도 좀 필요한데."

이호연은 임솔 교수가 맡았던 마법사 학회를 떠올렸다.

지옥의 문에서 나오는 괴수들은 인간의 힘으로 막기 어렵다.

이호연 혼자 아무리 떠들어봤자 인간들은 실제로 눈앞에 닥치는 위협이 아니면 움직이지 않는다.

필사적으로 싸워도 모자랄 판에 뒤로 숨는 것이다.

인간들이 답답하긴해도 가만히 있을 순 없으니, 마법사 협회에 도움을 받아야 한다.

아이리스 길드나 마법사 협회 같은 대형 단체들이 위험하다고 소리치면 다른 사람들도 경각심을 가지겠지.

"응. 필요할 때 도움을 주기로 했어."

"와. 정말요? 그 아저씨를 어떻게 설득한 거예요."

이호연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아서 협회장이 누구인가.

이호연의 주도로 마법사 협회에 숨은 판데믹의 끄나풀 에이든을 찾아내고 권력을 잡았으면서 제대로 된 보상도 없이 입을 싹 닦은 사람이다. (이상한 상을 주긴 했는데 관심 없었다.)

물론 마법사 협회에서 훔친, 아니 잠시 빌려온 물건이 몇 개 있지만.

그건 다시 돌려줄 생각이었으니 보상은 없는 게 맞다.

"설득이라고 해야 할까? 네가 프랑스에 있는 동안 나도 마법사 학회에 들렀거든."

임솔은 그때의 기억을 잠시 떠올렸다.

마법사 학회에 찾아가서 대뜸 도와달라고 했을 때 아서 학회장과 했던 대화다.

'아, 호연 생도 말인가? 당연히 도와줘야지! 그에겐 내가 갚을 빚도 있으니.'

'그거 상 하나 던져주고 입 싹 닦은 거 아니었어? 학회장 상인지 뭔지 쓸모도 없는 거 주고. 아무것도 안 줬잖아.'

'내가 나중에 보상해준다고 하지 않았냐! 그때는 학회를 정상화하느라 바빴다! 학회 내부에 있는 마인의 끄나풀들과 썩어빠진 원로들을 내가 전부…!'

'응응. 알겠어. 아저씨. 이거나 봐봐.'

딱히 대단한 건 없었네.

짠돌이 아저씨에게 당연한 걸 뜯어냈을 뿐이다.

"아무튼 다행이네요. 마법사 협회라면 큰 도움이 될 테니까."

"무슨 도움을 받고 싶은 건데? 검은 기둥하고 던전의 폭주 현상은 아이리스 길드가 처리했잖아."

본래 마법사 협회엔 검은 기둥과 던전의 폭주 현상에 대한 재조사를 요청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이리스 길드가 생각보다 대단한 덕분에 검은 기둥에 대한 조사는 프랑스에서 이호연이 직접 처리해버렸다.

"학회의 힘으로 지옥의 문의 위험성을 알릴 거예요. 거기서 튀어나오는 괴물들은 엄청 강하거든요. 아이리스 길드에서 일하는 동안 알아냈어요."

"… 우리 제자가 엄청 바쁜가 봐."

"네. 그래도 열심히 해야죠."

이호연은 임솔의 어깨를 꾹꾹 누르며 말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아는 건 자신밖에 없다.

눈앞에 보이는 건 바늘구멍 하나지만, 어떻게든 몸을 비틀어서 살아남아야지.

"오늘은 할 일 있어?"

"글쎄요. 아침까지 교수님하고 마법 연구나 할까 했는데."

지금 밖으로 나가봤자 새벽이라 할 게 없다.

임솔이랑 놀면서 시간이나 때워야지.

"아, 지옥의 마력 특훈이라도 하면…."

스윽-

그때, 이호연의 손등에 임솔의 손이 올라왔다.

슬쩍 시선을 내리자, 임솔의 푸른 눈동자가 자신을 또렷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건 나중에 해도 되잖아."

"…."

"호연이 부탁도 들어줄 테니까. 내 부탁도 들어줄 수 있지?"

"… 응. 솔아."

저 시선만 봐도 임솔이 요구하는 게 뭔 지 알 수 있다.

'굳이 챙겨줄 필요가 없었네.'

이호연은 미소를 지었다.

임솔은 알아서 자기 몫을 챙길 수 있는 어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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