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4화 > 범인은 이호연이었습니다 (3)
몸이 둥둥 뜨는 느낌.
임솔은 꿈을 꾸고 있다.
엄청나게 큰 초콜릿을 안은 행복한 꿈이다.
이 정도 크기라면 평생 먹어도 부족하지 않겠지.
특히 다른 초콜릿보다 달콤한 향기가 너무 먹음직스러웠다.
아앙.
임솔은 초콜릿을 먹기 위해 입을 벌렸다.
스르륵-
"…!"
그때, 초콜릿이 자신의 품을 벗어나 도망치기 시작했다.
임솔은 어떻게든 그 뒤를 쫓아가려 했다.
평생 먹어도 될 초콜릿을 놓칠 순 없었다.
꿈틀꿈틀.
그러나 이상할 정도로 잘 도망치는 초콜릿은 요리조리 임솔의 품을 벗어났다.
속도가 너무 빨라서 손으로 잡을 수가 없었다.
저 멀리 도망치는 초콜릿을 멍하니 바라보던 임솔은 마력을 끌어올렸다.
이대로 놓칠 순 없었다. 임솔은 마법을 영창 하기 위해 자세를 똑바로 잡았다.
쿵-
"악…."
그리고, 뒤통수에 오는 충격에 눈을 떴다.
좁은 침대에서 꿈틀거리며 허리를 피다가 벽에 머리를 박은 것이다.
"으, 으음…."
임솔은 머리를 부여잡고 조용히 고통을 삼켰다.
이미 옅어진 꿈의 기억은 그녀가 왜 머리를 박았는 지도 망각하게 했다.
"하, 하아. 후우…."
익숙한 천장이다.
천천히 기억을 되짚었다.
왜 자신이 벽에 머리를 박고 고통스러워했을까.
"… 초콜릿."
희미하게 기억하는 거대한 초콜릿은 꿈이었다.
생각해보면 말이 안 되긴 하지.
그렇게 큰 초콜릿이 세상에 있을 리가 없잖아.
"응?"
아쉬움의 하품을 한 임솔은 이상하게 자리가 좁은 걸 느꼈다.
고개를 돌리자 옆자리에 누운 이호연이 보였다.
그는 눈을 감은 채 이리저리 뒤척이고 있었다.
"깜짝 놀랐네. 우리 제자였구나."
깜박. 깜박.
눈을 깜박거리던 임솔은 이내 눈을 크게 떴다.
조교가 지금 그녀의 모습을 봤다면 '교수님이 저렇게 당황할 수도 있구나.' 하고 놀랄 정도였다.
"엥. 응? 제자가 왜 여기 있지?"
아직 꿈인가?
하지만 벽에 머리를 박았을 때 엄청나게 아팠는데.
임솔이 다시 한번 자신의 볼을 꼬집어보려고 하던 그때.
"하아…. 으, 으윽."
이호연이 고통스러운 듯 눈을 찡그리며 몸을 뒤척였다.
그는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고, 고개를 이리저리 휘젓고 있었다.
"호연아…?"
그 순간, 잠에 취해있던 임솔의 정신이 각성했다.
그가 왜 여기 있는지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임솔은 이호연의 어깨에 손을 얹고 그의 상태를 살폈다.
다행히 발작 같은 건 아니었다.
'마법을 사용하면 무조건 깨어나겠지.'
제자의 감각은 그녀도 잘 알고 있다.
자고있어도 몸에 마력이 들어오는 걸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다.
임솔은 마력을 일으키는 대신 천천히 이호연의 머리를 쓸어내렸다.
악몽이라도 꾸고 있는 걸까.
불편한 신음을 흘리는 모습이 마음에 걸렸다.
"우리 제자가 힘들 땐 스승이 도와줘야하는데…."
그의 마음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임솔은 알 수 없었다.
그를 깨워야 할지 말아야 할 지도 감이 오지 않았다.
다만 그가 힘든 상황이라면 고통을 덜어주고 싶었다.
임솔은 이호연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왠지 동질감이 느껴졌다.
천재 마법사 임솔의 재능이 세상에 드러난 건 이호연의 나이와 비슷했다.
비교 대상이 없을 정도로 파괴적이었던 재능을 가진 임솔은 어릴 때부터 괴물이라고 불리며 온갖 시기와 질투를 받았다.
지금의 임솔이라면 그런 말을 하는 놈들 대가리에 파이어볼을 꽂았겠지만, 어렸을 때의 임솔은 그렇지 못했다.
그 대신 매일 밤 베개를 끌어안고 혼자 울곤 했다.
자신이 잘못한 게 무엇일까. 왜 이렇게 태어난걸까.
어린 임솔이 선택한 결정은 압도적인 실력으로 불만을 잠재우고 입을 다물게 하는 것.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마법뿐이었다.
이호연을 만나지 않았다면, 지금도 그 굴레에 빠져있겠지.
특히 아서 학회장이 했던 말은 아직도 임솔의 기억에 깊게 박혀있다.
'네 제자가 그러더구나. 자기 스승님한테 더 이상 괴물이라는 단어를 쓰지 말라고.'
임솔은 볼이 붉어지는 걸 느꼈다.
그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지금이라도 제자를 덮치고 싶을 정도였다.
이호연의 머리를 쓰다듬던 임솔은 번데기처럼 몸을 말고 있는 이호연의 등에 몸을 딱 붙였다.
불편한 자세로 머리를 쓰다듬기보단 그냥 그를 안아주고 싶었다.
그에게 풍기는 달콤한 향기가 임솔의 코를 맴돌았다.
꿈에서 봤던 거대한 초콜릿의 향기였다.
"뭘 해줘야 우리 제자가 좋아하지…?"
임솔은 마법밖에 모른다.
이호연을 마법 이상으로 좋아하지만, 그녀가 자신 있는 건 마법뿐이다.
이호연에 대한 건 아직도 모르는 게 많았다.
'평생 마법 연구만 해도 부족한데, 우리 제자도 마찬가지겠지.'
앞으로 시간은 많으니, 천천히 익숙해지면 된다.
임솔은 그런 마음으로 이호연을 끌어안았다.
그를 괴롭히는 게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이 조금이라도 힘이 되길 바랬다.
"흐으, 으음…."
그 마음을 이호연도 느낀 걸까.
이호연의 뒤척임이 느려졌다. 호흡이 안정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임솔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다시 눈을 감았다.
긴장이 풀리자 다시 졸음이 쏟아졌다.
얼마나 잤는지 모르겠지만, 아직 몸에 피로가 남아있었다.
아마 오래 잠들진 않았던 모양이다.
임솔은 이호연의 달콤한 향에 취하며 다시 잠을 청했다.
[솔아-. 솔아-?]
그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임솔에게 들려왔다.
등골이 서늘해진 임솔은 이호연에게서 떨어졌다.
너무 놀라서 이호연을 밀어냈는데 다행히 이호연은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 아영이?'
임솔은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일어났다.
백아영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떠오른 건 정기 검진이라도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검진이 있다고 해서 백아영이 직접 올 리는 없다.
'일단은 나가야 해.'
백아영이 왜 여기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호연과 같이 누워있는 모습을 보여줬다간 난리가 날 건 예상할 수 있다.
구겨진 옷을 대충 핀 임솔은 조용히 사무실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연구실을 자기 집처럼 돌아다니는 백아영의 뒷모습이 보였다.
"아영아. 나 여기 있어."
"응? 솔아! 사무실도 확인했는데 왜 못 찾았지?"
백아영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선 임솔을 보며 반가운 미소를 지었다.
저번처럼 어딘가에 쓰러져있는 건 아닌가 했는데, 몸은 괜찮아 보였다.
"미안. 사무실 안쪽 창고에서 정리할 게 있었거든."
"정리할 거? 나도 도와줄까?"
"… 아니. 다 했으니까 걱정하지 마. 무슨 일이야? 커피라도 줄 테니까 앉아서 얘기하자."
임솔은 헛기침하며 백아영을 사무실 소파에 앉혔다.
그 맞은편에 앉은 뒤 마법으로 주전자를 움직이며 입을 열었다.
"갑자기 무슨 일로 온 거야?"
"헌터협회에서 소집요청을 했는데 솔이 네가 안 왔잖아. 회의 결과라도 전해주려고."
"… 소집요청? 그런 게 있었다고?"
"네가 스마트 워치를 안 보니까 몰랐나봐."
"아…."
임솔에게 스마트 워치는 이호연의 연락을 받는 기계일 뿐이다.
가끔 백아영이나 민예지의 연락을 보고, 아주 가아끔 아카데미에서 내려오는 교수 방침을 확인한다.
즉 협회의 연락은 임솔과 상관없는 일이다.
"그럴 줄 알고 내가 찾아왔어."
멍한 표정의 임솔을 본 백아영은 준비한 서류들을 꺼냈다.
헌터 협회에서 나눠준 지옥의 문에 대한 경고와 괴수들의 상대법이었다.
"이런 게 있었구나. 굳이 이걸 전해주러 온 거야? 고마워. 아영아."
"그것도 있고, 혹시 훈련장에서 계속 훈련하고 있을까 봐 걱정되기도 했어. 훈련장이 20시간이나 가동중이라고 해서."
"그건 내가 다 한 게 아니야. 루시 생도랑 루미 생도를 좀 가르쳤거든."
"정말? 대단하네. 호연이 말고 개인시간에 마법을 가르친 적은 없었잖아."
백아영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마법밖에 모르던 임솔이 교수로서 일을 하다니.
아카데미의 이사장님이 들으면 얼마나 기뻐하실까.
"… 나도 가끔은 그럴 때가 있어."
호연이라는 이름이 마음에 걸린다.
지금 이호연은 사무실 안 쪽에서 자고있으니까.
임솔은 표정을 관리하며 서류를 둘러봤다.
지옥의 문.
최근에 나타난 현상 중에 하나라고 한다.
임솔도 존재 자체는 알고 있지만, 그렇게 신경 쓰고 있지는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직접 경험하지 않은 건 믿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서류에서 익숙한 이름이 보였다.
"여기 호연이 이름이 있네?"
"아이리스 길드에서 제공한 정보인데, 그 정보의 출처가 엽… 아니, 호연이라고 하더라고. 하하, 신기해라…."
"… 그렇구나?"
임솔은 눈을 찌푸렸다.
우리 제자가 하는 고민이 이것 때문일까.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있을까.
여러 잡생각이 임솔에게 떠올랐다.
"솔아. 얼굴에 걱정이 많아 보여. 고민이라도 있어?"
"… 아니, 비상사태라고 하니까 괜히 신경 쓰여서."
"너무 신경 쓸 필요는 없을 거야. 아이리스 길드에서 전 세계적 비상사태를 선포해야 한다고 주장하긴 하는데… 기우일 가능성이 높아. 전문가들은 아직 회의적이더라."
"그랬으면 좋겠네."
임솔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서류를 읽어 내려갔다.
*
"하으음…."
소파에서 기지개를 켠 임솔은 손을 휘저었다.
달그락- 달그락-
그와 동시에 일을 끝마친 주전자와 찻잔이 혼자 제자리로 돌아갔다.
"바쁘다는 애가 1시간이나 떠들고 갔네."
백아영은 신나게 떠들다가 어느새 시간이 이렇게 됐냐고 놀라며 집으로 돌아갔다.
사무실 안쪽에 이호연이 자고 있었으니, 이야기하는 내내 조마조마했다.
다행히 들키지는 않았다.
임솔은 하품하며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조용해진 사무실의 뒤쪽 방문을 살짝 열었다.
이호연은 한 시간 전 모습 그대로 침대에서 자고 있었다.
밖에서 꽤나 떠들었는데 잠이 깨지 않은 걸 보니 깊게 잠든 모양이다.
임솔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이호연에게 다가갔다.
"… 내가 나쁜 년이 된 거 같네."
임솔은 방금까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백아영과 잡담을 나눴다.
백아영도 분명 이호연을 보고 싶었을 텐데, 임솔이 독차지해버렸다.
그녀의 감정을 잘 알고 있기에 임솔은 죄책감을 느꼈다.
죄책감. 미안함. 애정. 사랑. 애틋함.
지금까지 임솔과는 거리가 먼 감정들이었다.
우리 제자 덕분에 여러 가지 감정을 경험해보니 기분이 참 이상했다.
임솔은 이호연의 옆에 몸을 눕혔다.
'그래도 좋은 걸 어떡해.'
이기적이라고 욕해도 어쩔 수 없다.
죄책감이나 미안함은 이호연의 따뜻함에 닿자 눈 녹듯이 사라졌다.
달콤한 향에 몸을 맡긴 임솔은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