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3화 > 범인은 이호연이었습니다 (2)
이호연은 루시루미 쌍둥이와 데이트를 즐겼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들에게 끌려다녔지만… 즐거워 보였으니 만족이다.
"이호연! 이거 봐봐. 햄버거를 먹으면 쿠폰을 준대."
"이건 무슨 게임이야?"
"루, 루시. 호연 씨…. 혹시 쿠폰이 필요 없으시면 저한테 주시면 안 될까요…."
햄버거를 먹으며 루미에게 게임 쿠폰을 몰아주기도 하고.
"루미, 이 꽃은 이름이 뭐야?"
"잘 모르겠어. 향이 엄청 산뜻해."
"얘들아. 그거 독초니까 조심해."
"도, 독초. 호연 씨. 조심하세요…!"
"큭, 먹지만 않으면 괜찮아. 냄새는 맡아도 돼."
별 게 다 있는 아카데미의 정원을 걷기도 했다.
임솔 교수님에게 마법만 배우고 헤어지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쌍둥이들과 시간을 많이 보내버렸다.
"왜 벌써 해가 지는 거야? 이제 시작인데."
"루시. 나 힘들어 죽겠다. 슬슬 집에 가자."
"에엥. 벌써?"
"거의 10시간을 놀았는데 벌써라니."
"히잉. 호연 씨. 헤어지기 싫어요…."
이호연은 루시와 루미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얼마 논 것 같지도 않은데 빌딩 너머로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이리 와."
울상을 짓는 루시와 루미를 양손으로 끌어안았다.
양팔에 달라붙는 쌍둥이들이 참 귀여웠다.
"바빠서 미안해. 그래도 내일 동아리 방으로 놀러 갈게."
"네. 호연 씨! 그때 봐요!"
"잘 가~! 다은이랑 릴리아나 언니도 데려오구!"
"알겠어."
루시와 루미는 내가 없는 동안 다은이와 릴리아나랑 더 친해졌다고 한다.
그 미친 서큐버스가 이상한 짓을 하진 않았나걱정이네.
안그래도 이호연이 바빠서 동아리가 제대로 굴러가질 않아서 걱정이었다.
나 빼고 놀았다는 게 약간 질투가 나긴 하지만, 친해지면 좋은 거지.
특히 다은이가 있어서 안심이다.
바이바이.
이호연은 아쉬운 듯 손을 흔드는 루시와 루미에게 인사했다.
마음 같아선 루시루미와 하루종일 놀고 싶지만, 아직 볼 사람이 많이 남아있다.
'다들 최대한 빨리 보고 싶을거야.'
한국에 돌아온 이호연을 빨리 보고 싶은 건 모두가 똑같은 마음일거다.
히로인들 입장에서 누군 바로 만나는데 누군 며칠 뒤에 만나면 기분이 나쁘겠지.
어쩔 수 없이 하루에 여러 번 볼 수밖에 없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제일 중요한 걸 까먹으면 어쩌냐."
이호연은 한숨을 쉬고 아카데미 쪽으로 몸을 돌렸다.
동시에 스마트 워치로 임솔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 나 : 솔아. 다시 돌아가도 돼?
병신도 이런 병신이 없지.
성욕에 빠져서 섹스는 해놓고 정작 용건을 안 말해버렸다.
검은 기둥을 부수는 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데.
이걸 말 안하면 어떡하냐고.
'히로인들하고 있으면 집중력이 떨어지는 기분이란 말이야.'
누군가 다가오는 걸 눈치채지 못하기도 하고, 기억력이 안 좋아지는 거 같기도 하다.
그러니까 맨날 스칼렛한테 놀라는거다.
이호연에게 걸려있는 주인공 너프 같은 건가.
"답장이 없네."
이호연은 답장이 없는 스마트워치를 보며 아카데미로 걸어갔다.
답장이 없지만 별로 신경 쓰진 않는다.
다른 히로인에게 답장이 없다면 바쁘겠구나. 하고 생각하지만, 임솔에게 답장이 없는 건 그냥 훈련실에 박혀있는 거다.
내가 마지막에 보여준 마법을 보고 또 훈련에 빠져있겠지.
공간을 가속한 게 아니라 인식을 조금 뒤튼 거라고 말해주면 또 방방 뛰면서 좋아하지 않을까.
우리 교수님이 신나 하는 모습을 기대하니까 또 가슴이 두근거린다.
이호연은 벌써부터 웃으며 걸음 속도를 높였다.
*
사람이 거의 없는 마도관.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이호연은 이상하게 조용한 연구실로 들어왔다.
"솔아? 솔아…?"
연구실이 조용하다는 건 임솔이 마법 실험에 빠져있다는 뜻이다.
이호연은 그녀의 사무실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텅 빈 사무실과 마주했다.
"응? 어디 있지?"
당연히 여기 있을 줄 알았는데 없으니까 당황스럽네.
이호연은 임솔을 부르며 2층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훈련실에 들어가자 그녀를 찾을 수 있었다.
훈련실에 있는 소파.
루시와 루미가 훈련하는 동안 임솔과 사랑을 나눴던 좁은 소파에 그녀가 누워있었다.
"… 설마 그대로 자고 있는 건가?"
루시와 루미를 데리고 나갈 때 임솔을 소파에 눕혀놓은 상태였는데, 그대로 잠든 건 아니겠지.
이호연은 잠든 임솔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뒤에 있는 훈련장이 아직도 번쩍거리고 있었다.
저건 얼마 전까지 훈련장을 사용했다는 뜻이다.
'내 마법을 보고 훈련하다가 쓰러졌구나.'
임솔은 한 번 불이 붙으면 말 그대로 쓰러질 때까지 몰두하니까.
아마 훈련에 몰두하다가 침대에 갈 힘도 없어서 소파에 대충 쓰러졌을 거다.
"이런 데서 자면 입 돌아간다."
스윽-
이호연은 마력을 조종해 임솔의 몸을 들어 올렸다.
여기서 재우는 건 마음이 편하지가 않다.
그녀의 사무실 옆 방에 있는 침대에서 재우면 되겠지.
이호연은 둥둥 뜬 임솔을 데리고 사무실로 갔다.
조심스럽게 침대에 천천히 내리자, 잠깐 몸을 움츠렸던 임솔은 이내 곤히 잠들었다.
다행히 깨진 않은 모양이다.
이호연은 새근새근 잠들어있는 임솔의 얼굴을 보며 옆에 있던 의자에 걸터앉았다.
잘 자는 모습이 참 예쁘긴 하다.
"막상 옮기긴 했는데… 검은 기둥 일은 어떡하지."
임솔에게 검은 기둥을 같이 부숴달라고 부탁해야 하는데… 좀 전에 잠들었으면 언제 깨어날지 모른다.
피곤한 상태에서 잠들었다면 내일까지 계속 잘 수도 있다.
"그렇다고 깨우는 것도 좀 그렇고."
다급한 일이긴 하지만… 아까 봤던 상태창이 마음에 걸렸다.
애인으로 대우해 줬으면 좋겠다는 그녀의 속마음.
이호연은 옅게 웃으며 임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우리 솔이가 귀엽긴 하단 말이야."
어른스러운 모습도 있지만 순수한 모습도 있는 게 임솔의 매력이었다.
그 갭에서 오는 귀여움이 대단하거든.
'아영 씨랑 수린 누나 얼굴도 봐야하는데.'
이호연은 스마트워치를 확인했다.
다행인지 아닌지, 수린 누나는 지옥의 문 때문에 우리나라 높으신 분들과 의논하는 중이라고 한다.
빨라도 내일, 늦으면 모레가 되어야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백아영도 바쁜지 어젯밤 이후로 연락이 없었다.
'응급실 일이 바쁜가?'
환자가 많이 있을 것 같진 않은데, 백아영한테도 한 번 찾아가 봐야지.
띡-
이호연은 스마트워치를 끄고 잠든 임솔을 바라봤다.
깨우긴 싫지만, 할 말은 있다.
그럼 어떻게 해야할까.
'피곤한데 그냥 같이 자야겠다.'
고민은 길지않았다.
당장 얼굴을 봐야 할 히로인은 백아영 밖에 없다.
하지만 그녀도 연락을 안 받고 있으니, 그냥 임솔이 일어날 때까지 같이 자지 뭐.
마침 루시 루미 쌍둥이에게 끌려다니느라 피곤하기도 했다.
"하으. 나도 좀 잘게. 솔아."
이호연은 임솔의 옆에 조심스럽게 누웠다.
역시 마법 침대답게 푹신한 게 참 좋았다.
'저번에 여기서 진지한 대화도 했었지.'
자신밖에 선택지가 없다는 임솔의 말은 감동이었다.
그때 다시 한번 임솔에게 반했었던 기억이 난다.
일어나면 그 얘기를 좀 해줘야겠다.
킁킁.
"으음. 으응…."
임송은 잠든 와중에도 가까이 온 이호연의 냄새를 맡고 팔에 달라붙었다.
이호연의 몸에서 나는 달콤한 향을 맡은 거다.
"팔 하나 줄 테니까 같이 자자."
"흐음…."
이호연은 자신의 팔을 끌어안은 임솔을 보며 눈을 감았다.
'일어나면 깜짝 놀라겠네.'
이호연은 미소를 지었다.
눈을 뜨면 보일 임솔의 귀여운 표정이 기대된다.
*
백아영은 헌터 협회를 나서며 어깨를 움츠렸다.
그녀의 얼굴에는 피로감이 묻어있었다.
백아영은 구겨진 옷매무새를 다듬고 기지개를 켰다.
"으으으으으읏… 하아. 협회 사람들은 참 힘들어."
오랜만에 헌터 협회에 방문했다.
이유는 당연히 지옥의 문.
백아영은 전투력이 전무하지만, 어떤 상처도 치유하는 성녀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헌터 협회에서 중요한 취급을 받는다.
세계적인 비상사태가 발생했으니 당연히 그녀도 불려온 것이다.
지금은 장장 12시간에 걸친 대책 회의를 끝내고 나오는 길이었다.
"힘들지만 우리 여보를 먹여 살리려면 더 열심히 해야지…! 아. 답장. 답장을 해야 하는데…."
백아영은 울상을 지으며 스마트 워치를 확인했다.
예상대로 이호연의 메시지가 3개나 쌓여있었다.
- 여보 : 아영 씨. 오늘 보러 가도 괜찮아요?
- 여보 : 힘들면 내일도 괜찮고, 늦은 밤도 상관없어요.
- 여보 : 혹시라도 혼자 돌아다니면 안돼요. 지옥의 문이 나타난 거 알고 있죠? 거기 괴물들이 언제 나타날지 모르니까….
길게 쓰여있는 이호연의 걱정하는 말을 보니 백아영의 가슴이 따뜻해졌다.
방금까지 받았던 스트레스가 전부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오늘 밤에 볼 수 있으려나? 요즘은 응급실도 한가할텐데. 응급실 데이트라도 해보면…."
응급실 사람들에게 우리 여보 소개도 해주면. 헤헤.
이호연에게 답장을 보내려던 그때.
띠리리- 띠리리-
백아영의 스마트 워치에 알람이 울렸다.
[임솔 교수 훈련시간 20시간 돌파.]
"… 솔이가 또 이러네."
임솔이 일주일간 식음을 전폐한 연구로 쓰러진 뒤.
백아영은 그녀의 조교에게 임솔을 감시하라고 부탁했다. (비용은 당연히 임솔이 부담한다.)
그러나 혼자 있을 때 집중이 잘된다면서 조교를 퇴근시키고 다시 훈련을 시작하는 경우가 너무 많아서, 지금처럼 알림을 달아놨다.
"20시간이면 큰 일은 아니겠지만…."
임솔의 열정은 백아영도 놀랄 정도다.
12시간 훈련이 기본인 임솔에게 20시간 정도는 조금 무리한 정도.
하지만 사고는 안전하다고 생각한 상황에서 일어나기에 사고인 법이다.
'일도 끝났으니 오랜만에 솔이나 보러 갈까.'
사실 임솔도 중요한 전투 요원으로서 헌터 협회의 부름을 받았다.
이호연은 생도 신분이기 때문에 면제지만, 임솔은 교수니까.
'아마 또 스팸전화인 줄 알고 무시한 거겠지….'
아예 전화를 안 받았을 수도 있고.
어쩌면 알고도 안 나왔을 수도 있다.
워낙 자유분방하다 보니 임솔의 마음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없다.
친구로서 조금은 고쳐주고 싶지만 그녀의 자아가 워낙 강해서 어쩔 수가 없었다.
"전해줘야 할 것도 있고… 다음 회의 때는 솔이도 데려가야 하니까. 음. 오랜만에 연구실에 가야겠다."
혹시 모를 사고를 대비하고, 별일 없으면 회의 내용을 전달한다.
백아영은 자신의 완벽한 계획에 고개를 끄덕이며 마도관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