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 야겜에 빙의했다-589화 (589/648)

< 589화 > 지옥의 문 (3)

아이리스 길드의 밤은 길었다.

그들은 지옥의 문(이호연이 알려준 이름이다.)이 열리며 발생할 세계의 변화에 빠르게 적응해야 했다.

이호연이 종이에 써놓은 정보는 허무맹랑한 것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길드장과 두 딸의 억지로 아이리스 길드의 총력을 쏟아붓기로 결정했다.

그 결과, 이호연이 한국으로 떠난 뒤에도 끝 없는 회의에 시달렸다.

"하아…."

조용한 방.

아이린은 격무를 끝낸 뒤 간신히 숙소로 돌아왔다.

아이리스 길드가 더욱 최고로 거듭나기 위해 행동 방침을 정하는 시간이었으니, 피로가 굉장히 심했다.

그녀는 기진맥진한 상태로 부엌으로 향해 따뜻한 차 한 잔으로 마음을 진정시켰다.

뜨거운 물로 몸을 씻어내며 긴장을 풀고, 잠옷으로 갈아입자 그제야 진정되는 것 같았다.

아이린은 그대로 침대에 몸을 던졌지만 아직도 걱정은 멈추지 않았다.

"인큐버스에게 대처하는 방법은 알베도한테 물어라… Strange Nightmare를 말하는 거고. 가고일은 날개에 붙은 막을 먼저 공략. 그리고 땅을 오염시키는 데드우드는… 아, 아으. 머리야."

이호연이 휘갈기고 간 쪽지를 해석하고 그에게 연락해서 되묻기도 했다.

그럴수록 느끼는 건, 대체 그 남자는 이런 걸 어떻게 다 알고 있냐는 거다.

'생각했다고 하기엔 너무 구체적이야. 아니, 애초에 확실하지 않은 걸 굳이 종이에 남기고 갈 이유도 없어. 으, 머리야.'

고개를 휘휘 젓던 아이린은 문득 테이블에 있던 액자를 확인했다.

자신과 엘리스의 어린 시절 사진이 들어있는 고급 액자였다.

맞아.

아이린은 침대에서 일어나 자신이 벗어놓은 겉옷 주머니를 뒤졌다.

아공간이 달려있는 외투는 꽤 큰 물건도 보관할 수 있었다.

"여기 있다…. 잘 나왔네?"

아이린은 사진관에서 받아온 액자를 꺼냈다.

후우.

액자에 붙은 먼지를 불어내고 침실 탁자에 올려놨다.

이호연을 중심으로 아이린과 엘리스가 양 쪽에 서있는 사진.

그 사진을 보고 있으니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번졌다.

'… 참 잘생기긴 했어.'

오늘, 정확히는 어젯밤.

아이린은 자신의 마음을 깨달아버렸다.

처음엔 엘리스를 위해 희생할 생각이었지만, 결국 쾌락을 못 이겨서 몇 번 넘어가버렸다.

그래도 언제나 선을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정신 차려보니 이미 돌아갈 수 없는 길을 건너있었다

엘리스의 선천적 마력장애를 고쳐주고.

자신과 엘리스의 관계를 한 층 더 가깝게 만들어줬다.

옆에 있으면 웃음이 나오는 행동을 자주 하는 무례한 놈이지만, 또 아예 매너가 없는 건 아니었다.

'섹스도 잘하고… 아니, 아무튼.'

아이린은 부끄러운 생각을 지우고, 액자에 있는 동생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호연에 대한 호감이 문제가 아니다.

그는 여자가 많고, 자신이 끼기엔 이미 동생과 깊은 관계였다.

'이미 끼어들고 말고를 따지기엔 늦은 것 같긴 하지만… 하아. 답답하네.'

엘리스에 대한 미안함과 속상함.

이호연이 떠났다는 아쉬움, 그리움.

여러 감정이 아이린을 덮쳤다.

아이린은 혼란스러운 마음 그대로 액자에 있는 이호연을 바라봤다.

사진에 찍혀있는 셋은 사이 좋은 친구같았다.

아이린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이호연과의 추억을 상상했다.

'… 추억이 딱히 없는데?'

섹스.

가끔씩 식사.

섹스.

가끔씩 1팀장실에 와서 일 방해하기.

섹스.

이호연과 가진 추억의 대부분이 섹스였다.

아이린은 눈가를 쓸어내리며 고개를 저었다.

다음에 한국으로 가면 엘리스와 함께 셋이서 시간을 보내야겠다.

하으음-

아이린은 쏟아지는 졸음에 하품을 했다.

내일도 업무가 쏟아질텐데, 고민은 그만하고 슬슬 자야지.

"이럴 때 엘리스라도 끌어안고 자면 참 좋을텐…."

딩동-

별 생각없이 중얼거린 말이었는데, 그에 대답하듯 숙소의 벨이 울렸다.

아이린은 눈을 크게 뜨고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지금 시간에 방문할 사람은 엘리스 밖에 없다. 혹시 언니와 마음이 통해서 같이 껴안고 자려고 온 걸까?

"언니. 2팀장을 덮친 가고일의… 아, 벌써 자려고?"

문 밖에 서있던 건 아이린의 예상대로 엘리스였지만, 용건은 그게 아니었다.

엘리스는 퇴근하기 전과 똑같은 복장이었다.

아마 숙소에서 잔업을 하다 물어볼 게 생겨서 잠시 들린 모양이다.

"일은 내일도 해야 하니까. 엘리스, 온 김에 언니랑 잘까?"

"이만 갈게. 잘 자, 언니."

"잠시만, 잠시만… 엘리스. 맞아. 아까 낮에 찍은 액자 좀 가져갈래? 혹시 몰라서 3개 정도 만들었거든. 이호연하고 찍은 사진. 응?"

미련없이 몸을 돌렸던 엘리스는 자신의 옷깃을 잡고 있는 아이린을 난처한 눈으로 내려다봤다.

이대로 손을 털어내고 돌아가도 되겠지만… 그랬다간 무릎이라도 꿇을 기세였다.

"하아. 알겠어. 한 번 볼게."

"응! 안으로 들어와."

아이린은 미소를 지으며 엘리스를 방 안으로 들였다.

엘리스의 대답이 너무 기뻐서 하늘로 날아가 천장에 머리라도 박고 싶었다.

"자. 이거야. 어때?"

"사진은 잘 나왔네. 하으음."

엘리스는 자신도 모르게 하품을 했다.

확실히, 너무 일을 한 모양이다.

… 생각해 보면 어제 잠도 제대로 못 잤으니까 당연한 일이겠지.

"엘리스, 피곤해 보이는데 여기서 자고 가."

"싫어."

"왜, 왜… 언니랑 자는 게 싫어?"

"싫다기보단… 이상한 짓을 할 거 같은 눈이잖아."

아이린의 반짝거리는 눈은 침대에서 이제 한 번 쌌다는 이호연의 눈과 비슷했다.

즉 절대 가까이하면 안 되는 눈이다.

"안고만 잘게. 정말! 내 목을 걸고!"

"목을 왜…."

"흑… 엘리스…."

"하아…."

사고뭉치 이호연이 갔는데 왜 언니가 이러는 걸까.

확실하게 거절하지 못하는 자신의 잘못도 어느 정도는 있지만… 엘리스는 왠지 모르게 아이린의 눈빛을 피하기가 어려웠다.

"… 안고만 자는 거야. 이상한 데 손을 넣으면 앞으로 아는 척 안 할 거니까 그렇게 알아."

"에, 엘리스! 걱정하지 마! 절대 안 건드릴게! 내 손을 묶고 잘까?!"

"…."

전혀 믿음직스럽지 않다.

엘리스는 한숨을 쉬며 겉옷을 벗어 옷걸이에 걸었다.

'아무리 언니라도 덮치진 않을 거야.'

한 번 정도는 괜찮을거다.

엘리스도 손해 볼 건 없었다.

일주일간 이호연과 끌어안고 잤더니 침대가 텅 빈 느낌이었던 건 사실이다. 그래서 일을 더 하고 있었으니까.

언니와 자는 게 숙면에 도움이 되는지, 한 번 정도는 시험해 볼 만하겠지.

*

우뚝 솟아있는 검은 기둥.

이호연은 눈앞에 있는 기둥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마력을 모았다.

'스파이럴.'

순식간에 만들어진 마력의 폭풍.

손을 번쩍 든 이호연은, 이내 검은 기둥에 마력을 때려 박았다.

콰아앙-!

쿵-.

단 일격.

배에 구멍이 난 듯 무너진 검은 기둥은 굉음을 내며 바닥에 처박혔다.

방금까지 몸을 압박하던 지옥의 마력이 사라지고, 이호연은 가뿐하게 어깨를 돌리며 전용기를 향해 걸어갔다.

"고생이 많으십니다. 호연 님."

"어차피 언젠가 다 부숴야 하는 거. 가는 길에 부수는 게 낫지. 아, 미안해요. 빅터 씨. 이게 벌써 몇 번째인지…."

"아닙니다. 이호연 마법사 님! 이야, 저 기둥에서도 힘을 유지하는 건 세계에서 유일하게 이호연 마법사 님뿐이라고 하던데… 역시 대단하십니다."

이곳은 서울 근교의 농업지역.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검은 기둥이 보였기에 잠시 내려서 부순 것이다.

'이게 3번째인가? 이상하게 많이 보이네.'

물론 프랑스부터 한국까지 오는 비행에서 본 검은 기둥은 엄청나게 많았지만, 시간이 없어서 전부 넘겼다.

그래도 한국에 있는 건 차마 넘길 수 없어서 비행기를 멈춘 게 이제 3번째.

"고마워요. 빅터."

"아니야. 스칼렛. 이호연 마법사 님의 마법을 실제로 볼 수 있다니. 이런 영광이 또 어딨겠어."

빅터는 너스레를 떨었다. 그가 자신에게 호감이 있는 남자라 다행이었다.

마법 정도는 얼마든지 보여줄 수 있으니, 다음에도 좀 와줬으면 좋겠네.

"스칼렛. 난 잠시 눈 좀 붙일게. 혹시 검은 기둥이 보이면 또 깨워줘."

"알겠습니다."

하암.

이호연은 하품을 하며 눈을 감았다.

잠이 부족했으니 이런 자투리 시간이라도 활용해야 한다.

자신의 몸은 약간의 휴식으로도 금방 회복할 수 있다.

두두두두-

얼마나 지났을까.

비행기가 천천히 착륙하는 움직임을 느낀 이호연은 눈을 뜨고 주변을 살폈다.

"도착이야…? 하으."

"예. 내리시죠. 빅터. 고생하셨습니다."

"그래. 오늘처럼 이호연 마법사 님의 마법을 볼 수 있다면 휴일에도 달려오겠어."

빅터라는 남자의 악수를 받아준 이호연은 기지개를 켜며 집을 바라봤다.

오랜만에 온 자신의 집.

"근데 왜 아무도 안 나왔지? 메시지도 보냈는데."

"다들 바쁜 모양입니다. 먼저 들어가시죠. 저는 빅터를 보내고 가겠습니다."

"알겠어. 스칼렛."

2주 만에 보는 거라 다들 집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다.

바쁜 와중에 사놨던 선물도 다 챙겨 온 나만 진심이었구나. 이호연은 아쉬움을 가진 채 집으로 들어갔다.

'며칠은 시간이 있어. 그전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알려줘야 해.'

이호연의 표정은 금방 진지하게 변했다.

태평양 한가운데 지옥의 문이 나타난 이상, 혼자 힘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

'수린 누나한테는 또 도움을 받아야겠네.'

빅토리아 아카데미는 이런 일을 대처하는 데 도움이 될 거다.

다행히 이호연에게 도움을 줄 곳은 더 있었다.

'미국의 마법사 협회랑 아이리스 길드도 합치면 꽤나 세력이 생기겠는데?'

빨빨대며 돌아다닌 지금까지의 시간이 헛되지 않았구나.

이호연은 자기 자신의 노력에 감복하며 현관문을 열었다.

"어, 어쩌지…. 아, 아. 맞아. 119에! 헉. 오빠!"

"응? 다희야!"

집에 와서 가장 처음 본 게 남다희라니. 의외네.

이호연은 허리를 숙여 다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빠, 오빠아. 큰일이야. 빨리 와줘."

"왜 그래?"

남다희는 오랜만에 본 이호연을 반가워하기도 전에 그의 손을 잡아당겼다.

이호연은 영문도 모르고 다희의 손에 잡힌 채 거실로 끌려갔다.

다희가 이렇게 다급해 보이는 건 처음이네.

다희에게 이끌려 거실로 들어간 이호연은 눈을 크게 떴다.

레베카와 남다은, 그리고 릴리아나가 바닥을 기어 다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으어어. 하는 좀비 같은 소리를 내면서 말이다.

"뭐, 뭐야. 레베카 씨. 괜찮아요?"

무슨 일이라도 생긴건가? 가슴이 쿵쾅거린다.

이호연은 가장 가까이 있는 레베카에게 다가갔다.

심장은 뛰고 있고, 호흡도 정상이었다. 호흡이 느껴지는 건 남다은과 릴리아나도 마찬가지.

목숨이 위험한 상황은 아니었다.

"다희야. 언제부터 이 상태였어?"

"그게, 그게… 모르겠어. 집에 왔는데 언니가 쓰려져있구. 으, 119에 전화하려고 했는데 오빠가 와서…."

다희도 자세한 건 모르는 모양이다.

대체 원인이 뭐지?

이호연은 레베카의 상태를 살피며 마력을 펼쳤다.

"… 아."

신경을 곤두세우던 이호연은 그제야 거실에 가득 차 있는 지옥의 마력을 느꼈다.

히로인들이 쓰러져있는 걸 보고 너무 당황한 탓에 가장 기본적인 걸 놓치고 있었다.

"마천궁 전개."

마천궁을 전개한 이호연은 거실에 있던 지옥의 마력을 갈무리했다.

이 정도면 검은 기둥에 가까이 갔을 때와 비슷한 농도였다.

'… 하지만 레베카나 다은이가 쓰러질 정도는 아닌데. 릴리아나도 그렇고.'

게다가 다희는 멀쩡한 것도 이상했다.

무언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것 같았다.

"습격? 아니, 설마 마력 회로가 문제인가?"

레베카의 손목을 붙잡고 마력을 집어넣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이었는데, 정답이었다.

레베카의 몸 안에는 엄청난 지옥의 마력이 흐르고 있었다.

이호연은 마천궁의 도움으로 마력 회로에 있는 지옥의 마력을 전부 끌어냈다.

"애, 애기 아빠. 으, 으읏…."

"잠시만요. 레베카 씨."

아직 두 명이나 더 있다.

이호연은 거실 한가운데에 있던 남다은에게도 똑같은 조치를 취했다.

"하, 하아. 호연아…."

"응. 다은야. 이제 괜찮아. 천천히 심호흡해."

"언니이…."

울먹거리는 남다희가 남다은에게 달라붙었다.

마지막으로 릴리아나에게 다가간 이호연은 눈을 찌푸렸다.

그녀의 마나 회로는 지극히 정상이었다.

아니, 애초에 릴리아나가 지옥의 마력 때문에 쓰러질 리가 없잖아.

"릴리아나. … 릴리아나?"

"으음. 코오…."

"…?"

너무나 편안한 숨소리에, 이호연은 손을 들어올렸다.

짝- 짝-

"으음, 으브읍…. 으어."

자고 있는 서큐버스의 뺨을 툭툭 때리자, 릴리아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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