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8화 > 지옥의 문 (2)
부드럽고 따뜻한 조명이 감싸는 아늑한 분위기의 레스토랑.
고급진 스테이크를 썰자 분홍색 육즙이 터져 나온다.
입에 넣자마자 사르르 녹는 고기를 먹으며, 이호연은 눈을 크게 떴다.
"확실히 비싼 게 맛있긴 해. 그렇지?"
"그렇군요."
냠냠.
이호연은 스테이크를 음미하며 감탄을 멈추지 않았다.
릴리아나에게 이걸 먹여주면 치킨이고 뭐고 바로 잊어버릴 텐데.
한국으로 돌아가면 치킨대신 비싼 오마카세같은 걸 먹여야겠다.
"스칼렛. 나랑 같이 밥 먹어주는 건 고맙긴 한데, 오늘은 엘리스랑 아이린 씨하고 식사한다니까. 왜 안 먹고 있었어."
"당신이 스케줄을 끝내는 걸 확인한 뒤에 먹으려 했으니까요."
"그럴 필요 없다니까… 미안하게 왜 그래."
"애초에 비서로 온 건데 뭐가 미안하다는 겁니까. 물론 일주일째 찬밥 신세였지만요."
"… 그 정도였나?"
이호연은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며 고민에 빠졌다.
나름 챙겨줄 대로 챙겨준 거 같은데.
★ 히로인 상태창
[스칼렛]
- [ 호감도 : 100 ] ( + 2.8)
- [ 성욕 : 55 ]
- [ 식욕 : 30 ]
- [ 피로도 : 50 ]
현재 상태 : 며칠 내내 치즈 순두부를 먹자는 말만 안 했으면 참 좋았을 텐데.
[호감도 100 달성 시 이호연을 위해 봉사합니다.]
'… 치즈 순두부가 뭐가 문제야.'
맛있지 않나?
난 진심으로 맛있어서 먹자고 한 거였다.
"스칼렛. 그래도 치즈 순두부의 뜨끈한 국물이 생각나지 않아?"
"오랜만에 단 둘이 식사에서 그걸 먹이면 당신을 죽일지도 모릅니다."
"… 농담이야."
엘리스한테는 맞고 스칼렛한테 욕을 먹고.
내 이미지가 많이 상했구나.
이호연은 씁쓸한 표정으로 고기를 삼켰다.
'그래도 침대에선 내가 다 이길 수 있어.'
정신승리하며 식사를 마치고 바깥으로 나왔다.
마지막 날인 만큼 스칼렛하고 데이트라도 할까 했는데, 스마트워치가 울렸다.
"음?"
이호연은 화면에 나온 엘리스의 이름을 보며 전화를 받았다.
*
두근- 두근-
가슴이 두근거린다. 강적을 만났을 때와 비슷한 감정이다.
이호연은 레스토랑에서 아이리스 길드까지 곧바로 달려왔다.
건물 안을 바쁘게 돌아다니는 길드원들을 스쳐 지나간 이호연은 옷가지를 정리하는 것도 잊은 채 길드장실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길드장실에는 아이작을 비롯한 간부와 엘리스, 그리고 아이린이 보였다.
이호연은 대충 눈인사를 하며 아이작을 바라봤다.
"길드장님, 영상. 영상을 보여주세요."
"알겠네."
아이작은 곧바로 영상을 재생했다.
아이리스 길드의 2 팀장이 직접 찍었다는 태평양의 영상이었다.
영상을 보는 내내 가슴의 두근거림이 멈추지 않는다.
[치지지지지지지직-]
어디서 많이 본 괴물에게 헬리콥터가 공격받는 것을 마지막으로 영상이 끊어졌다.
몇 분도 안 되는 짧은 영상이었지만, 영상을 본 이호연은 혼란에 빠졌다.
'이게 왜… 지금 일어나는 거지?'
저 불길해보이는 어둠은 익히 알고 있다.
지옥의 문.
지구와 지옥의 차원을 연결하는 원작의 후반부 이벤트.
지옥의 문이 열렸을 때 나타나는 이상현상이다.
그리고 문이 열렸다는 건, 마왕의 강림이 눈앞까지 다가왔다는 뜻이다.
"자네는 무슨 상황인 지 알 수 있겠나?"
"아이리스 길드에서 지키던 거대한 문… 그게 열린 겁니다. 판데믹의 소행이죠."
"그 문이 열렸다고? 그렇다면 저 어둠과 괴생명체는 뭐지?"
"지옥의 문이 열리며 지구와 지옥이 연결된겁니다. 이제 전 세계에 저런 괴물들의 공격이 쏟아질 거예요. 당장 대비해야 합니다."
이호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왜? 라는 생각이 머리에 가득 찼다.
지옥의 문이 열리려면 엄청난 제물, 인간의 죽음이 필요하다.
제물로서의 가치는 개개인의 마력. 혹은 강한 두려움, 공포 같은 부정적인 감정에 따라 다르기에 정확한 수치를 알 수 없다. 따라서 완벽한 타이밍을 예상할 순 없다.
'… 하지만, 지금 열리는 건 말이 안 돼.'
원작보다 적어도 2년은 빠르다.
이호연은 최대한 머리를 굴렸다.
이 세계의 신이 억지로 문을 열었을 가능성은 낮다.
양질의 제물을 바쳐야 지옥을 그대로 구현할 수 있고, 그래야 마왕의 힘을 완전히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직 인간이 많이 죽지 않았어.'
원작에 비해 테러가 많아졌다곤 해도, 아직 턱없이 모자랐다.
원작에서는 나라가 몇 개나 괴멸한 후에 지옥의 문이 열리기 시작한다.
'내가 뭘 놓친 거지? 원작과 크게 달라진 게 있나?'
제물이 부족한데도 문이 열린 이유는 이호연이 만들어낸 나비효과일 거다.
그중 가장 큰 게 뭐였지?
이호연은 하나하나 기억을 되짚었다.
판데믹의 테러. 자신의 성장. 히로인 공략. 내기의 신과 대화. 이 세계의 신과 나눴던 대화.
그리고 얼마 전 케이론과 한 대화까지 도달했을 때.
이호연의 머리에 무언가 스쳤다.
"… 루시퍼?"
"루시퍼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아이린 씨. 케이론한테 아직도 루시퍼의 마력이 느껴지는지 물어봐주세요."
"Wild Gladitor 말이지? 알겠어."
아이린이 스마트워치를 건드리는 동안.
이호연은 고민을 이어갔다.
'루시퍼. 그래. 루시퍼가 있었지.'
케이론이 말하길, 루시퍼가 살아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그의 시체를 수습하긴 했지만 루시퍼는 본래 마왕이 될 정도로 강한 존재다.
만약 그가 어떤 방법으로 다시 살아났고 마에스트로가 루시퍼를 제물로 삼았다면….
'말이 안되는 건 아니야.'
제물이 되는 건 기본적으로 인간이다.
인간만이 지성체로서 두려움을 가질 수 있고, 마력을 다룰 수 있으니까.
그리고 그 조건엔 루시퍼도 부합한다.
"이, 이호연. 어젯밤에 루시퍼의 마력이 증폭되었다가 완전히 사라졌대. 안 그래도 네가 훈련실에 오면 말해줄 생각이었다고…."
"… 하아. 그런 걸 바로 말해야 될 거 아니야."
미친 켄타우로스새끼.
이호연은 욕을 억지로 삼키며 주변을 둘러봤다.
길드장실에 보이는 종이와 펜.
이호연은 원작에서 봤던 지옥의 괴수 상대법을 생각나는 대로 써내려갔다.
지옥의 문이 빠르게 열렸으니 희생이 더욱 많을거다.
"길드장 님. 저 괴물들이 지구를 파악하자마자 공격이 시작될 거예요. 이 정보를 최대한 많이 퍼트려주세요."
"이건… 그래. 알겠네. 이호연 자네는 어쩔 생각인가?"
"계획대로 한국으로 돌아가야죠. 한국에서 할 일이 많거든요."
"그런가. 자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어쩔 수 없지."
아이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 같아선 아이리스 길드의 일을 더 도와달라고 하고 싶었다. 이런 정보를 아는 사람은 전 세계에 이호연 밖에 없다.
하지만 언제나 이호연의 도움을 전제로 하면 안 된다.
엘리스에게도 가르친 아이리스 길드장으로서의 덕목이었다.
"아이린 씨. 먼저 가볼게요. 그래도 마지막 식사는 했으니 다행이네요."
"… 이호연. 지금 한국으로 가려고? 네 말대로라면 아이리스 길드에 있는 게 가장 안전할 거야. 그냥 여기서 조금 더 있는 게 어때?"
이호연은 자신을 붙잡는 아이린을 보며 침을 삼켰다.
그녀의 눈에 들어있는 감정은 두려움과 불안, 그리고 애정이었다.
★ 히로인 상태창
[아이린]
- [ 호감도 : 100 ] (+ 1.9)
- [ 성욕 : 60 ]
- [ 식욕 : 20 ]
- [ 피로도 : 40 ]
현재 상태 : 아이리스 길드에서 보호를 받는 게 훨씬 안전해.
[호감도 100을 달성시 이호연에 대한 애정이 엘리스와 같거나 그 이상으로 변합니다.]
'호감도 100….'
그녀의 마음은 너무나 고맙다.
하지만 이호연은 아이린의 손등에 손을 올린 뒤 고개를 저었다.
"아이린 씨. 미안해요. 하지만 빅토리아 아카데미가 마비 상태인데 제가 숨어있으면 누가 싸우겠어요."
"그, 그렇지만. 너도 봤잖아. 아이리스 길드에서도 꽤 강했던 2 팀장이 죽었어."
"그러니까 제가 나서서 막아야죠. 제가 얼마나 강한 지 아시잖아요?"
아이린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호연을 바라봤다.
이호연을 붙잡는 건 욕심이라는 걸 알고 있다.
실제로 그의 강함은 세계에서도 손 꼽히고, 그는 한국에 지켜야 할 게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보내기 싫은 욕심을 숨길 수 없었다.
"아이린 씨는 아이리스 길드에서 절 도와주세요. 제가 연락할게요."
"… 알겠어."
아이린이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호연은 미소로 화답하며 옆에 서있는 엘리스를 바라봤다.
그녀는 의외로 아이린보다 침착한 모습이었다.
"엘리스. 음, 최대한 빨리 대책을 찾아서 연락할게."
"마음대로 해. … 나도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너한테 도움이 될 방법을 찾아볼 테니까."
엘리스는 복잡한 마음으로 이호연을 바라봤다.
그녀도 마음 같아선 이호연을 붙잡고 싶지만, 앞에서 언니가 호들갑을 떠는 바람에 자신까지 이호연에게 달라붙을 순 없었다.
★ 히로인 상태창
[엘리스]
- [ 호감도 : 100 ] ( + 3.1 )
- [ 성욕 : 50 ]
- [ 식욕 : 20 ]
- [ 피로도 : 40 ]
현재 상태 : 언니는 창피하게 왜 저러는 거야. … 하지만 프랑스에 있는 게 더 안전할 텐데.
[호감도 100을 달성시 이호연을 상대로 더욱 솔직해짐]
이호연은 엘리스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두 자매가 자신을 걱정하는 건 알겠지만, 한 시라도 빠르게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한국에도 지켜야 할 소중한 히로인들이 있다.
'그래도 그냥 가면 안 되겠네.'
어젯 밤 그런 짓을 해놓고 그냥 떠나는 건 너무 나쁜 남자잖아.
이호연은 자신을 바라보는 엘리스의 뺨에 손을 얹었다.
뜨거운 볼의 체온이 자신을 걱정하는 엘리스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 아?"
엘리스가 의문을 표시하던 그 순간, 이호연은 그녀에게 다가가 몸을 끌어안았다.
갑작스럽게 품에 안긴 엘리스는 당황한 눈으로 이호연을 바라봤다.
순식간에 뜨거워진 얼굴은 토마토처럼 붉어졌다.
"기다리고 있어. 엘리스."
"너, 너. 이호연…."
"아이린 씨도. 금방 좋은 소식 가져올게요!"
"으응. 알겠어."
엘리스와의 짧은 포옹을 끝낸 이호연은 멍하니 서있는 아이린과 눈을 마주치고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는 걸 확인하자마자 길드장 실에서 빠져나왔다.
이왕이면 아이린도 안심시켜주고 싶었지만, 그녀까지 끌어안았다간 살아서 아이리스 길드를 나가기 힘들 거다.
[… 야. 잠깐! 저 미친 검은 머리 잡아! 잡으라고! 감히 누구 딸을! 야이 개새….]
[길드장 님! 제발, 제발 지금은…!]
[달링! 지금은 딸을 응원해 줄 때잖아요!]
뒤에서 들려오는 말을 한 귀로 흘리며, 아이리스 길드의 공터로 향했다.
두두두두두-
공터에 들어오자마자 바람소리가 땅을 울린다.
프랑스에 올 때 사용한 소형 전용기가 곧바로 출발할 수 있도록 대기 중이었다.
스칼렛에게 미리 부탁한 것이었다.
"스칼렛. 고마워. 바로 준비해 줬네."
"예. 바로 탑승하시면 됩니다."
"출발하자."
한 시가 급했다.
이호연은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