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7화 > 지옥의 문 (1)
태평양 한가운데의 섬.
문명에서 떨어진 무인도는 인간의 손길이 전혀 닿지 않은 외딴곳이다.
독특한 야생 동물과 자연경관을 볼 수 있는 그 섬의 중심부엔, 거대한 문이 서있었다.
때 묻지 않은 섬의 분위기와 전혀 다른 거대한 문.
마치 조각품같이 고급스러운 문에는 인간들이 고통받는 모습이 복잡하면서도 상세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문에서 멀지않은 곳에, 남자 두 명이 서있었다.
"귀찮아 죽겠네."
"경계 근무만큼 쉬운 게 어딨다고 불만이야. 다른 길드원들은 검은 기둥 부순다고 난리난 거 몰라?"
"듣긴 했지. 지옥의 마력 특훈 중이라고 하던데."
"그래. 듣기로는 익히는 과정이 엄청 어렵다더라. 한국을 덮친 루시퍼 알지? 그 시체를 만져야한대. 그래야 지옥의 마력을 익힐 수 있다고 하더라고."
"으, 듣기만 해도 기분나쁘네."
"우린 얼마나 편하냐. 그냥 멍하니 바다나 보고 있으면 되잖아."
아이리스 길드원은 잡담을 나누며 슬쩍 뒤에 있는 거대한 문을 바라봤다.
보기만 해도 불길해지는 구조물이다.
검은 기둥처럼 지옥의 마력을 내뿜고 있었기에 가까이 갈 순 없었지만, 무슨 일이 터지면 곧바로 대처할 수 있도록 최대한 가까이 위치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이 문도 좀 무섭지 않아? 뭔가 튀어나올 것 같잖아."
이 문의 정체는 모르겠지만, 보고 있다 보면 소름이 끼치고 으스스해진다.
게다가 지옥의 마력때문에 기분도 나빴다.
"검은 기둥하고 비슷한 거겠지. 그것도 머리 아프기만 하고 별 거 없었잖아. 게다가 이호연 생도, 아니 이호연 마법사가 결국 부수는 데 성공했고."
"검은 기둥도 무시하면 안 된다고 하던데…. 에이 씨. 모르겠다. 슬슬 교대시간이니까 준비해. 다음 누구지?"
"유진하고 알렉스였…."
쿠궁-
그 순간. 거대한 문이 흔들렸다.
잡담을 나누던 길드원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움직임을 멈췄다.
주변의 공기가 무거워지고, 발 밑의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뭐, 뭐야. 지진인가?"
"젠장. 일단 보고를… 어?"
삐걱. 삐걱.
달그락- 달그락-
자신들이 지키고 있던 거대한 문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문 건너편에서 썩은 냄새가 풍겨왔다.
꽤나 거리가 있는데도, 마치 거대한 심연을 마주한 것 같은 공포가 길드원들을 덮쳤다.
"보, 보고. 보고해!"
"무전에 반응이 없어…! 마력도 움직이질 않아!"
"이런 씨발… 일단 도망ㅊ…."
끼이이이익-
삐걱거리던 문이 완전히 개방된다.
그 안에서 새어 나오는 어둠은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이며 주변을 장악했다.
[꺄하하하. 꺄하하하.]
[그르륵- 그르륵-]
형언할 수 없는 기괴한 소리들이 들려온다.
그와 동시에 문에서 튀어나온 어둠이 엄청난 속도로 길드원들을 덮쳤다.
"아, 아…."
마지막 순간.
길드원은 자신을 덮치는 절망을 보며 눈을 감았다.
*
찰칵- 찰칵-
시끌벅적한 사진관.
이호연은 웃으며 눈앞의 사진기를 바라봤다.
한국에 돌아가기 전, 아이리스 길드 홍보를 위해 사진을 찍어달라는 아이린의 요청이었다.
"찍겠습니다. 위스티티~."
"위스티티."
참고로 위스티티라는 건 한국에서 말하는 김치~의 프랑스 버젼이다.
이호연도 사진관에 와서야 알았다.
뜻이 뭐라더라. 원숭이였나?
"웃는 얼굴은 안 나왔는데… 이 정도로 끝낼까요?"
"한 번 확인해 볼게요."
사진사가 어색한 표정으로 웃고 있자, 이호연의 뒤에 서있던 아이린이 걸어가 사진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된 것 같아요. 수고하셨습니다."
"아닙니다! 저희야말로 감사하죠. 이런 선남선녀 분들을 홍보용으로 쓸 수 있게 해 주시다니."
연신 고개를 숙이는 사진사를 내버려 둔 채.
아이린은 이 쪽으로 다가왔다.
"용건은 끝났으니 돌아갈까?"
"… 언니. 난 분명 이호연과 단 둘이 홍보용 사진을 찍는다고 해서 온 건데."
"이왕 찍는 김에 셋이 기념사진도 하나 찍어봤는데… 불쾌했어? 미안해. 엘리스."
"불쾌한 건 아니고…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엘리스는 괜히 이상한 기분이었다.
분명 불쾌한 일은 아니다.
이호연과 사진을 찍은 것도 맞고, 거기 아이린이 낀다고 해서 불쾌해야 할 이유는 없다.
… 근데 왜 짜증이 나는 걸까.
애초에 목적이 달랐던 기분이다.
"엘리스. 어제 우리 좋았잖아. 아이린 씨도 그냥 사진을 찍고 싶었, 큽. 아악…."
이호연은 배에 엘리스의 주먹을 맞고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엘리스가 이제 자연스럽게 날 때리기 시작했다.
물론 엘리스가 때린다고 이호연도 때릴 순 없으니, 그냥 맞을 수 밖에 없다.
"… 그 얘기하지 말라고."
엘리스는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어제, 아니 시간으로 따지면 12시간도 안되었다.
그 일을 잊을 수 없었기에, 엘리스는 얼굴이 새빨개지는 것 같았다.
"일단 밥이라도 먹으러 갈까? 엘리스. 스테이크 괜찮아?"
"응. 그래… 언니 마음대로 해."
엘리스는 아이린을 보며 슬쩍 눈을 피했다.
이호연은 괜찮지만, 아이린은 아직도 창피했다.
어색하기보단… 창피했기 때문이다.
그날 아이린에게 안긴 채 몇 번이고 절정 한 자신의 모습이 떠오른다.
특히 아이린의 풍만한 가슴을 보면 부드러운 감촉이 떠오르는 것 같아 너무 창피했다.
"이호연. 너도 갈 거지? 프랑스에서 마지막 식사잖아."
"네. 당연히 가야죠."
"알겠어. 엘리스. 그럼… 음?"
띠리리- 띠리리-
엘리스가 좋아하는 레스토랑으로 데려가려던 아이린은, 스마트워치를 보고 표정을 굳혔다.
[위급 상황 발생. 태평양의 거대한 문을 감시하던 길드원들 실종, 가까이 간 조사팀도 연락 두절. 현재 2팀장을 현장으로 파견했으니 간부들은 전부 길드장실로 소집바람.]
옆에 서있던 엘리스도 똑같은 메시지를 받은 상태였다.
"엘리스. 식사는 나중이야."
"응. 언니."
"… 밥 먹으러 가는 거 아니었어요?"
엘리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는 이호연을 보며 잠시 고민했다.
태평양의 문은 이호연도 알고 있으니 거기서 일어나는 일은 공유해도 문제가 없을 거다.
만약 판데믹과 관련된 일이라면 이호연의 도움이 필수적이다.
'… 하지만 아직 확실하진 않아.'
판데믹의 소행인지, 다른 정보길드의 소행인지. 혹은 제3의 세력인지.
적어도 습격의 주체가 누군 지는 알아낸 뒤 알려주고 싶었다.
모든 일을 이호연의 도움을 받으며 해결할 순 없으니까.
"미안해. 이호연. 길드에 급한 일이 생겨서 가봐야 할 것 같아."
"내가 도와줄 수 없는 일이야?"
"아이리스 길드의 일이거든. 이제 한국으로 돌아갈텐데 언제나 네 도움을 받을 순 없잖아. 숙소에서 쉬고 있어."
"… 알겠어. 바빠 보이는데 빨리 가봐. 아이린 씨도 다음에 봐요."
"응. 다음에 보자. 아, 사진은 잘 쓸게."
엘리스는 말을 마치자마자 달려갔고, 아이린도 다급하게 그 뒤를 따랐다.
"사진을 잘 쓴다는 건 뭐야?"
이호연은 파리 한가운데에 남은 채 혼잣말을 뱉었다.
설마 아버님이 또 바람피우다 걸린 건 아니겠지.
쩝.
왠지 불안하긴 하지만… 엘리스가 괜찮다고 했으니 괜찮을 거다.
이호연은 아쉬움을 안고 몸을 돌렸다.
*
두두두두-
아이리스 길드의 헬리콥터는 태평양의 무인도 상공을 맴돌았다.
짙은 어둠에 가려진 섬은 안을 확인할 수 없었다. 마치 새벽녘 안개로 뒤덮인 도시를 보는 것 같았지만, 거기서 흘러나오는 불길함은 안개 따위와 비교할 수 없었다.
저 어둠이 삼킨 길드원들이 두 자리가 넘었으니 더 이상 가까이 갈 수도 없었다.
"잭슨. 카메라 제대로 돌아가고 있나?"
"예. 2 팀장님. 실시간으로 본부에 전달 중입니다. 하지만… 저 어둠은 실제로 봐야 할 것 같은데요."
"영상은 현장의 분위기를 전달하지 못하니까. 확실히 이 음침함은 직접 보지않으면 느끼지 못하겠어."
아이리스 길드의 2 팀장은 긴장을 유지하며 어둠을 주시했다.
어둠은 무인도 주변의 바다까지 전염된 상태였다. 예전에 기름 유출 사고를 실제로 봤을 때와 비슷했다.
생명의 흔적이 없는 섬과 바다는 어둡고 불길한 느낌을 풀풀 뿜어댔다.
"마인이나 던전의 마수들은 안 보이는군. 하지만 던전의 폭주라기엔 너무 규모가 커."
"예. 아직까지는… 앗? 2 팀장님. 저건…!"
무인도를 바라보던 2 팀장과 잭슨은 눈을 찌푸렸다.
어둠의 구석에서 정체불명의 생명체가 날개를 피며 날아올랐다.
길쭉한 팔과 거대한 날개.
그리고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박쥐같이 생긴 인간이 날아오르고 있었다.
"젠장, 도망가! 당장 뒤로 빠져!"
2팀장은 곧바로 헬리콥터를 돌렸지만, 어둠 가운데에서도 빛나는 눈을 가진 괴물은 순식간에 헬리콥터를 향해 날아왔다.
"마력이… 마력이 말을 듣질 않습니다!"
"뭐?! 이렇게 거리를 벌렸는데 무슨 소리야!"
카드드득-
괴물의 움직임은 빠르고 매서웠다. 눈 깜박할 새에 헬리콥터의 기체가 기우뚱 기울었다.
기체의 강철을 날카로운 손톱이 긁은 것이다.
"이런 씨발… 잭슨! 전투 준비…."
*
[잭슨! 전투 준비…. 치지지지지지지직-]
삐. 삐. 삐.
2팀장의 마지막 외침과 함께, 영상이 끝났다.
아이리스 길드장실에 모인 간부들은 2 팀장의 마지막 모습을 보며 침을 삼켰다.
"…."
충격적인 영상이었기에, 먼저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2 팀장의 말처럼 저 거대한 어둠은 존재하지 않던 현상이었다.
게다가 처음 보는 강한 괴수까지 등장했다.
이제 아이리스 길드의 힘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라는 뜻이다.
"… 더 이상 길드원을 보내지 않는다. 대신 이 영상을 다른 길드와 협회에게 전달하는 게 낫겠군."
"예. 곧바로 연락하겠습니다."
"저런 게 태평양 한가운데에 나타났으니 정보를 통제할 수도 없어. 차라리 다른 곳에서 파악하기 전에 먼저 움직인다."
거대한 문은 운 좋게 아이리스 길드가 먼저 발견하고 통제해 왔다.
하지만 상황이 바뀌었다. 통제할 수 없다면 주도해야 한다.
"마법사 협회가 최우선이다. 그 다음은 빅토리아 아카데미야."
"아서 학회장에게 직통 연락중입니다!"
길드장실의 분위기는 신기할 정도로 차분했다.
여기 있는 자들은 전부 프로였다.
이럴 때일수록 감정을 자제하고 우선적인 일을 처리해야 한다.
'이호연을 불러올 걸 그랬네.'
한편, 영상을 본 엘리스는 조용히 한숨을 쉬며 후회했다.
저 어둠이 뭔 지 모르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해결책은 이호연 밖에 안 떠올랐다.
그에겐 자신도 모르는 정보가 많았으니까.
"… 제가 이호연에게 연락할게요. 그라면 무언가 알 수 있을 거예요."
"오, 그래. 엘리스. 이호연 마법사에 대한 건 너에게 맡기마."
세계 최고의 정보 길드.
아니, 이제 모든 분야에서 세계 최고가 된 아이리스 길드가 이호연보다 정보력이 부족하다니.
지금도 어느 정도 협력관계긴 하지만, 그에게 더 도움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 엘리스는 화가 났다.
이래서는 이호연이 말하던 마왕을 죽일 수 있는 걸까.
"엘리스… 괜찮아?"
곁에 있던 아이린은 조심스럽게 엘리스를 바라봤다.
고민이 많은 것 같은 동생이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별 거 아니야. 언니. 난 이호연하고 전화라도 하고 올게."
엘리스는 눈을 찌푸리며 길드장실 바깥으로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