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 야겜에 빙의했다-580화 (580/648)

< 580화 > 가장 쉬운 방법 (2)

'이클립스.'

하늘을 닿을 듯 뻗어있는 나무들 사이.

뜨거운 검은 태양이 나무들을 불태우며 검은 기둥에 충돌했다.

콰앙-!

후두두-

새들이 날아오를 정도의 커다란 굉음.

그와 동시에 우뚝 솟아있던 불길한 기둥이 서서히 넘어갔다.

쿵-.

"콜록. 콜록. 아오, 씨."

손가락을 튕겨 흙먼지를 날려 보낸 이호연은 눈을 찡그린 채 뒷걸음질했다.

혹시나 산불로 옮겨질 수 있으니 불을 전부 없애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대론 안돼. 효율이 너무 안 좋아."

이호연은 손에 남은 마력을 털어내며 중얼거렸다.

오랜만에 맡는 흙냄새가 그나마 기분을 달랬지만, 이건 물리적으로 더 할 수가 없다.

검은 기둥을 부술 수 있다는 걸 깨달은 날.

무엇을 할 지 고민은 짧았다.

아이리스 길드에 알린 직후, 이호연은 검은 기둥을 부수러 다녔다.

일단은 프랑스에 있는 거라도 전부 부숴볼 생각이었다.

이제 겨우 하나를 부순 직후였으니 시행 횟수를 늘려 예외가 있는 지도 파악해야 했다.

… 그렇게 이틀 내내 검은 기둥만 부수러 다녔다.

"그건 어떤 새끼 머리에서 나온 생각이야. 시발."

볼을 따라 흐르는 땀을 닦아냈다.

이틀 전 자신의 뒤통수를 후리고 싶었다.

검은 기둥마다 강도가 달랐기 때문에 가벼운 스파이럴로 부서지는 놈이 있는가 하면 지금처럼 무식하게 마력을 때려 박아야 하는 놈도 있었다.

검은 기둥에서 나오는 부정적인 기운을 막는 일은 이호연에게도 많은 집중력을 요구한다.

게다가 기둥끼리 딱딱 붙어있는 게 아니라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이동시간도 장난이 아니었다.

이틀간 빨빨대며 검은 기둥을 부수기 위해 돌아다니며 확실히 느꼈다.

전 세계에 있는 기둥을 혼자 부수는 건 너무 힘들다.

물론 몇 달 정도 시간을 잡는다면 할 수 있겠지만…. 그럼 히로인들은 누가 만나.

그렇다고 천천히 조금씩 부수기도 쉽지 않았다. 검은 기둥은 각 국에 흩어져있으니까.

"… 일단 돌아갈까."

벌써 내일이면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이대로 검은 기둥만 부수다가 집으로 가기엔 아직 아이리스 길드에서 할 일이 남아있다.

검은 기둥에 대한 건 다시 고민해 보면 되겠지.

바스락거리는 낙엽들을 밟으며, 이호연은 숲 밖으로 빠져나갔다.

*

아이리스 길드의 1 팀장실.

이호연은 아이린이 직접 타준 커피를 마시며 소파에 몸을 맡겼다.

검은 기둥을 부수느라 녹초가 된 몸의 피로를 풀어야 했다.

"… 오늘도 그 무식한 짓을 하고 온 거야?"

"무식한 짓이 뭐예요. 아이린 씨. 뉴스 안 봤어요? 이호연 마법사의 굉장한 업적이라잖아요."

"굉장하긴 한데… 그래. 네 말이 맞지."

아이린은 소파에 뻗어있는 이호연을 보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굉장한 업적인 걸 인정하지 않는 게 아니다. 아이리스 길드도 이호연 덕분에 엄청난 반사이익을 얻고 있다.

다만 오랜만에 시간이 남아서 스마트 워치에 저장해 놓은 엘리스의 어린 시절 동영상을 보려고 했는데, 하필 그때 이호연이 찾아오는 바람에 업무에 집중하는 척해야 하는 자신이 억울했을 뿐이다.

타닥- 탁-

조용한 사무실 안에 키보드 소리만 울려 퍼졌다.

이호연은 소파에 쥐 죽은 듯 누워있었고, 아이린은 슬쩍 이호연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 크흠. 피곤하면 숙소에 가서 쉬지 그래."

"제가 있으면 불편해요? 어차피 스마트 워치로 시간 때우기 밖에 안 한다고 하던데요."

"어떤 새끼가 그런 말을 해? 길드원이야?"

"농담이에요."

아이린은 눈을 찌푸린 채 노려봤고, 이호연은 슬며시 눈을 피했다.

"하아."

결국 지는 건 아이린이었다.

여긴 그녀의 사무실이었고, 저 무뢰배를 내쫓지 않는 이상 자신의 패배였으니까.

"그래서 왜. 진짜 놀러 온 거야? 커피라도 한 잔 더 줘?"

이호연은 아이린의 말에 미소를 지었다.

요즈음 아이린이 편해져서 자주 놀러 오는데, 의외로 엘리스보다 더 잘 받아주는 것 같다.

엘리스는 일할 때 건드리면 화내거든.

"그것도 있고… 할 얘기도 있구요."

"할 얘기가 뭔데?"

"당연히 검은 기둥이죠."

이호연은 아이린과 말을 이어가며 스마트 워치를 확인했다.

[이호연이 검은 기둥을 부쉈다.]

이 세계의 신이 해낸 대규모 의식 조작.

그 덕분에 검은 기둥은 던전 생성이나 던전 폭주처럼 자연 현상이 되어가고 있었다.

인류가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가 하나 더 늘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그걸 천재 마법사 이호연이 깨트렸다.

게다가 아이리스 길드의 도움으로 전 세계에 검은 기둥의 위험성이 알려지고 있었기에, 그 여파는 더욱 컸다.

- 검은 기둥. 단순히 무시하는 게 정답이 아닙니다. 최근 연구에서 테러 집단 판데믹과 검은 기둥에 대한 연관성이….

- 프랑스의 아이리스 길드, 전 세계에 검은 기둥의 위험을 알리는 데 일조한 것은 이호연 마법사.

- 천재 마법사 이호연. 다시 꿈꾸다. 전 세계의 골칫덩이였던 검은 기둥을 부술 방법을 찾았다!

- [실제상황] '한국'의 마법사 이호연에게 무릎 꿇는 전 세계의 정상들?! 한국을 무시하던 중국의 외교부. '부탁합니다. 따거.'

"뭐 이런 미친놈들이 다 있어. 큭."

이호연은 마지막에 있는 기사를 보며 끅끅 웃었다.

하긴, 중국은 베이징에 싱크홀이 생기며 많이 힘들어지긴 했지.

아이린은 자기가 말하다가 갑자기 웃기 시작한 이호연을 보며 질문했다.

"검은 기둥? 네가 다 부수러 다니는 거 아니었어?"

"그건 저보고 죽으라는 소리고요. 진짜 무리하면 하루 10개가 최대예요."

"10개면 금방 부수는 거 아니야? 전 세계에 검은 기둥이 500개 정도밖에 없잖아. 두 달이면 부수겠네."

"10개가 무리한 거라고요. 24시간 동안 마력을 썼으니 하루는 쉬어야 해요."

"그럼 네 달?"

"24시간 내내 검은 기둥을 부숴야 한다니까요. 아니, 아이린 씨, 지금 일부러 물어보는 거죠?"

아이린은 슬쩍 눈을 피했다.

당연히 그녀도 알고 있다. 최근 이틀간 프랑스의 검은 기둥을 15개 정도 박살낸 이호연의 상태는 영 정상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여기서 꼬장을 부리고 있는 거겠지.

"마음 같아선 나도 도와주고 싶은데, 지금 검은 기둥에 다가갈 수 있는 게 너뿐이잖아."

"… 네. 그렇죠."

참고로 언론에는 루시퍼와 전투를 이어가며 검은 기둥에 대한 마력을 깨우친 천재 마법사라고 알려졌다.

"나랑 엘리스, 그리고 아이리스 길드원들도 지옥의 마력을 연구 중이야. 너무 걱정하진 마."

"으음… 저도 알긴 하는데요."

솔직히 기대는 안 하고 있다.

자기 입으로 말하긴 좀 그렇지만, 아마 자신보다 지옥의 마력을 빨리 깨우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거다.

이호연도 지금처럼 완벽히 익히는 데 한 달 이상 시간이 걸렸다.

그런데 아이리스 길드원이라면?

'최소 1년이고 길면 몇 년이야.'

그 정도면 이미 마왕을 죽였거나, 세계가 멸망했을 거다.

"어디 마법에 재능이 뛰어나면서도 지옥의 마력을 일찍 접해서 연구하는 사람들 없나. … 어?"

소파에 몸을 맡기고 있던 이호연은 자세를 바로잡았다.

마법에 엄청난 재능을 가졌고, 지옥의 마력을 일찍 접해본 사람.

둘이나 있잖아.

"갑자기 왜 그래? 그런 사람이 있어?"

"… 네. 임솔 교수님. 그리고 레베카 씨."

그녀들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할 것 같다.

내일이면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이니 돌아가서 말해보면 되겠지.

"그 둘이 너만큼 지옥의 마력을 다룰 수 있어?"

"저만큼은 아니어도, 제일 빨리 발전할 사람이 그 둘이죠."

"그럼 레베카 씨와 임솔 교수님에게 아이리스 길드원들이라도 붙여줘? 도우미가 필요할 거 아니야. 주변을 지킬 사람도 필요할 거고."

"으음… 그건 생각해 볼게요."

자세한 일은 한국에 돌아가서 그녀들과 상담하면 된다.

여기서 다 정하고 가봤자 정작 그녀들이 거절하면 소용없는 일이다.

"그것보다, 자. 오늘 할 일 없으시죠?"

"… 아니. 많은데? 지금 바쁜 거 안 보여?"

"제가 다 알고 온 거예요. 설마 아이린 씨한테 일이 많을 때 와서 민폐를 끼치겠어요?"

"…."

그럼 이 남자는 자신이 일하는 척을 하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는 건가.

… 뭐 이런 놈이 다 있지?

"우리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이야기를 해봐요. 아이린 씨."

*

뚝. 뚝.

반들거리는 쇠창살과 물이 새는 천장.

자그마한 창문에 들어오는 옅은 달빛.

아마도 지하 감옥으로 쓰였던 장소 같다.

지금은 판데믹의 수많은 은신처 중 하나가 된 조용한 지하실에서, 한 남자가 눈을 감고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

마에스트로.

그의 조용한 기도는 언제나 똑같았다.

'저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인간의 몸으로 인간을 멸망시키려 하는 저주받은 운명.

매일 자신을 저주하고 원망했다. 매일 사과하는 밤을 보냈다.

하지만, 아무리 저항해도 사라지지 않는 이 운명에 어느 순간 적응해 버렸다.

마에스트로는 죄책감이 사라지는 걸 느꼈다.

자신은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인간과 다른 존재다.

그래. 귀신이라고 부르자.

귀신이기에 인간의 정신을 조종할 수 있다.

귀신이기에 자신은 인간을 죽인다.

귀신이기에 자신은 잘못하지 않았다.

"… 아니요. 귀신? 저는 마왕 님을 위해 살아가는 마인입니다. … 마왕? 당신은 누구죠?"

마에스트로는 더 이상 이 자신의 삶을 저주하지 않았다.

비관하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이 운명이니까.

자신이 해야 할 일은 마왕의 강림뿐이었다.

꿈틀-

그때, 차가운 지하실의 구석에 있던 썩은 고깃 덩어리가 꿈틀거렸다.

조금씩 생기를 되찾던 그것은 조금씩 크기를 키웠다.

마치 풍선에 공기가 차는 것처럼 크기를 키우던 살덩이는 이내 인간의 형태로 바뀌었다.

붉은 마안.

머리 위로 뻗어있는 산양의 뿔.

불길하면서도 날카로운 눈매.

"… 그래. 패배라, 좋은 경험이었다."

이호연에게 토벌당했던 루시퍼가 지금 다시 태어났다.

그의 능력 중 하나인 '의식 이동'이다.

루시퍼는 죽기 직전, 은신처에 숨겨놨던 자신의 분신에 의식을 이동시켰다.

그리고 지금까지 천천히 마력을 모으며 다시 몸을 구성했다.

"근처에 검은 기둥이 있어서 다행이군. 생각보다 빨리 부활했어."

혹시나 하는 마음이었다.

자신이 지구에서 죽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란 걸 알고 있었지만, 만에 하나를 대비하자는 생각으로 지옥의 마력이 가장 강력한 장소에 자신의 분신 일부를 떼어놨다.

만약 그 보험이 아니었다면 루시퍼는 다시 눈을 뜨지 못했겠지.

그러나 부활의 기쁨은 잠시였다.

곧 주변을 둘러본 루시퍼는 이상함을 느꼈다.

"… 이 곳은?"

자신이 분신체를 숨겨 놓은 곳은 지옥의 마력이 가장 강한, 검은 기둥의 바로 옆이다.

어째서 이런 감옥 같은 곳에서 눈을 뜬 거지?

저벅. 저벅.

"오…, 루시퍼. 당신이 정말 패배할 줄이야.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

기분 나쁜 인간의 목소리를 들은 루시퍼는 감옥의 입구를 바라봤다.

그리고 이 쪽으로 다가오는 마에스트로를 볼 수 있었다.

"당신의 죄를 알고 계십니까. 루시퍼."

마에스트로는 기분이 나빴다. 루시퍼가 패하며 이호연이 더욱 강해졌기 때문이다.

그 증거가 바로 '지옥의 문'이다.

"당신을 믿었기에 개인행동을 허락한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대척자를 죽이긴커녕 그를 성장시켰습니다."

대척자가 강해지는 만큼 마왕의 강림도 더욱 앞당겨진다.

그건 절대 좋은 일이 아니었다.

"마왕님을 억지로 강림시킬 순 없습니다. 예. 그분의 힘이 제한되는 건 절대 볼 수 없으니까요. 맞습니다."

"… 인간."

루시퍼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마에스트로는 자신의 목숨을 노리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봤을 때 보다 더욱 미쳐있었다.

마안에 읽히는 그의 정신상태는 너무나 난잡했다.

"당신에게 세뇌가 먹히지 않는 건 알고 있습니다. … 하지만, 아직 부활하지 못한 분신을 노릴 줄은 모르셨나 보군요."

루시퍼는 당장 마에스트로의 얼굴을 깨부술 생각으로 마력을 일으켰지만, 자신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마에스트로의 말대로 루시퍼의 몸은 그도 모르게 세뇌에 당해있었다.

"하, 하하. 걱정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성배의 제물로 바쳐진다면, 다시 한번 그에게 복수할 기회가 주어지는 거니까요."

마에스트로는 미친 사람처럼 낄낄대며 루시퍼에게 다가왔다.

본래 마에스트로라는 인간을 완벽하게 파악하지 못했었던 루시퍼지만, 마지막에 와서야 깨달았다.

저 놈은 완전히 미쳤다.

루시퍼는 이내, 자신의 최후를 직감했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