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8화 > 밤의 황제 아이작 (6)
"무슨 일이야? 갑자기 찾아오고."
"그냥 놀러 왔죠. 안 돼요?"
이호연은 자연스럽게 1 팀장실 안으로 들어왔고, 아이린은 그제야 그의 손에 들린 와인을 발견했다.
샤토 디켐.
엘리스가 가장 좋아하는 와인이다.
아이린도 자주 마시지만 엘리스가 좋아해서 마시는 것 뿐, 그녀의 취향은 아니었다.
"지금은 근무시간이잖아."
방금까지 이호연에 대한 잡생각을 했지만, 아이린은 괜히 까칠한 척했다.
아버지때문에 화난 상태인데다가 이호연이 이제야 자신을 찾아온 게 괘씸했기 때문이다.
"아까 길드장 실에서 소리 지르던 것도 일이에요? 길드장 님, 굉장히 슬픈 표정으로 어딘가로 나가시던데."
"… 한 마디를 안 지네. 거기 앉아."
"이건 선물이에요.전에 아이린 씨가 마시는 걸 봤거든요."
이호연은 와인을 내려놓으며 소파에 털썩 앉았다.
빈 손으로 오기 뭐해서 와인이라도 하나 가져오려고 숙소로 가는데, 길드장 실에서 불만을 지르고 있는 아이린의 목소리가 들려오더라. 그래서 마음 편하게 왔다.
"와인?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분거야."
"진솔한 대화라도 나눠보려고요."
"…?"
아이린은 뜬금없는 소리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과 이호연이 진솔한 대화를 나눌 게 있나?
'… 이 사람도 참 예쁘긴 하네.'
한편 이호연은 그 모습에 내심 놀랐다.
아이린이 나르시시스트인 이유. 그녀가 말도 안되게 예쁘기 때문이다.
이렇게 예쁜 사람에게 대우를 제대로 못해준 것 같으니 좀 챙겨줘야지.
"아이린 씨는 제가 미워요?"
"… 갑자기 왜 그런 걸 물어보는 거야?"
"그냥요. 아이린 씨한테 미안한 짓을 많이 했으니까."
"이제 와서 그러는 게 더 웃기는 거 같은데. 한창 쓰레기짓을 할 때는 그렇게 뻔뻔해놓고."
"그렇긴 하네요."
이제와서라는 말이 틀린 건 아니지.
사과가 꽤 늦긴 했다.
'예전에도 사과하긴 했는데.'
엘리스와 첫 3p를 하고 나서 미안하다고 했더니 엘리스와 뜨거운 밤을 보내게 해줘서 고맙다는 말을 들었었다.
… 사실 그 말 때문에 아이린을 상대할 때 죄책감이 덜 든단 말이지.
아이린은 이호연을 빤히 바라봤다. 왠지 그가 평소와 좀 다른 것 같았다.
나름 할 말이 있는 것 같아보여서 자리에서 일어나 이호연의 맞은편에 앉았다.
"미안해요. 아이린 씨."
"… 응?"
"맨정신에 제대로 사과한 적이 없는 것 같아서요."
지금 생각하면 조금 더 좋은 방법이 있었을 것 같기도 하다.
지나간 일을 되돌릴 순 없지만, 사과 정돈 할 수 있다.
… 게다가 문제가 있거든.
아이린에게 정말 사과해야 할 일이 있다.
"그리고… 저희 집에 사는 애들이 실례를 했다고 하더라고요."
"응? …아. 그거."
이호연의 동거녀들에게 당했던 서프라이즈 납치쇼.
그 미친 여자들 때문에 얼마나 당황했는지 모른다.
아이린은 고개를 꾸벅 숙이는 이호연을 보며 다리를 꼬았다.
"어색하니까 자꾸 고개 숙이지 마. 그 일은 그 사람들하고 이미 풀었거든. 널 닮아서 이상한 사람들이라 그렇지, 나쁜 사람들은 아니더라."
"그렇긴 해요. 다들 심성은 착하거든요."
"… 그거보다 너. 저번에 루시퍼 얘기를 할 때도 그렇고 갑자기 이상해졌어. 주변에서 정의의 사도라고 띄워주니까 진짜 그렇게 착각하는 건 아니지?"
"그럴리가요."
아이린의 말에 이호연은 헛웃음을 지었다.
정의의 사도.
그 말대로, 이호연의 위상은 세계에서 점점 치솟고 있었다.
원래부터 '천재 마법사', '꿈꾸는 마법사' 같은 이상한 별명으로 불렸는데, 루시퍼를 죽이고 아카데미를 구한 영웅이 되며 한 번 날아올랐다.
그리고 며칠 전 아이리스 길드가 전 세계에 퍼트린 판데믹과 검은 기둥의 연관성을 연구해 달라는 계획서에 내 이름이 있어서, 이번엔 하늘로 승천해 버렸다.
뉴스나 뉴튜브에 내 이름을 검색하기가 두려울 정도였다.
"쩝. 늦은 밤에 술이 들어가니까 솔직해지네요."
"… 아직 와인은 따지도 않았고 지금은 8시야. 혹시 어디 아파?"
이호연은 아이린의 말을 한 귀로 흘려 넘겼다.
그래도 한 번 터놓고 이야기하니까 속마음을 털어놓기도 쉬웠다.
본래 이호연은 나쁜 남자가 되고 싶었다.
히로인들의 마음을 훔친 채 억지로 따라오게 하는 나쁜 남자.
그렇게 해야만 하렘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내다 보니 알았다.
자신에겐 그런 방식이 안 맞는다.
매일같이 꾸던 악몽이 그 증거였다.
마음같아선 '뚜렷한 정신력' 때문이라고 핑계를 대고싶지만… 그래도 사과는 해야한다.
"이렇게 말하면 웃길 수도 있는데, 전 아이린 씨도 엘리스만큼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래서 저한테 있는 나쁜 이미지를 좀 털어내려고요."
아이린을 처음 공략할 때 강압적인 방법을 쓴 게 사실 마음에 걸린다.
어떻게 보면 백아영도 비슷했지만, 그건 그녀도 엄청나게 즐겼으니 좀 다르다.
'아이린도 즐기긴 했지만… 아니야. 이건 좀 다르지.'
강압적인 방법을 쓰기도 했고. 지금은 어찌어찌 회복했지만 엘리스가 아이린의 마음을 이렇게 알게 된 것도 조금 신경이 쓰인다.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는 뜻이다.
"무슨 말을 하나 했네. 지금은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
이호연 과의 관계가 로맨틱하지 않다는 건 아이린도 동의한다.
하지만…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았다.
그가 원망스러울 때도 있었지만, 이호연 덕분에 엘리스와 한층 더 가까워진 것도 사실이니까.
게다가 섹스를 잘한다.
'일단 능력이 워낙 좋아서… 아버지도 거절은 못할 것 같고.'
사위로서 능력도 너무 좋다.
이호연과 임솔의 대련. 그리고 루시퍼와 전투.
거기서 본 이호연의 싸움은 아직도 눈앞에 생생했다.
이 정도면 아버지도 딸 두 명 전부 허락해주지 않을까.
'… 두 명은 안 해줄 거 같긴 하네.'
아무리 그래도 두 명은 심하지.
아버지의 성격이면 이호연을 안 죽이는 게 다행이다.
아이린이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을 때.
이호연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냥 못 넘어가요."
"내가 괜찮다니까? 흐흠. 그렇게 미안하면, 밤에 한 번 찾아…."
"제가 책임지고 엘리스와 3p를 자연스러운 일로 만들겠어요."
"…?"
*
아이린과 잡담을 나누다가 1 팀장 실을 빠져나왔다.
어느새 시간은 늦은 밤.
결국 와인은 따지도 못했지만, 뭐 어때.
아이린도 나름 재밌게 어울려줬으니 기분이 좋았다.
"엘리스가 퇴근하기 전에 스칼렛 방에서 릴리아나랑 놀아야… 응?"
릴리아나가 심심하다고 징징대는 걸 어떻게 받아줄까 고민하고 있는데, 눈앞에 미약한 마력이 나타났다.
갑자기 나타난 마력은 빙빙 돌더니 어딘가로 날아갔다.
푸른 길을 남기는 마력은 이대로 따라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뭐야 이건."
별생각 없이 마력을 따라가자, 길드장실이 보였다.
이호연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방 안을 살짝 들여다봤다.
"왔구나. 이호연 마법사."
"… 어, 길드장 님?"
길드장 실에는 팔짱을 낀 금발의 미남자, 아이작이 앉아있었다.
옅은 미소를 짓고 있는 게, 뭔가 멋있는 등장을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냥 길드장 실로 찾아오라고 스마트 워치에 보내면 안 되는 거였나…?
"이렇게 단 둘이 보는 건 켄타우로스 추적 이후로 처음인가? 손님이 일주일 넘게 머물고 있는데 한 번도 안 부르는 건 실례 같아서. 한 번 불러봤다네."
"아, 그렇군요."
그래도 부른 이유는 납득이 간다.
아이리스 길드에 머무르는 데다가 이호연을 믿고 엄청난 지원을 보내주고 있으니 길드장으로서 한 번쯤 보고 싶을 만 하지.
"오히려 제가 먼저 찾아뵀어야 하는데 죄송하네요."
"괜찮아. 우리가 첫 만남은 그렇게 좋지 않았으니. 자네가 불편하진 않을까 걱정하고 있었거든."
"네? 아, 아하하…."
그래. 밤의 황제와의 첫 만남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테스트를 한다는 명목으로 아카데미의 골목에서 자신을 덮쳤으니까. 미친놈 같으니라고.
"표정이 안 좋군?"
"… 아닙니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으신가요?"
이 밤중에 부른 걸 보면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이는데.
아이작은 이호연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스와 아이린이 널 많이 믿고 있더구나."
"아, 넵."
사실 아이리스 길드의 협력을 받은 건 그 둘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딸 바보 길드장은 사랑하는 두 딸이 해달라고 하면 해줄 수밖에 없거든.
중요한 이야기가 있어서 부른 줄 알았는데, 아이작은 그 뒤로도 잡다한 이야기만 꺼냈다.
"그러고 보니 아이리스 길드에 들어올 생각은 없나? 예전에 물었을 때는 거절당했었지."
"… 지금도 거절입니다. 죄송합니다. 따로 할 일이 있어서요."
이호연은 대답을 하며 살짝 눈을 찌푸렸다.
대화를 이어가는 동안 아이작이 내뿜는 기세가 은근히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기세라기엔 압박감이 꽤 심했다.
혹시 기선제압 같은 건가?
여기서 한 번 당해줘야 앞으로 엘리스와 아이린을 볼 때 편한 걸까.
아버님에게 마력을 내뿜기는 싫은데….
탁-
그때, 아이작이 테이블에 던진 사진 하나가 이호연의 고민을 끊었다.
"이건…?"
"직접 확인해 봐라."
아하.
이호연은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이것도 아이작 나름의 시험인 모양이다.
자신이 엘리스나 아이린과 주기적으로 만난다는 건 어차피 숨길 수 없다.
그의 입장에선 웬 기생오라비 같은 놈이 딸과 친하게 지낸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겠지.
아무리 강하다고 소문이 났어도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해봐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도 있는 법.
그 증거로 사진을 던지고 나서 자신을 압박하는 기세가 더욱 강해졌다.
지금 몸을 움직이는 것 자체가 시험이다.
"이런 건 처음 보네요."
물론 그다지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다.
이호연은 아이작의 마력을 자연스럽게 몸 안으로 받아들였다.
[마력 감응]을 가지고 있는 이호연에게 이 정도는 릴리아나의 깨물기 공격보다 쉬운 일이었다.
"… 역시 루시퍼의 힘은 과소평가되어 있어. 자네 같은 괴물이 아카데미에 없었다면… 우리 딸들의 목숨도 위험했겠구나."
"아닙니다. 루시퍼는 저한테 흥미가 있었거든요. 사실 엘리스와 아이린이 휘말린 것도 저 때문일 거예요."
아이작은 놀란 표정을 드러내며 이호연에게 말을 건넸지만, 이호연은 저런 말에 넘어가지 않았다.
엘리스가 얻었다는 판데믹에 대한 정보들. 그건 당연히 아이작도 알고 있겠지.
원하는 대답을 맞춰주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나저나 이 문은 뭐죠? 예술품 같은 건가요?"
이호연은 사진을 보며 눈을 찌푸렸다.
기괴한 괴물들이 인간을 잡아먹고, 인간이 인간을 죽이며, 벌이라도 받는 듯 고통스러워하는 인간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 기괴한 문이었다.
"태평양 한가운데의 무인도에서 나타난 문이다. 우리 쪽 정보원이 발견한 뒤에 통제하고 있지."
"… 언제 나타났습니까?"
"약 두 시간 전이다. 내가 직접 확인했으니 틀림없어."
두 시간 전이면 아이린에게 욕을 먹고 슬픈 표정으로 나가던 때잖아.
그 상태로 이런 걸 조사하러 가다니, 직업정신이 투철한 사람이다.
"자네에게 보여주는 이유는 네 연구와 관련이 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루시퍼의 시체에 있던 지옥의 마력. 그것이 이 문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하…."
"이호연 마법사는 판데믹에 대한 개인적인 조사를 해온 것으로 알고 있네. 혹시 아는 정보가 있나?"
지옥의 마력이 흘러나오는 거대한 문.
당연히 알고 있다.
원작 스토리의 후반부.
던전에서 시작한 폭주 현상이 점점 심해지며 결국 지옥과 이어지는 문이 열린다.
통칭 '지옥의 문.'
저 문이 열리는 순간, 지옥의 마수들이 뛰쳐나오며 지구는 아수라장이 된다.
"아직 확실하진 않아요. 하지만… 아직은 괜찮을 거예요."
저 문이 열리려면 그만큼 거대한 제물이 필요하다.
원작에서는 나라 몇 개가 괴멸된 후에야 지옥의 문이 개방된다.
'지금의 판데믹은 그 만큼의 제물을 모을 시간이 부족했을거야.'
이건 나비효과가 일어났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물리적인 '제물'이 부족하니까.
… 하지만 왠지 모를 불안감이, 이호연의 가슴을 쿡쿡 찔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