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7화 > 밤의 황제 아이작 (5)
도시 곳곳에 불길이 솟아오른다. 새카맣게 물든 하늘 때문인지 분위기도 우중충했다.
평범한 지옥 도시의 풍경이다.
흉측하게 생긴 지옥의 마수들이 자연스럽게 걸어 다니고, 인간형 마수들과 악마들도 보였다.
지옥에서는 저게 인간이나 마찬가지겠지.
"마왕성은 여전하겠지?"
"… 예. 마왕성의 문을 걸어 잠근 채 그 누구의 출입도 허용하고 있지 않습니다."
"대단하군. 역시 마왕을 믿는 게 아니었나.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루시퍼는 원수라도 진 듯 마왕성을 노려보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휴식기라는 이름으로 마왕성을 닫아버린 마왕에 대한 분노가 생생하게 느껴졌다.
'루시퍼 입장에선 어이가 없긴 하겠네.'
루시퍼의 시점으로 기억을 보고 있던 이호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원작을 플레이 한 이호연이라고 해서 지옥의 사정을 알 수 있는 건 아니다.
원작에는 지옥의 존재도 나오지 않으니까.
하지만 이호연은 저 마왕성 안에 누가 있는지 알고 있었다.
'이 세계의 신이 있겠지.'
마왕의 자리를 물려주기로 해놓고 마왕성이 닫힌 이유도.
갑자기 루시퍼가 지구에 온 이유도.
그 새끼가 마왕의 몸을 차지했기 때문일 거다.
비정상적으로 강해진 이호연이 내기에서 승리하는 걸 보고만 있을 순 없었을 테니까.
다급하게 마왕의 몸으로 강림하다 보니 지옥에 사는 놈들 입장에선 어이가 없는 일이 발생하는 거겠지.
질 거 같으니까 직접 보스에게 강림할 수도 있고. 더럽게도 불공정한 세상이다.
'… 그래봤자 저 새끼만 죽이면 그만이야.'
스토리는 점점 결말로 치닫고 있다.
마지막 시나리오인 마왕의 습격.
이 세계의 신이 직접 습격하는 만큼 더욱 힘들겠지만, 한 번의 전투만 이겨내면 원작의 엔딩이다.
『메인 퀘스트 : 모든 히로인들을 공략하고 게임의 엔딩까지 살아남으시오. 할 수 있으면. 실패 패널티 : 죽음』
빌어먹을 메인퀘스트가 끝난다.
'그럼 모든 걸 지킬 수 있어.'
이 세계. 히로인들. 그리고 이호연 자신까지.
깜박-
잠깐 눈을 감았다 뜨자 세상이 뒤바뀌었다.
이곳은 판데믹의 은신처 중 한 곳.
당연히 이호연은 처음 보는 곳이다.
하지만 루시퍼의 기억을 보고 있는 지금,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이 장소가 익숙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계시라는 게 이호연이라는 인간을 노리는 이유가 뭐지?"
"그가 제 운명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인간이니까요."
"인간. 너의 말은 이해가 안 되는 군."
"마왕님이 강림하시면 이해하지 않아도 알게 되실 겁니다."
루시퍼가 지구에 강림한 지 얼마 안 됐을 때의 기억 같았다.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대화지만, 이호연은 루시퍼의 감정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 서로 뒤통수 칠 각 보고 있네.'
마에스트로와 루시퍼.
둘은 서로를 노리고 있었다.
루시퍼는 속내를 알 수 없는 마에스트로가 의심스러운 것 같았다.
근데 마에스트로 쟤는 자기가 소환해 놓고 왜 뒤통수를 치려는 거야?
진짜 무서운 놈들이네 이거.
이호연은 최대한 많은 정보를 얻기 위해 주변을 살폈다.
'저게 엘리스가 말했던 검은 성배구나.'
마에스트로의 앞에 있는 조각상이 들고 있는 검은 성배.
그 안에 차있는 음침한 마력은 이호연이 보기에도 불안하게 느껴졌다.
저게 가득 차면 마왕이 강림하는 건가?
다행히 겉으로 보기에 성배는 아직 여유가 있어 보였다.
마왕은 1년의 휴식기가 있다고 했으니, 그것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좋아. 당장 출발하지. 한국에는 흥미로운 게 있으니까."
마에스트로를 뻔히 바라보던 루시퍼가 몸을 돌리고.
스르륵-
그와 동시에 눈앞의 장면이 모래성처럼 무너졌다.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뜨자, 밝은 빛이 이호연을 맞이했다.
하지만 이내 거대한 무언가가 밝은 빛을 가렸다.
"오오, 일어났군! 어떤가!"
"… 얼굴 치워라."
이호연은 눈앞까지 다가와있는 케이론의 얼굴을 밀어내며 바닥에서 일어났다.
기억의 구슬을 본 게 처음은 아니었지만, 릴리아나의 기억을 봤을 때에 비해 두통이 더 심한 것 같았다.
"시체에 마법을 사용하는 건 처음이었다. 아직 나도 제대로 본 적이 없어서 결과가 궁금하군. "
"별 거 없었어. 그냥 적이 존나 센 걸 알았을 뿐이지. 그래도 고맙다. 케이론."
애초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가 대충 들어맞다는 걸 알았다는 것만으로도 큰 소득이다.
"이호연. 나 Wild Gladiator가 너에게 할 말이 있다."
"뭔데?"
"Lucifer가 살아있을 가능성이 있다."
"… 그건 뭔 개소리야? 너도 시체 봤잖아."
루시퍼의 목숨이 끊어진 건 확실히 확인했다.
시체를 가지고 다니기도 했고, 심지어 그 시체에 지옥의 마력을 불어넣어 증거로 사용하기도 했다.
"어디까지나 가능성이다. 정확히 말하면 생명의 끈이 이어지고 있다고 해야겠지. 내가 기억의 구슬을 만들 수 있던 것도 그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중요한 정보면 기억의 구슬을 보기 전에 말했어야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네가 기억의 구슬을 확인하는 동안 내 감각이 더욱 날카로워졌다."
"… ."
케이론하고 하는 대화는 항상 핀트가 어긋난다.
얘는 릴리아나보다 조금 더 심한 것 같다. 오랜 용병 생활에 정신이 나간 걸까.
이호연은 옆에서 구경하고 있는 인큐버스를 바라봤다.
"알베도. 넌 뭐 아는 거 없어?"
"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케이론의 날카로운 감각은 지옥에서부터 유명했습니다."
"흐음."
그렇게 들으니 괜히 신경 쓰이네.
생각해 보면 루시퍼가 나타났을 때 가장 먼저 경고해 준 게 케이론이었지.
"일단 인지해놓을게. 네 감각이 반응하면 언제든지 말해줘."
"알겠다. 최근 Killer Queen의 기운도 강해졌는데, 그 이유를 알고 있나?"
"아, 릴리아나? 음, 그냥 최근 수련을 열심히 해서 그럴 거야. 일단 가볼게. 나중에 얘기하자."
사실 금제가 조금 풀렸기 때문이지만… 케이론과 알베도에게 릴리아나의 얘기를 하는 건 별로 좋지 않다. 그들은 과거의 릴리아나에게 호되게 당한 기억이 있으니까. 혹시나 도망치기라도 하면 굉장히 귀찮아진다.
주변에 있는 길드원에게 대충 인사를 하고 훈련실을 빠져나온 이호연은 기지개를 켜며 걸음을 옮겼다.
지옥의 모습을 봐서 그런가 목이 탄다.
"지옥 놈들은 진짜 도움이 안 되네. 불길한 소리만 계속 해댄다니까. 스칼렛. 물 좀 줘."
"여기 있습니다. 호연 님."
"고마워.
아이리스 길드에 몸을 맡긴 지 벌써 나흘 째다.
일주일을 숙박하는 거지만 불편한 점은 없었다.
엘리스는 내가 부탁한 일을 확실히 처리해 줬고, 밤에만 찾아왔으니까.
"스칼렛. 특이한 소식은 없지?"
"없습니다. 다들 몸을 사리고 있는 건 확실하지만요."
이호연은 스마트 워치를 보며 넓은 복도를 걸어갔다.
- 아이리스 길드. 전 세계적으로 검은 기둥에 대한 조사요청.
- 빅토리아 아카데미를 필두로 한국의 파격적인 지원?!
- 미국의 헌터 협회는 아직도 묵묵부답….
- 약자를 보호한다는 아이리스 길드의 진실에 대하여.
"4일 차인데도 딱히 나오는 게 없네."
쓸데없는 기사와 헛소문들을 빼더라도 검은 기둥에 대한 조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호연도 개인적으로 조사를 이어가고 있지만, 뭔가 답답한 부분이 있었다.
굉장히 쉬운 걸 생각해내지 못하고 있는 느낌.
이 답답한 느낌 때문에 며칠 째 고생 중이었다.
"스칼렛. 일단 아이리스 길드에서 계속 정보 수집을 도와줘."
"알겠습니다. 중요한 정보가 있으면 찾아오겠습니다."
사사삭-
스칼렛이 천장에 붙어서 사라졌다.
엘리스가 찾아오지 않는 시간.
이호연은 혼자 검은 기둥에 대한 연구를 하곤 했다.
하지만 오늘은 기억의 구슬을 봐서 그런지 연구를 할만한 집중력이 부족했다.
"아이린 씨라도 만나러 갈까. 지금 쯤 1 팀장 실에 있을 텐데."
*
아이리스 길드의 길드장 실.
결계로 덮여있는 곳 안에서는 금발의 미녀가 책상을 쾅쾅 두드리고 있었다.
"나흘이나 길드장 업무 복귀를 못하시다니. 굉장히 피곤하셨나 봐요. 아버지."
"아이린, 우리 큰 딸. 아빠가 원래 업무 중에 연락 잘 안 받는 거 알잖니. 그러니 그 일은 이제…."
"그래도 그렇죠! 엘리스랑 있는데!"
아이린은 책상을 쾅쾅 두드리며 아버지를 째려봤다.
루시퍼에 대한 정보를 수집한다고 했으면서 갑자기 판데믹의 은신처에 숨어들다니.
엘리스가 다치기라도 했으면 어쩌려고!
"나, 나도 엘리스를 그런 곳에 데려가기 싫단다. 하지만 후계자로서 엘리스도 이제는…."
"위험한 일은 내가 하면 되잖아요! 아빠도 분명 그렇게 동의했으면서! 이제 와서 말을 바꾸면! 어떡해요!"
"커흡. 아이린. 미안, 미안하다."
"하아, 후우…."
아이작의 어깨를 흔들던 아이린은 천천히 화를 가라앉혔다.
이렇게 화난대고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그녀도 엘리스가 이런 경험을 해야 하는 건 알고 있다.
지금 하는 건 하필 이럴 때 연락이 없었던 아버지를 향한 화풀이였다.
"다음엔 이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네요. 길드장 님 혼자라면 1년 내내 연락 안해도 괜찮지만, 엘리스가 있으면 꼭 주기적으로 연락을 하셔야해요. 아시겠죠?"
"알겠다. 1 팀장…."
아이린은 어깨를 축 느러트린 밤의 황제를 뒤로한 채 길드장실 밖으로 나왔다.
[달링… 괜찮아요? 제가 아이린한테 개인적으로 말할게요.]
[허니, 내 딸이 걱정이 많아서 그래. 걱정하지 마]
뒤로 들려오는 주책 부부의 목소리는 억지로 머리에서 지워냈다.
텅 빈 1 팀장 실로 돌아온 아이린은 자신의 자리에 털썩 앉았다.
"… 왜 이렇게 조용하지?"
사실 1팀장 실은 대부분 조용했다.
실무진들이 항상 바깥에서 정보를 수집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들어 이 조용함이 어색했다.
원인은 이호연의 집에서 지내는 미친 여자들.
루시퍼의 습격이 있기 전 매일같이 집에 찾아와 조잘대던 그녀들이 없으니 이 적막함이 더욱 크게 다가왔다.
있을 때는 짜증났는데 막상 없으니 이렇게 조용한 게 느껴지는 걸 보니 인간은 이기적인 동물인 모양이다.
"아니야. 그래도 없는 게 낫지."
사실 그 사람들이 싫은 건 아니었다.
물론 일전의 납치가 워낙 충격적이라 그렇지, 루시퍼의 습격 사건에서 같이 싸우다 보니 어느새 마음에 유대감 같은 게 생겼다.
문제는 이호연이다.
그 남자.
아이리스 길드에 일주일이나 묵으면서 매일 밤 엘리스를 독차지하는 나쁜 놈.
"숙박권은 엘리스가 얻었으니 일주일 다 엘리스에게 가는 거. 이해할 수 있어. 하지만… 양심이 있으면 한 번은 찾아와야 하는 거 아닌가?"
아이린은 아직도 이호연과 보낸 밤들을 기억하고 있다.
그가 자신의 아랫배에 새겨놓은 뜨거운 기억은 잊으려고 해도 잊히지가 않았다.
그래놓고 엘리스에게만….
"하아. 이호연 때문에 다 이상해졌어."
왜 자신이 남자 생각으로 시간을 보내야 하나.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자신과 동생에 대한 생각할 시간도 부족한데.
"아주 나쁜 놈이야…. 검은 기둥 연구를 하는 건 알지만. 그래도 내가 얼마나 많이 도와줬는데."
이호연이 아이리스 길드의 지지를 받는 건 엘리스와 아이린 덕분이다.
엘리스와 같이 밤을 보내는 건 바라지도 않는다.
틈을 내서 한 번만 찾아왔어도 좋았을 텐데.
그 은혜도 모르고…!
[아이린 씨. 안에 있어요? 잠깐 놀러 왔는데.]
"힉."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는데.
진짜 왔다.
아이린은 자연스럽게 옆에 있던 서류 더미를 집었다.
"있어. 들어와."
잠깐 들린 이호연의 목소리에 입꼬리가 올라간 것도 모른 채.
아이린은 업무에 집중하는 척 다리를 꼬고 이호연을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