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 야겜에 빙의했다-574화 (574/648)

< 574화 > 밤의 황제 아이작 (2)

중국의 베이징.

갑작스럽게 나타난 직경 100KM의 싱크홀은 천만 명이 넘는 사상자를 낳았고, 베이징은 자연스럽게 사람의 발걸음이 끊긴 저주받은 도시로 변했다.

사람들이 부르기를 '지옥의 도시.'

중국의 불행한 기억과 슬픔을 모두 담고 있는 도시가 바로 이곳이다.

인기척 없는 도시의 어두운 곳에서 두 남녀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참사가 일어난 지 시간상으로 반년도 지나지 않았지만, 도시는 핵이라도 맞은 듯 폐혀가 되어 있었다.

앞장서는 건 조각같은 외모의 훤칠한 금발의 남자.

그는 뒤에 따라오는 여자를 향해 말을 걸었다.

"엘리스. 베이징을 덮친 참사가 일어난 날을 기억하고 있니?"

"8월이었죠? 정확한 날짜는 모르겠어요. 아빠."

"정확한 날짜는 몰라도 된단다. 내가 묻고 싶은 건 그날에 일어난 일이야."

"그 날 전 세계에 검은 기둥이 나타났었죠."

"맞아. 아빠는 거기부터 조사를 시작했어. 두 가지 사건에 분명히 인과관계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흐음."

그게 베이징까지 들어온 이유인가? 하지만 두 가지 사건은 관련성이 없다는 결론이 난 줄 알았는데.

궁금한 게 몇 가지 있었지만, 엘리스는 조용히 아이작의 뒤를 따랐다.

어차피 물어봐도 안 알려준다.

거대한 아파트와 쓰러져갈 것 같은 건물을 지나간다.

중국 공안의 눈을 피해 베이징에 들어온 지 꽤 시간이 지났다.

알게 된 정보는 딱 하나.

베이징에 민간인이 없다는 정보는 틀렸다.

곳곳에 사람들이 보였다.

한적한, 아니 죽어있는 이 거리에서 사람들은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악에 받친 듯한 눈동자와 교활한 눈빛은 엘리스가 보기에도 오싹할 정도였다.

"범죄자들인가요?"

"그래. 일단 여기 들어오기만 하면 공안도 포기하는 눈치니까. 중국의 범죄자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흉악범들이 다수 숨어있을 거야."

"…."

아이작은 긴장한 엘리스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자신의 딸 엘리스.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은 게 아버지의 마음이지만, 길드장으로서 후계자에게 보여줘야 할 것이 많았다.

"조금만 더 가면 된단다."

아이작은 속삭이듯 말하며 걸음 속도를 높였고, 엘리스도 그 뒤에 바짝 달라붙었다.

후계자 수업이라는 이름의 출장은 벌써 일주일이 넘었다.

처음엔 루시퍼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게 목적이었지만, 윤곽이 잡힌 뒤에도 아이작은 돌아가지 않았다.

[널 데려갈 곳이 있다.]

라는 말 하나로 엘리스를 베이징까지 데려온 것이다.

물어보고 싶어도 보면 안다는 말만 반복했으니 이제 물어보는 것도 포기했다.

'… 기분 나빠.'

아이작과 엘리스가 다니는 길은 골목이었다.

골목 곳곳에는 기분 나쁜 낙서와 오물이 있었다.

음담패설이나 욕설은 양반이다.

말라붙은 피와 죽어있는 시체들은 엘리스의 기분을 더럽게 만들었다.

"아빠. 저건…."

"다 왔단다. 저기가 우리가 갈 곳이야."

엘리스의 몸이 움찔거렸다.

인간의 두개골이 장식되어 있는 음산한 입구.

마치 과거 인디언들이 만든 추장의 장신구 같은 모양이었다.

입구로 가까이 다가가자 굳게 닫혀있는 철문이 보였다. 철문에 피범벅이 되어있는 게 더욱 위험한 분위기를 내뿜었다.

입구에 다가간 아이작은 가장 커다란 두개골에 손을 얹은 채 조용히 읊조렸다.

"아르마 디 마에스트로."

끼, 끼긱….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철문이 열리고, 아이작이 안으로 들어갔다.

엘리스는 꽤나 당황스러웠지만, 그녀는 멍청하지 않았다.

여기서 주변을 둘러보거나 당황한 티를 내면 안된다. 엘리스는 자연스럽게 아이작의 뒤를 따라갔다.

안 쪽은 미로처럼 복잡했는데, 아이작은 몇 번이나 와본 것처럼 걸음을 옮겼다.

이 상황에 대해 묻고 싶은 게 너무나 많았지만 이런 곳에서 먼저 입을 열 수는 없었다.

엘리스가 할 수 있는 건 조용히 아이작의 뒤를 따르는 것이었다.

어느새부터 조금씩 지하로 내려갔다.

기분 나쁜 흙냄새와 녹슨 철의 냄새가 코를 찌른다.

슬슬 말을 해봐도 되지 않을까 고민이 되던 찰나에 아이작이 먼저 입을 열었다.

"판데믹이라는 조직은 알고 있지?"

"당연하죠. 아빠."

"판데믹은 세계에 있는 테러 조직 중 가장 강한 힘을 가진 마인들의 테러조직이야. 정치적 대립이 있는 것도 아니고, 종교적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지. 그렇다고 무정부주의자들도 아니야. 단지 쾌락만을 위해 민간인들을 학살하는 조직이야."

"저도 알고 있어요. 최근 조직이 와해되면서 요즘 들어 기세가 꺾였잖아요."

"그래. 다들 그렇게 알고 있을 거야."

아이작은 어느 지하실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끼이이이이익-

녹이 슬어있는 철문을 열자 비위가 상할 정도로 구리고 퀴퀴한 냄새가 풍겼다.

엘리스가 방 안으로 따라들어온 이후, 아이작이 손가락을 튕기자 방 안에 약한 빛이 들어왔다.

"엘리스. 판데믹은 단순한 테러 집단이 아니란다."

"네?"

"그들의 목적은 확연히 존재하고 이미 세계 곳곳에 그 뿌리를 넓히고 있지."

세계 최고의 정보 길드인 아이리스 길드.

그중에서도 밤의 황제라 불리는 사나이, 아이작.

그는 한 번 정한 사냥감은 놓치지 않는다. 정보라는 건 아무리 숨기려 해도 틈이 있는 법.

특히 개인이 아닌 집단은, 더더욱 아이작의 품을 벗어날 수 없다.

예를 들어… 단순한 테러 집단으로 위장한 판데믹의 진실까지도.

전부 그의 손아귀 안에 있었다.

아이작은 녹슨 책장 속에서 책 한 권을 꺼냈다.

일기장처럼 생긴 책은 최근까지 사용한 것 같은 흔적이 보였다.

"아빠. 이제 슬슬 뭐 때문에 여기 왔는지 알려주셨으면 좋겠는데요."

"이걸 읽어보면 그 답을 알 수 있을 거란다. 엘리스."

엘리스는 너덜너덜한 책장을 쓸어넘겼다.

[기억이 흐릿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 주가 지나있었고, 나는 어느새 판데믹에 소속되어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이번엔 한 달이 지났다. 이번엔 얼마나 될까. 처음엔 한 시간이었고, 저번엔 두 시간이었지. 이번엔 세 시간인가? 그럼 다음엔? 아니, 난 왜 판데믹에 있는 거야?]

누군가의 일기 같았다.

하지만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건 지 이해가 잘 안 된다.

"… 이 책은 뭐예요?"

"판데믹에 속해있던 마인의 일기다. 유능한 머리로 마에스트로의 비서자리를 꽤 오래 유지한 마인이었던 모양이지만, 어느 날 실종되었다고 하더군. 이건 그의 일기장이야."

엘리스는 조용히 일기의 다음 장을 넘겼다.

[오늘은 시간이 적다. 보스, 마에스트로가 눈앞에 있을 때 정신이 돌아왔기 때문이다. 일주일 만이었지만 다행히 빠르게 표정을 관리할 수 있었다.]

[엄청난 걸 두 눈으로 보았다. 눈앞에 있는 수 백명의 마인이 마에스트로를 보자마자 무릎을 꿇었다. 단지 눈을 마주치는 것 만으로.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일종의 정신세뇌라고 생각한다. 보스 마에스트로. 그가 내 정신을 지배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정신을 차릴 수 있는 주기는 무작위. 그것도 겨우 한 시간뿐이다. 다행인 점은 정신을 되찾는 주기가 평균적으로 빨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어떻게든 탈출할 방법을 찾아야 할 텐데.]

"… 이게 뭐예요? 정신 세뇌?"

"세계에는 네가 모르는 어둠이 암약해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어두운 부분이 바로 판데믹이지."

[세계 멸망. 지옥의 강림. 판데믹은 말도 안 되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나도 처음엔 마에스트로의 정신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그 칠흑의 성배를 본 순간 직감했다. 어떻게든 이곳을 탈출해야 한다고. 그리고 세상에 알려야 한다고. … 탈출하기 전에 이 일기가 끝난다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과연 난 이 괴물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일기는 거기서 끝나있었다.

엘리스가 일기를 전부 읽자마자 아이작이 입을 열었다.

"나는 몇 달 전부터 판데믹의 뒤를 쫓았고, 드디어 목적을 알 수 있었단다. 그들의 목적은 세계의 멸망. 그리고 지구에 '지옥'이라는 곳을 강림시키는 거야. 이 일기 외에도 여러 증거들을 교차검증해 본 결과. 가능성이 굉장히 높다고 판단했다."

지구의 멸망을 바라는 조직이 있는 건 상관없다.

정신병자는 세상에 많으니까.

하지만 판데믹처럼 힘과 능력이 있는 곳이 그런 목표를 가진다면 세상은 분명 혼란에 빠질 거다.

"이 정보를 알고 있는 건 누가 있죠?"

"아무에게도 공개한 적이 없으니 지금은 너와 나 밖에 없단다."

"이런 정보를 왜 숨기고 계신 거예요. 어서 세상에 알려야 하잖아요."

"엘리스. 인간은 그렇게 이타적인 존재가 아니야. 당장 내일 세상이 멸망한다고 해도, 세상은 누군가 구할 거라면서 자신의 이권을 챙기는 게 인간이라는 존재란다."

"그렇지만, 분명 뜻을 함께 해줄 사람이…."

엘리스는 입술을 깨물며 말을 멈췄다.

아빠의 말이 맞는 건 자신도 알고 있다.

자신도 이타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아이리스 길드가 전력을 다해 판데믹을 틀어막는 동안 다른 사람들이 아이리스 길드의 이권을 갉아먹는 꼴을 상상하니, 차라리 같이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결국 누군가는 앞장서야 하지만, 그게 아이리스 길드가 되긴 싫었다.

"걱정 말거라 엘리스. 너와 아이린은 내가 무슨 짓을 해서라도 지킬 테니."

아이작은 복잡한 감정을 품고 있는 엘리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자신이 나서지 않던 이유는 이권때문이 아니다. 이권 같은 건 엘리스와 아이린에 비교하면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아직 결정적인 증거가 부족했을 뿐이다.

"네 말대로 앞장서줄 사람은 많을 거다. 그러니 더욱 신중했어야 했어. 확실하게 판데믹을 없애버려야 했으니까. 엘리스, 마지막 장으로 넘겨보렴."

판데믹은 세계 곳곳에 뿌리를 뿌리고 있다.

사람들은 판데믹이 와해되었다고 생각하지만, 판데믹은 보스인 마에스트로만 살아있다면 언제든 부활할 수 있다.

그렇기에 확실하게 숨통을 끊어야 한다.

스륵-

엘리스는 책을 넘겼다.

마지막 장에는 틈틈이 메모한 것 같이 보이는 구절들이 쓰여있었다.

그리고 중간중간 눈에 띄는 이름이 보였다.

[이호연. 이호연이 대체 누구길래 마에스트로가 눈에 불을 켜고 찾는 거지? 그가 하는 일을 막아야 한다는 마에스트로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다. 지옥의 강림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인간이라니. 그런 게 존재하긴 하는 건가?]

[오늘 이호연이 케이론을 제압했다. 사도를 제압할 정도의 실력을 숨기고 있다니, 역시 평범한 생도는 아니었다. 혹시 그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다면….]

[마에스트로의 말대로였다. 그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이호연. 그의 존재만이….]

"…… 이호연?"

엘리스는 눈을 크게 떴다.

몇 번이나 다시 확인해 봤지만, 메모 곳곳에는 이호연의 행적에 대한 걸 정리한 메모가 쓰여있었다.

판데믹의 테러를 막아내고, 간부를 생포하고, 사도라고 불리는 괴물들을 제압한다.

자신이 아는 이호연의 행적과 똑같았다.

이호연이 판데믹의 눈에 띄었다?

그 정도 일은 일어날 수 있다. 판데믹은 민간인뿐만 아니라 실력자들에게도 테러를 자행하는 곳이니까.

하지만 여기 쓰여있는 구절들은 이호연을 마치 구세주처럼 묘사하고 있었다.

"그래. 이호연. 동명이인일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지만… 한국 어딘가에 있는 청년 이호연보단 만 년에 한 번 태어난다는 천재마법사 이호연일 가능성이 높겠지."

"…네. 그렇겠죠."

"그에게 무슨 사정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판데믹에서 그를 주목하고 있어. 우리는 그를 도와야 한다. 엘리스."

이호연….

항상 판데믹과 지옥에 대한 정보를 찾아다니던 그의 모습이 떠오른다.

너 대체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거야.

*

다시 돌아와서.

아이리스 길드에 복귀하자마자, 엘리스는 겉옷을 벗지도 못하고 아이린에게 안겨있었다.

엘리스의 진지한 다짐은 아이린의 눈물 앞에서 잠시 기다려야했다.

"에, 엘리스… 다행이야. 다행이야…."

"응. 언니. 오랜만… 인가?"

"당연하지! 일주일이 넘었잖아! 우리 엘리스, 어디 다친 곳은 없지? 길드장 님! 아니, 아버지! 미쳤어요? 우리 엘리스를 데리고 대체 어디 틀어박혀있다 온 거예요?!"

"미, 미안하다. 아이린. 네가 아빠를 그렇게 걱정할 줄이야… 흐, 흑. 아이린."

"엘리스, 엘리 스으…."

방금까지 보여주던 길드장으로서 품위 넘치는 모습은 어디로 팔아먹었는지.

자신을 붙잡은 채 훌쩍이는 아이린을 끌어안은 아이작을 보며 엘리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모녀가 참 비슷하구나.

"미안해. 언니. 연락했어야 했는데, 그럴 환경이 아니었어."

"괜찮아. 난 엘리스가 살아있다는 것 만으로 너무 다행이야…."

아이린은 흘러나오는 눈물을 꾹 참으며 엘리스의 온기를 느꼈다.

동생이 사라졌는데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 내심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른다.

"아무 일도 없었어. 그냥 단순한 출장이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언니. 나 제대로 씻지도 못했으니까 일단 놔줘."

"으, 응…. 미안. 엘리스."

씻지 못했다니.

깔끔한 엘리스는 청결을 중요시 한다.

그 만큼 소중한 경험이라는 뜻이지만, 일단은 놔주자.

"나도 미안하다. 아이린. 네가 이렇게 걱정할 줄은…."

"길드장 님. 보고드릴 게 많습니다. 길드장 실에서 기다리시죠."

"어? 아, 응. 그래. 1 팀장."

아이작은 머쓱한 표정으로 아이린과 떨어졌다.

오늘따라 자신의 딸이 어색했다.

"언니. 이호연 지금 길드에 있다고 했지?"

"엘리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았어?"

"오자마자 밀린 보고를 들었으니까. 중요한 일 때문에 방문했다는 거 1팀장인 언니가 쓴 거잖아. 길드장 님을 기다리고 있다면서."

"으응. 맞지. … 근데 오늘은 좀 쉬는 게 어떨까? 엘리스, 너 너무 피곤해보여."

"괜찮아. 나는 이제 애가 아닌 걸. 그리고 중요한 일이잖아. 마침 할 말도 있었으니까 지금 불러줘. 일단 씻고 올게."

아이린은 훈련실의 샤워실로 향하는 엘리스를 보며 눈을 깜박거렸다.

눈에 다크서클이 선명한데 피곤하지 않다니. 언니로서 너무나 슬펐다.

… 그리고 오자마자 이호연부터 찾는 거야? 언니가 얼마나 슬퍼했는데.

지금은 오랜만에 만난 언니와 눈물의 재회를 하는 시간이잖아. 엘리스.

'이호연한테 정장 같은 거 챙겨주지 말 걸.'

아이린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응접실을 비우라고 메시지를 남겼다.

그래도 엘리스가 시킨 일을 무시할 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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