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3화 > 밤의 황제 아이작 (1)
띡. 띡. 띡. 띡.
벽에 달려있는 시계만이 똑딱거리는 조용한 방 안.
끼이익-
침묵을 깨트리며 천천히 문이 열리고, 복도의 불빛이 방 안으로 파고들어온다.
이윽고 방에 들어온 금발의 미녀는 문을 닫은 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곧바로 겉옷을 벗어던진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앉았다.
"휴우…."
스르륵-
책상에 앉자마자 쌓여있는 서류들을 대충 넘기고 중요한 것들만 확인한다.
방금까지 회의를 하다 왔는데도 쌓여있는 일들을 보면 절로 눈이 찌푸려진다.
아이리스 길드의 1 팀장으로서 생활 패턴이 망가진 건 어쩔 수 없지만, 한밤중에도 계속 쌓이는 업무를 보면 한숨밖에 나오질 않는다.
1%들의 엘리트가 세상을 이끌고 간다는 말이 있다.
엘리트로서 책임을 져야하는 건 알지만, 너무 쉬어서 그런 건지 일에 복귀하는 게 쉽지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더 빨리 복귀하는 건데."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이호연이 아이리스 길드로 찾아와 숙소를 얻어가고, 폭탄 발언을 터트려 아이린의 휴가를 빠르게 끝낸 게 벌써 일주일이다.
그 남자 때문에 꿀같은 휴가가 끝난만큼 빠르게 일을 처리하고 싶었지만, 그녀의 생각대로 흘러가지가 않았다.
가장 문제인 건 아직도 길드장과 엘리스는 행방불명 상태라는 것.
정확히 말하면 행방불명이 아니라 출장 중이지만… 이 정도로 연락이 없으면 행방불명이라고 보는 편이 맞겠지.
이미 아이리스 길드원들을 시켜 길드장의 뒤를 쫓게 만들었다.
그런데….
"길드원들이 아빠를 어떻게 찾겠어. 차라리 파리에서 나보다 예쁜 사람을 찾는 게 더 빠르겠지."
밤의 황제라는 이름은 딱지치기로 얻은 게 아니다.
길드원들에게 뒤를 잡힌다면 아이리스 길드장의 자리를 진작 엘리스에게 넘겼을 거다.
참고로 파리에서 아이린보다 예쁜 사람을 찾을 확률은 0%다.(아이린의 생각)
길드장이 없으니 이호연이 가져온 안건은 시작도 못했고, 결국 아이린은 이호연의 일 대신 아이리스 길드의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이럴 거였으면 휴가 반납 따위 안 했을 텐데.
'이호연도 문제야. 엄청 다급한 일이라고 내 휴가도 반납하게 해 놓고 왜 숙소에만 박혀있는 거야?'
처음 며칠은 마법 연구를 한다고 방에 틀어박히더니, 이내 훈련실도 돌아다니고 자신과도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신을 차려보니 다시 숙소에 틀어박혔다.
이왕 아이리스 길드에서 머물거면 길드원들한테 마법이라도 좀 알려주면 덧나나?
스칼렛의 말로는 마법 연구라는데, 무슨 마법 연구를 하길래 얼굴도 안 보이는 거야.
이호연의 이야기만 아니었다면 이렇게 길드장을 찾을 이유도 없었을 거다.
도움을 받고 싶고, 그렇게 급한 일이면 그쪽에서도 행동을 해줘야지.
왜 다시 방에 틀어박혀있는 거야.
"… 길드장의 소재도 제대로 못 파악하는 길드에서 할 말은 아니지."
에휴.
아이린은 한숨을 내쉬며 입맛을 다셨다.
누구 탓을 하겠어.
이호연을 도와주기로 한 것도 자신이고, 그게 아이리스 길드에 이득이 될 것도 알았다.
이호연도 일주일이나 이러고 있을 줄은 몰랐겠지. 듣기로는 금방 처리하고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고 하니까.
아이린은 답답함에 서류를 살폈지만, 길드장에 대한 보고는 영양가 있는 게 없었다.
이제 다른 여자를 만나고 있는지 아닌지의 문제가 아니다.
상상하기 싫은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물론 아버지는 지옥에 내던져도 살 사람이니, 엘리스에게 아무 일도 없어야 한다.
그 귀한 아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아이린도 충격에 그 뒤를 따라갈지도 모른다.
평생 거울만 보면서 살 수는 없다.
"… 그러고 보니 아버지가 돌아오면 이호연이랑 첫 소개 아니야?"
문득 생각났다.
이호연은 천애고아였으니, 양가의 가족이 처음 만나는 자리나 마찬가지다.
소위 말하는 상견례.
다행히 아버지와 어머니는 차별을 하는 인간이 아니었으니 그가 고아인 건 전혀 문제가 아니다.
"그래도 아버지한테 첫 소개인데 양복이라도 입혀야 하나? 하지만 너무 신경 쓰는 것 같긴 한데. 으음, 왠지 거지꼴로 나오는 건 걱정되기도 하고."
이호연이 옷을 잘 입는 편은 아니다.
워낙 옷걸이가 좋고 대충 굴러다니는 옷을 걸쳐도 모델 같은 핏이 나오니까 티가 안날 뿐이다.
'그래. 첫인상이 좋아서 나쁠 건 없지.'
아버지는 이호연을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
게다가 엘리스도 있다.
언니로서 엘리스의 취향은 잘 알고 있다.
소위 말하는 있어 보이는 복장.
오랜만에 만나는 이호연인데 더 멋있는 모습으로 보여주면 동생도 더 좋아하겠지.
"정장… 맞춤 정장 같은 건 안 해도 되겠지. 기성으로 보내줘도 비율이 괜찮으니 멋있을 거야."
길드 창고를 뒤져보면 잠입용 기성 정장이 남아돌 거다.
적당히 사이즈 맞는 걸로 보내주면 되겠지.
띡띡.
"여보세요. 응. 1 팀장인데, vip숙소 301호에 기성 정장 남는 거 하나만 보내줘. 아니 아니. 남자용으로. 응. 이호연 거 맞아. 대충 보내면 돼."
뚝.
전화를 끊고 다시 서류를 훑어보려던 아이린은 눈을 찌푸렸다.
그래도 선물로 주는 건데 창고에 돌아다니는 기성 정장을 보내주는 건 조금 무례한 일 아닐까?
"나한테 창고에 돌아다니던 옷을 선물이라고 준다면… 음. 기분이 나쁠지도."
본래 엘리스가 아닌 다른 사람들의 일에는 큰 관심이 없던 아이린이지만, 이호연에 대한 일도 어느새 꽤 고민하게 되었다.
짧은 고민의 결과. 자신이 틀렸다는 걸 알았다.
내 생각이 짧았구나.
아이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관리팀에 전화를 걸려던 그때.
쿵쿵!
[1 팀장님! 계십니까!]
"… 누구야? 안에 있으니까 말해."
우리 길드에 저렇게 문을 부술 기세로 노크할만한 사람은 없는데.
무례한 행동을 보아하니 아빠가 돌아오기라도 한건가?
[길드장 님과 엘리스 아가씨가 돌아오셨습니다!]
"지금 나갈게!"
이어지는 말에 눈을 크게 뜬 아이린은 방금까지 머리를 채우던 정장에 대한 생각을 날려버렸다.
맞춤 정장은 무슨.
그딴 게 중요한 게 아니다.
사랑하는 동생과 사고뭉치 아버지가 돌아왔다.
아이린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내던지고 팀장실을 뛰쳐나갔다.
*
스륵- 스르륵.
"그러고 보니 맞아. 나 연구실에 틀어박힌 지 얼마나 됐어? 창문을 닫고 있었더니 해가 몇 번이나 떴는지 모르겠네."
"오늘이 프랑스에서 일주일째였습니다. 이제 곧 12시가 지나면 8일 차가 되겠네요."
"와… 용케도 안 굶어 죽었네."
냠.
이호연은 스칼렛이 사준 초코바와 우유를 입에 집어넣었다.
분명 연구 중에는 배고픔과 갈증이 없었는데, 음식과 물이 입에 들어가니까 그제서야 반응이 온다.
'밥까지 굶어가며 개고생한 결과가 조금 아쉽긴 하지만… 어쩔 수 없지.'
내다 버린 일주일.
…이라고 표현하긴 싫었다.
[현월의 전당]이라는 엄청난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게 된 건 아쉽지만, 마법의 성취를 잃어버린 건 아니었다.
신의 영역.
세계의 법칙.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어서 아직 머리가 아프긴하다.
하지만 애초에 이 세계에 빙의한 것부터 말이 안 됐으니까.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해야겠지.
'신의 영역이 있다는 건 인간의 영역도 있다는 뜻이지. 그럼 인간을 초월하자마자 신이 되는 건가?'
… 그건 너무 어색하잖아. 그 말은 이호연의 마법적 성취가 신이 되었다는 뜻이나 마찬가지니까.
아무리 이호연이 마법에 재능이 있어도 그 정도가 아니라는 건 자신이 가장 잘 안다.
인간과 신 사이의 틈은 엄청나겠지.
이호연이 [현월의 전당]을 만들어낸 건 우연이 겹치고 겹쳐서 생긴 일이다.
'인간 주제에 신의 영역에 다다르는 것… 그게 세계의 법칙에 어긋난다는 거지. 그럼 신의 영역에 발을 들이지 않기만 하면 뭐든 된다는 거잖아.'
신의 영역이 100이라면 99까지. 아니, 99.9999까지.
한 번 해낸 일을 두 번 못 해낼까.
마법의 극한까지 제어하면 세계의 법칙이라는 놈도 자신을 막을 수 없겠지.
스르륵- 꾸욱.
스칼렛의 손길이 생각에 빠져있던 이호연을 깨운다.
그녀의 손에 완성된 깔끔한 정장핏과 넥타이는 어색하지만 왠지 기분이 좋았다.
"자. 됐습니다. 호연 님."
"스칼렛, 그래서 이건 왜 입고 있는 거야?"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이린 아가씨가 급하게 보낸 선물이라고 하던데요."
"그건 나도 들어서 알지. 아이린 씨가 이걸 입고 오라고 했어?"
"아니요. 하지만 급하게 보낸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길드장 님을 보러 가는 거니까 이미지를 위해서 챙겨준 것 아닐까요."
그런가?
아이린이 날 그 정도로 챙겨줬었나. 하는 생각이 들지만, 그거 말고는 가능성이 없잖아.
뜬금없이 정장을 선물로 주는 건 입으라는 뜻이 맞겠지.
마침 평상복 밖에 없었으니 다행이긴하다.
"어색하진 않아? 이런 옷은 처음 입어봐."
생도복도 정장의 일종이지만, '슈트'라고 부를만한 옷을 입은 건 처음이었다.
이호연이 좌우로 돌며 스칼렛을 바라보자, 스칼렛은 멍하니 눈을 깜박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정말… 얼굴 하나는 타고나셨네요. 축하드립니다."
짝. 짝.
스칼렛은 고개를 저으며 박수를 쳤다.
"창피하니까 그러지 마라."
"진심으로 감탄한 겁니다. 이 정도면 아이리스 길드의 자매 정도는 손쉽게 볶아먹을 수 있을 겁니다."
"제발 단어 좀 순화해…."
쟤는 볶아먹는다는 말을 왜 저렇게 좋아하는 거야.
예쁜 여자의 입에서 나올만한 말이 아니라고.
"정말 대단해서 그런 겁니다. 와…."
저렇게 순수하게 감탄하는 걸 보니 쪽팔리기도 하고 …정말 멋있긴 한 건가?
스칼렛의 반응을 보니 자신감이 올라온다.
조금 빨개진 스칼렛의 볼을 보니 동시에 장난기도 조금 올라왔다.
이호연은 슬쩍 스칼렛의 턱선을 쓰다듬으며 미소를 지었다.
"가까이 와. 스칼렛. 나 못 참겠어."
"예? 엘리스 아가 씨를 보러 가셔야죠.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
"지금이 밤이라지만 당신도 참을 때는 참을 줄 아셔야 합니다."
"응…."
이호연은 시무룩한 얼굴로 어깨에서 힘을 뺐다.
타이밍이 영 별로였나. 나중에 침대에서 해볼걸.
"자, 힘내시죠. 빨리 엘리스 아가씨와 길드장 님을 보러 가시죠."
"알겠어. 넌 안 가려고?"
"저는 호연 님의 비서로 온 거니까요. 나중에 개인적으로 길드장 님과 회포를 풀겠습니다."
"그래. 일단 빨리 가봐야겠다. 지금도 시간이 늦었으니까."
길드장 님과 엘리스가 정확히 언제 돌아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더 늦기 전에 빨리 보는 편이 낫겠지.
이호연은 스칼렛에게 인사한 뒤 숙소 바깥으로 나갔다.
한편, 혼자 남은 스칼렛은 이호연의 마력이 사라지자마자 몸을 부르르 떨며 의자에 풀썩 주저앉았다.
"… 큰일 날 뻔했네."
아직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누가 봐도 장난치는 것 같은 저 남자의 실실 웃는 얼굴이 아니었다면, 스칼렛도 못 참고 넘어갈 뻔 했다.
"하아, 후우…. 진정하자."
스칼렛은 가슴에 손을 얹은 채 심호흡을 이어갔다.
정장이 저렇게 잘 어울리는데 왜 그런 허접한 옷만 입고 다니는 걸까. 그건 범죄나 마찬가지잖아.
집에 돌아가면 레베카 씨와 다은 양과 진지한 토론을 해봐야겠어.
그런 생각을 한 스칼렛은 비틀거리며 방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