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1화 > 세 번째 만남 (2)
"5일 만에 느껴버렸어. 프랑스는 진짜 물 맛부터 달라."
"그렇습니까. 보기보다 민감하시네요."
냠.
스칼렛은 소고기 스테이크와 감자 퓌레를 입에 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녀도 물 맛이 다르다는 건 동의하지만, 이호연을 놀리는 게 반응이 재밌었다.
"… 아닌가? 나보단 네가 더 민감할 텐데. 흠."
이호연은 머쓱한 표정으로 물을 들이켰다.
스읍. 분명 다른데.
"글쎄요? 그나저나 요리들이 수준급이군요. 굉장히 맛있습니다."
"아이린 씨가 추천한 곳들이거든. 시간 나면 한국에 돌아가기 전에 둘이 맛있는 곳도 가보자."
스칼렛한테 맛있는 식사를 사준다는 말을 몇 번은 한 것 같다.
이렇게 먹는 것도 좋지만 역시 분위기 있는 식당은 직접 찾아가서 먹어야 제 맛이 나거든.
거짓말쟁이가 되기 전에 시간을 내야겠지. 물론 마법 연구만 잘 된다면 말이다.
"좋습니다. 그때는 제가 대접하겠습니다."
"응? 아니야. 내가 사야지."
"저번에 구해주신 것도 있으니까요. 빚을 남겼다가 어떤 이상한 짓을 요구당할지 모릅니다."
"넌 대체 날 뭘로 보는 거냐."
후훗.
자신을 놀리며 기분 좋은 듯 미소를 짓는 스칼렛을 보니 어이가 없었다.
마음 같아선 침대로 끌고 가서 상하관계를 확실히 정립하고 싶지만, 프랑스에 있는 동안 스칼렛과 노는 게 유일한 여가였으니 내버려 두자.
"근데 여기서 벌써 5일이나 있었구나."
"그러게 말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이렇게 오래 걸릴 줄 알았으면 숙소를 받지도 않았을 텐데. 쩝."
이호연은 두툼한 스테이크를 썰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하루 만에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오기로 했었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시간을 쓴 걸까.
'뭐 어차피 한국에 있었어도 마법 연구를 하는 건 똑같았을 거 같긴 한데.'
아이린의 말을 들어보니 판데믹은 대부분 와해되었고, 조각난 조직들이 각국에서 테러를 일으키는 상황이라고 한다.
지금 당장 판데믹을 견제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검은 기둥을 처리하는 것 밖에 없다.
오히려 중심이 없는 테러 때문에 판데믹을 더더욱 잡기 힘들어졌다는데… 잡기 힘들면 안 잡으면 되지.
판데믹의 소행인 게 확실한 검은 기둥이나 던전의 폭주 현상을 막는 편이 낫다.
'어차피 아이리스 길드의 협력을 받아야 하는 건 맞는데… 아니 엘리스 얘는 대체 어디로 간 거야? 루시퍼를 조사할 수가 없으니 직접 만들고 있는 건가?'
앞으로의 일을 편하게 진행하려면 아이리스 길드의 협력을 받아야 한다.
약간 이상할 때도 있지만 아이리스 길드가 가진 영향력은 절대 무시할 수 없으니까. 특히 귀찮은 일들을 대부분 처리해 줄 수 있다.
"그냥 한국으로 돌아갈까? 애들도 보고 싶고 임솔 교수님도 한 번 뵈어야 하는데."
3일 정도까진 마법 연구에 집중하느라 괜찮았지만, 슬슬 다른 히로인들도 보고 싶다.
자기 앞가림을 못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해도 괜히 걱정되기도 하고.
물론 단순히 얼굴을 보고 싶은 게 제일 큰 감정이긴 하다.
"그리고 물 맛이 달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연구가 힘들어서 그런 건지. 몸도 좀 피곤해. 집에서 자고 싶어."
"확실히 며칠간 연구 때문인지 얼굴이 수척해지긴 하셨네요. 성녀 님이 챙겨주셨다는 약은 꼬박꼬박 먹고 계십니까?"
"응. 근데 거의 다 떨어졌어. 한국으로 돌아가서 다시 받아오든 해야지."
"저는 지금도 좋지만… 프랑스에 있어서 이득 될 게 없다면 돌아가는 걸 생각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냠.
스테이크를 입에 넣은 이호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좋은 점은 최근 악몽을 한 번도 꾸지 않았다는 것.
아무리 생각해도 원인은 백아영이 준 약 밖에 없다. 확실히 성녀라는 이름은 틀리지 않았어.
"아이린 씨한테는 무슨 말 없었지? 엘리스랑 길드장 님은 여전히 연락이 없을 거고."
"예. 아이리스 길드도 다급한 지 직접 찾으러 간다고 하지만… 글쎄요. 제가 현역으로 활동하기 전부터 지금까지 길드장님이 누군가에게 뒤를 잡혔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 정도야? 대단한 건 알았지만 내 생각보다 더 대단한 사람인가 보네."
"밤의 황제가 뒤를 잡힌다면 황제라고 불릴 자격이 없겠죠."
평소 스칼렛의 태도도 그렇고 길드원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확실히 길드장을 존중하는 게 보인다.
마법사들 사이에서 임솔이 받는 취급과 비슷한 걸까?
그렇게 생각하니까 갑자기 대단해 보이네.
사실 이호연에게도 아이리스 길드장에 대한 정보는 많이 없으니 어쩔 수 없다.
그나마 아는 것이라곤 굉장히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과 딸바보라는 것.
딸바보설정 덕분에 이득을 많이 봤지.
"그러고 보니 마법 연구는 어떻게 되고 있으신가요? 어제오늘은 바깥에 계신 시간이 많네요."
"마법은 일단 보류지 뭐. 아니, 보류라기보단 조금 지쳤어. 솔직히 아이디어는 나올 게 없고, 이제 단순한 실험의 반복이거든. 될 때까지 머리로 박아보는 거야."
"본래 새로운 연구는 핵심을 파악한 순간부터 반복의 연속이니까요."
"그러게. 핵심을 알겠는데도 잘 안되더라."
"꿈꾸는 천재 마법사에게도 힘든 마법이 있었군요."
"… 그건 또 무슨 별명이야?"
천재 마법사는 많이 들어봤지만, 악몽은 몰라도 꿈을 꾼 적은 없는데.
혹시 내가 악몽을 꾸는 걸 들킨 건가.
"뉴스가 있던데요. [이호연. 꿈을 현실로 이루어내는 천재 마법사.] 라면서요. 아, 기사에 딱히 새로운 내용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별명이 입에 잘 달라붙는 건지, 여러 곳에서 채용하더군요."
"멋있긴 하네. 꿈꾸는 천재 마법사라니."
"조금 더 들으시겠습니까? 그의 마법에 대한 찬사를 쓰고 싶었지만 여백이 부족해 적지않았…."
"그만그만. 또 나 오글거리는 거 보고 좋아하려고. 디저트나 먹어."
이호연은 헛소리를 하려는 스칼렛의 입에 아이스크림을 물려줬다.
내심 말이 막힌 게 아쉬워하는 눈치였지만, 스칼렛은 아이스크림을 거절하진 않았다.
꿈꾸는 마법사라… 그 말을 들으니 밤마다 자신을 괴롭히던 악몽이 떠오른다.
꿈에서는 어색한 일이나 말도 안 되는 일도 자연스럽게 넘어간다. 게다가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도 바라는 대로 이루어진다.
지금 막혀있는 연구도 꿈이라면 바로 끝냈을 텐데. 아쉽네.
'… 음?'
그때, 무언가 뇌리에 스친다.
꿈.
마법.
자유자재.
전지전능.
아직 완성되지 않은 단어와 영감의 집합체들이 눈앞을 스쳐 지나간다.
정리되지 않은 난해한 개념들이 이호연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몇 번이나 겪었던 깨달음의 전조.
이호연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호연 님?"
"잠시만."
의사소통에 할애할 집중력은 없다.
이호연은 곧바로 방 안에 만들어놓은 간이 연구실로 들어갔다.
될 것 같아.
지금 이 깨달음이라면.
느껴지는 감각을 현실로 구현한다면, 할 수 있다.
"… 밥 먹다 말고 왜 저러는 거람."
디저트를 먹는 중에 갑자기 뛰쳐나가다니, 마법사라는 족속들은 다 저런 걸까.
식탁에 앉아있던 스칼렛은 순식간에 닫힌 방문을 보며 눈을 깜박거렸다.
*
연구실의 문을 쾅 닫은 이호연은 곧바로 마력을 일으켰다.
"룬의 결계."
외부와 연구실을 단절시킨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이곳에서, 이호연은 다시 마력을 퍼트렸다.
"마천궁 전개."
공간 전체를 짓누르는 자신의 마력을 느끼며 이호연은 허공에 손을 뻗었다.
목표는 저 책상 위에 있던 머그컵.
"가까이 와라."
손을 뻗었지만 닿지 않는 거리.
이호연이 마력을 사용한다면 당장 가져올 수 있다.
하지만 이호연은 마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대신 이 공간에 집중했다.
마력을 사용해서 컵을 옮기는 것과 이 공간 자체를 마력으로 지배하는 것.
그 둘은 비슷한 것 같지만 전혀 다른 결과를 도출한다.
두근. 두근.
심장이 빠르게 뛴다.
볼을 따라 흘러내린 땀은 턱에 맺히고, 집중을 깨지 않기 위해 숨소리 하나까지 조절했다.
룬의 결계와 마천궁.
두 가지 마법은 전부 공간을 지배한다.
그리고 이호연은 그 두 개의 마법에 통달해있다.
들썩.
이윽고, 책상 위에 있는 머그컵이 약간 들썩거렸다.
저 컵은 마력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오로지 공간의 지배력만으로 움직인 것이다.
"… 하아."
그래.
룬의 결계의 극한에 도달한 내가 못 할리가 없지.
"룬의 결계. 마천궁. 그리고… 악몽."
반복되는 악몽은 이호연에게 트라우마를 가져왔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전지전능한 꿈에 대한 열망또한 가져왔다.
꿈은 어떤 일이 일어나도 자연스럽고, 깨어나면 눈 녹듯이 사라진다.
몇 번이나 이호연을 괴롭혔던 꿈.
그 감각을 자신이 지배하는 공간에서 재현할 수 있다면….
*
며칠이 지났다.
아니, 정확히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다.
이틀은 확실히 지난 것 같은데, 사흘은 지난 건가?
바깥에 해가 몇 번 지고 떴더라.
여러 생각을 하던 이호연은 비틀거리며 창문으로 다가갔다.
파악-!
바깥의 빛을 막아주던 커튼을 걷었다.
뜨거운 햇빛을 기대했지만, 이호연을 마중 나온 것은 수많은 별과 밝은 초승달 하나였다.
아쉬운 대로 상쾌한 밤공기를 들이마셨다.
"밤이었구나… 아 씨. 배고프네. 얼마나 굶은 거야?"
임솔이 일주일 굶고 쓰러졌다고 했었지.
딱 이런 느낌이었을까.
아니, 며칠 굶었다고 이 상태인데 그 사람은 정체가 뭐야.
"그래도 깨달음이 사라지기 전에 연구해야 하는 마음은 이해가 가네."
해보니까 알겠다.
깨달음이란 꿈과 같다.
잠에서 깨어난 뒤 몇 시간만 지나도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다행히 이호연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굶어 죽지는 않았으니 됐지 뭐. 솔이는 그때 입원까지 했었잖아."
그래도 갈피를 잡은 이후로는 쉬웠다.
아주 작은 깨달음이었지만, 그것만으로 이호연의 재능에 날개를 달아줬다.
"처음부터 잘못 생각하고 있었어. 내가 신도 아니고, 어떻게 진짜 공간과 시간을 지배하겠어."
아마 실험을 계속했더라도 제대로 된 결과가 나오진 않았을 거다.
그대로 연구를 지속했다면 시간을 얼마나 낭비했을까.
생각만 해도 두렵네.
"이름은… 흠. 아직 상태창처럼 나타나지가 않네."
스파이럴. 아크. 마천궁까지.
이 세계에서 마법은 그것을 깨우친 순간 상태창처럼 나타난다.
그 이름들을 직접 지은 건 아니지만, 전부 자신의 취향에 딱 맞았다.
아마 이호연의 잠재의식과 관련이 있는 거겠지.
"그럼 이 마법은… [악몽의 영역] 같은 거면 괜찮으려나?"
자신의 악몽에서 영감을 받았으니 그런 이름도 괜찮아 보인다.
조금 무서워 보이긴 하지만.
스윽-
그때, 창 밖의 빛이 강해졌다.
구름이 걷히며 은은한 달빛이 창 안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손등을 비추는 달빛을 보던 이호연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현월…."
어디선가 들었던 초승달의 다른 이름.
그 순간, 이호연의 머리에 한 단어가 스쳤다.
[현월의 전당]
"나쁘지 않네."
마음에 드는 이름이다.
사실 마법과 큰 연관성은 없지만… 초승달 뜨는 밤에 완성한 마법이니까.
대충 초승달 하나 띄우면 되겠지. 부정적인 이름보단 나아 보인다.
"근데 왜 아직도 상태창이 안 나오는 거야?"
아직 완벽하지가 않은 건가?
그럴 리가. 이론상 모든 게 완벽했을 텐데.
이호연은 마력을 끌어올렸다.
"현월의 전당… 개방."
마천궁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마력의 영역을 펼친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니야. 이럴 리가 없는데?"
수백 번, 아니 수 천 번의 증명을 마쳤다.
이론이 틀린 거라면 이호연의 모든 마법 개념을 뜯어고쳐야 할 정도로 완벽하게 증명했다.
솔직히 말하면 아직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마천궁을 만들었을 때보다 엄청난 놈이 나왔으니까. 겨우 일주일 만에 새로운 세상을 열었다고 생각했다.
이 마법을 임솔에게 보여주면 얼마나 흥분할까 기대되기도 한다.
처음 보는 얼굴로 울면서 자신에게 안길지도 모른다.
… 근데 왜 마법진이 움직이질 않는 거야.
이호연은 눈을 찌푸리며 마력을 응축했다.
다시 한번 마법진을 펼치려고 하던 그때.
[세계의 법칙에 관여하였습니다.]
"… 뭐야 이건?"
오랜만에 보는 알림이다.
히로인들을 공략한 이후로 보이지 않아서 세상이 날 버린 줄 알았는데, 오랜만에 보는 상태창이 왜 이러냐.
팔랑-
동시에 이호연의 눈앞에 종이 한 장이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