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0화 > 세 번째 만남 (1)
짹짹- 호르르-
창 밖에서 비추는 따스한 햇빛과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새소리.
프랑스는 역시 한국과 다른 새가 사는 걸까.
소리가 참 청량하네.
"… 으음."
천천히 정신이 깨어난다.
이호연은 푹신한 침대에서 부스스 일어나며 하품을 했다.
"역시 프랑스의 새는 울음소리부터 남다르네."
"프랑스에 왔는데도 당신의 성욕은 줄지 않는군요."
"미안."
이호연은 옆에서 나체로 누워있는 스칼렛을 슬쩍 바라봤다.
새하얀 피부와 곡선진 라인이 이불 위로도 드러난다.
"손만 잡고 잘 것처럼 말하더니 결국은 이렇게 되네요."
"너도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온 거잖아."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스칼렛은 바보가 아니다.
이런 일이 있을 건 당연히 예상하고 이 방까지 왔다.
지금 하는 대화는 아침인사나 마찬가지.
"하으… 그래도 아침이 상쾌하다. 외국 공기라 그런가?"
이렇게 기분 좋은 아침은 또 오랜만이네.
지긋지긋한 악몽도 없고 식은땀도 없었다.
아이리스 길드에서 제공해 준 숙소가 좋아서 그런 건가? 아니면 끌어안고 잔 스칼렛이 좋아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프랑스라 다행입니다. 한국이었다면 죽기 직전까지 했을 텐데."
"… 그 정도는 아니지."
사실 프랑스나 한국이 문제는 아니다.
그냥 아직까지 조금은 마음이 불편했기 때문이다.
뭐, 나만 이상한 걸 지도 모르지만.
"이리 와봐. 스칼렛."
잡념을 털어내기 위해 스칼렛의 몸을 끌어당겼다.
서로의 눈이 마주치고, 자연스럽게 키스를 나눈다.
가벼운 모닝 키스.
부드러운 입술과 끈적한 타액의 교환에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다.
"으음, 당신은 아침부터. 후우…."
"왜? 싫었어?"
"그런 건 아닙니다만… 양치도 못했는데 이러는 건 매너가 아닙니다."
"난 괜찮은데. 딱히 냄새도 안 나."
"제가 괜찮지 않거든요. 게다가 입 안에 달콤함이 맴돌아서 기분이 이상합니다."
정액이 달콤한 것으로도 모자라 왜 타액까지 달콤한 걸까.
이 남자는 평소에도 마력을 돌리고 있는 건가.
스칼렛은 입 안에 맴도는 달콤함을 삼키며 기지개를 켰다.
이불이 흘러내리며 스칼렛의 새하얀 가슴이 드러났지만 이미 볼 거 다 본 사이기에 창피하진 않았다.
"하지만 이런 것도 나쁘진 않네요. 둘이 지내는 건 처음인 것 같습니다."
"… 너 일부러 프랑스로 바로 가자고 한 건 아니지?"
"그럴 리가요. 운이 좋았습니다."
"그래그래."
피식 웃은 이호연은 하품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속셈이 있으면 어떻고 없으면 어때. 가끔은 스칼렛도 그런 날이 있어야지.
스칼렛하고 잡담을 나누며 스마트워치를 켜자 어제 보낸 메시지에 답장이 와있었다.
신경 써서 답장을 보내준 뒤, 침대에서 일어났다.
창문 밖의 아침햇살을 보니 아이리스 길드도 정상업무를 시작했겠지.
"아직 엘리스는 안 왔나 보네?"
"아가씨가 왔다면 가장 먼저 저희에게 알리지 않을까요."
"하긴."
대체 어디까지 갔길래 복귀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건 지 궁금하긴 하다.
곧바로 복귀를 못하는 걸 보면 연락망이 아예 없는 모양이다.
"일단… 엘리스가 돌아올 때까지 마법 연구나 해야겠어."
"좋은 생각이십니다. 그럼 저는 아이리스 길드의 비밀 임무라도 수행해야겠네요."
"그런 것도 있어?"
"농담입니다. 아이리스 길드의 훈련장을 빌릴 생각입니다."
"나쁘지 않네. 케이론이 그렇게 잘 가르친다고 하던데."
켄타우로스 주제에 아직도 안 잘리고 아이리스 길드에 붙어있는 이유가 있겠지.
나름 길드원들하고도 잘 지낸다고 하니 스칼렛이랑도 잘 지낼 거다.
"저는 먼저 씻고 나갈 테니 천천히 나오시죠."
"응. 어차피 마법 연구는 여기서 해도 돼."
스칼렛이 씻으러 나간 뒤.
잠을 완전히 깬 이호연은 책상에 앉았다.
"자… 마법. 마법이라."
지금 당장 엄청난 마법을 만들어내는 건 힘들겠지만, 예전부터 구상해 놓은 것들이 있다.
스케일이 너무 커서 시간이 꽤 필요한 주제들이었다.
"마천궁을 만들면서 영역에 대한 이해가 늘었으니… 도전해도 될 것 같은데."
마천궁과 룬의 결계.
그 두 가지를 조금만 비틀어도 완전히 다른 마법이 튀어나올 수 있다.
"시간. 아니면 공간. 그중 하나를 건드려보고 싶단 말이야."
임솔과 대련 때 있었던 순간적인 현상도 연구해 볼 가치는 있지만, 지금은 조금 더 어려운 마법을 연구하고 싶었다.
게다가 그런 현상은 실전에서 연습해야 하는 거고, 지금은 연구자 모드가 필요하다.
이호연의 마법은 항상 한계를 넘어왔다.
예를 들어 모든 마력에 지배력을 행사하는 마천궁.
부정적인 감정을 증폭하는 감정 증폭 같은 마법.
이호연이 지금까지 만난 강적들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도 이 미친 재능 덕분이었다.
하지만 시간과 공간은 조금 이야기가 다르다.
개개인이나 그 주변이 아닌, 그야말로 '신'이 할 수 있는 행동을 마법으로 구현해야 한다.
"마천궁이나 다은이가 하는 정도로 끝낼 거면 시작도 안 했어."
자신을 중심으로 하는 게 아닌 이 세상을 조종할만한 마법.
그 정도는 해내야 신을 이길 수 있겠지.
"어디부터 건드려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시작해 볼까."
정말 이 세상 자체를 조종하는 건 바라지도 않는다. 그 비슷한 효과만 나오면 되는 거거든.
그리고 좋은 아이디어를 위해 들이받다보면 뭐라도 나오겠지.
우웅-
이호연을 중심으로 커다란 역장이 무형의 파동을 내뿜었다.
마천궁 내부의 마력을 온몸으로 느낀다.
마력의 지배 아래에서 수 십 수 백가지의 연산이 동시에 이루어진다.
엘리스가 오기 전까지 조금이라도 결과가 나왔으면 좋겠네.
이호연은 눈을 감은 채 집중을 이어갔다.
*
아이리스 길드의 1 팀장실.
아침 햇살을 받으며 커피를 마시던 아이린은 스마트 워치를 보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으음. …설마 이럴 줄은 몰랐네."
이호연이 아이리스 길드에서 지낸 지 벌써 4일이 지났다.
그리고, 엘리스와 길드장은 아직도 도착하지 않았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니겠지. 하아…."
밤의 황제의 정보수집은 언제나 은밀했다.
추적당할 여지를 남기지 않기 위해 주기적인 연락 수단을 만들지 않으며, 연락이 필요하다면 며칠에 한 번씩 정해진 포인트 중 한 곳에 서신을 남긴다.
평소에는 길드장이 아무리 연락을 안해도 걱정따위 안했다. 워낙 강한 사람이니 어디에 던져놔도 살아나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엔 엘리스도 있는 데다가, 이 쪽에서 전할 소식도 있었다.
하필 이럴 때 접촉을 안하고 있으니 아이린도 답답한 상태였다.
"이 아저씨가 또 이상한 여자라도 만나러 간 건 아니겠지? 어머니가 화낼 텐데… 아니, 엘리스가 있는데 설마 그럴 리가."
아이린은 테이블에 쌓여있는 서류를 보고 답답한 한숨을 흘렸다.
마음이 답답하긴 하지만, 업무를 미룰 수는 없었다.
… 설마 밤의 황제에게 무슨 일이 있진 않겠지.
아이린은 팀장실 바깥으로 나왔다.
오늘 있을 회의는 길드장 대리로서 반드시 참여해야 한다.
부길드장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건 어머니지만, 실권을 가지고 있는 건 아이린이었기 때문이다.
"이 쪽에서 접촉을 시도해야 하나…? 하지만 아버지가 마음먹고 숨은 걸 어떻게 찾아…."
복잡한 머리를 싸매고 복도를 걷던 그때.
정면에서 다가오는 스칼렛이 보였다.
며칠 째 여기서 묵고있지만 이렇게 아침부터 마주한 건 처음이었다.
"스칼렛?"
"아이린 아가씨. 좋은 아침입니다."
"아, 응. 너도."
그녀는 편한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숙였다.
엘리스와 길드장이 바로 도착하지 않은 건 스칼렛과 이호연에게도 편한 일은 아닐텐데?
아이린은 의문을 느꼈지만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편해보이네. 숙소는 잘 쓰고 있어?"
"덕분에 편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훈련실에 케이론, 아니 Wild gladiator의 실력도 좋더군요."
"응. 조금 이상해도 실력하나는 좋으니까. 맞아. 이호연은 아직도 연구실에 박혀있어?"
"그렇습니다. 밥도 거의 안 먹으며 마법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래…? 네가 잘 관리해 줘."
이호연과 스칼렛이 아이리스 길드에서 지낸 지 이틀 차가 되던 날.
아이린이 직접 방에 찾아갔을 때도 이호연은 마법 연구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래도 천재 마법사라는 말이 틀린 건 아닌가 보네.'
연구에 집중하면 밥도 안 먹는 꼴이 임솔 마법사의 소문과 똑같았다.
마음 같아선 자신도 이호연의 상태를 확인하고 싶지만, 그럴 명분이 없으니 스칼렛에게 부탁할 수밖에 없다.
"아가씨와 길드장 님은 오늘도 소식이 없는 모양이군요."
"… 응. 오늘까지 연락이 없으면 직접 찾아볼 생각이야."
"길드장 님을 찾는 건 힘들 것 같은데요. 저는 좋은 소식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꾸벅.
살짝 고개를 숙인 스칼렛은 훈련실로 향했다.
솔직히.
그녀의 입장에서 지금 생활이 나쁜 건 아니었다.
오랜만에 훈련에 집중하는 것도 꽤 재밌었고, 이호연의 얼굴을 보긴 힘들지만 그래도 조금씩은 볼 수 있다.
하루에 몇 번밖에 보여주지 않는 얼굴을 자신만 보는 상황도 조금은 즐거웠다.
잠은 잘 안 자서 문제지만, 이틀에 한 번 꼴로 잘 때는 같이 잘 수 있기도 하고.
"쟤는 뭐 저렇게 편해 보이는 건 지 모르겠네."
부럽다.
스칼렛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아이린은 입맛을 다시며 회의실로 향했다.
*
어두운 방 안.
지금이 낮인 지 밤인지도 모르겠다.
허기진 건지 목이 마른 건지 약간은 불편함이 느껴진다.
그래도 지금 하는 고민은 끝내야겠지.
"… 시간을 멈춘다. 아니, 되돌린다?"
며칠간 고민과 테스트를 멈추지 않은 결과.
마법의 가닥은 시간을 건드리는 쪽으로 맞춰졌다.
특히 룬의 결계의 극한으로 스칼렛을 치료했던 기억이 도움이 되었다.
결계 내부의 시간을 느리게 만드는 원리는 모든 마력에 '감속'을 부여하는 것.
그것을 중첩하고 또 중첩해 시간을 느린 속도로 흘러가게 만들었다.
"근데 그걸 어떻게 재현하냐가 문제거든."
룬의 결계 내부의 시간을 느리게 하는 건 오케이.
그런데 룬의 결계가 없다면? 혹은 룬의 결계로 커버할 수 없는 범위라면?
아직 고쳐야할 부분이 너무 많았다.
"조금 더… 생각해 봐야겠네."
마법 연구를 시작하고 두 번 잤으니, 아마 삼 사일 정도 지났겠지.
아직도 엘리스의 소식이 없는 건 조금 이상했다.
그리고 너무 한국에 돌아가지 않는 건가 싶긴 하지만… 지금 이 마법연구를 멈출 순 없었다.
"잡힐 듯 말 듯 하단말이야. 쓰읍…."
오랜만에 마법사의 피가 들끓고 있다.
임솔이 일주일간 식음을 전폐하는 걸 그렇게 욕했던 자신이지만, 마법사는 다들 이렇게 되는 거구나.
자신도 스칼렛이 챙겨주지 않았다면 굶어 죽거나 과로사했을지도 모른다.
"시간을 되돌린다는 개념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고 있는 걸 지도 몰라. 조금 다른 방식으로. 이 공간 전체를 속인다면…."
어느새 배고픔도 잊은 이호연은 다시 한 번 마력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