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 야겜에 빙의했다-569화 (569/648)

< 569화 > 아이리스 길드 (8)

아이린과 대화를 마무리한 뒤.

루시퍼의 시체까지 넘겨주고 1 팀장실을 빠져나왔다.

바닥에 이런 걸 냅다 꺼내지 말라고 욕을 먹긴했지만 전체적으로 일이 잘 풀렸다.

'루시퍼의 시체에 마력도 잘 발라놨으니까… 알아서 잘 되겠지."

루시퍼에게 지옥의 마력을 듬뿍 주입해 놨다.

지옥의 마력에 대한 어색함과 위험성을 알리기 위해선 자신의 마력이 필요했다.

자신이 직접 이야기해도 되겠지만, 그것보다 루시퍼의 시체에 담겨있는 게 이야기의 흐름이 좋겠지.

"스칼렛 얘는 어디 있으려나."

아이린과 대화가 꽤 길었는데, 스칼렛은 끝까지 오지 않았다.

길드를 돌아다니면서 부서마다 떡이라도 돌리는 건가?

스르륵-

스마트 워치로 연락을 보내보려던 찰나.

스칼렛의 금발이 벽 한 쪽에서 나타났다.

"저라면 여기 있습니다."

"아이씨, 깜짝이야."

이호연은 갑자기 튀어나온 스칼렛을 보며 눈을 찌푸렸다.

왜 여기서 숨어있는 거야.

"너 거기서 뭐 하냐."

"보시는 대로. 은신 중이었습니다. 호연 님에게 걸리지 않아서 기분이 좋네요."

"그러게. 좋아지긴 했네."

긴장을 풀고 있었지만 자신의 감각을 벗어나는 걸 보면 스칼렛도 확실히 괜찮은 재능을 갖고 있다.

주변이 워낙 괴물이라 문제지.

이호연은 기지개를 켜며 스칼렛에게 다가갔다.

"태평하게 숨어있는 거 보니 한가한가 봐? 길드원들이 엄청나게 많다길래 돌아가면서 인사라도 하는 줄 알았어."

"한가하진 않았습니다. 다 처리하고 왔는데 두 분께서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들어와도 됐을 텐데. 뭐, 됐어. 일단 협조해주기로 약속은 받았거든. 가자. 안내해."

"어디로 말입니까?"

"한국으로 가야지. 일처리만 하고 오긴 개뿔. 생각해보니 처음부터 말도 안 됐어."

바깥은 이미 어두워진 지 오래다.

한국에서 출발했을 때도 이른 시간은 아니었으니, 아마 다들 자고 있겠지.

하룻밤 자고 이른 아침에 오는 게 나으려나.

"길드장 님하고 엘리스가 오면 내가 직접 할 말도 좀 있으니까 인사만 하고 와야 해."

"지금 길드장 님은 출장 중이고 엘리스 아가씨는 휴가 중이라고 들었는데요."

"겉으로는 그렇게 되어있는데, 후계자 교육 비슷한 거래. 아무튼 빅터 씨한테 한 번만 다시 와달라고 해줘."

"빅터가 휴일에는 부르지 말라고 하지 않았나요?"

맞다. 그랬었지.

"… 내가 사인이라도 하나 해주면 되지 않을까?"

"그냥 아이리스 길드에게 요청하시는 게 쉬울텐데요. 당장 뒤로 돌아 문을 열면 아이리스 길드의 1 팀장이 있습니다. 그것도 호연 님이 마음대로 구워삶을 수 있는."

"…."

스칼렛의 말투는 그렇다 치고, 이호연은 1 팀장 실에서 나오기 직전 봤던 아이린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렸다.

스칼렛의 말대로 아이린에게 부탁하는 게 가장 쉬운방법이지만, 아이린은 지금 할 일이 너무나 많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이호연이 전 세계를 뒤흔든 루시퍼의 습격이 자신의 짓이라고 밝혔고, 지옥의 마력과 검은 기둥에 대한 재조사를 요청했다. 게다가 루시퍼의 시체를 떠넘겼고 전 세계에서 정보를 수집하고 있는 길드장도 호출해달라고 했다.

심지어 개인적으로 부탁한 것도 있으니, 아이린은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물밑작업을 시작해야 한다.

내가 나가기 전부터 손놀림이 굉장히 바빠 보였지.

'… 더 방해하기는 싫은데.'

겨우 한 마디면 되지만, 이호연도 양심이 있다.

자신을 도와주는 아이린한테 더 부담을 주기는 좀 그렇다.

"그럼 숙소에서 조금만 쉬었다가 내일 가자. 지금 당장 하기엔 아이린 씨가 엄청 바빠 보여."

"굳이 한국으로 돌아가셔야 하는 겁니까? 길드장 님과 엘리스 아가씨가 언제 돌아올지 모르지 않습니까. 검은 기둥이 호연 님에게 그렇게 중요한 일이라면 대기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요."

"하지만 제대로 인사를 못하고 와서. 걱정되잖아."

"릴리아나 님과 다은 양은 애가 아닙니다. 레베카 씨도 마찬가지고요. 일 때문에 하루 정도 집에 못 들어간 걸로 욕할 사람들은 더더욱 아니죠."

"… 그렇긴 하지."

내가 너무 호들갑을 떠는 건가.

아니, 어쩌면 히로인들을 믿지 못하는 건 자신일 수도 있다. 반대의 입장이라면 이호연은 흔쾌히 허락할 테니, 그녀들도 마찬가지겠지.

이호연은 입맛을 다시며 스마트 워치를 들었다.

"그래. 스칼렛 네 말대로 메시지만 보내놓을게."

"좋은 생각이시네요. 남자는 본래 가정보다 일을 우선시하는 거라고 했습니다."

"누가 그래?"

"레베카 님이 그러시더군요."

"…."

스칼렛의 말을 무시한 이호연은 스마트 워치로 메시지를 남겼다.

일 때문에 조금 늦는다는 연락이었다.

"스칼렛. 숙소로 가자. 안내해 줘. vip 301호라고 하던데."

"알겠습니다. 혹시 저랑 같은 방을 쓰시는 건가요?"

"아니, 넌 302호야."

"쳇."

방금까지 갈궈놓고 왜 아쉬워하냐.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모르겠네.

"숙소까지는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응. 앞장서. 가는 길에 길드원들 만나면 나도 인사할까?"

"이미 각자 할 일을 하러 갔으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쯧. 아쉽네."

길드원들에게 스칼렛을 잘 부탁드립니다. 하면서 인사하면 스칼렛의 반응이 얼마나 재밌을까.

진심으로 아쉽다.

이호연은 스칼렛의 뒤를 따라 천천히 걸어갔다.

*

"역시 돈은 많고 봐야 해."

역시 아이리스 길드.

vip 호실이라는 명칭이 부끄럽지 않다.

히로인들과 이호연이 같이 들어가서 주지육림을 펼쳐도 될 듯한 넓은 욕조에서 몸을 씻고 침대에 누우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오랜만에 에브리데이나 들어가 볼까."

빅토리아 아카데미의 커뮤니티인 에브리데이.

예전엔 자주 들여다봤는데, 요즘 삶이 피폐해서 그런 건지 제대로 확인을 못했다.

그래도 이슈를 파악하는 데는 뉴스보다 이 쪽이 빠르거든.

특히 빅토리아 아카데미의 생도들은 정보에 민감한 편이다.

- 루시퍼의 습격을 극복한 빅토리아 아카데미. 그 이후로는?

- 학생회장 문수린. 그녀가 24시간 동안 한 일.

- '또 한 번 아카데미를 구했다?' 치명적인 남자 이호연. 던전의 한가운데에 서다.

- 사상 초유의 사태에도 사망자가 없는 이유. 이사장 문재철의 리더십 강의.

"여기는 여전하네."

뉴스 탭은 딱히 볼 게 없었다.

어디서 한 번씩은 들어본 정보들을 모아놓은 기사들밖에 없으니 도움이 될 수가 없다.

특히 문수린의 사복 차림과 옴므파탈 이호연 어쩌고 하는 글의 제일 조회수가 높은 것만 봐도 여긴 신뢰도가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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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 언제쯤 정상화되는지 아시는 분…?]

솔직히 말해서 상처 하나도 없고 제 주변 사람들도 가벼운 찰과상뿐인데요… 시설들이 전부 운영을 안 하니까 너무 힘들어요.

추천 : 120 비추천 : 80

[이거 인정 ㅋㅋ 훈련실도 막아놓는 건 뭐 하는 거임]

[너무 이기적인 생각인 듯. 제 지인은 아직 트라우마 때문에 병원에 입원해 있어요]

[ㄴ 그건 니 친구가 약해빠져서 그렇고 ㅋ]

[ㄴ 말을 왜 그렇게 하냐? 미친 새끼 아니야 이거]

"아카데미도 문제가 많네."

한국의 미래를 이끌어갈 빅토리아 아카데미의 생도들이 쌍욕을 하며 싸우는 걸 지켜보던 이호연은 에브리 데이를 종료했다.

아카데미의 기능이 정지되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

사망자는 없다지만, 죽지 않았다고 모든 걸 하루아침에 원래대로 돌릴 순 없다.

쯧.

혀를 찬 이호연은 스마트 워치를 종료한 뒤 눈을 감았다.

시간이 늦어서 다들 자는 건지 메시지에 답장은 없었다.

"…."

하지만 잠이 오질 않는다.

이미 잠들고도 남았을 시간이니 시차 때문은 아닐 텐데.

그냥 자야 할 시간을 놓친 건가?

이호연은 말똥말똥한 눈으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엘리스가 오기까지는 얼마나 걸릴지 모르고… 시간은 많긴 한데."

솔직히 돌아오는 시간이 왜 그리 오래 걸리는지는 모르겠다.

대체 어디서 정보를 수집하는 거야.

'그냥 연락을 안 받는 건가?'

정보 수집에 집중하기 위해서?

아니면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고?

생각해도 잘 모르겠다.

나중에 엘리스한테 물어보지 뭐.

"개인적인 시간을 좀 가지고 싶긴 한데."

이호연을 둘러싼 문제는 한 두 개가 아니지만,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건 결국 마법이다.

루시퍼를 죽인 지금 남은 건 마왕 하나.

그 새끼를 잡기 위한 무기는 마법 밖에 없다.

임솔과의 대련에서 느꼈던 특이한 감각.

이호연은 그 감각을 다시 떠올렸다.

'당연히 연구할 가치는 있지만… 이것만으론 부족해.'

더욱더 강한 마법이 필요하다.

하지만 단순히 강하기만 해선 안된다.

새롭고, 상상하지 못하고, 획기적인.

그런 마법이 필요했다.

이호연의 상대는 신이었으니까.

"진득하게 앉아서 연구라도 해야겠는데."

밤을 새우며 연구하다가 낮에 잠드는 습관이 좋지 않은 건 알지만… 오늘은 특히 잠이 잘 안 왔다.

잠자리가 익숙하지 않은 데다가 혼자 자는 거라 그런 걸지도 모른다.

'스칼렛이라도 데려와서 잘까.'

껴안고 자기만 해도 잠이 잘 올 텐데.

"물이라도 한 잔 마시고… 그래도 잠이 안오면 마법을 조금만 건드려볼까."

끼익-

이호연은 물을 마시러 거실로 나왔다.

그리고.

머리가 아래로 흘러내린 스칼렛이 거미처럼 천장에 붙어서 다가오는 걸 발견했다.

"으아아아아악!"

"… 꺄악!"

탓-!

이호연은 스칼렛을 보자마자 소리를 질렀고, 스칼렛은 눈이 마주치자마자 바닥에 가볍게 착지했다.

그리고 눈가를 좁히며 허리에 손을 얹었다.

"대체 뭐죠. 당신은 왜 갑자기 소리를 질러서 사람을 놀라게 하는 건가요. 대체 왜? 어째서?"

"너야말로! 왜 천장에서 기어 다니는 거야. 깜짝 놀랐잖아."

"이게 가장 효율적인 잠입 자세니까요. 시야의 맹점이면서도 공기와의 마찰을 줄일 수 있는 제가 가장 자신 있는 잠입 자세입니다."

저 자세 보고 설명을 들으니 예전 생각이 난다.

스칼렛을 처음 만났을 때. 거미처럼 천장에 붙어서 다가오는 걸 잡았었지.

거미인간인 줄 알고 얼마나 놀랐었는지.

… 그러고 보니 그 자세 분명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그거 내가 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냐? 니 외모랑 너무 안 어울리는 자세라고. 볼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려."

"칭찬은 감사하지만, 분명 집에서만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그런가?"

기억을 되짚어보니 그랬던 것 같다.

쩝.

입맛을 다신 이호연은 옷매무새를 다듬는 스칼렛을 보며 의자에 털썩 앉았다.

이제야 가슴이 좀 진정되는 것 같다. 이게 뭐라고 놀라나싶겠지만, 미녀가 거미자세로 천장을 타고 오는 장면은 실제로 봐야 그 공포를 알 수 있다.

"하아. 그래서 내 방에 왜 잠입하셨습니까?"

"호연 님이 잠에 들지 못하는 것 같아 밤시중을 들 생각이었어요."

"… 너 말투가 점점 릴리아나를 닮아간다. 그리고 밤시중을 들 거면 그냥 오면 되지 왜 잠입을 하냐고."

"그야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면 안 되니까요. 당신은 우리의 합방 소식을 아이리스 길드에 자랑이라도 할 생각인가요?"

"아니 방에 잠입한 뒤로 그냥 걸어오면… 하아, 됐어."

아이리스 길드에 합방 소식이 퍼지든 말든 알 바도 아니고, 왜 그 거미자세를 거실에서도 유지하고 있는 건 지 궁금하지만 그만두자.

굳이 저러고 있는 걸 보니 그 기괴한 자세가 정말 자신 있으니까 그렇겠지.

"그래도 오랜만에 그러고 있는 걸 보니 처음 봤을 때 생각나네."

"좋은 기억은 아니네요."

"왜. 릴리아나한테 걸려서 엄청 좋아했잖아."

"……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스칼렛은 이호연의 눈을 피하며 유리잔에 물을 따랐다.

그리고 조용히 잔을 내밀었다.

"목이 마른 건 어떻게 안 거야."

"보면 압니다."

"고마워. 그러고 보니 그때는 조금 멍청한. 아니, 귀여운 이미지였는데. 지금은 왜 이렇게 된 걸까."

홀짝.

한 손으로 물을 마시고 남은 손을 들어 스칼렛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곧바로 눈이 찌푸려진다.

릴리아나의 꼬리에 박힌 채 앙앙대던 첫 만남과는 확실히 다른 모습이다.

"그게 무슨 뜻일까요."

"기억 안 나? 릴리아나랑 나한테 잡혀사는 게 엄청 재밌었는데. 아, 물론 지금의 스칼렛도 멋있다고 생각해."

그 때는 이런 똑 부러진 이미지가 아니었지.

조금씩 정신을 차리더니 어느 순간 이렇게 변했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왜 그래. 안 좋은 추억은 아니잖아. 오히려 기분 좋은 추억이지."

"말도 안 되는 계약서로 사기를 친 기억을 웃으면서 얘기하는 건 짐승도 하지 않을 짓입니다."

"너도 좋아했으면서."

맞다. 물컵을 보니 백아영이 챙겨준 약이 떠오른다.

이호연은 아공간에 넣어놓은 약봉지를 꺼내 일 회분을 입에 털어 넣었다.

꿀꺽. 꿀꺽.

이호연의 놀림을 듣고 있던 스칼렛은 이때다 싶어 주제를 돌렸다.

"… 그건 뭔가요? 정력제라도 챙겨드시는 겁니까?"

"정력제는 아닌데, 나도 뭔 지는 몰라. 아영 씨가 챙겨준 약인데 종합비타민 같은 건가 봐. 먹으면 컨디션이 좋아져."

"성녀가 종합 비타민을 처방해줄 것 같진 않은데…

성녀 백아영이 그럴 짬은 아니지.

그래도 이호연의 몸에 해가 되는 걸 주진 않았을 거다.

스칼렛은 자연스럽게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고 보니 요즘 릴리아나 님도 건강에 신경을 많이 쓰시더군요. 비타민 300을 하루에 3병씩 드시고 계십니다."

"릴리아나가? 아니, 그걸 그렇게 먹으면 안 되잖아. 화장실 볼 때마다 색에 놀랄 텐데."

"제가 말한다고 들을 분이 아니니까요."

"걔는 왜 철이 안드는거지. 힘만 세진 청소년이 되는 거 아니야? 걱정이네."

자연스러웠다. 이대로 잘 때까지 대충 어울려주면 된다.

스칼렛은 대화 주제가 바뀐 것에 내심 기뻐하며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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