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 야겜에 빙의했다-568화 (568/648)

< 568화 > 아이리스 길드 (7)

"하아아."

아이린은 땅이 꺼질 기세로 한숨을 쉬며 1 팀장실에 들어왔다.

의자에 털썩 몸을 맡긴 그녀는 책상에 있는 서류들을 흘겨보다 방금 하던 대화를 떠올렸다.

"누가 보면 자기가 아이리스 길드장인줄 알겠어."

이호연과 엮일 때는 항상 이랬다.

저 남자는 과연 일개 아카데미 생도가 맞는 걸까.

처음 봤을 때부터 이상했다.

엘리스가 선천적 마력 장애를 치료할 수 있다는 마사지사로 동급생을 데려왔던 그날부터.

이호연은 항상 자신의 머리 위에 있는 것 같았다.

자신이 엘리스를 좋아하는 것도 알고 있었고, 엘리스가 무엇을 좋아하는 지도 자신만큼이나 잘 알고 있었다.

뒷배경 하나 없는 아카데미 생도가 누구도 치료하지 못한 엘리스의 선천적 마력 장애를 치료했고, 그 뒤로 승승장구해 이제 세계 최고의 마법사라는 타이틀까지 얻어냈다.

게다가 전투력 또한 아카데미 생도라기엔 말이 안 되는 수준.

루시퍼와 전투를 생각해보면 아이린은 어림도 없고 아버지가 직접 나서야 상대가 될 것 같았다.

그래도 모자란 지 자신도 모르는 판데믹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으니, 정보 길드의 최고 간부인 아이린이 느끼기에 이것 만큼 불합리한 일이 없다.

'이상할 정도로 섹스를 잘하기도 하고… 으음.'

아이린은 머리를 채우는 음란한 생각을 지워냈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일개 아카데미 생도가 자신도 모르는 정보를 자연스럽게 꺼내는 걸 보면 이호연의 정보망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대체 어디서 그런 정보들을 다 가져오는 거야? 천재 마법사라면 다 잘하는 건가?"

이호연을 만난 뒤 몇 번이나 고민했었고, 실제로 여러 조사를 했었지만 어떤 정보도 얻어낼 수 없었다.

그는 뒷배경 하나 없는 천애고아였다.

"스칼렛은 아닐 거야. 그녀도 나름 능력은 좋은 편이지만… 그럼 임솔? 아니야. 그녀도 정보 쪽은 문외한 아닌가?"

이호연이 나타난 뒤로 살짝 주춤하고 있는 천재 마법사 임솔.

그녀는 '천재 마법사'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마법을 제외한 그 어떤 것에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 정도의 성취가 당연하다고 볼 수 있는 노력과 재능.

하지만 이호연은 그렇지 않았다.

"마법사면 임솔처럼 연구실에 박혀서 마법에 미쳐있어야지. 어딜 저렇게 싸돌아다니는 거야."

쯧.

답답함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아이린은 곧 스마트 워치를 조작했다.

길드원에게 검은 기둥과 던전의 폭주현상에 대한 조사 결과를 전송해달라는 요청을 보냈다.

"지옥의 마력…? 그 이상한 것도 말했었지."

이호연의 능력을 못 믿는 건 아니지만, 그의 말만 듣고 모든 걸 결정할 순 없다.

아이리스 길드의 조사 내역을 다시 한번 살펴봐야 한다.

"이 자식 알고보면 판데믹의 첩자 아니야? 내부 사정을 어떻게 아는 거야."

전 세계를 상대로 하는 반인륜적 테러집단 판데믹.

그들은 종교적 또는 정치적 이유 없이 무차별적으로 테러를 자행한다.

원하는 게 없으니 협상도 불가하고, 그들의 목적을 모르니 대비할 수도 없다.

아이린은 진지하게 고민해 봤지만, 마인들로 이루어져 있는 판데믹에 이호연이 속해있을 가능성은 없다.

애초에 이호연이 망친 판데믹의 테러만 해도 손으로 셀 수 없기도 하고.

…게다가 만약 이호연이 판데믹의 첩자라면 그에게 몇 번이고 알몸을 보여준 자신이 너무나 초라해진다.

판데믹의 데이터 베이스에 자신과 엘리스의 기록이 남아있다는 뜻이니까.

"음. 그런 거라면 혀를 깨물어야겠네."

그 수치스러운 모습이 판데믹에게 넘어갔다면 죽는 편이 낫다.

이호연에게 희롱당하고 짐승 같은 교성을 내지르던 그 모습은… 자신이 봐도 창피하니까.

"왜 계속 이런 생각을. 하아…. 해소를 못해서 그런가?"

아이린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찌푸렸다.

성욕이 쌓일 때는 운동이나 일로 해결해야 한다던데, 전부 개소리였다.

일과 훈련을 병행하는 자신인데도 성욕을 참을 수가 없다.

매일 밤 자위에 빠져있으니 평소에도 이런 생각이 드는 거겠지.

앞으론 조금 자제해야 할까.

지이잉-

그때, 아이린이 요청했던 자료들이 홀로그램 모니터에 비쳤다.

검은 기둥과 던전 폭주 현상에 대해 조사했던 자료.

그리고 판데믹에 대한 아이리스 길드의 내부 자료까지.

"검은 기둥은 조사 완료. 판데믹은 아직도 정체불명이고…."

판데믹 마인들의 충성심은 업계에서 유명했다.

대부분이 고문을 당하기도 전에 목숨을 끊어버리고, 간신히 생포한다고 해도 절대 입을 열지 않으니 그들의 정체를 파악하긴 너무나 어려웠다.

"검은 기둥이 판데믹과 연관이 있다면 분명 위험한 건데."

아카데미를 습격한 루시퍼가 판데믹의 소행이라는 건 사실상 기정 사실이다.

아무 이유 없이 그런 테러를 자행할 곳은 판데믹 밖에 없다.

"루시퍼의 마력… 그 이상한 마력과 검은 기둥의 연관성을 찾는다면 재조사할 명분은 충분해."

전 세계에 나타난 검은 기둥이 판데믹 테러의 수단이라니.

사실이라면 엄청난 사건이고, 그 위험성은 말할 것도 없다.

똑똑.

- 아이린 씨. 들어갈게요.

"응. 들어와."

아이린은 허공을 밀어내 홀로그램 모니터를 치웠다.

아직 의문은 많지만 일단 듣고 생각하자.

이호연이 자신을 놀리는 게 아니라면, 아이리스 길드에게 좋은 일이 될 수 있다.

"늦어서 죄송해요. 정리할 게 있어서. 뭐 하고 있었어요?"

"네가 말한 것들 자료 좀 확인하고 있었어."

"아하."

이호연은 자연스럽게 의자에 앉았다.

다행히 아이린이 자신의 말을 곧바로 믿어줘서 일이 쉽게 풀렸다.

"스칼렛은요?"

"글쎄? 길드원들하고 인사라도 하고 있나 보지. 길드 내에서 인망이 있었으니까."

"… 의외네."

뭔가 그런 성격은 아닐 것 같았는데.

하지만 실제로 본 게 있으니 못 믿을 수도 없다.

"이제 슬슬 길드원들이 돌아올 시간이다 보니 더욱 바쁠 거야."

"루시퍼에 대한 조사가 끝났나봐요?"

"그런 건 아닌데 다른 일도 해야하니까. 맞아. 그러고 보니 루시퍼에 대한 정보도 있다고 했었지? 직접 싸운 너라면 뭔가 더 알 수 있는 거야?"

이호연이 루시퍼와 대치하던 그 모습은 아이린에게도 또렷이 남아있다.

천재 마법사라고 하니, 직접 루시퍼와 싸우며 느낀 점도 있겠지.

"비슷하긴 하죠. 일단 가장 필요한 정보가 뭐예요?"

"가장 중요한 건 그런 대규모 마법진을 설치할만한 능력이 판데믹에 있냐겠지. 만약 맞다면 전 세계가 테러에 대비해야 할 테니까. 세계의 마법사들이 달라붙었는데도 마법진의 해석을 못하고 있잖아."

"그 정도예요?"

"응. 그러니까 아이리스 길드도 루시퍼 조사에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거지."

물론 임솔 교수를 필두로한 아카데미 교수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도 있다.

원래 마법은 천재 한 두 명이 이끄는 분야니까.

"일단 마법진에 대한 이야긴데요. 아마 평범한 마법사들은 평생 조사해도 모를 거예요."

"아는 게 있나 봐?"

"네. 그 마법진은 제가 만든 거거든요."

"…?"

잠시 눈을 깜박거리던 아이린은 눈을 크게 뜬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 진짜 판데믹 출신이야?"

"네? 아니, 그런 건 아니고요. … 제가 만든 마법진을 루시퍼가 강탈한 거예요."

자신을 바라보는 붉은 눈동자에 침을 삼켰다.

가슴이 두근거리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말할 수밖에 없다.

이호연은 긴장한 채로 말을 이었다.

*

이호연의 말을 들은 아이린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갑자기 들어온 이상한 정보들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 이해가 안 돼. 이호연. 왜 그런 짓을 한 거야? 네가 그렇게 멍청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는데."

"제 여자관계를 정리하려면 이 방법 밖에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잠시 정신이 나갔었나 봐요. 저도 그 당시의 제가 이해가 잘 안 돼요."

"이 사실은 다른 여자들도 아는 거야?"

"엘리스랑 아이린 씨를 빼고 전부 얘기했죠. 아이린 씨에게도 연락을 받았으면 먼저 얘기했을 거예요. 제가 저지른 일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흐음…."

아이린은 다리를 꼰 채 이호연이 한 이야기에 대해 고민했다.

어떤 정보일지 기대하고 들었는데 설마 이런 폭탄이었다니.

'그 마법진을 직접 만들었다고….'

천재 마법사라는 말이 틀리진 않았구나.

전 세계의 마법사들이 달라붙었는데도 파악하지 못한 마법진을 만든 게 이호연이었다.

그 말은 이호연이 나쁜 마음을 먹으면 전 세계를 공포에 빠뜨릴 수 있다는 뜻이다.

'마법진을 해체하려는 그 순간에 주도권을 빼앗겼다는 건… 진실이겠지.'

이호연이 말하지 않았다면 아이린은 마법진이 이호연의 것이라는 사실을 몰랐을 거다.

아니, 자신뿐만이 아니라 그 누구도 알 수 없었겠지.

저런 거짓말을 하며 진실을 밝힐 이유는 없다.

"이호연 네 말이 맞다면 루시퍼에 대한 조사는 더 할 게 없어 보이네."

루시퍼가 가진 힘의 원천은 마법진이었고, 판데믹에게 마법진을 설치할 능력 따윈 없었다.

판데믹과 루시퍼의 연관성은 검은 기둥을 조사하는 것으로 확실하게 밝혀낼 수 있다.

더 이상 루시퍼에 대한 조사를 이어갈 필요가 없다.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 협력할게요."

"하아… 엉망진창이네. 상상도 못 한 결과야."

아이린은 싱숭생숭한 마음에 테이블에 있던 와인 잔을 들었다.

엘리스가 가장 좋아하는 샤토 디켐. 그 달콤한 향을 맡으니 조금은 머리가 가벼워졌다.

이호연의 복잡한 여자관계는 당연히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아카데미 전체를 납치한다는 발상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런 계획을 세우면서도 피해자는 없게 하려고 했다니.

나쁜 짓을 할 거면 확실히 나쁘게 할 것이지. 왜 그렇게 애매한 스탠스를 취하는 거야.

정말 정신이 나가기라도 한 걸까. 아니면 아직 숨기는 사정이 있는 걸까.

'어쩌면 자기 자신도 문제를 모를 수도 있고.'

아이린은 와인잔을 내려놓았다.

의외로 실망감 같은 건 없었다.

애초에 나쁜 놈이 아니라고 했지, 선량한 놈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래도 이 사실을 들킨 게 아니라 직접 말해줬다는 점까지 생각해야 하니까.

"뭐, 그래. 어차피 네가 이상한 놈인 건 알고 있었어. 처음부터 그랬잖아."

"… 네."

"엘리스와 날 위험에 빠뜨리려고 했던 건 화나지만… 굳이 책임을 묻진 않을게. 실제로 피해자가 나오지도 않았고. 마지막에는 해체하려고 했다고 하니까."

"더 욕하셔도 돼요. 제가 잘못했다고 생각하니까요."

"앞으로 내 눈앞에 띄지 말라고 하면 어쩌려고?"

"무릎 꿇고 빌어야죠. 뭐. 아이린 씨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전 아이린 씨도 엘리스만큼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 참나."

왜 갑자기 멋있는 척을 하고 그러는 건지.

아이린은 새하얀 볼이 붉어지기 전에 주제를 돌렸다.

"일단 엘리스와 길드장 님에게 돌아오라는 연락을 보낼 거야. 너도 아이리스 길드에 머무르면서 조사를 도와줘."

"네. 아, 근데 급하게 출국한 거라서 한국에 갔다가 금방 돌아올게요. 숙소는 제공해주시는 거죠?"

"응. 숙소 정도는 제공할…."

그때. 아이린의 머릿속에 이호연의 수행원처럼 딱 붙어있던 스칼렛이 스쳤다.

숙소를 제공하면 당연히 그 둘이 같이 지내지 않을까.

'아이린 아가씨.' 라며 말을 걸던 그녀의 얼굴이 다시 떠오른다.

"왜 그래요 아이린 씨?"

"잠시. … 잠시만 기다려봐."

아이린은 엘리스가 얻어낸 이호연의 일주일 숙박을 떠올렸다.

사실상 엘리스의 집은 아이린과 같이 쓰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호연이 엘리스의 집에서 숙박한다면 아이린과 관계를 가지는 것도 확실한 일이다.

'… 그럼 3.5일은 내 거라고 봐도 되는 거 아닌가?'

잠시 고민하던 아이린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다.

아이린도 양심이라는 게 있다.

동생이 얻어낸 일주일 합숙을 빼앗는 건 언니로서 도리가 아니다.

성욕이 쌓여서 제대로 된 판단을 못한 걸까.

어차피 집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스칼렛과 지내는 건 똑같다. 쓸데없는 욕심은 잠시 지우자.

"엘리스가 언제 돌아올지는 나도 몰라. 길면 이틀 정도지만 짧으면 오늘 올 수도 있으니까 최대한 빨리 오는 편이 좋을 거야."

"알겠어요. 아, 그전에 루시퍼의 시체도 드릴까요?"

"응. 일단 조사해볼 가치는 있는 것 같아."

이야기를 마무리하면 스칼렛이나 찾으러 가야겠네.

이호연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아이린과 대화를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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