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7화 > 아이리스 길드 (6)
훈련실의 구석에 있는 프라이빗 룸.
개인 훈련을 위한 곳이지만 오늘은 비밀 이야기를 위한 장소로 사용했다.
"친우여, 무슨 일이지? 아직 내 가르침을 받아야 할 인간들이 많이 남아있다만."
"흥. 인간 주제에 나를 마음대로 오라 가라 하는 군."
"여기라면 길드원들에게 비밀로 이야기할 수 있을 거야."
"고마워요. 아이린 씨."
지옥 놈들에게 할 말이 많지만, 그전에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다.
아까부터 거슬렸거든.
"알베도. 나 기억하지?"
"… 예."
이호연은 알베도와 눈을 마주쳤다. 자신의 눈을 슬쩍 피하는 게 자기 자신의 위치는 알고 있는 모양이다.
인큐버스인 알베도.
그를 살려둔 이유는 아이린이 조사의 성과로 알베도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여러모로 귀찮아서 아이리스 길드에 던져두고 연락을 안 한 지 꽤 되긴 했는데… 그 사이에 애가 왜 이렇게 됐을까.
"너 원래 그렇게 버릇이 없었냐? 마지막에 봤을 때만 해도 애가 착했는데."
"…… 죄, 죄송합니다."
"정신 차리고 임마. 길드원은 괜찮아도 엘리스나 아이린 씨한테는 꼬박꼬박 존댓말 해. 알겠지?"
"옙 …."
"Strange Nightmare. 예전에도 궁금했는데 어째서 저 인간에게 그렇게 굽실대는 거냐?"
"닥쳐라. 케이론."
이호연은 눈을 부라리며 케이론을 째려보는 알베도를 바라봤다.
차마 자신에게 화를 내진 못하니 만만한 케이론에게 덤비는 모양이다.
얼마나 화가 났는지 마력을 풀풀 흘려대고 있었다.
'저렇게 마력을 흩뿌리는데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네.'
분명 지옥의 마력인데… 어딘가 다른 건가?
이호연은 아이린을 슬쩍 바라봤다.
먼저 그녀에게 지옥의 마력이 가진 위험성을 알려줘야 한다.
"케이론. 너도 알베도처럼 마력 좀 꺼내봐."
"이렇게 말인가?"
"잘했어. 아이린 씨. 어때요. 검은 기둥에서 봤던 마력하고 비교해봤을 때 유사한 점이 느껴져요?"
"색이 비슷하긴 하네. 하지만 검은 기둥에서 조사했던 기록과는 다른 것 같은데?"
아이린도 1 팀장으로서 검은 기둥 조사에 어느 정도는 참여했지만, 그녀는 검은 기둥에서 어떠한 위협도 느끼지 못했다.
'뭐가 다른 거지?'
이호연은 케이론과 알베도가 꺼낸 지옥의 마력을 보며 고민을 이어갔다.
겉으로 보기에 차이는 없다.
자신이 구분할 수 없다면 다른 사람들도 구분할 수 없다는 뜻인데, 같은 지옥의 마력이라면 어째서 이질감을 눈치채지 못하는 거지?
"알베도."
"예, 옙."
"지옥에서 마력을 사용했을 때랑 여기서 사용했을 때랑 다른 점이 느껴지냐?"
"무슨 말을 하시는 건 지 잘… 마력을 사용하기 힘들긴 하지만 다른 점은 없습니다."
"케이론 너는?"
"환경이 다르긴 하군. 지옥에는 지옥의 마력이 가득 찬 반면 이곳은 지구의 마력이 가득 차 있지. 하지만 내 마력이 다르진 않을 거다."
지옥의 마력을 직접 본 아이리스 길드원들이 이질감을 느끼지 못했다.
케이론의 말이 맞다면 이호연의 생각도 조금은 어긋난 곳이 있다는 뜻이다.
"… 그럼 이건 어떤데?"
스르륵-
이호연의 손바닥 위에 칠흑 같은 어둠이 피어난다.
레베카도 임솔도 자신의 마력을 보고 나서야 이질감을 눈치챘다.
그래.
애초에 전제가 틀린 게 아닐까.
검은 기둥에 대한 인식이 바뀐 게 아니다.
'지옥의 마력'의 인식이 바뀐 거라면?
"오, 오오…! 몸이 오싹한 기분이 듭니다."
"으음?! 이것은 지옥의 향? 지옥의 향수가 느껴진다."
"어떻게 이런 완벽한 마력을…."
"인간, 아니 이호연. 그건 뭐지?"
어쩐지 이상하더라.
좋게 말하면 예상대로. 나쁘게 말하면 짜증 나는 반응.
이호연은 한숨을 내쉬며 케이론과 알베도에게 말했다.
"내가 예전에 지옥의 마력에 대해 물어봤을 때는 환경이니 뭐니 그런 말 안 했잖아. 마력이 이상하면 그때 진작 말해줬어야지."
"그랬었나? 사소한 일 따윈 기억에 남기지 않는다."
… 이 새끼들 장난하는 건가?
좀 더 일찍 말해줬으면 좋았잖아.
그럼 상황 파악이 더 쉬워졌을 거다.
"이제야 내 힘이 약해진 이유를 알겠군! Strange Nightmare! 너도 이제 다시 강함을 되찾을 때가 됐다!"
"그래. 단순히 적응의 문제가 아니었다. 환경이 꽤나 큰 문제였어."
욕이라도 한 바가지 퍼부어주려고 했는데, 생각해보면 케이론과 알베도의 잘못이 아닐지도 모른다.
'얘들도 인식이 뒤바뀌었을지도 몰라.'
케이론과 알베도는 지옥 출신이었기에 괜찮을 거라 생각했지만, 신의 기준으로 봐야 한다.
인간이나 케이론이나 신이 보기엔 똑같은 미물이겠지.
인간의 인식만 바뀐 게 아니라 모든 존재의 인식이 바뀐 거다.
'루시퍼와 전투 뒤에도 이상함을 눈치챈 건 임솔 뿐이었어.'
지옥의 마력을 접촉하는 게 트리거였다면 루시퍼와 전투에 참여한 인원이 전부 이상함을 느꼈어야지.
'나 혼자만 괜찮은 이유는 내기의 신 때문인가?'
이호연은 이레귤러.
내기의 신에 의해 초청된 사람이기에 원래 이 세계에 속하는 사람이 아니다.
이 세계의 신이 자신에게는 영향을 끼칠 수 없었거나, 내기의 신이 중간에서 막아준 게 아닐까.
"확실히 이건 비슷해. 루시퍼와 검은 기둥의 마력까지… 그런데 너는 어떻게 이 마력을 사용하는 거야?"
"마법 연구의 결과죠."
"…."
아이린이 눈가를 좁혔지만 이호연은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에요. 루시퍼의 습격도, 검은 기둥도, 던전의 폭주 현상도. 모두 판데믹이 벌이는 일이라는 거예요."
"지옥의 마력이라고 했지? 판데믹은 지옥의 마력이라는 거랑 무슨 관계야? 단순한 테러집단 치고 규모가 많이 크긴 하지만… 최근에 힘을 쏟아내고 조직이 와해되면서 조금 주춤하는 것 같던데."
"단순 테러집단은 아니에요. 이 세계에 지옥을 소환하려는 놈들이죠."
"지옥?"
"지옥은 케이론 하고 알베도가 태어난 이세계에요. 검은 기둥을 사용해 그 세계를 지구와 동화시키려는 거예요."
케이론과 이호연의 대화를 듣고있던 아이린은 처음 듣는 용어들에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케이론이 단순한 괴수가 아니었다는 건가?
물론 지옥이니 뭐니 몇 번이나 지껄이긴 했지만… 당연히 헛소리인 줄만 알고 있었다.
"미안한데 너무 진도가 빨라서 못 알아듣겠어. 판데믹은 대체 무슨 목적으로 그러는 건데?"
"목적은 저도 모르겠어요. 확실한 건 그 미친놈들을 내버려 둘 순 없다는 거예요."
아이린은 눈을 찌푸리는 이호연을 보며 내심 놀랐다.
여자밖에 모르는 줄 알았는데, 판데믹에 대한 증오는 진심같았다.
아이린은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확실한 정보지? 판데믹의 목적은 나도 처음 듣는 내용인데."
"네. 검은 기둥에 대한 조사를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밝혀질 거예요."
"그 정보를 어떻게 아는지 궁금하지만… 검은 기둥에 대한 재조사. 그래. 알겠어. 지금 하는 조사가 끝나는 대로 길드장님에게 보고할게. 나랑 엘리스가 보증한다면 아이리스 길드의 총력을 쏟아붓는 것도 어렵지 않으니까."
"아."
지금 길드장이 하는 조사는 루시퍼에 대한 것.
그리고 그가 찾는 정보의 대부분은 이호연이 알고 있다.
이호연은 헛기침을 한 뒤에 말을 이었다.
"… 그 루시퍼에 대한 조사도 말인데요. 저한테 정보가 있어요. 케이론한테 궁금한 것 좀 물어보고 제가 아이린 씨 방으로 찾아갈게요."
"또 정보가 있어? 진짜 내가 모르는 정보원이라도 있는 거야? 혹시 스칼렛인가?"
"그런 거 아니에요. 금방 끝내고 갈게요."
"내가 도와줄 건 없고?"
"네. 쉬고 있어요."
아이린은 내보낸 뒤.
이호연은 케이론과 알베도를 보며 자리에 앉았다.
이 놈들의 인식도 뒤바뀌었다는 건 생각 못했네.
"뭐가 궁금하다는 거지? 이호연? 너에게 말해줄 새로운 정보같은 건 없다."
"저, 저도 없습니다."
"알베도 넌 됐고. 케이론 네가 저번에 했던 거 있잖아. 릴리아나의 기억을 구슬처럼 뽑아냈던 거."
여기까지 찾아와서 이 놈들을 만난 이유가 지옥의 마력뿐만은 아니었다.
바로 케이론이 사용하던 특별한 기술 때문이었다.
"기억의 구슬을 말하는 건가? 그건 우리 일족의 비기다."
"그래. 어쩐지 따라 해보려고 했는데 힘들더라. 그거 남한테도 사용할 수 있는 거지?"
"나를 뭘로 보는 거지? 상대가 허락한다면 가능하다."
"잘 됐네. 좀 해봐."
따악-
이호연은 손가락을 튕겨 허공의 이 공간을 열었다.
루시퍼의 시체를 보관하기 위해 수린 누나에게 받은 이 공간이었다.
쿵-!
잠시 마력을 움직이자 루시퍼의 거구가 훈련실에 떨어졌다.
당장이라도 일어나 괴성을 지를 것 같지만, 목숨이 끊어진 건 몇 번이나 확인했다.
"이건… 정말 lucifer 군. 죽었다는 말이 사실이었나."
"눈앞에 시체가 있는데 거짓말이겠냐. 그리고 루시퍼는 왜 Lucifer야. 이상하잖아. Wild Gladiator 같은 이상한 이름 없어?"
"무슨 소리지? Killer Queen이 Killer Queen 인 것처럼 Lucifer는 Lucifer다."
"맞습니다. Lucifer라는 이름이 어디가 잘못되었습니까?"
"… 둘 다 닥치고 얘기나 해봐. 케이론. 기억의 구슬 뽑을 수 있어?"
이호연은 쓸데없는 대화를 그만뒀다.
지옥 놈들을 지적한 자신의 잘못이겠지.
케이론이 보여준 기억의 구슬은 꽤 신기한 기술이었다.
자신이 지금 보는 장면을 기억의 파편처럼 만드는 건 이호연도 가능하지만, 과거의 기억을 영상화해서 뽑아내는 건 조금 다르다.
게다가 자신의 기억이 아니라 죽은 자의 기억은 난이도가 훨씬 높겠지.
물론 시간을 들인다면 성공할 수도 있지만 이호연이 직접 연구하는 것보다 케이론에게 맡기는 편이 훨씬 쉽다.
"루시퍼의 기억을 보려는 목적이 뭐지?"
"당연히 마에스트로를 잡기 위해서지. 루시퍼의 기억에 증거가 있을 수 있으니까. 너무 부담 갖지 말고 해 봐."
"그 인간말이군. 흠. 알겠다."
큰 수확이 없을 수도 있지만, 보너스의 의미다.
할 수 있다면 하는 게 좋겠지.
수린 누나가 노력해서 시체를 내게 양도해줬지만, 솔직히 루시퍼의 시체로 딱히 할 수 있는 것도 없다.
케이론이 안된다고 하면 그대로 아이리스 길드에 넘길 생각이었다.
'그렇게 하면 수린 누나한테 좀 미안한가?'
날 위해서 기껏 챙겨준 건데.
뭐, 그만큼 아이리스 길드에서 뜯어내면 되겠지.
이호연은 루시퍼의 시체를 보며 이리저리 마력을 흘리고 있는 케이론에게 말을 걸었다.
"그래서, 기억의 구슬을 빼낼 수 있는 거야?"
"불가능하다."
"왜 못하는데?"
"나야말로 묻고 싶군. 어째서 될 거라고 생각했지? 죽은 자의 시체를 가져다 놓고 기억을 꺼내라니."
"쩝. 안되면 됐어. 훈련이나 하러 가라. 나중에 또 물어볼 게 생각나면 올게."
사실 이호연도 큰 기대를 한 것은 아니었다.
되면 좋고 안되면 말고.
딱 그 정도 기대였다.
"하지만…, 루시퍼라면 가능할 지도 모르겠군."
"뭐?"
"워낙 강한 악마다 보니, 죽어서도 의지가 남아있다. 처음 루시퍼가 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믿지 않았던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지. 이 세계에 그의 존재감이 남아있었다. 이것이 그 정체로군. 해봐야 알겠지만 의지에 깊게 박힌 기억이라면 꺼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깊게 박힌 기억? 정확히 무슨 기억인데?"
"말 그대로 루시퍼에게 큰 충격이었거나 기억에 박혀 절대 잊을 수 없는 광경 같은 것이지. 기억의 구슬을 꺼내보기 전까진 알 수 없다."
"… 없는 거 보단 낫겠네."
깊게 박힌 기억이라.
왠지 중요한 장면이 있을 것 같았다.
"루시퍼의 첫 경험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진귀한 광경이야. 조금은 기대가 된다."
"미친 새끼 아니야 이거."
"아악…."
이호연은 케이론 옆에 쭈그리고 앉아 헛소리를 하는 알베도의 뒤통수를 후렸다.
인큐버스라 그런지 성욕이 없어졌는데도 저런 소리를 하네.
기분 나쁘다.
"당분간 훈련은 못하겠군. 기억의 구슬을 만드는 데 집중하겠다."
"오래 걸려? 그때는 금방 만들었잖아."
"자신의 기억과 남의 기억은 엄연히 다른 법.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흠. 알겠어. 루시퍼의 시체는 아이리스 길드한테 넘길 거야. 미리 귀띔 해놓을 테니까 아이린 씨한테 요청하면 될 거야."
"루시퍼의 기억은 나도 꽤나 기대되는군. 인간의 훈련을 도와주는 것도 좋지만 이런 것도 재밌겠어."
시간이 걸리는 건 아쉽지만, 집으로 돌아갔다가 결과가 나온 뒤 다시 돌아오면 되겠지.
아이린에게 말해놓으면 다음 방문 때는 더 쉽게 올 수 있을 거다.
"알베도. 내가 한 말 까먹으면 안 된다. 아이린 씨랑 엘리스한테 까불면 안 돼."
"아, 알겠습니다…."
루시퍼의 시체를 갈무리한 뒤.
허리를 90도로 숙이는 알베도를 보며 이호연은 프라이빗 룸을 빠져나왔다.
다시 1팀장 실로 돌아가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