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 야겜에 빙의했다-566화 (566/648)

< 566화 > 아이리스 길드 (5)

"… 그러니까 너는 검은 기둥에 대한 조사 협력을 바라는 거네?"

"쉽게 말하면 그렇죠."

아이린은 커피잔의 손잡이를 잡으며 이호연의 말을 다시 되새겼다.

하지만 눈앞에 앉아있는 이호연의 부탁이 영 이해가 되질 않았다.

"이해가 잘 안 되네. 지금 한국은 밤일 텐데, 겨우 그런 것 때문에 그 고생을 하면서 여기까지 찾아온 거야?"

얼마나 중요한 부탁인가 조마조마했는데, 아이린이 생각하기에 검은 기둥을 조사하는 일이 그 정도로 중요할 것 같진 않았다.

이미 전세계적으로 끝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겨우 그런 게 아니에요. 검은 기둥에 판데믹이 연관되어 있다면 세계적인 재앙이 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아이리스 길드에선 이미 검은 기둥에 대한 조사를 마쳤는걸?"

"네. 아이리스 길드라면 당연히 조사를 마쳤겠죠. 하지만 석연치 않은 점이 더 있어서 그래요."

"그 기둥은 가까이 가지만 않으면 되는 단순 구조물이잖아. 던전 폭주현상도 새로 나타난 이상현상일 뿐이고."

"전 세계에 동시에 발생한 검은 기둥이 단순 구조물이라니 말이 안 되지않아요?"

"하지만 마법을 처음 사용할 때도 그랬고 던전이 처음 나왔을 때도 그랬어. 지금은 당연한 일이잖아? 인간은 새로운 걸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니까."

이 사람 왜 이렇게 말을 잘해.

순간 말문이 막힌 이호연은 곧바로 마력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 그렇긴 한데요. 아이린 씨. 루시퍼가 사용하던 마력 기억하죠? 검은 기둥에서 나오는 그 기분 나쁜 기운하고 비슷하지 않아요?"

"그 거뭇거뭇한 마력말이지? 으음, 그런가? 생각해보니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어."

역시 아이린도 전혀 감을 잡지 못했구나.

루시퍼와 전투에 직접 참여했는데도 지옥의 마력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다.

"안 그래도 조사하면서 말해줄 게 많아요. 아이리스 길드에 신세 지고 있는 놈들 있죠? 걔들 마력도 좀 조사해볼 거예요."

"케이론 하고 알베도말이지? 으음? 그러고 보니 걔들 마력도 검은색을 띠고 있긴 했어."

"네. 같은 지옥 출신이니까요. 그리고 검은 기둥에서도 그 지옥의 마력이 흘러나오고 있어요."

"들어보니 연관이 없다고 하진 못하겠네. 그런데 넌 그 이상함을 어떻게 눈치챈 거야? 같이 있던 나도 몰랐는데."

제가 주인공이라서요. … 라는 말을 할 순 없겠지.

다행히 변명도 이미 생각해 놨다.

이호연에겐 무적의 변명이 있다.

"마법 연구 중에 알아냈어요."

"마법사들은 뭐만 하면 마법 연구라고 하니까 믿을 수가 없어. 특히 넌 맨날 그러잖아."

"… 진짜예요. 제 별명 아시죠? 천재 마법사 이호연."

"알긴 하지. 너무 유명해서 문제지만."

이호연은 미국의 마법사 학회에서 인정받은 천재 마법사.

천 년에 한 번 태어날까 말까라는 임솔의 재능을 뛰어넘었다고 평가받고 있으니 그 실력은 의심할 수 없다.

문제는 그 핑계를 너무 자주 댄다는 거겠지.

아이린은 고개를 저으며 옆에 다소곳이 앉아 커피를 마시는 스칼렛에게 물었다.

"스칼렛, 너도 이호연의 의견에 동의하는 거야?"

"글쎄요. 저는 호연 님의 의견에 따를 뿐입니다."

"사랑에 미쳐서 길드까지 그만둔 여자 답네. 일편단심이야."

"커흡."

따악-

이호연은 빠르게 손가락을 튕겼다. 동시에 공중에 흩뿌려진 검은 액체들은 깔끔하게 사라졌다.

사랑을 위해 길드까지 버린 스칼렛의 품위는 자신이 지켜줘야지.

"그 얘기는 하지 말아 주시죠. 아이린 아가씨."

"왜? 난 한국에 있어서 잘 몰랐는데, 이미 일반 길드원들 사이에 다 퍼져있던데?"

"…."

스칼렛은 눈을 질끈 감았다.

길드장 아이작.

헤어질 때는 분명 좋은 기억이었는데, 다시 만나면 죽여버리고 말겠다.

"아무튼… 네가 필요한 건 검은 기둥의 재조사라는 거잖아. 그 정도는 도와줄게. 하지만 아이리스 길드 전체의 협력을 받으려면 길드장님의 허락을 받아야 해."

"예. 그렇겠죠."

"근데 길드장 님은 아이리스 길드의 이익을 최우선하는 분이라. 어떻게 될지 모르겠네."

"괜찮아요. 아이린 씨가 도와주면 되잖아요."

"… 난 아이리스 길드가 이득을 보는 쪽으로만 움직일 거야."

아이린은 말을 꺼내면서도 입맛을 다셨다.

자신은 이호연에게 최대한 협력할 생각이었다.

그건 엘리스도 마찬가지겠지.

스칼렛의 말처럼 이호연이라면 엘리스를 '구워삶을' 수 있을 테니까.

사실 그 둘이 이호연을 도와준다면 그 순간 게임 끝이다.

아버지의 딸바보 기질을 생각하면 길드의 힘을 빌리는 것도 쉬울 거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픈 두 딸이 부탁한다면 곧바로 허락하겠지.

"괜찮아요. 진짜 설득할 거니까. 아, 훈련장에 가서 테스트할 게 있어요. 아직 그 지옥 출신 놈들 훈련장에 있죠?"

"케이론 하고 알베도라면 훈련장에 있을거야."

"그 놈들도 만나야 하니까 같이 가요."

"그래. 하지만 그전에 길드원들 진정 좀 시켜야겠어. 너희와 관련해서 괜히 이상한 소문이 퍼질 수도 있으니 확실히 입단속을 해야지."

"그건 제가 맡을테니 두 분은 일 보시죠. 안 그래도 길드 내부에 퍼져있는 헛소문도 좀 잠재워야 하니까요."

스칼렛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살짝 숙인 뒤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작게 '그 개새끼.' 같은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이호연은 슬쩍 웃은 뒤 남아있던 커피를 입에 털어 넣었다.

"우리도 가요. 아이린 씨."

*

저벅. 저벅.

이호연은 아이린의 뒤를 따라 아이리스 길드의 훈련장으로 향했다.

저번에 왔을 때와 달라진 곳은 없지만, 아이리스 길드원들을 자주 만나다보니 아이린의 뒤를 따라가는 게 여러모로 편했다.

"아이리스 길드에서 조사를 끝냈다는 말은 이미 정보를 사간 곳도 있다는 뜻이야. 심지어 검은 기둥같이 큰 사건은 길드장 님이 직접 조사했을 거야."

"밤의 황제가 직접 조사한 정보는 꽤나 귀하네요."

"그 정도로 큰 사건이었으니까. 안전하다는 공식 발표가 나온 후에도 정보를 사간 곳이 꽤 많아."

"아이리스 길드에서 틀린 정보를 팔았다라… 그래도 아직까진 괜찮을 거예요. 아직 사건이 일어난 건 아니니까 아이리스 길드에서 새로운 정보를 알아냈다고 하면 되죠. 아이린 씨가 한 일로 처리해도 좋겠네요."

아이린은 사후 대처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이호연의 모습을 보며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천재 마법사라는 이호연이 저렇게 자신 있어하는 걸 보니 확실히 짐작 가는 곳이 있기는 있는 모양이다.

"진짜 자신 있나 보네? 하지만 천재 마법사라고 밤의 황제를 우습게 보면 안 돼."

"그런 뜻이 아닌 거 알면서 왜 그러세요. 길드장, 아니 아버님이 저보다 마법을 잘하진 않잖아요."

이호연이 아무리 강해졌다고 해도 밤의 황제와 싸웠을 때 낙승을 장담할 정도는 아니다.

애초에 정보력이나 강함의 문제가 아니다.

임솔처럼 유전자 자체가 다른 게 아닌 이상, 이호연을 제외한 누구도 어긋난 것을 눈치채지 못한다.

"… 아버님?"

이호연은 눈을 살짝 찌푸리는 아이린을 보며 눈을 꿈벅거렸다.

아버님이 왜?

"장인어른 보단 아버님 쪽이 더 친근하지 않아요?"

빅토리아 아카데미의 이사장은 장인어른이라고 부를만한 외모지만, 아이리스 길드장 아이작은 아버님 정도가 좋은 호칭 같다.

겉보기엔 아직도 젊으시니까.

"그게 문제가 아니라… 음, 그래.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저 자식이 저렇게 들이대는 건 하루 이틀도 아닌데.

이호연의 별 것 아닌 호칭이 괜히 이상한 감정이 느껴진다.

이것도 엘리스를 보지 못한 탓이다.

아이린은 고개를 휘휘 저은 뒤 다른 말을 꺼냈다.

"네 의견이 맞는지 아닌 지는 둘째 치고… 그런 세계적인 재앙에 네가 앞장서서 나서는 이유는 뭐야? 그런 건 헌터 협회에서 해야지."

"세상이 망하면 안 되잖아요. 아이린 씨도 있고 엘리스도 있는데."

"흐음... 정말 그게 끝이야? 다른 목적은 없고?"

이호연이라는 사람을 지켜본 결과.

그렇게 나쁜 놈은 아니지만(여자 문제는 제외.), 또 이렇게 착한 놈도 아니다.

적당히 자기 자신을 위해 움직이는 사람이 왜 갑자기 이렇게 변한 거지?

이호연은 의심하는 눈빛을 보내는 아이린에게 미소를 지어줬다.

"아이린 씨는 몰랐겠지만 전 언제나 세계 평화를 위해 움직였어요."

"네 성격이 그런 줄은 몰랐네. 그것도 혹시 저주 때문이야?"

"…글쎄요."

갑자기 그렇게 훅 들어오면 어떻게 대답해.

이호연은 어떻게 대답해야할 지 몰라 말 끝을 흐렸다.

아이린도 이호연의 대답이 없자 흥미를 잃은 듯 조용히 걸음을 재촉했다.

'아쉽네.'

재미있던 대화가 갑자기 끊겼다. 아이린처럼 리액션이 좋은 사람이 재밌는데.

아이린과 엘리스에게도 가짜 던전에 대한 걸 이야기해야 할 생각이지만, 타이밍을 잡기가 쉽지 않다.

"그러고 보니 엘리스랑 아이린 씨가 연락을 못 받은 사정은 뭐예요?"

검은 기둥에 대한 이야기를 하느라 까먹을 뻔했네.

이것도 엄청나게 중요한 일인데.

"엘리스는 지금 후계자 수업을 받는 중이야. 최근 루시퍼의 아카데미 습격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있어. 길드장 님과 함께 다니면서 노하우 같은 걸 배우고 있을걸?"

"그런 거 막 말해줘도 되는 거예요?"

"너라면 괜찮지 않을까?"

이미 길드장을 아버님이라고 부르고 있고, 두 딸들에게 부정당하지 않았으니.

언젠가 다 알게 될 사실이다.

"와. 이건 좀 감동이네요. 아이린 씨도 그래서 연락을 못 받고 있던 거예요?"

"… 그렇다고 할 수 있지? 모든 길드원들이 루시퍼의 습격사건을 조사하고 있거든."

아이린은 휴가 중이었지만, 굳이 해명하기 싫었기에 대충 흘려 넘겼다.

이호연에게 답장을 할까 말까로 고민한 것이 자랑은 아니었으니까.

"근데 루시퍼에 대한 정보를 찾을 게 있어요? 가장 중요한 루시퍼는 이미 죽었잖아요."

"여러 가지 있어. 아카데미의 보안이 뚫린 흔적이 없거든. 그 정도의 마법진을 설치하려면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을 거야. 그게 가장 중요한 정보고…. 그 거대한 힘에 대한 정보. 그리고 판데믹과의 연관성을…."

"…."

아이린이 주절주절 이야기했지만 귀에 들어오지가 않았다.

왠지 가장 중요한 조사가 나인 것 같은데.

"맞아. 너한테 루시퍼의 시체가 있었지? 그거 조사할 권리 좀 줄 수 있을까?"

"아, 네. 뭐 그 정도야…."

이호연은 앞장서서 걸어가는 아이린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용건이 끝나면 바로 아이린에게 말해줘야겠네.'

훈련실에서 케이론과 알베도를 만난 뒤에 곧바로 시간을 내야겠는데.

천천히 타이밍을 찾을 시간은 없는 것 같다.

특히 엘리스는 지금도 정보를 찾느라 개고생을 하고 있을 테니까.

"고마워. 가자. 훈련실 다 왔어."

쿵-

타앙-!

주변을 울리는 미세한 마력이 느껴진다.

그 사이로 느껴지는 익숙한 지옥의 마력.

케이론의 것이었다.

"안에 보이네. 들어가자."

"넵."

지잉-

아이린의 뒤를 따라 들어간 훈련실 내부는 시끄러웠다.

"뻔한 공격이군! 이런 식으로 나 Wild Gladiator의 상대가 될 것 같으냐! 인간!"

"으, 으악!"

훈련실에 들어가자마자 거대한 창을 붕붕 흔들며 길드원을 상대하는 케이론의 모습이 보였다.

쟤도 오랜만이네.

처음엔 엄청 무서운 이미지였는데 갈수록 이상해지더니 마지막엔 완전히 돌아버렸었지.

상태를 보니 아직 돌아버린 머리가 안 돌아온 모양이다.

"1 팀장님! 휴가 중에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잠깐 일이 있어서 온 거니까 신경 쓰지 마."

"응? 오오. 이호연 아닌가! 오랜만이군! Wild Gladiator, 케이론이다. 내 친우 아이린도 있는가!"

"그래요. Wild Gladiator."

쟤는 만나자마자 지랄을 시작하는구나.

저 말투는 인간을 열받게 하기 위해 고민한 말투가 분명했다.

"이호연 자네가 왔다면 설마 Killer Queen도 함께 온 건가?"

"흐, 흐음?!"

구석에서 길드원들을 데리고 마력을 움직이고 있던 알베도가 흠칫하는 모습이 보였다.

눈치를 보고 있었나 보네.

"릴리아나는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라. 오늘은 너희 둘을 만나러 온 거니까"

"다들 급한 훈련 아니지? 얘들 좀 데려갈게."

"옙! 괜찮습니다!"

"무슨 일이지. 인간?"

"나 Wild Gladiator로도 모자라 Strange nightmare까지…."

"네네. 이 쪽으로."

아이린은 자연스럽게 켄타우로스와 인큐버스를 훈련실 안 쪽으로 이끌었다.

저 이상한 놈들을 관리하는 법을 제대로 알았나보네.

나도 빨리 가야지.

"감사합니다. 잠시 지나갈게요."

아이리스 길드원들에게 고개를 꾸벅 숙인 이호연은 재빨리 그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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