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5화 > 아이리스 길드 (4)
아이리스 길드의 내부. 1 팀장실.
조용한 공간에서 아이린은 다리를 꼰 채 와인잔을 기울였다.
달콤한 향기가 맴돌자마자 아이린은 슬쩍 눈을 감았다.
"엘리스…. 보고 싶네."
그녀가 좋아하던 달콤한 와인. 샤토 디캠.
아이린의 취향은 아니지만 이걸 마실 때면 엘리스와 함께 하던 시간이 떠오른다.
"엘리스가 돌아오려면 며칠은 더 걸릴 것 같은데. 나도 그냥 업무를 하나 맡아야 하나?"
밤의 황제라 불리는 아이작이 만든 정보 길드, 아이리스 길드.
엘리스는 아이리스 길드의 정식 후계자다.
아이작이 대충 산다고 해서 길드 운영까지 대충 하는 것은 아니기에, 엘리스는 후계자로서 확실한 절차를 밟아야 했다.
아이리스 길드의 차기 길드장으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당연히 정보 수집.
세계를 뒤흔드는 큰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아이작은 길드장으로서 직접 정보를 수집한다.
최근 일어난 큰 사건은 당연히 빅토리아 아카데미를 습격한 루시퍼.
지금쯤 엘리스는 아이작과 함께 전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고 있을 거다.
그 외에 아이리스 길드원들도 대부분 루시퍼의 습격 사건에 대한 조사를 진행 중이다.
공식적으로 엘리스와 함께 휴가 중인 아이린이 길드에서 가장 여유로운 사람이겠지.
"어차피 아버지가 못 찾는 거라면 다른 사람도 못 찾는다니까. 다들 헛고생을 좋아해."
짠-.
아이린은 거울에 비치는 자신과 건배하며 와인을 삼켰다.
엘리스와 함께 지내기 전에는 이런 식으로 자기 자신과 시간을 보내곤 했는데, 오랜만에 예전처럼 시간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거울에 비치는 모습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붉은 루비 같은 눈동자와 날카로우면서도 빠져들 것 같은 매력이 있는 얼굴.
아름다움을 인간으로 승화시킨 게 아이린이라는 존재같았다.
"가벼운 티타임이라도 보내고 싶네. 흐음."
홀짝-
아이린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TV처럼 바라보며 와인을 삼켰다.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도 좋지만 엘리스와 함께 보냈다면 더욱 좋았을 텐데.
방 한쪽에 엘리스와 함께 사용했던 티세트가 보인다.
차라리 같이 지냈던 시간이 없었다면 모를까.
한국에서 엘리스와 계속 지내다 보니 지금 그녀의 빈자리가 매우 커졌다.
"오늘도 언니는 쓸쓸히 잠들어야겠네. 엘리스."
아이린은 어디선가 베개 하나를 꺼냈다.
슬프지만 오늘 밤도 그녀가 베고 자던 베개를 끌어안고 잠들 수밖에.
언니가 이렇게 고통스러워하는 걸 엘리스는 알고 있는 걸까.
"흐읍."
아이린은 엘리스의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확실히 배어있는 사랑스러운 동생의 향기.
몸 안 쪽부터 야릇한 감정이 피어오른다.
"조금만 꼬시면 될 것 같기도 하고…."
아이린이 염원하는 건 엘리스와 단 둘이 보내는 밤.
물론 이미 그녀와 그렇고 그런 일까지 다 했지만, 제대로 된 사랑을 나누기 위해선 이호연이 없을 때 관계를 가져아한다.
뜨거운 눈빛의 교환과 터치.
서로의 혀가 얽히며 만들어지는 얇은 실.
자연스럽게 그 아름다운 육체를 쓰다듬는 상상을 한다.
"으음…."
그 아름다운 것을 자신이 가지고 놀 수 있다는 상상을 하면 지금처럼 몸이 뜨거워진다.
아이린은 슬쩍 창문 밖을 바라봤다.
이대로 열락의 시간에 빠져도 좋겠지만, 아직 해가 중천에 떠있었다.
조금 자제하는 편이 좋겠지.
'이호연은 뭘 하고 있으려나.'
아이린은 스마트워치를 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 이호연 : 아이린 씨. 메시지 확인하시고 연락 주세요.
- 이호연 : 엘리스도 그렇고 아이린 씨도 그렇고 많이 바쁜 거예요?
.
이호연에게 와있는 수많은 메시지들.
아이린은 아직도 고민 중이었다.
이걸 받아줘야 하는 건가?
엘리스가 없는 지금 답장을 해도 될까.
'왠지 배신하는 느낌이야….'
겨우 답장은 별 거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녀에겐 꽤 중요한 일이었다.
엘리스의 입장에서, 자신은 힘들게 임무를 수행하고 왔는데 언니는 이호연과 노닥거렸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니까.
"엘리스는 보기보다 여린 구석이 있어서 조심스럽게 다뤄야해."
엘리스와 뜨거운 밤을 보내기 위해 가장 쉬운 건 이호연의 도움을 받는 것.
하지만 엘리스도 이호연을 좋아하는 상황인 지금.
그 협력을 받는 상황 자체가 애매했다.
"너무 과한 걱정인가…? 엘리스가 언제 올지도 모르잖아. 이호연은 고객으로서도 대우해야하고…."
쩝.
메시지를 언제까지나 무시할 순 없다.
이호연과 관계는 아이린에게도 중요했으니까.
세계 최고의 마법사라는 배경도 중요하지만, 엘리스와 관계를 가질 수 있게 만들어주는 건 그뿐이다.
그리고… 엄청나게 잘한다.
"…."
그와 보낸 밤들이 스쳐지나가고, 아이린의 몸 안 쪽이 뜨겁게 달아오른다.
엘리스와 뜨거운 밤을 보내는 상상을 했던 때 보다 더욱 격렬히 반응했다.
"쓰레기주제에 쓸데없이 능력은 있어서 사람을…. 하아."
딸깍-
마력으로 문 잠금.
아직 해가 중천이지만, 자신도 모르게 다리 사이에 손 집어넣음
열정적인 키스라도 한 것처럼 젖어있음.
"이해가 안돼…. 으."
그래. 조금 잘생기긴 했는데.
아무리 그래도 자신과 엘리스보단 조금 모자라잖아.
그런데 왜 자신의 몸은 이렇게 반응하는 걸까.
그 쓰레기한테 당한 게 얼마인데.
"으음, 으흣…."
이호연에게 당한 짓들을 생각하니 더욱 몸이 뜨거워지는 것 같다.
이런 모습이 조금은 창피하지만, 그 배덕감이 다시 몸을 달군다.
아이린의 목소리에 달콤한 교성이 섞이려는 찰나.
작은 발소리가 들려왔다.
저벅- 저벅-
"흡…!"
숨을 들이키며 어깨를 움츠린 아이린은 천천히 다리 사이에서 손을 거두었다.
작은 발소리는 점점 커지고 있었다. 1 팀장실은 아이리스 길드에서도 구석에 있으니 어딘가로 가기 위해 거쳐갈 순 없다.
즉 저 발소리의 목표는 이곳이다.
아이린은 눈 깜짝할 새에 클린 마법을 사용한 뒤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똑똑똑.
"1 팀장님! 보고드릴 게 있습니다."
"응. 들어와도 좋아."
끼익-.
문을 연 길드원은 의자에 앉아있는 아이린을 보자마자 고개를 숙였다.
"휴식을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다급한 보고가 있어서 결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
"무슨 일인데?"
군기가 잡혀있는 걸 보니 신입인 모양.
아이린은 다리를 꼰 채 길드원의 보고를 들었다.
"1 팀장 님에게 손님입니다."
"나한테 손님? 오늘 약속은 따로 없었는데."
현재 아이린은 공식적으로 휴가 중이다.
자신에게 찾아오는 사람이 약속도 없이 올리는 없다.
"예. 약속은 아니지만…. 극비 임무를 증명하기 위해서 아이린 님의 확인이 필요합니다."
"… 극비 임무?"
생소한 단어에 아이린은 눈을 찌푸렸다.
표정을 보니 진지한 것 같은데, 대체 극비임무가 뭐지?
"지금 3 팀장이 길드에 있잖아. 3 팀장은 모른대?"
"예. 손님의 말로는 아이린 님이라면 모두 알고 계시다고…."
"내가?"
'그게 무슨 개소리야.'
길드장과 엘리스는 부재중이고, 부길드장인 어머니는 길드 일에 크게 관여하지 않는다.
단언컨데 지금 아이리스 길드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 중에 아이린이 모르는 건 없다.
자신만 아는 극비 임무 같은 게 있었다면 아이린도 이렇게 쉬고있지는 않았을거다.
"일단… 하아. 길드장 님에게 극비 임무 같은 건 전달받은 적이 없어. 왜 이런 걸 3 팀장 선에서 처리 안 하고 나한테 보고를 올리는 거야?"
"죄, 죄송합니다!"
웬 잡상인의 장난질에 자신의 휴가가 방해받아야 하는 건가.
아이린은 한숨을 푹 내쉬며 손을 휘휘 저었다.
명백한 축객령에 길드원은 고개를 연신 숙였다.
"죄송합니다. 하필 이름이 알려진 이호연 마법사와 전 길드원인 스칼렛이 찾아와서… 이 일은 3 팀장이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누구? 손님이 누구라고?"
"이호연 마법사와 전 길드원인 스칼렛입니다."
이호연. 그리고 스칼렛.
그 이름들이 왜 여기서 나오는 거지?
아이린은 빠르게 머릿속에서 계산기를 두드렸다.
'모르겠어.'
이유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그들을 이대로 보내면 안 된다는 것.
아이린은 1 팀장실에서 빠져나가려던 길드원을 붙잡았다.
"…… 기억났어."
"예?"
"극비 임무 기억났다고. 손님 두 분 조용히 여기로 모셔와. 길드원들 입단속은 3 팀장에게 맡기고."
"아, 알겠습니다!"
허겁지겁 1 팀장 실을 빠져나가는 길드원을 보며 아이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
탁- 탁-.
아이린이 테이블에 커피잔을 내려놓는다.
그녀는 자신의 방에 앉아있는 두 남녀를 보며 팔짱을 꼈다.
"잘 마실게요. 아이린 씨."
"아이리스 길드의 커피는 여전하군요."
홀짝-
이호연은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대형 길드에 있는 커피는 맛도 좋네.
그때 한숨을 쉰 아이린이 말을 이었다.
"팔자 좋게 커피를 마시기 전에 할 말이 있지 않아?"
"아, 갑작스럽게 찾아와서 죄송해요. 아이린 씨."
"실례했습니다. 아이린 아가씨."
고개를 숙이는 둘을 보며 아이린은 눈을 찌푸렸다.
이렇게 말도 없이 쳐들어오다니.
대체 아이리스 길드를 뭐라고 생각하는걸까.
"내가 바로 눈치채고 데려와서 그렇지. 혹시나 들켰으면 어쩌려고 그런 짓을 한 거야. 정당한 절차를 밟고 오면 되잖아. 아니, 애초에 나한테 연락을 했으면 바로 들여보내줬을 거 아니야."
"저도 그러고 싶었는데 아이린 씨가 연락을 안 받았잖아요. 엘리스도 연락을 안 받아서 어쩔 수 없었어요."
"아…."
맞다. 방금까지 이호연의 연락을 받을까 말까 고민하고 있었지.
아이린은 눈을 두 어번 깜박거린 뒤 바로 말을 이었다.
"그건 사정이 있었어. 크흠. 그래도 그렇지. 왜 그렇게 위험하게 들어오는 거야. 혹시나 길드원들이 의심했으면 어쩔 뻔했어. 그리고 극비 임무는 뭐야? 차라리 나를 만나게 해 달라고 하면 되지."
헛기침을 한 아이린은 스칼렛을 바라봤다.
이호연이 그런 계획을 세웠을리는 없다. 아이리스 길드를 잘 아는 스칼렛의 계획이겠지.
"죄송합니다. 절차를 밟기엔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그리고 극비 임무는 제 실수였습니다. 시간이 부족하다보니 간과한 점이 있었거든요."
"스칼렛. 이호연은 그렇다 쳐도 네가 그렇게 대책 없는 성격인 줄은 몰랐어. 게다가 다짜고짜 길드장 님을 팔아먹으면 어떡해? 혹시나 길드장 님이 있었으면 어쩌려고."
"나도 엄청 계획적인 편인데."
두 여자들의 대화에 슬쩍 끼어보려 했지만 이호연의 말에 집중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저도 생각이 있었습니다. 길드장 님이 이 시간에 계실리가 없으니, 엘리스 아가씨와 아이린 아가씨라면 호연 님이 어떻게든 구워삶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참나. 구워삶는 건 뭐야?"
감자도 아니고 구워삶다니.
말투가 마음에 안 든다.
누가보면 자신이 이호연의 말에 껌뻑 죽는 줄 알겠어 아주.
아이린은 팔짱을 풀고 허리에 손을 얹었다.
"스칼렛.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리고 저번에 만났을 때는 아이린 아가씨라고 안 부르지 않았어?"
"무슨 소리십니까. 아이린 아가씨."
"너 굉장히 재밌는 성격이었네. 길드원일 때는 몰랐는데."
"싸우지 마세요. 스칼렛. 우리가 다짜고짜 찾아왔으니까 사과해야지."
"죄송합니다. 아이린 아가씨."
이호연의 말을 듣자마자 고개를 꾸벅 숙이는 스칼렛을 보니 왠지 기분이 더욱 나빠졌다.
하지만, 이런 곳에서 기싸움을 하기엔 시간이 아까웠다.
아이린은 옅은 한숨을 내뱉으며 이호연을 바라봤다.
"하아. 그래. 너희들하고 대화를 계속한 내 잘못이지. 그래서 왜 찾아온 거야? 절차도 안 밟고 온 거면 다급하게 전해야 할 말이라도 있어?"
"그건 제가 설명할게요."
드디어 내가 말할 수 있겠구나.
이호연은 헛기침을 하며 말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