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 야겜에 빙의했다-564화 (564/648)

< 564화 > 아이리스 길드 (3)

사뿐사뿐.

풀숲에서 걸어 다닐 때 나기엔 적합하지 않은 소리.

스칼렛은 고요한 발걸음을 옮겼다.

아이리스 길드원이던 시절. 너무나 많이 다녔던 길이기에 암호를 입력하는 위치도 아직 생생하게 기억했다.

마력이 가장 진한 곳에 서있는 거대한 소나무.

스칼렛은 나무에 손을 얹은 채 마력을 집어넣었다.

띡띡띡. 띠익- 띡. 띠익-

'저게 무슨 암호야?'

이호연은 예민한 감각으로 스칼렛의 마력을 읽어냈다.

단순한 형식을 보니 모스 부호인가?

모스 부호라면 아카데미의 교육과정에 포함되어 있기에 외워놨던 기억이 있다.

이제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 방식이지만 알아두는 건 필수니까.

이호연은 눈을 찌푸린 채 스칼렛의 마력을 분석했다.

'스, 칼, 렛 라이트?'

… 그냥 이름이잖아.

이호연은 약간 실망한 채로 스칼렛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마법이 있는 세계관에서 첨단 기술도 아닌 모스 부호가 암호라고?

정말 이래도 되는 건가?

세계 최고의 길드 보안 수준이 이 정도 밖에 안되는 거야?

조금은 실망이네.

"왜 반응이 없을까요. 이상하군요."

한편 소나무에서 손을 뗀 스칼렛은 고개를 돌려 이호연을 바라봤다.

"아직 공격이 올 것 같진 않아. 근데 암호 입력하는 방식이 그게 맞아?"

"예. 걱정하지 마시죠. 유서 깊은 암호 전달 방식입니다."

"당연히 유서 깊긴 하겠지. 너무 유서 깊어서 이제 안 쓰잖아."

"사실 저도 그렇게 생각하긴 합니다. 아마 길드장님의 취향 아닐까요."

"…."

그렇게 말하면 반박할 수가 없네.

밤의 황제를 많이 만난 건 아니지만 그 사람도 특이한 사람이라는 건 분명하니까.

지이잉-

"응?"

모스 부호에 대한 궁금증이 풀리기도 전에 이호연이 서있는 바닥이 떨리기 시작했다.

자연적 현상이 아닌 마법으로 만들어진 현상.

이호연은 룬의 결계를 유지하며 전방위로 마력을 펼쳤다.

하지만 스칼렛은 태평하게 반응했다.

"다행히 된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스칼렛?"

"힘은 빼셔도 됩니다. 다행히 제 암호가 아직도 통하는 모양이니까요."

스르르륵-

이윽고 눈앞의 땅이 들리기 시작했다.

마치 엘리베이터가 올라오는 것 같은 모습.

스칼렛에게 들은 내용과 달랐기에 이호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 워프 게이트 어쩌고 하지 않았냐?"

"글쎄요. 제가 없는 동안 시스템이 바뀐 걸까요. 그래도 공격을 할 것 같진 않습니다. 당직 근무자가 조심성이 많은 성격일 수도 있고요."

"당직 근무?"

"아이리스 길드원 중 하나가 안에서 대기하고 있을겁니다. 길드원들이 워낙 많다 보니 순번이 돌아가는 데 시간은 꽤 걸리지만 저도 몇 번 해봤습니다."

"음…."

아무튼 스칼렛이 괜찮다고 하면 괜찮은 거겠지.

이호연은 마력을 갈무리하며 정면에 시선을 고정했다.

"스칼렛!"

엘리베이터처럼 생긴 땅이 열리고, 그 안에서 나온 건 스칼렛과 비슷한 금발의 여성이었다.

그녀는 반가운 얼굴로 스칼렛에게 다가왔다.

"제나? 오랜만이네요."

"갑자기 네 암호가 입력돼서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스칼렛, 왜 말도 없이 찾아온 거야?"

스칼렛은 제나에게 다가가며 인사했다.

둘의 거리감을 보니 안면이 있는 사이인 것 같다.

"그 일은 죄송하게 됐습니다. 호연 님. 여기는 제나 케일. 제 친한 친구입니다. 마침 오늘 당직이 제나라니 운이 좋군요."

스칼렛이 친한 친구라고 할 정도면 정말 친한 친구인 모양이다.

이호연은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스칼렛의 옆에 섰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호연 마법사군요. 어린 나이에 마법사 학회의 학회장 상을 부여받은 세기의 인재. 하지만 그의 가장 뛰어난 재능은 남녀를 가리지 않고 유혹하는 얼굴이라는 정보가 있었는데 정말이었네요…."

"… 예?"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상대의 정보를 혼자 중얼거리는 게 제 버릇이라서."

뭐 그딴 버릇이 다 있어. 당신이 왜 정보 길드에서 일하는거야.

이호연은 눈가를 좁히며 제나와 악수했다.

아쉽게도 딱히 사귀어서 도움 될 것 같은 사람은 아니었다.

"워프 게이트 사용 때문에 온 거지?"

"오랜만에 길드에 좀 가보려고 합니다. 일이 있어서요."

"마침 내가 당직이라 다행이네. 까다로운 3 팀장님이었으면 절차를 밟아야 했을 거야."

"확실히 그건 도박이었죠. 하지만 3 팀장 님이 항상 주말 전에 당직근무를 선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니까요."

"아하~ 스칼렛은 역시 똑똑하네. 그러고 보니 제대로 된 송별회라도 했으면 좋았을 텐데~. 지금 생각해도 아쉬워."

오랜만에 만났기에 대화주제가 쌓여있었는지 두 여성은 이호연을 빼고 떠들기 시작했다.

지금은 그냥 조용히 듣고 있는 게 낫겠지.

"그나저나 사랑을 위해 길드를 탈퇴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진짜 쇼크였는데. 설마 이호연 마법사 님과 그런 관계였다니. 진짜 부럽다"

"케흑! 콜록콜록!"

뒤에서 듣던 이호연의 귀가 쫑긋해지는 대사.

스칼렛은 제나의 입에서 나온 끔찍한 말을 듣자마자 사레들린 사람처럼 기침하기 시작했다.

"괜찮아?"

"제나. 그딴 소문은 대체 누가 퍼트린 거죠?"

"스칼렛이 직접 말한 거잖아."

"길드에서 나올 때 그런 말을 한 기억은 없습니다."

"응? 무슨 소리야. 길드장 님에게 한 말이잖아. 네가 길드를 탈퇴한 뒤에 길드장 님이 길드원들을 모아놓고 너랑 면담하며 있었던 일을 자세히 읊어주셨거든. 꿈을 찾아가는 모습을 응원한다며 감동의 눈물을 흘리셨어."

"하아…."

그 미친 새끼.

스칼렛이 조용히 중얼거리는 말을 들은 이호연은 스칼렛을 놀리려던 입을 다시 다물었다.

분위기가 무서우니까 조용히 있어야지.

그 이후로 워프게이트에 도달할 때까지는 어색한 침묵이 지속되었다.

다행히 길드원들이 사용하는 통로였기에 거리가 멀지는 않았다.

"이것도 오랜만에 보네요."

"설정도 했으니까 이제 들어가기만 하면… 응? 잠시만."

워프게이트를 건드리던 제나가 무언가 생각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 보니 스칼렛. 암호는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 거야?"

"예? 그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입니까. 당직 근무 중에 술이라도 퍼마신 건가요."

스칼렛은 눈을 찌푸린 채 제나의 얼굴을 자세히 확인했다.

아무리 혼자 하는 당직이라지만 이렇게나 군기가 빠져있다니.

자신이 없는 아이리스 길드는 결국 이 정도인걸까.

"아니. 스칼렛은 아이리스 길드에서 얻은 기억이 없어야 하잖아. 그 계약 몰라? 아이리스 길드를 그만둘 때 기억을 지운다는 그거."

"…… 아."

왜 그런 게 있었지? 같은 표정을 짓는 거야.

네가 그러면 안 되잖아. 스칼렛.

"어, 음. 어음."

"스칼렛?"

스칼렛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실수다. 길드장에 대한 걸 최대한 떠올리지 않도록 하다 보니 중요한 걸 까먹어버렸다.

아쉽게도 후회할 시간은 없다. 이미 물은 엎질러졌다.

여기서 어떻게 대처하는 게 가장 완벽한 방법일까.

'솔직하게 말한다?'

가장 담백한 방법은 곧바로 기각.

길드장이 스칼렛에게 해준 것은 배려다.

아이리스 길드의 근무 환경이 워낙 좋다 보니 아무도 길드를 나가지 않았고, 그 와중에 첫 탈퇴자인 자신이 특별 대우를 받았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가 좋아하는 예쁜 외모 덕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모두가 근무 환경에 만족하는 것은 아니다.

세계 최고의 대접이라도 누군가에게는 불만족스러운 법. 그런 사람들을 길드에 붙잡아 두는 게 기억을 지우는 계약이다.

아이리스 길드의 정보를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스펙이니까.

실제로 그 계약 때문에 길드를 나가지 않는 길드원도 있다고 했으니, 그녀가 함부로 입을 놀렸다가 탈퇴자가 나올지도 모른다.

만약 탈퇴자가 나온다면 거기부터 문제가 생긴다.

기억을 지운다면 스칼렛에게 해준 특별 대우가 문제고, 지우지 않는다면 그 탈퇴자가 가진 정보가 문제다.

비록 탈퇴했지만 좋은 기억이 많은 아이리스 길드에게 누가 되고 싶진 않았다.

"… 너 스칼렛 맞지?"

스칼렛이 고민하는 동안, 제나의 눈에 점점 의심이 싹텄다.

이제 결단을 내려야 한다.

스칼렛은 헛기침을 한 뒤 진지하게 말했다.

"크흠. 들켜버렸군요."

"… 들키다니?"

"저는 사실 극비 임무를 수행 중입니다."

"극비 임무!?"

"예. 최고위 간부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모르는 사실이니 제나가 모르는 것도 당연하죠. 들켰으니 어쩔 수 없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는 말아 주세요."

"그랬구나…! 알겠어. 명심할게."

고개를 끄덕인 제나는 그제서야 미소를 보였다.

아이리스 길드의 에이스 중 하나였던 스칼렛이라면 그런 임무를 맡을만 하지.

스칼렛도 그녀의 미소에 화답했고, 가볍게 목례를 한 뒤 이호연의 손목을 이끌고 워프게이트로 들어갔다.

스르륵-

가벼운 현기증이 지나간 뒤.

이호연은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눈앞에 나타난 건 아이리스 길드의 본 건물이었다.

깔끔하면서도 세련된 5층 건물은 지하가 진짜라는 엘리스의 말을 다시 되새기게 만들어준다.

"스칼렛. 근데 너 아이리스 길드 잘린 거 아니었어?"

이호연은 옆에 서있는 스칼렛에게 물었다.

"잘린 게 아니고 그만둔 겁니다."

"그럼 극비임무는 뭔데."

"당연히 거짓말입니다."

"그래도 되는 거야?"

"뭐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요. 일단 고비는 넘겼으니까요. 제나의 성격상 누군가에게 말하진 않을 겁니다."

스칼렛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후 건물로 다가갔다.

오늘따라 스칼렛이 왜 이렇게 못미더운 지 모르겠네.

그나저나 이 건물을 보다 보니 예전에 방문했던 기억이 난다.

엘리스 덕분에 참 편하게 왔었지.

그때, 이호연의 머리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스칼렛. 지금 생각난 건데 말이야. 그냥 정식 절차를 밟아서 왔으면 된 거 아니야? 그다음에 빅터 씨한테 부탁해서 아이리스 길드의 부지에 내리면 되잖아."

"그게 적합한 절차겠죠."

이호연은 스칼렛의 대답을 듣고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럼 왜 이렇게 개고생을 하는 거야.

"근데 왜 이렇게 한 거야?"

"절차를 밟으면 저도 편하지만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제 인맥을 이용해서 직통으로 연락해도 최소 몇 시간, 길면 하루는 걸리겠죠. 하지만 이렇게 막무가내로 들어오면 시간을 아낄 수 있습니다. 호연 님이 워낙 급해 보이시길래 이런 방식을 선택한 건데… 확실히 실수였네요."

"…."

듣고 보니 맞는 말이네.

진행이 완벽하진 않아도 날 위해 해준 일이다.

고맙긴 하네.

"그래도 고마워. 스칼렛. 마음은 받을게."

"별 거 아닙니다."

"날 위해 길드도 포기했는데 별 거 아니긴."

"그 이야기를 한다면 저는 돌아가겠습니다."

"미안해."

이호연은 스칼렛의 옆에 딱 붙은 채 그녀의 손을 감싸듯 붙잡았다.

생각해보면 바깥에서 그녀의 손을 잡은 기억이 없다.

"호연 님. 이건 무슨 의미죠?"

"이래 보여도 내가 꽤 잘 나가거든. 오랜만에 보는 아이리스 길드 사람들한테 자랑이라도 해야지."

"… 아이 같은 생각이네요."

불평을 내뱉으면서도 자신의 손을 내팽개치지 않는 스칼렛의 손을 강하게 쥔 이호연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경비를 지나 1층 로비로 들어오자, 하나둘씩 스칼렛과 이호연을 알아보는 사람이 늘어났다.

"스칼렛! 오랜만이야."

"극비 임무를 수행하느라 지금까지 길드를 탈퇴한 척했다는 게 사실이야?"

"어쩐지. 송별회도 없이 떠날 리가 없지."

"사실 나는 스칼렛 성격 상 진짜 그냥 말없이 떠난 걸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오해였네. 미안해."

"근데 옆에 계신 이호연 마법사 님은…."

그리고 주위를 둘러싼 사람들은 입이라도 맞춘 듯 극비 임무를 외쳐댔다.

이호연은 스칼렛의 손을 잡아당긴 후 귀에 속삭였다.

"야. 걱정 안 해도 된다면서."

"제나, 그 년이 절 배신할 줄은 몰랐네요."

설마 믿고 있던 게 제나였다고?

"… 그렇게 해결될 일이 아니잖아. 차라리 솔직하게 말하지 그랬어. 이거 어떻게 해명할 거야."

"걱정하지 마세요. 제게 생각이 있습니다."

"스칼렛. 당직 근무자에게 보고를 받았다. 최고위 간부만 알고 있는 극비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고? 3팀장인 나도 듣지 못한 극비 임무라니 그건 뭐지?"

스칼렛이 걱정하지 말라며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얼굴만 봐도 까다롭게 생긴 3 팀장이라는 사람이 길드원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스칼렛은 이호연의 손을 떼어낸 뒤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3 팀장님. 오랜만에 뵙네요. 말 그대로 극비 임무입니다. 길드장 님 측근이 아니면 모르는 게 정상입니다."

"측근이라고?"

스칼렛은 마음 속으로 후회하며 입을 열었다.

상황이 이렇게 복잡해질 줄 알았다면 처음부터 솔직하게 말할 걸 그랬어.

어차피 책임은 길드장이 질텐데 왜 자신이 힘든 길을 걸었을까.

쉽게 해결하려다 보니 일이 더욱 복잡해졌다.

하지만, 그녀에겐 이호연이 있었다. 그의 존재만으로도 그녀에겐 확실한 보험이 생긴다.

스칼렛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길드장 님을 불러주세요. 만약 부재중이시라면 1 팀장 님이나… 엘리스 아가씨라면 알고 계실 겁니다."

그녀는 자신만만하게 아이린과 엘리스를 호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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