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2화 > 아이리스 길드 (1)
방에 들어온 이호연은 기지개를 켜며 책상에 앉았다.
레베카를 놀렸더니 몸에 생기가 돌았다.
이 정도면 머리가 쌩쌩 돌아갈 것 같다.
탁-
딸깍. 딸깍.
책상에 앉아 노트를 펼친 뒤 볼펜을 딸깍거렸다.
당장 해야 할 일을 모르겠을 때는 책상에 앉아해야 중요한 일을 정리하는 게 이호연의 유일한 좋은 습관이었다.
"… 근데 이제 뭘 해야 하냐."
할 일이 없는 게 아니다.
할 일이 너무 많아서 뭘 해야 할지 감이 안 온다.
서걱서걱.
- 마법 연구. 임솔과 대련에서 사용했던 것??
더욱 강해지기!
당장 머릿속에 떠오르는 걸 노트에 써 내려간다.
이호연은 얼마 전 원작의 마왕 루시퍼를 죽였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마법을 깨닫고 이호연의 수준 또한 몇 계단이나 올라섰다.
하지만 기대 이상의 성과에 비해 전투의 흐름은 엉망진창이었다.
'더욱더 강해져야 해.'
스르륵-
이호연의 손 위에 마법진이 나타난다.
어느새 그의 눈은 화려한 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개안, 심(心).'
개안을 활성화하자마자 마법진의 구성이 이호연의 머릿속으로 자연스럽게 들어온다.
가벼운 손짓으로 마법진을 지운 이호연은 팔짱을 낀 채 고민했다.
"이렇게 보면 그냥 개안이랑 비슷하단 말이지."
──『 개안 』 ──
▶ 고유 스킬
▶ 마나를 눈에 집중시켜 안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린다.
마나가 깃든 존재나 형상을 인식하고 구별하는 능력이 극대화된다.
───────
──『 개안. 심(心)』 ──
▶ 고유 스킬
▶ 이호연이 원하는 순간 마나에 대한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삼라만상의 이치를 깨닫고 마나의 격을 뛰어넘는다.
───────
"뭔가 있어 보이는 말은 잔뜩 쓰여있네."
개안의 각성은 루시퍼와 전투에서 커다란 분기점이었다.
자신보다 양질의 마력을 넘치도록 사용하는 루시퍼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 마법진을 되찾는 데 성공했으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주먹구구식으로 이겼어."
좋은 결과가 나온 건 다행이지만, 이제 이호연도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우연의 우연이 겹쳤고, 루시퍼의 성격과 주변 히로인들의 상황. 이호연의 각성까지.
그야말로 엄청난 행운이었다.
어디 한 곳만 어긋났어도 이호연이나 히로인들이 죽었을지도 모른다.
"다음에도 이런 행운이 있을 거라는 보장은 없지."
지금까지 몇 번이나 이렇게 이겼다고 해서 다음에도 그럴 거라는 보장은 없다.
가장 중요한 마왕과의 전투에서 고꾸라져버리면 지금까지 한 일은 모두 무용지물이 되어버린다.
서걱서걱.
- 마왕을 죽이기 위해서 완벽한 준비가 필요함…. 새로운 마법?
임솔과의 대련에서 생긴 특이한 현상. 그건 다시 연구할 가치가 있다.
이호연에겐 기억 보완 능력이 있으니, 그때의 감각을 똑같이 구현할 수 있다.
서걱서걱.
- 검은 기둥과 던전의 폭주 현상.
그다음으로 생각해야 할 것은 세계에 나타난 이상현상.
히로인을 공략하는 것과 가짜 던전을 준비하는 것 때문에 정작 중요한 일에 신경을 쓰지 못했다.
"판데믹과 이상 현상이 연관되어 있는 건 확정이야."
이 세계에 마왕이 강림하기 위해서 필요한 과정이 무엇인지, 이호연은 알 수가 없다.
확실한 건 검은 기둥은 원작에 존재하지 않는다. 던전의 폭주 현상은 비슷한 게 있었지만, 이것도 시기가 훨씬 빨라졌다.
즉 이호연 때문에 생긴 나비효과라는 것이다.
"던전이 폭주하면서 지옥과 비슷한 환경을 만들고 천천히 지구와 동화한다…. 그럼 검은 기둥은 역할이 뭐지?"
이호연은 눈을 찌푸린 채 볼펜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저것들의 역할은 몰라도 왜 나비효과가 생겨났는지는 알 수 있다.
자신이 훨씬 더 강해졌고, 판데믹을 너무 잘 막았기 때문이겠지.
원작에서보다 훨씬 동화 작업이 빨랐다.
'이 세계의 신이 개입한 거야.'
마왕의 몸에 빙의해있는 내기의 신.
그가 이 상황을 조종하고 있다.
이렇게나 개입하는 걸 보면 항상 이겨왔던 내기에서 지기는 싫었나 보지.
"그게 아니라면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아."
서걱서걱.
- 사람들의 인식이 뒤바뀌었다….
이호연은 검은 기둥과 던전의 폭주 현상에 대해서 골똘히 고민을 이어갔다.
임솔의 말대로 사람들이 지옥의 마력에 무지한 건 확실히 이상한 일이다.
그야말로 인식을 바꾸는 정도의 거대한 조작이 아니면 일어날 수 없는 일.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건 신 밖에 없어."
하지만, 대체 어떻게 한 거냐고. 이건 전혀 공정한 내기가 아니잖아.
내기의 신이 한 말은 아직도 이호연의 기억에 남아있다. 그때 했던 말은 거짓말이었나?
'… 굳이 내 앞에 나타나서 거짓말을 하는 것도 웃긴데.'
사람들의 지옥의 마력에 대한 인식이 뒤바뀌었다면, 그것과 관련해서 또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
프랑스 아이리스 길드에 있는 지옥 출신 놈들.
켄타우로스 케이론과 인큐버스 알베도도 문제다.
지금은 착하게 지낸다지만, 그들이 사용하는 마력은 지옥의 마력이다.
… 그렇다면 왜 아이리스 길드를 중심으로 지옥의 마력에 대한 조사가 일어나지 않은 걸까.
"아이 씨. 어려워 죽겠네."
복잡하게 얽힌 사건들이 이호연의 머리를 가득 채운다.
하지만 고민해도 확실한 답이 나오진 않았다.
그때, 이호연의 머릿속에 방금 놀리고 온 붉은 머리의 미녀가 스쳤다.
"잠시만. 레베카 씨도 있잖아."
레베카도 임솔처럼 자신의 지옥의 마력을 겪어본 사람이다.
그녀도 대련이 끝난 뒤부터 지옥의 마력을 연구했다고 했었지.
쾅-!
생각이 들자마자 문을 박차고 나온 이호연은 테이블에 앉아있는 레베카에게 소리를 질렀다.
"레베카 씨!"
"앗! 깜짝이야. 왜 그래? 커피 흘렸잖아. 애기 아빠."
커피잔을 들고 있던 레베카는 갑자기 뛰쳐나온 이호연을 보며 당혹스러워했다.
뭐가 그렇게 급한 걸까.
"저번에 저한테 대련에서 지고 지옥의 마력을 연구한다고 했던 적 있잖아요. 그때 일 좀 자세히 말해주세요."
방에서 나온 이호연은 곧바로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 입을 열었다.
"갑자기 그건 왜?
"안돼요?"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응. 알겠어."
"오케이."
레베카는 이호연의 기세에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급해보이니까.
그녀는 잠시 고민한 뒤 입을 열었다.
"음.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까. 근데 자세히 말해달라고 해도 말해줄 게 없어. 그냥 애기 아빠한테 지고 나서 수련을 시작한 것뿐이야. … 혹시 이걸 내 입으로 직접 패배를 인정하게 하려고 그러는 거야? 애기 아빠에게 그런 취향이 있었다니 조금 신기하네."
"아니, 아니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대체. 그냥 마법 연구에 필요해서 그래요."
당황한 듯 고개를 젓는 이호연을 보며 레베카는 살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자존감이 바닥까지 떨어져 있던 사람인데 어째서 저렇게 변한 건 지 도통 알 수가 없었지만, 괜히 자신도 기분이 좋아진다.
"마법 연구는 모르겠지만 애기 아빠 기분이 좋아 보이니까 나도 기분이 좋다. 아내로서 남편의 멘탈케어를 하지 못해서 슬펐는데. 다행이야."
레베카는 부드럽게 이호연의 손을 잡았다.
낯부끄러운 말을 하며 자연스럽게 손을 잡은 레베카의 모습에 순간 이호연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미소짓는 그녀의 얼굴은 당장 침대로 껴안고 가고 싶을 정도로 사랑스러웠지만, 이호연은 인내심을 발휘하며 레베카의 손을 맞잡았다.
"… 고마워요. 레베카 씨. 그럼 딱히 마음에 걸리는 건 없었어요? 왜 이런 마력을 지금까지 몰랐지? 하는 생각 같은 거요."
"글쎄… 당연히 있긴 했지. 릴리아나가 사용하는 마력 하고 비슷했으니까. 하지만 애기 아빠의 비밀병기라고 생각했어."
"아하…."
이호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임솔과 레베카가 마법을 대하는 태도의 차이인 모양이다.
임솔 교수는 최고의 재능으로 마법에 목숨을 걸었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어긋난 점은 바로 파악할 수 있는 거다.
레베카도 열심히하지만 일주일간 식음을 전폐하며 마법에 몰두하는 열정까진 아니니까.
'그럼 다른 사람들도 이 상태라는 건가? 대체 얼마나 뒤틀어진 거야.'
레베카 정도의 마법사가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했다면 다른 사람들은 전부 모른다고 봐도 무방하겠네.
아이리스 길드에 가봐야 알겠지만, 이 정도 정보도 소중했다.
"고마워요. 레베카 씨. 많은 도움이 됐어요."
"정말? 이 정도는 별 것도 아니야. 다행이네."
딱히 한 말도 없는데 저렇게 기뻐해 주니 레베카도 흐뭇했다.
요즘 통 성공한 적이 없는데 오늘은 남편의 내조를 성공했다.
"그럼 다시 가볼게요."
"벌써? 용건만 끝내고 가는 거야?"
"죄송해요. 할 일이 꽤 많아서요."
"혼자 하지 말고 나도 알려줘. 도울 수 있는 게 있으면 도울게."
"… 그렇네요. 왜 혼자 하려고 했지."
항상 히로인들에게 무언가를 숨기고 혼자 처리하다 보니 이런 일도 혼자 처리하는 게 버릇이 되어버렸다.
레베카라면 도움을 받을 수 있겠지.
"사실 지옥의 마력에 대해 연구 중이에요. 검은 기둥에서 나오는 지옥의 마력 아시죠? 제가 펼치는 지옥의 마력 하고 비슷한데도 아무도 수상함을 못 느끼더라고요."
"검은 기둥에서 나오는 마력…. 그렇네. 스칼렛이 그런 이야기를 했던 것 같기도 해."
"스칼렛도 눈치챘었구나. 아무튼 검은 기둥이 루시퍼나 판데믹의 작전인 게 확실한데도 아무도 반응하지 않잖아요. 제가 좀 앞장서서 움직이려고요."
"애기 아빠. 오늘따라 세계의 평화를 정의의 사도 같네."
"잘 모르셨겠지만 저는 항상 세계를 위해 움직이고 있었어요."
"그래그래. 대단해 우리 애기 아빠."
상냥하게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는 걸 보니 믿는 것 같진 않네.
아쉽다.
"일단 아이리스 길드에 접촉할 생각이에요. 그다음엔 미국 마법사 협회하고 접촉할 거고요."
"… 뭐야. 스케일이 왜 그렇게 커? 진짜 세계의 수호자라도 돼? 왜 애기 아빠가 그런 일을 하는 거야."
"그런 게 어딨어요. 할 수 있는 사람이 하는 거죠. 그럼 아이리스 길드에 레베카 씨도 같이 갈래요?"
"도와주고 싶긴 하지만… 거기 길드장이 좀 마음에 안 들어."
"… 맞다. 그 아저씨 레베카 씨한테 껄떡댔죠?"
"애기 아빠. 무서워. 화내지 마."
쓰읍. 이호연은 표정을 풀고 감정을 다스렸다.
엘리스의 부모만 아니었어도 한바탕했을 텐데.
'아닌가? 엘리스랑 나의 관계를 알테니 긁어부스럼 만들 필요는 없지.'
특별히 이번만은 넘어가도록 하자.
앞으로 레베카와 만나지않게 하면 된다.
"아무튼, 그럼 레베카 씨는 임솔 교수님이라도 도와주세요. 그쪽이 마법사 협회하고 접촉하고 있으니까."
"응. 그래야겠네. 연락해볼게."
"좋아요. 아주 좋아."
피식 웃으며 레베카의 어깨를 조물거린 뒤, 이호연은 다시 방으로 향했다.
레베카와 대화를 좀 했더니 머리가 시원해졌다.
다시 펜을 든 이호연은 노트를 빤히 바라보며 고민했다.
"아이리스 길드는 언제쯤 가야 하나. 최대한 빨리가고 싶은데."
서걱서걱.
- 케이론 , 알베도…
"분명 분명 엘리스가 이상한 마력을 쓰는 놈들이라고 말했었지."
엘리스가 스쳐 지나가며 했던 말이다.
아마 레베카처럼 그녀도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을 거다.
"쯧. 이건 가서 생각해보자. 어차피 아이리스 길드에 한 번 들려야 하니까."
그러고 보니 엘리스와 아이린은 왜 아직도 연락이 없는 거야?
혹시나 해서 다시 한번 스마트워치를 확인했지만, 이호연의 메시지만 텀을 두고 올라와있을 뿐 둘의 답은 없었다.
"… 자매가 같이 잠수를 타버리면 어떡해."
바로 옆 집이니 쳐들어가면 될 일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녀들의 상태를 모르다 보니 먼저 연락하는 게 부담이었다.
"일단 메시지라도 다시 보내 놔야겠다."
엘리스와 아이린에게 메시지를 보낸 이호연은 입맛을 다시며 답장이 없는 스마트워치를 건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