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1화 > 트라우마 (3)
나른함이 몸을 감싼다. 아직도 잠에서 깬 것 같지가 않다.
이호연의 악몽은 잠에서 깨어난 뒤에도 불쾌함을 남겼다. 하지만 오늘은 평소와 다르게 식은땀이 흐르지 않았다.
백아영의 품에 안겨있기 때문일까.
체온은 높았지만 기분은 산뜻했다.
"아암. 음."
"으응… 여보, 그마안."
괜히 백아영의 가슴을 입으로 뻐금거렸다가 백아영의 손에 찰싹 등을 맞았다.
… 왜 이렇게 기분이 좋은 지 모르겠네.
가슴을 채우던 죄책감이 이상할 정도로 사라졌다.
'솔이한테 좋은 말을 들어서 그런가. 아니면 아영 씨한테 안겨있어서 그런가.'
이호연의 생각보다도… 히로인들의 반응이 긍정적이긴 했다.
그래서일까 조금은 안심하게 된다.
'우리 아영 씨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으려나.'
백아영이 가진 이호연을 향한 집착.
그것이 어떻게 나타날지가 두려웠다.
'히로인 상태창.'
이호연은 오랜만에 백아영의 상태창을 확인했다.
이것도 뚜렷한 정신력을 억제하고 나서는 잘 안 쓰게 되었다.
히로인들을 게임 속 설정으로 보는 것 같아서 왠지 양심에 찔렸거든.
★ 히로인 상태창
[백아영]
- [ 호감도 : 100 ] (+ 3.6)
- [ 성욕 : 70 ]
- [ 식욕 : 30 ]
- [ 피로도 : 50 ]
현재 상태 : 우리 아이는 몇 명이 좋을까….
[호감도 100 달성시 이호연의 애정을 갈구합니다.]
"… 괜히 봤네."
"응?"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 아응…."
이호연은 깊게 생각하지 않고 다시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사실 가슴이나 다른 살이나 본질적으로 다른 건 없을 텐데.
가슴에 안겨있으면 마음이 너무나 편해진다.
어쩌면 이게 모성애의 힘일까.
부모님의 기억이 없어서 그런 감정을 느끼지못하는 줄 알았는데, 본능적으로 모성애를 갈구하는 건가.
백아영의 가슴에 안겨있다 보니 세상의 진리를 깨달을 것만 같다.
띠리리리- 띠리리리-
진리의 품에 안겨있던 그때.
백아영의 스마트 워치가 울리기 시작했다.
"아…."
알림을 듣자마자 백아영이 아쉬운 듯 탄식을 흘렸다.
아마 다시 응급실로 가야 하는 시간인 모양이다.
"미안해요. 여보. 더 일찍 왔어야 했는데. 으으."
"벌써 교대할 시간이에요?"
"퇴근이 아니고 잠깐 쉬는 시간을 받은 거라… 조금만 더 하면 퇴근이긴 해요."
백아영이 퇴근해도 뭐라고 할 사람은 없지만, 백아영은 퇴근 시간을 확실히 지키는 편이었다.
조금 더 일하는 정도는 웃으며 할 수 있다.
"일이 많았나 봐요.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고 왔잖아요."
"루시퍼의 습격 때문에 긴급 환자가 많아져서… 그래도 사망자는 없고, 다들 열심히 하고 있어요."
"음… 알겠어요. 아영 씨."
예상은 했지만 직접 듣는 건 쉽지 않네.
이호연은 여보 모드를 해제한 뒤 아쉬움을 삼켰다.
'나중에 다시 와야 하나.'
지금이 적기였는데… 가슴에 안겨있다가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이래서 잠이 들면 안 됐는데. 간신히 마음을 다잡았으니 오늘 말했어야 했다.
젠장. 기껏 좋아진 기분이 다시 씁쓸해졌다.
이렇게 좋은 분위기로 헤어지면 다음에 어떻게 말하라는 거야.
이호연은 눈을 찌푸리며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
백아영은 스마트워치의 알림을 끄며 이호연의 얼굴을 살폈다.
여러 감정이 담겨있는 표정은 악몽에서 헤매던 때와 비슷했다.
눈물을 흘리며 흐느끼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했다.
"호연아, 조금 더 같이 있을까?"
"네?"
"응급실이 바쁘긴 하지만, 긴급 환자들은 전부 끝났어. 어느 정도 땡땡이쳐도 뭐라고 할 사람은 없을 거야. 나도 나름 권한이 강하거든."
어른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백아영을 보며 이호연은 눈을 꿈벅거렸다.
그녀는 자신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스마트 워치를 두드렸다.
이호연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백아영에게 물었다.
"저야 고맙긴 하지만, 갑자기 왜 그러세요?"
"그냥. 우리 여보가 같이 있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뭔가 하고 싶은 거 없어?"
오래 만나다 보니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하는 걸까.
살짝 놀란 이호연은 백아영을 살짝 밀어낸 뒤 정자세로 앉았다.
"사실 말할 게 있어요. 아영 씨."
"편하게 해도 괜찮아."
똑같은 이야기를 몇 번이나 하는 거지만, 긴장감은 여전했다.
이호연은 천천히 가슴에 담긴 말을 풀어냈다.
*
"으으음."
이호연의 말이 끝난 뒤.
백아영은 이호연의 상태를 살폈다.
온몸에 퍼진 긴장과 두려움 그리고 불안감.
말을 하는 내내 없어지지 않았던 감정들을 보니 트라우마의 원인을 알 것 같았다.
"… 실망했어요?"
한편 이호연은 조심스럽게 백아영의 얼굴을 확인했다.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혼자 고민에 들어갔으니 불안할 수밖에.
하지만 곧 이호연과 눈을 마주친 백아영은 미소를 지으며 팔을 벌렸다.
"이리 와요. 여보."
"읍."
다시 찾아온 부드러운 살결.
이 가슴에 안겨있다 보니 또 설렌다.
"그게 고민이었구나. 차라리 빨리 말해줬다면 좋았을 텐데."
"실망하지 않았어요?"
백아영이 응급실에서 살핀 환자들은 이호연 때문에 만들어진거나 마찬가지.
사망자는 없었다해도 자신이 원망스러울 수 있다.
"그럴 리가. 우리 여보가 힘들어하는 게 더욱 슬퍼."
백아영은 훌쩍 거리며 이호연의 머리를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저렇게 나오니 오히려 자신이 얼떨떨했다.
"내가 더 챙겼어야 했는데. 그랬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 사실 별 거 아닌거야?'
그럴 리가 없는데.
다른 사람은 몰라도 백아영에게 왜 이런 반응이 나오는 걸까.
★ 히로인 상태창
[백아영]
- [ 호감도 : 100 ] (+ 3.6)
- [ 성욕 : 70 ]
- [ 식욕 : 30 ]
- [ 피로도 : 50 ]
현재 상태 : 우리 여보는 내가 더 보살펴줘야 해. 슬프지만… 무너지는 걸 볼 순 없어.
[호감도 100 달성시 이호연의 애정을 갈구합니다.]
'분명 슬퍼하고 있는데.'
슬퍼하는 감정을 겉으로 티 내지 않고 있다.
백아영의 호감도가 높은 것도 있겠지만, 호감도는 무적이 아니다.
분명 그것뿐만은 아닌 것 같은데… 원인을 잘 모르겠다.
"… 고마워요. 아영 씨."
결국 이런 말 밖에 할 말이 없었다.
사정이 있는 것 같긴 했지만, 이호연의 생각보다 반발이 적어서 고마울 뿐이었다.
"아니야. 이렇게 안고 있으니까 우리 여보가 진짜 연하가 된 거 같아서 기분이 좋네."
백아영은 이호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흐흐 웃었다.
만났을 때부터 자신이 연하였는데 이건 무슨 뜻일까.
'생각해보면 처음 만났을 때 빼고는 그런 적이 없었나?'
몇 번의 만남 이후로 관계가 완전히 뒤집혔으니 백아영이 그렇게 느낄 만도 했다.
자신도 백아영을 연상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얼마 없었다.
"음… 그럼 아영 누나라고 부를까요. 아영 누나."
백아영은 임솔과 동갑이다.
문수린보다는 연상이지만, 누나라고 불러도 딱히 지장 없는 나이다.
"허, 허억…."
반응은 극적이었다.
백아영은 총이라도 맞은 듯 가슴을 부여잡더니 몸을 떨기 시작했다.
… 문수린도 엄청 좋아했던 거 같은데.
다들 좋아하네.
"아영 누나? 왜 그래요?"
"그, 그만해…."
불을 붉게 물들이며 몸을 파르르 떤 백아영은 이호연의 어깨를 흔들며 부끄러워했다.
그리곤 자신의 얼굴을 다시 가슴 쪽으로 끌어당겼다.
"호, 호, 호… 호연아."
"네. 아영 누나."
쓰담쓰담. 쓰담쓰담.
백아영은 이호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몸을 떨었다.
천천히 움직이던 그녀의 손은 점점 빨라졌다.
"누나라니, 누나…."
"네. 아영 누나."
누나라고 한 것만으로 몸을 떠는 그 모습이 귀여워서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진작 이렇게 해줄 걸 그랬네.
"누나만믿어앞으로누나가다해결해줄게앞을가로막는것도방해하는것도사랑도다른어떤…."
"…?"
어? 방금은 뭐였지?
너무 순식간에 지나가서 제대로 못 들었는데.
"여보. 우리 여보."
"네, 네."
백아영은 뜨거운 시선으로 이호연을 바라봤다.
뭐. 딱히 중요한 건 아니었을 거다.
백아영의 스마트워치가 다시 울릴 때까지, 백아영은 이호연을 쓰다듬으며 침대에 누워있었다.
*
덜렁덜렁.
의료팀을 빠져나온 이호연의 손에는 들어갈 때 없던 종이팩이 있었다.
백아영과 눈물의 이별을 한 이호연은 그녀가 급히 챙겨준 약봉지를 보며 눈가를 좁혔다
"이건 무슨 약인 지 모르겠네. 도파민, 항정ㅅ… 뭐야 이건?"
뒷부분이 긁혀있어서 항정ㅅ… 까지만 보였다.
뭐지? 항정살은 아닐 텐데.
약봉지를 이리저리 살피던 이호연은 생각을 멈춘 뒤 약봉지를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환자한테 주는 약을 이렇게 가려서 줘도 되는 건가. 무슨무슨 법에 걸릴 텐데."
백아영이 줬으니 몸에 나쁜 건 아니겠지.
아마 관리 중에 실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덤벙대는 구석이 있으니까.
띠리링-
집으로 돌아오자 조용한 거실이 이호연을 반겼다.
환영하는 목소리가 없는 걸 보니 집에 사람이 없는 모양이다.
타다닥- 탁- 탁-
하지만 조금 더 들어가자 부엌 쪽 식탁에 앉아있는 붉은 머리의 미녀가 보였다.
레베카는 허공에 뜬 화면을 보며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재택근무라도 하나 보네.
"애기 아빠. 왔구나? 고생했어."
"네. 집에는 레베카 씨 혼자예요?"
"스칼렛 양은 일하러 갔고, 다은 양은 다희랑 산책. 릴리아나는 어디 갔는지 모르겠네."
"흐음…. 뭐 릴리아나도 이제 어디 가서 당하진 않겠죠."
"그럴 거야."
시간이 있을 때 릴리아나의 강해진 마력을 한 번 살펴볼까 했는데, 없다고 하니 아쉽네.
이호연은 레베카의 맞은편에 앉아 그녀가 마시던 차를 홀짝거렸다.
"이거 맛있네요. 유자차예요?"
"아니. 그건 모과차야. 비타민 C가 풍부해."
보나 마나 임신에 좋은 차겠지.
이제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레베카는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이호연과 대화를 이어갔다.
"우리도 다은 양처럼 산책이나 갈까? 적당한 산책은 임산부의 몸 관리에 좋대."
"레베카 씨는 임산부가 아니잖아요."
"곧 될 거니까 괜찮아."
이 뻔뻔한 대화도 이제 다 예상이 된다.
하지만 좀 이상하긴 하네.
백아영도 그렇고, 임신시킬 기세로 엄청나게 했는데 아직 소식이 없다.
진지하게 병원을 가볼까 생각하던 이호연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원래 임신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나저나 산책이라. 나쁘지않네.
오랜만에 레베카랑 천천히 시간을 보낼까.
"산책… 나쁘지 않네요. 같이 나가요."
"에에엥? 정말?"
레베카는 눈을 크게 뜨고 이호연을 바라봤다.
마치 절대 일어나선 안될 일이 일어났다는 표정이었다.
"… 레베카 씨가 먼저 말해놓고 왜 그래요."
"애기 아빠가 당연히 거절할 줄 알고 그냥 던져본 거거든. 미안. 나도 할 일이 있어서."
"…."
이 사람은 뭐지? 자기가 말해놓고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호연은 머쓱하게 웃으며 뒤통수를 긁고 있는 레베카를 보며 눈을 깜박거리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것도 다 내 잘못이지.'
평소에 같이 외출을 안 하다 보니 레베카가 기대도 안 하는 거다.
모든 게 내가 뿌린 씨앗이고 내 잘못이오.
마음을 다잡은 이호연은 그윽하게 웃으며 레베카의 손등에 손을 올렸다.
"그럼 산책 말고 같이 방에서 좀 쉴까요? 오랜만에 레베카 씨와 시간을 보내고 싶은데."
"아이 만들기 하는 거야? 그거라면 환영이지!"
스킨십을 하자마자 레베카의 눈에 생기가 돈다.
눈을 반짝거리는 그녀를 보며 미소를 짓던 이호연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도 그냥 던져본 말이었어요. 사실할 일이 있거든요."
"애기 아빠. 그러는 게 어딨어. 여성의 순정을 짓밟는 거 아니야."
레베카는 팔짱을 낀 채 자신을 노려봤다.
방금까지 미소짓던 게 거짓말인 것 처럼 무서웠다.
"다음에 해요. 진짜 할 일이 있거든요."
"애기 아빠!"
순정….
그 단어를 여기서 써도 되는 걸까.
이호연은 정색하며 자신을 바라보는 레베카를 내버려 둔 채 방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