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0화 > 트라우마 (2)
이호연은 정체불명의 장소에서 눈을 감고 있었다.
이 곳은 어디일까. 몸이 둥둥 떠있는 느낌.
어두운 우주 한가운데에서 혼자 표류한 기분이었다.
"으음. 읏…!"
갑자기 몸 곳곳을 가시로 찌르는 것 같은 고통이 느껴진다.
꿈에서는 어색한 일이라도 자연스럽게 진행된다. 갑작스러운 일이지만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벌을 받고 있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잘못을 했으면 벌을 받는 게 당연한 일.
무슨 잘못을 했는지 확실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이호연은 눈을 질끈 감고 고통을 버텼다.
이렇게하면 고통이 조금이라도 줄어들까라는 마음에 태아처럼 몸을 웅크린다.
그제야 몸을 찌르는 고통이 덜어졌다.
두근.
하지만 고통이 끝나자마자 가슴이 두근거린다. 심장이 터질 기세로 빠르게 뛰기 시작한다.
마라톤을 방금 마친 선수처럼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다.
온 몸에 긴장이 올라왔다.
이호연은 천천히 눈을 떴다.
기억에 있는 아카데미의 등굣길.
차가운 바람이 가지런하게 서있는 나무들을 우수수 치고 지나간다.
잘 정돈되어있는 잔디밭과 꽃을 피운 꽃봉오리들.
너무나 익숙한 길을 걷는 와중에, 이호연의 시선이 강제로 고정된다.
하나 둘 씩.
너무나 잘 아는 얼굴이 눈앞을 지나간다.
히로인들의 얼굴이다.
그녀들의 얼굴엔 부정적인 감정이 가득 차 있었다.
슬픈 눈초리. 혹은 경멸하는 눈빛으로 자신을 노려본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피하기 위해 아이처럼 몸을 웅크렸다.
입술이 새파랗게 질리고 어깨가 부르르 떨린다.
'왜 그러는 거야. 왜….'
왜 저러는지.
그 이유는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다.
그녀들을 화나게 한 건 자신이었다.
그만. 미안해. 잘못했어요.
완성되지 못한 말이 입 안에서 맴돈다.
"호연 씨… 실망이에요. 저는 믿었는데. 정말, 정말 믿었는데."
작고 귀여운 소녀가 눈물이 가득 찬 눈으로 떠나간다.
"나는 호연이와 다희만 있으면 됐어. 정말이야. 하지만…."
동생의 손을 잡은 그녀도 슬픈 눈으로 입술을 떨다가 돌아섰다.
"이호연. … 넌 지옥에서도 못 볼 쓰레기야. 이 말미잘 촉수 같은 놈."
꼬리가 달린 여자도 울먹거리며 뛰어나간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가지말아줘.
슬픔 분노 분개 절망 억울 자책
여러 부정적인 감정들이 이호연을 스쳐간다.
이호연은 눈앞의 광경을 몇 번이나 경험했다.
이것은 악몽이다.
자신의 마음을 서서히 갉아먹는 악몽.
주변 여자들이 이호연을 이상하다고 느낄 때 즈음부터.
이 악몽은 매일같이 이호연을 괴롭혔다.
예전엔 이런 꿈을 꾸지 않았다.
이호연의 정신을 지켜주던 '뚜렷한 정신력'
그것을 고의로 억제한 결과가 이 악몽이다.
인간의 정신력을 뛰어넘게 만들어주는 그 능력이 없는 지금 이호연의 멘탈은 너무나 약한 상태였다.
이 세계에 떨어졌을 때 느꼈던 두근거림.
특별한 일에 당첨된 것 같았던 감정이 창피하게 느껴진다.
이건 애니메이션이 아니다. 책임져야 할 것이 너무나 많다.
자신 같은 범인(凡人)이 감당하기에 너무 무거운 짐이다.
'차라리 죽어버린다면….'
모든 짐을 내려놓을 수 있을 텐데.
잘못된 판단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호연 님 같은 사람을 만난 게 제 인생의 유일한 실패였어요. 아쉽지만 감사했습니다."
또 한명이 공손한 태도로 허리를 숙인다.
이호연이 어떤 생각을 하든, 눈앞의 여자들은 하나둘씩 떠나간다.
어째서 그렇게 가볍게 생각했을까.
나는 왜 죽지 않고 버텨야 하는 걸까.
"… 정말, 정말 고마웠어요. 여보."
쪽.
짧은 키스를 한 그녀가 떠나간다.
이호연의 눈 앞에는 이제 아무도 남아있지않았다.
악몽인 걸 알지만 깨어날 수 없다.
아무리 후회하고, 참회하고, 뇌우치고, 반성해도.
이 악몽은 끝나지 않는다.
부정적인 생각에 매몰되어 마음이 갈기갈기 찢기고 나서야 눈을 뜰 수 있다.
이호연의 얼굴에 눈물이 흘러내린다.
히로인을 만날 때마다 악몽이 실체가 될까 두렵다
[호연 님 주변의 여성분들이 착하다지만… 호연 님과의 관계를 다시 생각할 정도로 실망하는 사람이 몇 명 정도는 있지 않을까요?]
스칼렛의 말이 다시 한번 귓가를 울린다.
그녀는 항상 이호연을 당황스럽게 하는 말을 했지만, 저 문장이 들은 뒤로 머리가 더 아프기 시작했다.
스칼렛의 잘못이라는 것이 아니다.
그녀의 말이 정곡을 찔렀을 뿐이다.
"으, 아…. 그만, 그만…."
눈앞에 보이는 일만 해결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언제나 그렇게 행동해왔고, 모든 일은 술술 풀렸다.
하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그 모든 행동이 부메랑처럼 돌아와 이호연을 압박했다.
"내가 잘못했어. 제발…."
어깨를 짓누르는 부담이 너무나 무겁다.
가끔 모든 일이 없던 일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처음부터 이 세계에 오지 않았다면.
게임 리뷰 따위를 하지 않았다면.
이런 고통은 없었을텐데.
부정적인 생각에 다시 빠져들기 직전, 이호연의 몸을 따뜻한 기운이 감쌌다.
"괜찮아요."
악몽 한가운데에 내려온 한 줄기 빛.
이호연은 따스한 빛에 몸을 맡겼다.
고통과 슬픔이 조금씩 사라진다.
"여보. … 괜찮아요."
"…."
따스한 빛이 이호연의 몸을 덮는다.
약해지고 찢어진 마음이 돌아온다.
과거로는 돌아갈 수 없다.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이호연이 가장 잘 안다.
만약 신이 자신을 도와 과거로 돌아가게 해 준다고 해도 절대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히로인들을 만나고 관계를 쌓았던 모든 것이 이호연이라는 사람을 증명한다.
그가 느꼈던 감정들은 메인 퀘스트 때문이 아니었다. 전부 진실이었다.
부족하고 부족하지만 자기 자신을 부정할 수는 없다.
지나간 시간이 아닌 앞으로 일어날 일을 생각한다.
"…."
이호연은 서서히 눈을 감았다.
아직도 의식은 악몽의 한가운데였지만, 자신을 감싸고 있는 새하얀 빛은 여전히 따뜻하게 빛나고 있었다.
마음 구석구석까지 채워지는 상냥함.
이호연은 그 빛에 의식을 맡겼다.
*
눈을 뜬 이호연을 맞이하는 건 낯선 천장이었다.
"… 읍."
아니, 정확히 말하면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부드러우면서 뜨거운 무언가에 갇힌 이호연은 정체모를 무언가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몸을 비틀었다.
"응? 일어났구나. 으흐읏…?"
머리를 들자마자 느껴지는 밝은 빛에 이호연은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가까이에 있던 푹신한 손잡이를 잡고 일어난 뒤, 고개를 들고 위를 올려다봤다.
눈앞에는 엄청나게 예쁜 여자가 있었다.
"잘 잤어?"
자신을 바라보는 백아영은 싱긋 웃는 미소와 함께 상냥한 눈길을 보냈다.
눈을 깜박깜박거린 이호연은 정신을 차리자마자 눈을 크게 뜨며 기겁했다.
"아영 씨? 아영 씨가 왜…."
"응급실에서 퇴근했더니 사무실 침대에서 자고 있길래, 나도 같이 누워 있었어."
아니, 대체 언제 잠든 거야?
분명 잠들지 않으려고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었는데.
젠장. 침대가 너무 편한 탓인가.
주변을 둘러보자 시간 자체가 많이 지난 건 아니었다.
조금만 더 버텼으면 잠들지 않았을 텐데.
몽실몽실.
혀를 찬 이호연은 자신의 손을 채우는 부드러운 감각을 그제야 확인했다.
양손에 가득 잡혀있는 백아영의 가슴.
화들짝 놀라며 백아영에게 떨어진 이호연은 손을 하늘로 들었다.
"아, 으. 미안, 죄송해요. 아영 씨."
"괜찮아. 더 만져도 돼. 얼마나 귀여웠는데."
후후 웃는 백아영을 보니 왠지 모를 불안감이 엄습했다.
이호연은 기억을 되짚었다.
방금 잠에서 깨어난 탓에 악몽을 꾸었다는 건 뚜렷했다.
반복해서 꾸었던 꿈이었지만, 이상하게 오늘은 더욱 감정 기복이 심했다.
"… 왜 이렇게 상쾌하지?"
게다가 악몽을 꾸면 항상 깜짝 놀라며 일어났는데, 오늘은 굉장히 기분 좋게 일어났다.
그 원인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킁킁.
자신의 몸에 향긋한 냄새가 가득하다.
몇 번이나 맡았던 백아영의 체향이다.
'백아영이 계속 껴안고 있었구나.'
상쾌한 이유는 백아영에게 안겨있던 덕분인가?
어쩐지. 악몽의 끝이 평소보다 좋았다.
'혹시 안긴 채 이상한 짓을 하진 않았겠지?'
이호연은 백아영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 자면서 뭐 이상한 짓을 하진 않았죠?"
"전혀. 잠꼬대도 없이 잤어."
"…."
백아영은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지만, 이호연의 시선은 한 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녀의 와이셔츠에 묻은 습기의 흔적.
이호연이 안겨있던 위치와 똑같았다.
오늘의 악몽은 감정 기복이 굉장히 심했다.
악몽에서 흐느끼던 기억이 아직 생생하다.
저게 혹시 자신의 눈물이라면.
싱긋.
"… 에이 설마."
백아영의 미소를 본 이호연은 고개를 휘휘 저었다.
자신의 잠꼬대는 자신이 가장 잘 안다.
평소같이 잠에 든 히로인들에게도 아무 말도 없었고, 자는 동안 다른 위치로 이동한 적도 한 번도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백아영의 품에 안겨 우는 자신의 모습이 상상이 가질 않는다.
"이리 와요. 여보."
"응?"
"방금 일어났으니까. 피곤할 거예요. 루시퍼와 전투가 끝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니까요. 많이 걱정했어요."
백아영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이호연을 가슴으로 품었다.
이호연은 다정한 마력에 이끌려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파묻었다.
'왜 이렇게 상냥하지?'
물론 여보 백아영은 보통 이런 느낌이지만… 뭐라고 할까.
상냥한 걸 넘어서 친절하다고 해야 하나. 지극정성이라고 해야 하나.
'하지만 좋은 게 좋은 거잖아.'
백아영의 말이 틀린 건 아니다.
상쾌하긴 했지만 악몽을 꾼 탓에 기분이 좋진 않았고, 몸의 컨디션도 최상이 아니었으니까.
"그럼… 감사합니다."
"으응. 여보…."
이호연은 눈을 감은 채 백아영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