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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 야겜에 빙의했다-559화 (559/648)

< 559화 > 트라우마 (1)

"힘들다 힘들어."

이호연은 스마트 워치를 보며 발걸음을 빠르게 옮겼다.

벌써 점심시간이 가까워졌다.

백아영과 만나는 시간은 양호실을 사용할 때부터 언제나 이 시간이었다. 워낙 바쁜 사람이다 보니 시간을 확실하게 지켜야 한다.

이호연은 의료팀에 있는 백아영의 개인 사무실로 향했다.

양호 선생님을 그만둔 이후에 응급 팀에서 일하는 백아영은 사무실 하나를 받아 쓰고 있었다.

똑똑똑.

"아무도 없나?"

슬쩍 문에 귀를 대며 마력을 넣어봤지만 내부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은 없었다.

아직 점심시간은 조금 남았으니… 생각보다 이르게 도착한 모양이다.

띡띡띡띡.

이호연은 자연스럽게 사무실의 비밀번호를 눌렀다.

안에 아무도 없지만 바깥에서 기다리는 게 더욱 시선을 끌 거다.

차라리 안에서 기다리는 편이 낫다.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는 사무실.

평소 백아영의 이미지와 똑같았다.

"이러니까 연락을 안 받았구나."

책상에 널브러져 있는 스마트워치를 보며 이호연은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의 일을 할 때는 칼 같지만 가끔씩 덤벙대는 게 백아영의 모습과 겹쳐 보였다.

완벽하게 처리되어 있는 서류들도 백아영의 업무능력을 보여줬다.

'섹스할 때랑은 천지차이지만.'

성녀 백아영과 여보 백아영은 180도 다르다.

일할 때의 백아영만 본 사람이라면 그녀의 본모습은 상상도 못 하겠지.

이호연에게 본모습을 들키기 전까지는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았던 그녀였으니까.

주변을 둘러보던 이호연은 구석에 있던 휴식용 침대에 누웠다.

"왜 솔이네 간이침대가 더 좋은 거 같지?"

흠.

역시 아카데미에서 지급한 침대다 보니 고급 마법 물품과는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나름 편했다. 이호연은 침대에 누운 채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백아영도 엄청 바뀌었지.'

깔끔한 방의 분위기와 백아영의 본모습 사이에는 확실히 차이가 있다.

다만, 요즘은 그 차이가 점점 줄어드는 느낌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 섹스에 미쳐있던 백아영과는 조금 다른 모습.

'이것도 운명이 바뀌었다고 볼 수 있겠네.'

그녀의 본성은 이 세계관의 히로인으로서 설정되어있던 것.

성욕에 집착하던 그녀는 점점 이호연에게 집착했고, 이호연을 사랑하게 되었다.

게임의 '히로인'이었던 그녀가 이호연을 만나며 바뀌었다.

이런 것들이 이호연의 마음을 다시 다잡게 만든다.

이 세계는 게임이 아닌 실제로 존재하는 세계다. 이 세계를 지키기 위해서는 마왕을 죽여야한다.

"…쩝. 몸이 피곤하네."

진지한 생각은 잠시 미뤄둔 뒤 하품을 했다.

임솔과 시간을 보낸 탓에 육체적 피로가 심했다.

백아영이 오는 건 소리로 파악할 수 있으니 조금만 누워서 쉬자.

이호연은 눈을 지그시 감은 뒤 침대에 몸을 맡겼다.

깜박 방심했다가는 잠들 것 같았기에 정신을 단단히 잡고 있었다.

그렇게 약 30분.

"… 이 사람은 또 왜 안 와?"

이호연은 스마트 워치를 보며 눈을 찌푸렸다.

곧 점심시간이었으니 백아영도 금방 올 거라 생각했는데 영 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잔업이라도 있는 건가.'

백아영이 일하는 응급실은 언제 일이 터질지 모르는 곳이다.

갑자기 환자가 많아진다면 식사를 거르는 건 일도 아니겠지.

그것이 가짜 던전의 여파라고 생각하니 마음 한편이 불편했다.

"분명 큰 부상자는 없을 텐데. 으음… 그래도 혹시 모르나."

가짜 던전의 설계는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는 구조로 만들어놨다.

물론 루시퍼에게 던전을 장악당한 뒤 어떻게 변했는지 확신할 수 없다는 게 불안요소지만, 루시퍼도 자신과의 전투에 집중하느라 가짜 던전을 컨트롤 하진 못했을 거다.

"생각해보니 내가 불평할 처지는 아니네.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이호연은 손가락으로 미간을 꾸욱 눌렀다.

마음을 다잡는다. 히로인들이 자신의 잘못을 이해하더라도 이호연이 그 잘못을 잊으면 안 된다.

그래야 다시는 멍청한 짓을 하지 않을 테니까.

'… 혹시 화난 건 아니겠지?'

이호연은 천장의 무늬를 바라보며 문득 생각했다.

백아영이 가진 자신에 대한 집착은 충분히 알고 있다.

가짜 던전에서 그렇게 많은 여자들을 봤으니 백아영이라면 충격을 받을 만도 하다.

"하아. 씁. 으음."

한 번 시작된 부정적인 생각은 끝없이 늘어진다.

[호연 님 주변의 여성분들이 착하다지만… 호연 님과의 관계를 다시 생각할 정도로 실망하는 사람이 몇 명 정도는 있지 않을까요?]

스칼렛이 했던 말이 가슴을 찌른다.

임솔과 만나며 좋아졌던 기분이 푹 가라앉는다. 긴장감이 이호연의 몸을 지배한다.

이호연은 천천히 마음을 다잡으며 할 말을 되새겼다.

*

"에, 에치! 으으."

누가 자기 험담을 하는 걸까.

백아영은 코를 훌쩍거리며 종이를 넘겼다.

그녀가 맡은 마지막 환자의 메디컬 체크가 끝났다. 드디어 휴식 시간을 받을 수 있게 된다.

"고생하셨습니다. 성녀 님."

"아니에요. 모두 조금만 더 힘내주세요."

"저희는 걱정하지 마시고 들어가서 쉬세요. 벌써 몇 시간 째인지… 성녀 님의 마음은 알지만 그러다가 몸이 상하시면 큰일입니다."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이라니까요."

백아영은 미소를 지으며 교대 인원에게 서류를 전달했다.

가짜 던전으로 인한 입원 환자가 폭증하면서 아카데미 내부의 의료팀에는 비상이 걸렸다.

주변 기관들의 지원을 받았는데도 인원이 너무나 부족했기에 아카데미의 의료팀들은 잠도 자지 못하고 일에 몰두해야 했다.

쏟아지는 환자들을 위해 가장 희생한 건 당연히 성녀 백아영.

의료팀에서 가장 치유 능력이 뛰어난 그녀는 쉬지 않고 환자들을 받으며 치료를 이어갔다.

그 결과 다른 의료팀들의 부담이 많이 적어졌고, 백아영의 몸 상태를 걱정한 의료팀은 억지로 백아영과 교대하며 그녀에게 쉬는 시간을 부여했다.

"휴우…."

끄응.

백아영은 기지개를 켜며 사무실로 향했다.

사망자는 없었지만 중상자는 많았고, 정신적 스트레스를 호소하는 환자들도 많았다.

위급한 환자들은 처리가 끝났으니 이제 자신도 다른 인원들에게 맡기고 휴식을 취할 수 있겠지.

몸은 피곤했지만 사람들을 돕는다는 뿌듯함이 더욱 컸다.

'호연이는 괜찮은 걸까….'

백아영은 종종걸음으로 사무실로 향했다.

가장 열심히 싸웠으면서 제대로 된 치료도 받지 않고 사라졌으니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사무실에 두고 온 스마트 워치로 연락이라도 보낼 생각이었다.

띡띡-

띠리링-

사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간 백아영은 겉옷을 벗어 옷걸이에 걸었다.

평소 의료팀에서 착용하는 복장은 편하지 않았으니 사무실에선 편하게 있어야 한다.

"의료 팀은 다 좋은데 복장이……?"

스마트워치를 찾기 위해 책상으로 고개를 돌리던 백아영의 눈이 크게 떠졌다.

구석의 휴식용 침대를 차지하고 있는 이호연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어? 응? 어째서?"

색- 색-

이호연을 인지하고 나서야 편안한 숨소리가 들려온다.

방금까지 이호연을 걱정하며 스마트워치를 찾던 백아영이었기에 더욱 놀랐다.

왜 이호연이 자신의 사무실에서 자고 있는 걸까.

그 의문의 답을 알기도 전에, 백아영은 이호연에게 다가갔다.

총총총.

백아영은 혹시나 큰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발끝을 든 채 침대로 다가갔다.

"…."

이호연은 편안한 얼굴로 잠을 청하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 문제는 없어 보였다.

백아영이 퇴근한 시간은 점심시간을 한참 넘은 시간이었다. 아마도 점심시간에 자신을 찾아왔다가 그대로 잠들어버린 것 같았다.

"으으. 내가 스마트 워치만 챙겼어도…."

"음…."

아쉬운 마음도 잠시. 백아영은 잠꼬대를 하는 이호연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일이 끝나자마자 보는 이호연의 얼굴은 그녀에게 힘이 되었다.

늦게 왔으니까 이런 모습도 볼 수 있는 거 아닐까.

스윽-

조심스럽게 침대에 걸터앉은 백아영은 이호연의 잠든 얼굴을 보며 헤헤 웃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으니 이런 게 사랑이겠지.

'나만 있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그때,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이 백아영의 얼굴에서 미소를 지워냈다.

"하아."

조심스럽게 이호연의 얼굴에 손을 올렸다.

부드러운 볼과 날카로운 턱선을 간지럽히듯 건드리자 이호연의 잠꼬대가 심해졌다.

… 다른 여자들을 모두 없앤다면 호연이는 나만의 것인데.

"아니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백아영은 잠시 떠오른 끔찍한 생각에 고개를 휘휘 저으며 자신의 뺨을 톡톡 때렸다.

그런 능력도 없을뿐더러 능력이 있더라도 하면 안 되는 일이다.

빨리 호연이나 깨우자.

"… 깨우기 전에 잠깐만."

백아영은 조심스럽게 이호연의 옆 자리에 나란히 누웠다.

서로를 마주 보는 연인처럼 침대에 누운 채 이호연의 얼굴을 바라봤다.

곤히 자고 있는 그 얼굴을 보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고, 고생했어요. 여보…."

깊게 잠든 이호연의 입술과 짧은 접촉.

입술에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촉이 백아영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이러니까 마치 신혼부부 같네.

히히. 백아영은 미소가 아니라 변태 같은 웃음을 지었다.

그때, 이호연이 눈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만… 싫어."

허억.

가슴이 철렁한 백아영은 슬픈 눈으로 이호연을 바라봤다.

싫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찌푸려진 눈과 무언가 말하려는 듯 옴싹달싹하는 입술.

그제야 백아영은 무언가 눈치챘다.

"호연이 너. 자, 자는 척하는 거지."

또 장난에 걸린 거구나. 그게 아니면 타이밍 좋게 싫다고 말 할리가 없다.

백아영은 억울한 눈초리로 이호연을 바라봤다.

"으윽. 음, 으으…."

"정말! 이러면 나도. 아…?"

창피한 마음에 이호연의 어깨를 흔들어 깨우려던 백아영은, 이호연의 슬픈 얼굴을 보고 손을 멈췄다.

그의 볼을 따라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힘들어… 미안해요…."

"…."

항상 장난기 있는 이호연과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언제나 자신을 주도하던 그의 처음 보는 얼굴에 백아영도 당황했다.

"… 여보."

울먹이는 이호연을 보던 백아영은 곧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의사였다. 성녀라고 불리는 백아영이 마력을 사용하지 않고도 이호연의 상태를 파악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깊이 잠든 상태에서 저런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은 이미 마음의 손상이 심한 상태라는 것.

마음 깊은 곳에 트라우마가 있는 것 같았다.

"어째서…?"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음 깊은 곳에 트라우마나 고민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호연은 그 정도가 조금 심해보였다.

그는 눈물을 흘리는 것으로 모자라 흐느끼는 정도로 울고 있었다.

"… 괜찮아요. 여보. 괜찮아."

백아영은 조용히 손에서 마력을 내뿜었다.

그녀의 상냥한 마음처럼 새하얀 마력이 이호연의 몸을 따뜻하게 감쌌다.

이호연이 무엇 때문에 힘들어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에게 다른 여자들이 있는 것도 중요하지 않다.

지금 그의 옆에 있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해야한다.

흐느끼는 이호연의 얼굴을 자신의 가슴에 묻는다. 부드러운 머릿칼을 쓰다듬는다.

아무 말도 하지않고 천천히.

그의 흐느낌이 멎고 편안한 호흡으로 돌아올 때까지.

백아영은 상냥하게 이호연을 쓰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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