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7화 > 어긋난 것 (3)
"으어…."
이호연은 전쟁이 끝난 패잔병처럼 절뚝이며 훈련실을 빠져나왔다.
그냥 부축을 받을 걸 그랬나.
조금씩 걸을수록 더 아파지는 느낌이다.
"응?"
간신히 훈련실을 나온 이호연이 처음 마주친 건 눈치를 보다가 바깥으로 나간 조교가 퇴근을 준비하는 모습이었다.
마법 훈련이 끝나자마자 퇴근이야?
"이제 가시는 거예요?"
"네. 교수 님이 들어가라고 하셔서요."
"아, 그래요?"
언제 그런 말을 한 거지?
초콜릿을 주문했을 때처럼 명령을 보내는 장치가 있는 건가.
이호연의 뒤에서 걸어오던 임솔이 이호연의 말을 이었다.
"다음에 연락할게. 고생했어. 문단속 잘하고."
"넵. 교수님!"
허리를 거의 90도까지 굽힌 조교는 기분 좋은 표정으로 엘리베이터에 탔다.
예의가 아주 바른 사람이네. 하긴, 이런 곳에서 일하면 나라도 사장한테 90도로 허리를 굽히겠다.
"마법 연구가 끝나자마자 칼퇴근이라니 이런 꿀직장이 없네. 그렇죠?"
"그런가? 나는 쓸데없는 관심이 덜한 저 아이가 좋아."
이런 교수라면 대학원생활도 나쁘지 않을지도.
이호연은 그런 생각을 하며 임솔의 연구실로 향했다.
딱-
임솔은 연구실에 들어오자마자 손가락을 튕겼고, 어디선가 날아온 간이침대가 이호연의 앞에 촤르륵 깔렸다.
────[ 간이침대 ]────
▶ 상 등급
▶ 최상급 마석을 기반으로 만들어낸 최고급 간이침대.
▶ 누우면 기분이 좋아지고 피로 회복 속도가 빨라진다.
────────────
침대따위에 최상급 마석이라니.
라는 생각은 침대에 누워보니 곧바로 사라졌다.
"간이침대 치고 되게 좋네요."
부드러운 매트릭스에 몸을 맡긴다.
이 정도면 우리 집에 있는 침대만큼 좋잖아.
이호연은 침대에 누운 채 몸 안의 마력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마력을 움직이는 정도는 오케이. 마법을 사용할 때만 고통이 있는 걸 보니 역시 단순한 휴식 부족이었던 것 같다.
"컨디션 관리를 잘했어야 했는데… 쩝."
"…."
한편 임솔은 누워있는 이호연을 지긋이 바라봤다.
힘 없이 몸 내부의 마력을 움직이는 모습을 보다 보니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다.
[임솔 교수님? 환자 응급조치를 해야 합니다.]
[아뇨, 건들지 마세요.]
이호연과 첫 만남은 아직도 기억한다.
자신이 저지른 실수를 순식간에 바로잡는 마성의 재능.
그때도 지금처럼 마법에 눈이 돌아가서 실수를 했었는데. 오늘도 똑같은 일이 일어났다.
왠지 마법 학회장 아서가 떠올랐다. 항상 자신보고 마법만 잘하는 어린아이라고 했는데, 자신은 아직도 철이 들지 못한 걸까.
[절대 놓치면 안 돼.]
그날 이호연의 마법에 눈이 돌아간 임솔은 어떻게든 이호연과 연결고리를 만들었다.
아예 후회한 적이 없었냐고 물어보면 거짓말이지만, 결국 자신이 막힌 벽을 뚫어내는 데 성공했으니 틀린 판단이 아니었다.
손에 마력을 담아 이호연의 어깨를 슬쩍 쓰다듬었다.
몸 내부로 느껴지는 마력은 안정되어 있었다.
다행히 치료가 필요한 것 같진 않았다.
어쩌면 첫 만남 당시.
이호연의 빛나는 재능을 본 순간부터 임솔은 이호연과 이렇게 될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때는 이런 마음이 들지는 않았는데.'
아름다운 마법과 재능만 보고 다가간 제자에게 어쩌다가 이런 마음을 품었을까.
"…."
"왜 그러세요?"
이호연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몇몇 부끄러운 기억이 떠오른 임솔은 입술을 앙 다물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저 얼굴이 왜 멋있어 보이는지는 자기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다.
게다가 저렇게 힘없이 누워있는 걸 보니 보살펴주고 싶고 왠지 귀여워 보이기까지 하는….
"으, 으으으. 아니야. 임솔. "
자신이 저렇게 만들어 놓고 무슨 생각을 하는 거람.
임솔은 자신의 볼에 손등을 가져다 댔다.
조금씩 뜨거워지는 얼굴은 곧 붉어질 것만 같았다.
"누워있어. 코코아라도 가져다줄게."
자리를 피한 그녀는 코코아를 타며 다시 감정을 조절했다.
'이번에도 마법 때문에 주변 신경을 못 썼네….'
이런 기억이 처음은 아니다.
지금이야 아카데미에서 혼자 연구를 진행하지만, 현역일 때나 마법 학회에서 활동할 때에는 며칠에 한 번 꼴로 일어나던 일이니까.
그때는 직접적으로 불평을 들어도 별 생각이 없었는데, 이상하게도 오늘따라 죄책감이 심했다.
이럴 때는 어떻게 사과해야 하는걸까.
"고마워요. 근데 오늘은 왜 직접 타시는 거예요? 평소에는 알아서 뚝딱뚝딱 만들어지던데."
"아… 음. 그냥."
"그래도 스승님이 손수 만든 코코아 감사히 먹겠습니다."
컵을 받은 이호연은 슬쩍 미소를 지었다.
임솔도 나름 사과의 의미로 직접 타 온 게 아닐까.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지만 저 얼굴을 보면 무언가 찔리는 건 있어 보였다.
겨우 코코아라는 게 약간은 서운하지만 어쩔 수 없나.
홀짝-
코코아를 입에 머금은 이호연은 다시 한번 컵을 확인했다.
'맹물이잖아.'
입 안에서 도는 씁쓸한 코코아 가루의 맛.
매일 마법으로 만들다 보니 직접 타는 감각을 잃어버린 걸까.
이호연은 맹물을 들이키며 입맛을 다셨다.
'우리 제자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건 지 모르겠네….'
임솔은 코코아를 홀짝거리는 이호연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자신을 의미심장하게 바라보는 걸 보니 무언가 눈치챈 것 같았지만, 볼이 붉어지기 전에 자리를 피했다는 걸 알지는 못하는 것 같다.
그 정도면 만족해야겠지. 사실 이런 일에 창피함을 느끼는 것도 임솔에게는 생소한 감각이었다.
마법 말고도 관심이 가는 일이 정말 생길 줄이야. 아직도 실감이 나질 않는다.
"교수님?"
"… 으응?"
이호연은 고민에 빠진 얼굴인 임솔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기가 팍 죽어있네. 귀엽게.'
자신이 누워있는 걸 보며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게 분명하다.
이럴 때는 남자답게 멋있는 모습을 보여줘야지.
"괜찮아. 이제 별로 아프지도 않으니까. 억지로 마력을 끄집어내지만 않으면 금방 회복할 테니 너무 기죽지 마. 솔아."
"응? 아, 응. 다행이다."
"…."
의외의 반응에 이호연은 눈을 꿈벅거렸다.
뭐야. 내 몸 걱정하는 거 아니었어?
"크흠. 그, 뭐야. 아니 지옥의 마력을 보고 싶으면 보여달라고 말을 하면 되지. 다짜고짜 대련을 하자고 하면 어떡합니까. 임솔 교수님. 네?"
부끄러움에 헛기침을 한 이호연은 다급하게 주제를 돌렸다.
"미안해. 진심이야. 다음에는 네 말에 집중할게."
"아으. 몸이 뻐근하네 뻐근해."
이호연은 부들부들 떨리는 팔을 들었다 내리며 자신의 고통을 표현했다.
그제야 임솔이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아까 할 말이 있다고 했지? 지옥의 마력에 관한 일이야?
"… 어, 으음."
임솔의 말을 듣자 이호연의 정신이 돌아왔다. 애초에 여기 온 이유가 있었잖아.
해야 할 말은 당연히 가짜 던전에 대한 말이다.
다른 히로인들에게 했던 것처럼, 임솔에게도 말해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갑자기 이러니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네.
처음부터 진지한 분위기를 잡고 말하고 싶었는데, 갑작스러운 대련에 다치기까지 했으니 계획이 망가져버렸다.
침대에 누워서 그런 이야기를 할 순 없잖아.
'그래도 숨길 순 없어.'
임솔이 아무리 마법 빼고 문외한이라지만 루시 루미 쌍둥이처럼 상처받는 걸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렇게 다 숨길거였다면 처음부터 말하겠다는 생각도 안했겠지.
"지옥의 마력에 관한 일은 아니고… 일단 들어주세요."
"응."
침대에서 억지로 몸을 일으킨다.
이호연의 분위기가 일변하고, 임솔도 자세를 바꿨다.
목소리에서 묻어 나오는 진지함에 임솔은 귀를 기울였다.
*
"흐음…."
이호연이 말해주는 사실을 들은 임솔은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사실 가짜 던전에 대한 얘기는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그래도 마지막에 반성했다는 걸 들으니 그렇게까지 화가 나진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이 고마웠다.
이호연은 임솔의 부끄러운 부분을 많이 알고 있다.
마법사들에게 따돌림을 당했던 일이나 다른 마법사들에게 자격지심이 심한 것. 언제나 최고여야하는 자존심.
모두 이호연이 해결해준 일이나 마찬가지다.
사실 임솔이 더욱 놀란 건 여자들이 그렇게 많다는 사실이었다.
던전에서 볼 때도 놀랐지만 실제로 들으니 더욱 놀라웠다.
"여자들이 그렇게 많은 건 정말 신기하네."
"… 넵."
"저주라고 했었지? 그것 때문인 거야?"
이호연은 임솔의 말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고민했다.
사실 이호연이 가짜 던전에 대해 고백하는 이유는 히로인들을 납치하는 가짜 던전을 설계한 것이 마음에 걸리기 때문인데, 말하는 히로인들마다 가짜 던전보단 다른 여자들에 더욱 신경 쓰는 것 같았다.
'뭐… 그것도 잘못이긴 하지.'
하지만 '저주'라고 하니 뭔가 어색했다.
이호연의 행동을 제약하는 메인 퀘스트는 어떻게 보면 저주라고도 할 수 있지만, 그렇게 표현해도 정말 괜찮은 걸까.
히로인들을 만나고 사랑하는 게 저주 때문이라고 생각되고 싶진 않았다.
"저주랑 교수 님을 만나는 거랑은 상관없어요. 임솔 교수님을 좋아하는 제 마음은 정말이에요. 항상 챙겨주고 싶고… 원하는 건 모두 해주고 싶어요.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나랑 같아서 다행이네."
임솔은 고개를 숙이느라 앞으로 쏠렸던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미소를 지었다.
혹시나 저주때문에 자신을 억지로 만나주는 걸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이호연과 마음이 같다면 더 고민할 필요는 없다.
"사실 여자들이 얼마나 있냐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
억지로 몸을 세우고 있는 이호연의 가슴에 손을 얹고 침대로 밀어 눕혔다.
침대에 누운 채 자신을 멀뚱멀뚱 바라보는 이호연의 모습도 꽤나 귀여웠다.
"난 너밖에 선택지가 없거든.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렇게 정했어."
이것은 임솔의 가슴에 담아둔 비밀이지만, 처음부터 그렇게 정하지는 않았다.
자신보다 뛰어난 마법사와 결혼하고 싶다는 어린 나이의 치기.
언제나 주변에 그렇게 말하고 다녔지만 사실 마음에 없는 소리라는 걸 임솔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자신보다 뛰어난 마법사가 나올 가능성 따위 없으니까.
모든 마법사는 나보다 열등하니까.
그러니 고결한 나는 너희 따위와 친하게 지내지 않을 거다.
친구가 없는 마법사보단 친구를 만들지않는 싸가지없는 마법사가 차라리 나았다.
아직 철들지 않은 어린아이의 불평. 이루어지지 않을 꿈.
그러나 아이의 허황된 꿈을 이루어준 남자에게 반해버린 이상 벗어날 방법은 없었다.
그 기억은 평생 임솔의 가슴에 남아 있을 테니까.
"… 그런 말을 하면 어떡해요."
다시 한번 반할 것 같은 달콤한 말에 이호연의 가슴도 두근거렸다.
침을 꿀꺽 삼킨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이 같았다.
임솔도 자신처럼 두근거리고 있는 거겠지.
그 말에 동의하듯 가슴에 얹어있던 임솔의 손이 떨어진다.
임솔은 산뜻한 미소를 지으며, 이호연의 바지 지퍼를 내리기 시작했다.
"… 교수님?"
"가만히 있어."
"아니, 솔아. 잠시만, 끄아아악…!"
임솔의 손을 타고 몸 안에 들어오는 마력에 눈을 찡그린다.
이 미친 여자가 환자에게 마력을 내뿜었다.
"나 환자라고! 미쳤어?"
"걱정하지 마. 따끔한 거뿐이야. 그 정도는 조절할 수 있어."
침대에 억지로 누운 이호연은 자신을 잡아먹을 기세로 바라보는 임솔을 보며 몸을 움츠렸다.
"우리 분위기 좋았잖아. 여기서는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포옹과 뜨거운 키스를…."
"이것도 사랑을 확인하는 거야. 오늘은 당 보충이 아니라 사랑 보충으로 할게."
"크, 크흠."
이호연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임솔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오다니.
너무 사랑스러운 말이었다. 굉장히 부끄러운 말이지만 연인 사이이기에 할 수 있는 말.
지금도 설레지만 조금 더 분위기를 잡았으면 정말 설렜을 텐데.
이호연의 속옷을 내리면서 한 말이라는 게 조금 아쉬웠다.
'거절할 수는 없겠네.'
진지한 분위기를 유지하고 싶었지만, 임솔과 있을 때 이호연의 마음대로 상황이 흘러간 적은 얼마 없었던 것 같다.
오늘도 흘러가는대로 당할 수 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