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2화 > 동아리 방 (1)
동아리 건물의 2층 구석.
놀자 동아리 부실의 책상은 쌍둥이가 지키고 있었다.
"여기 침대를 만들어놔서 다행이다. 루미. 그렇지? 밤에 잘 수도 있고."
"응… 다행이야."
던전 테러 사태가 끝난 지 얼마 되지않은 지금.
아카데미 생도들은 대부분 기숙사나 본가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루시퍼와 전투를 치룬 쌍둥이는 더더욱 휴식이 필요했지만, 그녀들이 이곳에 있는 이유는 수많은 기자들이 기숙사 앞으로 몰려왔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언제까지 여기 있어야 하지? 내일이면 다 없어지려나?"
"아마 기자 분들이 가려면 며칠은 걸리지않을까…. 아직도 기숙사 주변에 숨어있는 것 같아."
"진짜 너무하네! 루시퍼랑 싸운 건 우리 말고도 엄청 많은데 왜 우리한테만 찾아오는 거야."
"다른 사람들은 전부 바빠서 그런 거 아닐까…?"
"그런 게 어딨어. 으으. 열받아. 이건 사생활 침해라고."
던전 테러에 휘말린 사람은 수 천명에 달했지만, 그중 테러를 해결한 영웅들은 열댓 명에 불과했다.
영웅들 중 명확하게 거처가 밝혀져있는 사람은 기숙사에 사는 루시와 루미뿐.
특종을 노리는 기자들의 목표가 되는 것은 당연했다.
"자, 이건 어때! 이러면 귀족이 내 거야."
"앗… 나, 나는 그러면 어떻게 하지…."
결국 그녀들은 기숙사에서 가까스로 빠져나와 동아리 방에 숨어 보드게임으로 시간을 떼우고 있었다.
"루미. 이 판은 내가 이겼으니까 포기를… 응?"
동아리 방에 있던 보드게임을 하며 시간을 보내던 루시는 문 밖에서 인기척을 감지했다.
카드를 잠시 내려놓은 루시는 루미에게 신호를 보냈다.
"쉬잇. 루미. 바깥에 누군가 왔어."
"으읏. 정말…?"
요즘 들어 더욱 날카로워진 루시의 감각은 루시퍼와의 전투로 절정에 달했다.
애초에 히로인인 루시 루미 쌍둥이의 재능은 최상위권.
계기가 생겼으니 실력이 오르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 실력은 임솔도 칭찬할 정도였으니 의심의 여지는 없다.
쉿.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 댄 루시는 동아리실 구석에 있던 프라이팬을 들고 문 뒤에 몸을 딱 붙였다.
루시가 여자력을 올리기 위해 요리 연습을 하던 도구다.
"루, 루시. 왜 그래?!"
"여기까지 쫓아왔으면 벌을 받아야지. 화가 나서 못 참겠어!"
"그냥 지나가던 생도는 아닐까…?"
"그럴리가. 학생회처럼 일중독자들이 아니라면 지금 아카데미에 있을 리가 없잖아. 무조건 우리 뒤를 쫓아온 기자일 거야."
"아, 아무리 그래도 기자분한테 그러면…."
"기자가 뭐 벼슬이야. 우리 동아리에선 내가 왕이라고. 그래도 일반인이니까 마법은 참을게. 걱정하지 마."
"…."
보통 프라이팬에 맞으면 크게 다치지 않나?
루미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루시를 말리진 않았다.
루시의 말대로 여기까지 쫓아온 기자에게도 잘못은 있겠지.
끼익-
"에잇!"
"애들아. 여기는… 응?"
서서히 문이 열리고, 루시가 프라이팬을 내려쳤다.
팅!
"꺄악!"
"… 루시? 지금 뭐 하는 거야?"
이호연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무언가를 보자마자 본능적으로 실드인 코튼 가드를 펼쳤다.
무게를 실어서 내려찍은 프라이팬이 가볍게 튕겨가며 무게중심을 잃은 루시가 꽈당 넘어지고, 이호연은 눈을 깜박거리며 루시를 바라봤다.
"호연 씨! 괘, 괜찮으세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루미는 카드게임이 엎어지는 것도 신경 쓰지 않으며 이호연에게 다가왔다.
"진정해. 안 맞았으니까 당연히 괜찮지. 루시는 갑자기 왜 이런 거야?"
"그게… 죄송해요. 저희를 쫓아온 기자분인 줄 알고 루시가 화나서…."
"음…."
기자랑 프라이팬이랑 무슨 상관이지?
이호연은 의문을 느끼며 루시에게 손을 내밀었다.
"루시. 괜찮아?"
"으으, 이호연의 마력이 아니었는데… 뭐지?"
"… 그거야 마력을 숨기고 있으니까."
원래도 유명했지만 던전 테러 이후로 워낙 유명인이 되었으니 그냥 돌아다닐 수가 없다.
학생회에서 나오자마자 결계를 펼쳤다.
'근데 루시는 날 어떻게 알아챈 거지?'
결계를 펼치고 있었는데도 내 기척을 눈치챘다니.
실력이 엄청나게 늘긴 했나보네.
"왜 마력을 숨기고 동아리 방에 온 거야?"
"그건 내가 묻고 싶네. 나는 학생회에 들렸다가 동아리 방이라도 좀 치울까 해서 온 거거든. 너희들은 왜 여기 있어?"
찰칵-
혹시 모르니 동아리 방의 문을 단단히 잠근 이호연은 책상으로 다가가며 쌍둥이에게 질문했다.
"만만한 게 우리밖에 없는지 기숙사에 기자들이 깔렸어. 그래서 도망쳤지."
"아하…."
던전 테러 이후로 루시와 루미도 엄청나게 유명인이 된 모양이다.
하긴 루시와 루미도 아카데미를 구한 영웅이니 당연한 일인가.
루시는 뒤통수를 벅벅 긁으며 이호연의 손을 잡았다.
"마침 게임하고 있었는데 잘 왔네. 온 김에 들어와서 같이 하자. 청소는 이미 다 끝내 놨어."
"네. 여기 침대도 있으니까 피곤할 때는 주무셔도 괜찮아요."
"그럼 조금만 있을까."
이호연은 양손을 쌍둥이에게 잡힌 채 보드게임이 널려있는 책상에 앉았다.
"이게 스플랜툰이라는 건데 땅이랑 보석을 모으는 거거든? 둘이 하는 것보다 셋이 더 재밌을 거야."
"루시가 계속 이겼는데… 이제 호연 씨가 이겨주세요!"
"알겠어. 그럼 규칙 좀 알려줘."
갑작스럽게 만나긴 했지만 루시와 루미에게도 할 말은 있었다.
이 둘에게도 던전 테러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했다.
'틈을 봐서 말을 꺼내야겠네.'
지금은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으니 일단은 보드게임에 어울려주자.
*
약 세 시간 뒤.
"이거 너무 사기카드 아니야? 나한테 귀족이 3개나 있는데 어떻게 질 수가 있어!"
"그렇지만 루미도 이걸로 나한테 많이 이겼잖아…. 질 때만 사기카드라고 하는 건 비겁해."
"…."
틈을 봐서 진지한 이야기를 꺼내려던 이호연은 자신도 모르게 보드게임을 즐겨버렸다.
루시와 루미의 에너지에 휩쓸려서 게임을 하다 보니 세 시간이나 지났다.
'슬슬 뭔가 얘기해야 될 것 같긴한데.'
루시와 루미가 동아리 방에서 잠을 청해야 하는 것도 결국은 이호연이 가짜 던전 마법진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결국 자신에게 책임이 있었다.
"아아아. 또 졌어. 이호연 너 왜 이렇게 잘하는 거야!"
"미안. 그래도 루시랑 루미랑 합치면 승률이 50프로는 나오잖아."
"셋이 하는데 네가 반이나 이기면 안되지. 매너가 없어."
"루시. 그러지 말고 다른 게임 하자…. 조커 뽑기는 우리가 이길 수 있어."
주섬주섬 트럼프 카드를 꺼내는 루미를 보니 지금 멈추지 않으면 몇 시간을 더 게임에 몰두할 것 같았다.
이호연은 큼. 하고 목을 다듬은 뒤 천천히 말을 꺼냈다.
"다들 상태가 좋네. 던전에서 나온 이후로 아픈 곳은 없지?"
"전혀? 오히려 임솔 교수님이 칭찬해줘서 기분 좋았어."
"맞아요. 아, 호연 씨를 데리고 연구실에 놀러 오라고 하셨어요. 다음에 같이 가주세요."
"응. 그런 말을 들었던 것 같네. 꼭 같이 가자."
"자. 한 장씩 가져가. 조커 뽑기 할 거야."
"잠시만. 얘들아. 카드 게임도 좋은데 잠시만."
카드를 나누기 시작하는 루시의 손을 붙잡았다.
얘는 왜 이렇게 게임을 좋아하는 거야.
"왜 그래?"
"아니, 뭐 궁금한 거 없어? 던전에 대한 거나… 다른 것도."
누가 보면 이호연만 던전에서 방금 나온 줄 알 것 같다.
루시와 루미도 분명 던전에 같이 있었는데, 그녀들은 이호연에게 할 말이 하나도 없는 듯이 행동했다.
'분명 안에서 다 들었을 텐데.'
문수린이 아는 것과 똑같은 정보를 루시와 루미도 알고 있을 터.
아무 질문도 하지 않는 건 뭔가 이상하잖아.
던전에 대한 거나 마법진에 대한 게 안 궁금한가?
"에…."
"으음…."
루시와 루미는 트럼프 카드를 든 채 서로를 마주 봤다가 바보 같은 웃음을 지었다.
"그냥… 말해주면 좋고. 아님 말고. 그 정도?"
"궁금하거나 묻고 싶은 건 없어?"
"굳이 궁금해야 해? 안 그래도 기자들이 찾아와서 물어대는 바람에 엄청 피곤해."
"… 꼭 그런 건 아니지."
"나는 그냥 지금처럼 게임하고… 루미랑 너랑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게 좋아. 물론 야한 일도 좋고."
"루시…."
이호연은 카드를 든 채 양손을 모은 루시의 손을 꽉 잡았다.
루시에게는 마음의 빚이 있다.
게임과 이 세상을 구분하지 못했을 때 상처를 주었으니까.
"저도 호연 씨랑 안 좋은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아요. 루시도 저도 같은 마음이에요."
"응. 애초에 다른 여자들은 별로 궁금하지도 않아. 어차피 나중에 우리가 다 이길 거라고."
"맞아요. 저희는 둘이니까!"
"… 아."
활짝 웃는 둘을 보니 가슴이 찌릿했다.
히로인들에게 사실을 말하고 사과하는 건 중요한 일이다.
그녀들에게 한 잘못을 반성하기 위해선 당연히 진실을 밝히고 사과해야겠지만, 그녀들이 불편해하는 진실을 굳이 밝혀야할까.
과연 그녀들을 위해서는 무슨 행동이 맞는 걸까.
"그리고 뭔가 호연 씨한테도 사정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어, 음… 뭐든지요."
"맞아. 이호연이 나쁜 짓을 할 리가 없으니까. 굳이 뒷 사정 같은 건 말해주지 않아도 괜찮아."
가만히 있는 이호연의 태도를 뭐라고 생각했는지 루시와 루미는 더욱 바쁘게 변호를 시작했다.
"루시. 루미."
"으응."
"넵…."
이호연은 긴장한 표정인 루시와 루미를 각각 한 팔로 끌어안은 채 고개를 푹 숙였다.
"좋아해. 너희들을 좋아하는 마음은 정말이야."
"헤헤. 나도 좋아해."
"저도요… 호연 씨."
"요즘 많이 못 챙겨줘서 미안해. 앞으로는 더 자주 놀러올게."
"아니에요. 저희도 바빴어요."
양 옆에서 귀여움을 뽐내는 쌍둥이들을 껴안고 있다 보니 미안한 마음이 계속 들었지만, 쌍둥이들이 저렇게 말해주는데 자신이 찌질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
"던전 하니까 생각났는데, 나도 이제 엄청 강해졌어. 임솔 교수님도 인정했다고. 이호연 너도 힘든 점 있으면 우리한테 말해!"
"아직 호연 씨에 비해서는 많이 모자라지만요…."
이호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아니야. 루시랑 루미도 각각 화력이랑 방어력만 따지면 나랑 비슷해."
"정말요?"
"응. 당연하지."
이호연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말을 이었다.
아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루시의 화력은 무식할 정도로 강하다.
이호연의 최대 화력보다는 부족하지만 비슷하다고 말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루미도 마찬가지. 그녀의 방어력은 루시퍼의 공격을 막아낼 정도로 강했다.
'물론 내가 전투 도중일 때가 기준이지만.'
이호연이 공격이나 방어 둘 중 하나에 집중한다면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다.
둘이 합쳐야 이호연과 엇비슷하다는 말이다.
'… 잠시만. 그것만으로도 엄청 대단한 거 아니야?'
이호연은 지금 원작보다 훨씬 강해진 상태였다.
루시와 루미를 띄워줄 생각이었는데, 둘이 합쳐서 자신과 엇비슷하다면 그것만으로도 칭찬할 일이잖아.
"생각해보니 더 대단한 거 같네. 언제 그렇게 강해진 거야."
"호연 씨가 마법을 알려주셔서 그래요."
"확실히 이호연의 수업이 도움이 많이 되긴 했어."
"장하다 장해. 이리와."
히로인들이 다치지 않도록 막는 건 이호연의 의무지만, 그녀들이 강해지면 더욱 안전해지겠지.
임솔에게 마법을 배우면 여기서 더욱 강해질거다.
"칭찬은 네가 했으면서 갑자기 왜 이래!"
"으으음… 호연 씨이."
이호연은 루시와 루미의 부드러운 볼에 얼굴을 비비며 루시와 루미를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