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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 야겜에 빙의했다-551화 (551/648)

< 551화 > 고백 (5)

잠시 이호연의 체온을 느끼며 심신의 안정을 찾던 문수린은 팔짱을 풀며 말했다.

"태연한 척했지만, 던전에 대한 건 조금 충격이었어. 루시퍼와 전투가 워낙 치열해서 나도 레베카 씨의 말을 놓치고 있었거든."

"죄송합니다…."

홀짝-

커피잔을 입에 가져간 문수린은 커피를 삼키며 쓴웃음을 지었다.

루시퍼에게 마법진을 강탈당했다고 해도, 애초에 그런 마법진을 설치한 게 무슨 의미인지.

그녀로선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야. 사실 이해가 안 되긴 하지만… 호연이가 천천히 설명해주겠지."

"…."

설명할 건 아무것도 없는데.

수린 누나는 뭔가 엄청난 비밀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음, 그게… 따로 설명할 비밀은 없긴 해요. 누나한테 숨긴 것도 없고요."

"이 서류들은 다 버려야겠네. 보안 팀의 개편은… 다시 생각해볼까."

문수린은 서류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보안팀 개편 서류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이호연이 범인인 걸 알았으니 쓸데없는 일이 많이 줄었다.

자신의 말을 무시한 채 일에 집중하는 문수린을 본 이호연은 말을 이으려 했지만, 문수린의 표정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 지금은 듣고 싶지 않은 모양이네.'

문수린에게도 나름대로 방어기제가 있다.

이호연을 누구보다 믿는다고 자부하고 사랑하는 그녀다. 하지만 그렇기에 이호연의 나쁜 모습을 보기 싫었다.

무슨 모습을 보더라도 사랑이 변하진 않겠지만, 101마리 달마시안도 아니고 11명의 여자를 당사자의 입에서 들은 지금.

문수린은 다른 정보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보안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 역시 개편은 취소할까?"

"… 네. 보안 팀은 잘해주고 있어요. 저 때문에 직장을 잃는 건 조금 그렇거든요. 아, 그리고 저를 영웅이라고 떠받드는 기사들도 부담이긴 한데…."

"호연이가 죄책감을 가진 건 알겠지만 사실을 공표했다간 테러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충격이 너무 커질 거야. 사람들은 젊은 영웅의 등장에 환호하고 있거든."

"… 그렇겠죠. 지금까지 쌓아온 제 이미지가 있으니까요."

"그리고 호연이를 감옥에 보낼 순 없잖아. … 가끔은 하얀 거짓말이 필요하지 않을까?"

쩝.

이호연은 입맛을 다셨다.

솔직히 말하면 자신도 안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영웅 취급을 받기 전이면 몰라도 이미 저렇게 퍼진 이상 되돌릴 순 없다.

'루시퍼가 끝이 아니야. 마왕까지 죽여버리면 돼.'

이호연에겐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아있다.

"호연이 덕분에 일이 사라져서 시간이 많아졌네."

"… 다행이네요."

이호연 때문에 생긴 일이 이호연 덕분에 사라지는 건 참 귀한 일이다.

애초에 그걸 내 덕분이라고 말해도 되는 걸까.

"시간도 생겼는데, 호연이는 누나랑 하고 싶은 거라도 있어?

"저는 딱히 없어요. 누나가 타 준 거라 그런 지 커피도 맛있네요."

"루시퍼와 싸우느라 고생도 했는데 기분 좋은 거라도 할래?"

문수린은 입꼬리를 올리며 이호연에게 어깨를 딱 붙였다.

다리를 꼬면서 어깨를 달라 붙이는 모습은 노출이 없어도 왠지 가슴이 뜨거워진다.

하지만 오늘은… 성욕의 화신인 이호연도 조금 쉬고 싶었다.

신체적이든 정신적이든 굉장히 피곤했다.

"… 저도 누나랑 그런 시간을 보내는 게 좋지만, 오늘은 조금 쉬는 거 어때요? 피곤함이 쌓여서 무기력해질 것 같아요."

"우으음, 그것도 맞긴 하지."

이호연은 꾸역꾸역 올라오는 성욕을 간신히 잠재웠다.

아무리 나쁜 남자라도 이런 상황에서 야한 짓을 하는 건 너무 나쁜 놈이잖아.

문수린의 표정을 보면 오히려 저 쪽에서 야한 일을 바라는 것 같기도 하지만, 오늘 하루 정도는 쉬어도 되겠지.

"그럼 그냥 같이 있을까? 누나는 그것도 좋아."

"응. … 나도 좋아. 수린아."

이호연은 문수린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갔다.

문수린도 자연스럽게 몸을 붙이고 어깨에 머리를 기댄다.

잠시 눈을 감았던 문수린은 눈을 뜨며 손뼉을 짝 쳤다.

"맞아. 호연이한테 주려고 준비한 게 있어."

"나한테?"

따악-

문수린이 손가락을 튕기자 책상 서랍이 열리며 티백 두 개가 둥둥 날아서 이호연의 찻잔으로 들어갔다.

이호연은 눈을 깜박거리며 커피의 변화를 바라봤다.

달콤 씁쓸했던 커피의 색이 점점 괴상한 색으로 변해갔다.

"… 이건 뭐야?"

"아는 카페 사장님이 티백으로 만들어주셨어. 한 번 마셔봐."

조심스럽게 커피잔을 든 이호연은 킁킁 냄새를 맡았다.

코를 찌르는 달콤한 향.

커피잔을 살짝 입에 가져가자 달콤하면서도 은은한 장미향이 입 안을 맴돌았다.

잠시 후 민트를 먹은 것처럼 입이 시원해졌다가, 갑자기 매운맛이 나기 시작했다.

"… 잠이 확 깨는 맛이네."

입에 대고 나서야 기억났다.

끌레르 로즈 라떼.

문수린이 좋아하던 호불호가 심하게 갈리는 음료.

'분명 커피가 들어있었는데… 이게 마법인가?'

한 때 문수린을 쫒아다닌다고 이것만 먹었을 때는 나름 적응했다고 생각했는데, 오랜만에 먹으니까 역시 적응하기 힘든 맛이다.

"호연이도 끌레르 로즈 라떼를 좋아했었잖아. 시제품이라 티백은 아직 몇 개 없지만, 호연이를 생각해서 남겨놨어."

"낙월 이었나? 아카데미 앞에 있던 카페. 거기서 만들어주신 거야?"

"기억하는구나!"

"당연하지. 그 때는 후배 님. 후배 님. 하고 불렀잖아."

"추억이잖아. 그렇지? 후배 님."

끌레르 로즈 라떼.

첫 만남부터 문수린이 마시던 음료였다.

기억 보완 능력으로 머리를 뒤지다 보니 기억이 났다.

'수린 누나랑도 많은 일이 있었지.'

첫 만남부터 스토커 사건, 기숙사를 습격당한 일. 그리고 문수린의 아버지와 관련된 일.

여러 가지 추억이 하나 씩 떠오른다.

'의료팀에 있는 장인어른은 괜찮으려나.'

아카데미 전체가 납치되었으니 분명 피해를 봤을 텐데.

이호연은 끌레르 로즈 라뗴를 마시며 행복한 표정을 짓는 문수린의 손을 살며시 붙잡았다.

"누나. 그러고 보니 장인어른은 괜찮은 거지?"

"음… 그렇지? 사실 이번 테러 이후로 몸이 더 좋아지신 것 같기도 해. 할아버지. 아니, 이사장 님이랑 같이 보러 갔을 때는 걸어 다니는 것도 무리가 없어 보이던데."

"그럼 시간 내서 같이 뵈러 갈까?"

"좋아. 아빠가 퇴원하고 죗값을 치르기까지 시간이 조금 남았으니까."

"아."

크흠.

문수린의 말에 이호연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분명 모녀가 재회했을 때 그런 말을 했었지.

- 아버지가 마인일 때 지은 죗값은 모두 치르게 할 거예요.

그때는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둘이 참 멋있어 보였는데, 막상 자신이 나쁜 짓을 하고 나니 양심이 쿡쿡 찔린다.

문성민처럼, 가짜 던전 마법진을 만든 자신의 죗값도 치러야 하지 않을까.

물론 이호연은 던전을 만들며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노력했고, 마인으로 타락한 문성민은 몇 백몇 천명에 달하는 사람을 죽였으니 죄의 질이 다르긴 하다.

"호연이는 왜?"

"… 아니야. 장인어른은 그럼 자수하시는거야?"

"으음, 날카로운 지적이네. 솔직히 말하면 아버지를 감옥에 처넣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아카데미에 어마어마한 충격이 올 거야. 법원에서 나랑 혈연관계라는 걸 숨길 순 없으니까. 그렇다고 법의 심판 없이 감옥에 넣는 건 아무 의미 없는 행동이고…."

문수린은 기본적으로 정의로운 성격이지만, 학생회장이라는 자리를 딱지치기로 딴 건 아니다.

아카데미를 소중하게 여기고, 학생회장으로서 아카데미를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이 있다.

거짓말 정도는 얼굴 표정이 바뀌지않고 할 정도로 현실적이라는 뜻이다.

문성민이 법의 심판을 받는다면, 아카데미의 권위는 땅에 박힐 것이다.

낮 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

그 정도의 스캔들은 아무리 숨기려 해도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이사장 님의 생각은?"

"할아버지는 그냥 넘어가고 싶은 것 같아. 하지만 그냥 넘어갈 순 없어. 보육원이라도 평생 운영하면서 죗값을 치러야지."

"아카데미에서는 아예 손을 떼시는구나."

"당연하지. 십 년이 넘게 아카데미를 내버려 둬 놓고 이제 와서 숟가락을 얹으려고 하면 절대 안 돼. 내 쪽에서 거절이야."

"으음…."

평생 보육원을 운영한다고 해서 지은 죄가 사라지는 건 아니지만… 자수하는 게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힌다면 그것도 고민할 만한 일이네.

자신은 누가 맞다고 정해줄 수 없는 입장이다.

선택은 문수린의 가족에게 맡기면 되겠지.

'호연이가 힘이 없네.'

문수린은 이호연을 보며 눈을 찌푸렸다.

아직도 표정에 찝찝함이 남아있다. 왜 저러는지는 알 거 같다.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 생각하고 있겠지.

호연이의 잘못인 걸 알지만,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다.

힘이 없는 이호연의 모습을 보니 뭐라도 해주고 싶었다.

문수린은 잠시 고민하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결과론적이긴 하지만 호연이는 사망자를 만들진 않았잖아? 치료 공간인지 뭔 지 때문에 죽은 사람도 없었고… 대부분 경상이었으니까. 아카데미의 의료팀이 말하기를 정신적인 피해를 호소하는 사람도 없다고 했어."

"… 그건 참 다행이네."

루시퍼가 마력을 팍팍 가져다 쓴 덕분에 던전의 능력을 대부분 잃었다.

그 덕분에 던전의 함정들이 전혀 작동하지 않았다. 부상자가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부상자의 치료는 치유 공간이 있었고 그들 대부분은 전투 인원이다 보니 정신적 피해도 없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걸 알아도 움츠려 든 어깨가 펴지진 않았다.

'… 쩝. 찌질한 모습은 그만 보여줘야지.'

이호연은 심호흡을 한 뒤에 어깨를 쭉 폈다.

할 말은 다 했으니 당당하게 나가자.

"아아-! 모르겠어! 이제 이런 이야기는 그만하자."

고개를 휘휘 저은 문수린이 이호연의 눈앞에 있던 끌레르 로즈 라떼를 빼앗아 들이켰다.

입 안에 감도는 화한 맛이 문수린의 기분을 조금 풀었다.

"아빠를 보러 가는 건 최대한 빨리 약속을 잡을 테니까, 그때 다시 말해. 괜찮지?"

"음, 알겠습니다. 아니, 알겠어."

이호연은 갑자기 텐션이 높아진 문수린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저런 모습을 먼저 보여주려고 했는데, 선수를 빼앗겼다.

"다른 거 하고 싶은 건 없어? 호연이가 가면 보안팀 하고 미팅을 해야 하니까 지금 말해줘. 아니면 메시지로 남겨줘도 괜찮아."

"… 그럼, 하나 부탁할 게 있어. 누나."

염치불구하고.

이호연은 학생회장 문수린에게 일을 더 맡겼다.

*

"고생하세요."

"후배 님도 고생했어~."

"… 네. 고맙습니다."

학생 회장실에서 나온 이호연은 학생회 선배들에게 고개를 숙이며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선배들은 학생회 이름을 달고 있는 주제에 나오지 않는 후배에게 참 잘 대해줬다.

하긴, 다들 착한 사람이니까 학생회에 있겠지. 부회장 그놈이 특이 케이스였다.

덜컹-

엘리베이터에 탄 이호연은 왠지 허무한 감정을 느꼈다.

엄청나게 긴장하고 있었는데, 의외로 별 거 없이 끝났다.

"… 수린 누나는 참 착하네."

신기할 정도로 자신에게 관대하고, 자기 자신보다 이호연의 입장을 우선시해준다.

이유는 당연히 이호연을 좋아하니까.

무슨 사정이 있더라도 자신을 믿어주는 거다.

'왜 고민하고 있었을까. 이렇게 쉬운 일이었는데.'

저런 호의가 감사하긴 하지만,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린 탓에 마음이 놓여버렸다.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말자. 정신 차려야지."

히로인들이 자신에게 관대한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히로인들은 어딘가 결핍되어있고, 그게 무엇이든 이호연이 채워줘야 한다.

그걸 공략한 건 자신이니까.

괜히 죄책감이 또 느껴지지만, 절대 방금처럼 찌질한 모습은 보이면 안 된다.

그녀들이 원하는 건 이호연이 고개를 푹 숙이는 게 아니다.

차라리 당당하게 사랑한다고 말해주는 게 낫겠지.

[띵동- 2층입니다.]

스르륵-

"아. 본능적으로 2층에 왔네."

루시 루미 쌍둥이가 있는 동아리 방.

문수린을 만나고 항상 들리다 보니 무의식적으로 2층을 누른 모양이다.

'다들 기숙사에서 쉬고 있겠지. 던전은 힘들었으니까.'

동아리방이나 가보자.

혼자긴 하지만 청소라도 해놓지 뭐.

항상 쌍둥이들에게 맡겨놨으니 한 번쯤은 직접 할 만도 했다.

[놀자 동아리]

익숙한 이름이다.

이호연은 싸구려 같은 동아리의 이름을 확인한 뒤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 쉿. 밖에 누가 왔어.

- 설마 여기까지 따라 온 거야? 으….

하지만 동아리방에서는 익숙한 인기척과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엥?"

너희들이 왜 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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