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 야겜에 빙의했다-547화 (547/648)

< 547화 > 고백 (1)

지이잉-

'으… 으음.'

따뜻한 빛이 문수린의 몸을 감싼다.

문수린의 몸 안을 채운 지옥의 마력을 몰아내고, 생기를 불어넣는다.

이호연이 갑자기 사라진 이후. 갑자기 공간을 채운 정체불명의 마력에 휩쓸린 문수린은 잠시 정신을 잃었다.

- 루미, 괜찮아?

- 으응. … 임솔 교수님. 저희는 이제 어떻게 해야할까요?

- 걱정하지 마. 루시퍼가 죽었으니 시간만 있다면 마법진은 분석할 수 있어. 하지만… 그전에 호연이를 찾아야 해.

주변 여자들의 목소리가 귀로 파고든다.

이호연?

무시할 수 없는 이름이다.

문수린은 미간을 찌푸리며 무거운 눈을 떴다.

그녀의 시야에는 걱정스러운 표정의 백아영의 얼굴이 꽉 차있었다. 백아영은 눈을 뜬 문수린을 보며 화색을 지었다.

"성녀 님…. 이게 어떻게 된 걸까요?"

"학생회장. 정신을 차렸네요. 다행이다."

백아영은 눈을 뜬 문수린을 보며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마력에 휩쓸린 사람들이 금방 정신을 차렸다.

진짜 문제는 정체불명의 마력에 휩쓸린 이호연이 사라졌다는 것.

평소라면 이호연이 사라졌다는 사실만으로도 패닉에 빠졌을 백아영이지만, 환자가 눈앞에 있다 보니 조금은 진정할 수 있었다.

"뭔가 기억이… 애매해요. 어떻게 된 거죠? 호연이가 루시퍼를 죽인 건 기억나는데. 그 뒤로 정체불명의 마력이 호연이를 감쌌어요."

"저도 학생회장과 아는 게 똑같아요. 갑자기 나타난 마력이 호연이를 감싸자마자 호연이가 사라졌어요."

"말도 안 돼. 루시퍼를 잡았는데 어째서…."

문수린은 부들거리는 주먹을 꽉 쥐었다.

이호연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던 모습이 아직까지도 생생했다.

루시퍼를 자신의 손으로 죽여버리고 싶었지만, 그녀의 능력 부족으로 이번에도 이호연에게 기대 버렸다.

"… 감사합니다. 성녀 님."

백아영에게 고개를 꾸벅 숙인 문수린은 주변을 둘러봤다.

문수린의 근처에는 레베카와 릴리아나가 보였다.

그녀들이라고 다른 정보가 있을까 싶지만, 문수린은 둘에게 다가갔다.

"레베카 씨."

"아, 학생회장. 정신 차렸구나? 꽤 오래 쓰러져있어서 걱정했어."

"네. 혹시 레베카 씨는 호연이가 어디 있는지 아세요?"

"글쎄. 우리도 애기, 크음… 호연이에 대한 이야기 중이었어."

문수린의 질문을 받은 레베카는 머쓱한 웃음을 지었다.

사실 레베카라고 더 아는 게 있을 리가 없다.

문수린도 그 사실을 알고 있겠지만, 그만큼 간절하다는 뜻이겠지.

"분명 이상해. 루시퍼도 죽었는데 이호연은 어디 간 거냐구."

"그러게 말입니다. 그래도 릴리아나 님의 말에 조금 설득력이 생겼습니다."

"엥? 그런 거야?"

"호연 님이 마법진을 장악하고 루시퍼가 죽었는데도 기분 나쁜 마력이 사라지질 않았으니까요. 어쩌면 릴리아나 님의 말이 정말 맞을지도 모릅니다. 그럼 호연 님을 의심한 것에 대해 사과라도 해야겠네요."

스칼렛은 고개를 끄덕이며 팔짱을 꼈고, 릴리아나는 눈을 크게 떴다.

흘러가는 대로 살아가는 릴리아나지만 그녀도 바보는 아니다.

그녀도 마법진의 기본은 알고 있다.

이호연이 루시퍼의 함정에 빠졌다는 건 어디까지나 그녀의 희망사항이었다.

차라리 긍정해주면 좋겠다는 릴리아나의 소망.

그 소망이 이루어진다면 참 좋을텐데.

"레베카 씨. 그럼 호연이는 함정에 빠진 걸까요?"

레베카는 쓴웃음을 지었다.

마법진의 중심부로 일행을 안내한 건 레베카였다.

그 말은 즉 이 던전을 이호연이 만든 게 맞다는 뜻.

물론 입 밖으로 말을 꺼내진 않았다.

"으음. 아마 그럴 가능성이 높겠지…? 모두 정신을 차렸으니 빨리 탐색해보자."

"저도 뭐든지 도울게요."

레베카와 남다은의 목소리는 중심부 전체로 울려 퍼졌다.

당연히 멀리 서있는 엘리스와 아이린 자매에게도 들렸다.

"…."

엘리스는 무언가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다들 삼삼오오 모여서 대책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그중에서 엘리스만 조금 짜증이 난 상태였다.

모두 잘 진행되고 있었다.

던전에 납치당하고, 루시퍼를 맞닥뜨린 엄청난 위기를 돌파했다.

물론 이호연이 사라진 것은 엄청난 문제였지만, 분명 금방 찾아낼 수 있을 거다.

엘리스는 그가 죽지 않을 거라고 믿고 있었다.

'기다리는 여자가 이렇게 많은데 죽을 리가 없어.'

죽을 거라면 진작 죽었겠지.

루시퍼도 이긴 그 괴물 같은 남자가 허무하게 죽을 리가 없다.

이호연이 처리한 루시퍼의 시체는 아직도 차가운 바닥에 누워있다.

루시퍼의 마지막 발악 같은 것에 당했다고 해도, 루시퍼를 죽인 이호연이 극복하지 못할 함정이 있을 리가 없다.

게다가 이 던전에는 마법에 능통한 사람들이 많다.

임솔을 필두로 레베카나 엘리스, 루시 루미 쌍둥이나 아이린까지.

마법진의 분석이 오래 걸릴 거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마법진을 분석한 후, 불길한 마력에 익숙한 레베카가 마력을 해석한다면 이호연도 금방 구할 수 있겠지.

당장 구하지 못한다고 해도 상관없다.

마법진에서 탈출만 한다면 아이리스 길드의 힘을 총동원해서 이호연을 구할 수 있다.

진짜 문제는 그다음이다.

'내 생각이 틀릴 것 같진 않은데… 다들 사이가 좋네.'

여기 있는 여자들은 모두 능력 있는 사람들이다.

최근 기세를 올리고 있는 마법사 쌍둥이.

아이리스 길드의 엘리스와 아이린.

천재 마법사 임솔과 최고의 힐러인 백아영.

학생회장 문수린, 그리고 생도 중 최강급인 남다은까지.

레베카나 스칼렛, 릴리아나는 유명하진 않지만 현역 중에서도 최상위 실력이다.

어딜 가든 한 자리를 꿰찰 수 있고, 누구에게 말하든 고개를 끄떡일만한 능력있는 여자들.

이 모든 여자들이… 이호연을 좋아한다.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더라도 여자의 감으로 짐작할 수 있다.

엘리스는 자신의 생각이 틀리지 않다고 확신했다.

"엘리스. 우리도 합류하자. 내 동생 엘리스라면 마법진 분석 정도는 도와줄 수 있을 거야."

"… 언니. 하나 물어봐도 될까?"

"당연하지."

"언니는 내가 싫다고 하면 이호연을 포기할 수 있어?"

"어, 으응…? 엘리스,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야. 나랑 이호연 둘 중에 하나만 고를 수 있다면 고민도 없이 나를 고를 거야?"

"…… 그야 당연하지. 나는 엘리스가 없으면 살 수 없어."

아이린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했지만,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아이린의 삶의 이유는 엘리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존재인 자신과 비등한 엘리스가 없다면 세상이 존재할 이유도 없다.

이호연은 어디까지나 그 다음 조건이었다.

… 당연히 그랬어야 하는데, 아이린의 고민은 대답 이후에도 이어졌다.

'7대3? 아니, 6대4까지는 줄만하지. …… 5.5대 4.5?'

자신도 모르게 커진 이호연의 비중에 아이린도 내심 놀랐다.

언제나 엘리스가 최우선이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저런 말을 들으니 눈앞이 캄캄해진다.

아이린의 가슴속에는 어느새 이호연이 들어와 있었다.

그리고 엘리스도 그걸 눈치채고 있었다.

이호연과 만나며 몇 번이나 자신의 가치관이 바뀌었다.

자기 주관이 뚜렷하고 자존심이 강한 엘리스는 그런 사실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여자들은 또 왜 이렇게 착한 건지 모르겠고….'

이호연의 바람기를 잠재울 순 없었다.

바람둥이인 건 어쩔 수 없다고해도, 자신이 여왕벌이 될 수 있는 걸까.

이호연은 여자들을 순위로 나누지 않을 것 같았다.

엘리스가 자존심을 버리고 눈물을 흘리며 매달린다고 해도 그 쓰레기가 다른 여자들을 버릴 거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첫 번째가 되지 못한다면 엘리스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걸까.

'… 도태될 바에는 묻어가는 게 차라리 나을지도 몰라.'

처음 이 던전에 들어왔을 때. 엘리스는 내심 안도감을 느꼈다.

혹시나 자신이 모르는 여자들이 있을까 두려웠는데, 파악하고 있던 사람들이 끝이었다.

이미 그녀의 방어기제는 깊이 뚫려있었다.

"엘리스. 표정이 안 좋아. 잠시 쉬고 있을래? 교수님에게는 언니가 혼자 다녀올게."

"… 아니야. 같이 가."

엘리스는 쓸데없는 생각을 멈췄다.

어차피 이호연이 없으면 필요 없는 고민이다. 일단 눈앞의 마법진에 집중해야지.

이걸 해석해야 나가서 아이리스 길드를 동원할 수 있다.

엘리스는 아이린의 뒤를 따라 임솔에게 합류했다.

한편 임솔은 마법진을 분석하고 있었다.

복잡한 마법진이었지만 지옥의 마력이 아닌 이호연의 마력이라면 해석이 가능했다.

"아?"

마법진에 집중하던 그 때, 임솔은 일행 중 가장 먼저 이상한 점을 눈치챘다.

마법진 분석을 준비하던 임솔의 손이 멈추고, 눈을 크게 뜬 채 마력을 일으켰다.

"교수님?"

옆에 서있던 루시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임솔은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잠시만… 집중해. 너희들도 느낄 수 있을 거야. 모든 감각으로 마력을 느껴."

이 공간 전체를 채우고 있던 불길한 마력이 사라지고, 다른 마력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청결하고 순수한 마력.

그녀에게 너무나 익숙한 이호연의 마력이었다.

"분명 이호연이 마지막에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응? 뭘까?"

"애기 아빠 생각은 나도 모르겠네. 표정이 좋은 일은 아닌 것 같았는데."

"호연 님을 찾으면 알게 되겠죠. 일단은 임솔 마법사님과 합류해서 마법진의 분석을…."

다가오던 릴리아나 일행도 이상함을 눈치챘다.

공간 내부의 마력이 흔들리고 있었다.

지이잉-

임솔은 이미 마력의 흐름을 조정하고 있었다.

익숙한 마력이 최대한 빠르게 공간을 채우도록, 자연스럽게 마력을 컨트롤했다.

근처에 있던 루시와 루미가 임솔을 따라 마력을 일으키려 했을 때.

콰아앙-!

폭탄이 터지는 것처럼 요란한 소리가 중심부를 가득 채웠다.

차원의 틈새를 타고 내려온 한 줄기 빛이 임솔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 제자야?"

깜박깜박.

공간을 채운 익숙한 마력.

임솔은 바닥에 쓰러져있는 이호연을 보며 눈을 깜박거렸다.

방금까지 텅 비어있던 자리에 한 줄기 빛이 떨어졌고, 눈 깜짝할 새에 이호연이 나타났다.

"어… 안녕하세요. 교수 님."

이호연은 고개를 들었다.

임솔이 뻗은 손을 잡고 몸을 일으키자, 릴리아나가 재빨리 다가왔다.

"이호연! 살아있어?! 뭐야! 지금부터 찾으려고 했는데!"

"응. 살아있어. 다들 괜찮아 보이네. 다행이다."

이호연은 안겨오는 릴리아나를 살짝 밀어냈다.

다행히 시간이 오래 지나진 않은 모양이다.

히로인들은 모두 정신을 차리고 있었고, 상태도 좋아 보였다.

"이호연… 죽은 줄 알았어…."

"호연 씨이…."

"갑자기 사라져서 미안해. … 근데 너무 달라붙진 마. 아직 아프거든."

다가온 루시와 루미를 살짝 안은 이호연은 쓴웃음을 지었다.

루시퍼와 전투의 후유증은 아직도 남아있었다.

몸 구석구석에서 쿡쿡 찌르는 것 같은 통증이 일어난다.

"제자야. 어떻게 된 거야. 갑자기 사라져서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죄송해요. … 루시퍼의 마지막 함정이었나 봐요. 이상한 공간에 납치되었는데, 운 좋게 탈출했어요."

이호연은 몸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왕을 만난 일은 굳이 말할 필요 없겠지.

나중에 알게 되더라도 지금은 괜히 걱정만 시킬 뿐이다.

"… 음. 일단 마법진을 해제할게요. 다른 사람들은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을 테니까."

이호연은 자신에게 향하는 수많은 눈들을 보며 마력을 일으켰다.

할 말이 많지만, 먼저 할 일이 있었다.

가짜 던전 내부에는 히로인들 말고도 다른 사람들이 많다. 이 불길한 마법진을 굳이 유지하고 있을 필요가 없다.

쿠웅-!

스으으-

거대한 굉음이 울린 후.

중심부의 천장이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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