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6화 > 신 (3)
촤아악-
내기의 신의 주변에 바람이 몰아친다.
정체불명의 투명한 막에 몸이 밀려난 이호연은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내기의 신, 아니 마왕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정체가 밝혀졌는데도 놈은 몸에 금을 주렁주렁 매단 모습 그대로였다.
겉모습을 바꿀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온통 새하얀 공간 속에서, 마왕은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이호연을 바라봤다.
"설마 들킬 줄은 몰랐지만… 상관없어."
마왕은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화려한 망토가 나타나 마왕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아마 놈의 취향이겠지.
"내 정체를 알았으니 그냥 보내줄 순 없겠네. 너도 마법사라면 네가 처한 상황을 알거야."
마왕은 허공을 쓰다듬듯 손을 아래로 내렸다.
콰득-
쿵-
그와 동시에 이호연의 주변에 무언가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도끼. 창. 검. 철퇴.
수많은 장병기들이 이호연의 주변에 박혔다.
무기 하나하나에 담긴 살의와 악의는 이호연의 몸이 떨릴 정도였다.
"이곳은 나의 심상 공간. 이곳에서 나는 전지전능. 너와 나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존재해."
"심상 공간이라…."
이호연을 주먹을 쥐었다 피었다.
확실히 놈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마력의 반항이 거세다. 아예 마법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강한 제약이 걸려있는 이 공간에서는 이호연이 활개 칠 수 없다.
심상 공간이라는 말은 거짓이라도 꼴에 신이라고 비슷한 건 구현한 모양이다.
'정신만 깨어있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신의 힘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마왕이라도 이호연의 정신 방벽을 뚫기는 힘들 것이다.
루시퍼와의 전투로 힘이 빠지긴 했지만, 그만큼 정신이 곤두서 있었으니까.
즉 지금 이 몸은 자신의 본체라는 뜻.
죽으면 그대로 끝이라는 것이다.
"고대하던 첫 만남인데 본모습은 보여주지 않는 거냐?"
하지만, 이호연은 전혀 죽음을 상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당당한 자세로 마왕을 바라봤다.
"주제를 모르고 떠들고 있네. 동물원의 원숭이처럼 말이야."
자신을 노려보는 공격적인 눈빛과 애새끼처럼 경박한 말투.
예상하던 그대로다.
놈은 신이라는 존재치고 굉장히 찌질하다.
이호연은 팔짱을 끼며 마왕을 바라봤다.
"생각하던 이미지 그대로네. 신이라면서 쪼잔하고 찌질해. 그러니까 악평 좀 들었다고 여기까지 데려오지."
"말조심하지 그래? 네가 살아있는 건 내 변덕일 뿐이야. 심경에 거슬리면 당장 널 죽여버릴 수도 있어."
"글쎄. 내가 너였다면 눈엣가시 같은 나를 당장이라도 죽였을 거야. 내기가 길어지는 건 너에게 있어서 좋을 게 하나도 없거든. 근데 난 왜 아직도 살아있을까?"
"…."
눈앞의 마왕에게서는 엄청난 압박감이 새어 나왔다.
주변에 박혀있는 병장기들이 두렵지 않은 건 아니지만, 이호연은 자신만만했다.
저 경박한 신이 신력을 사용하지 않고, 자신을 곧바로 죽이지않는 것 만으로도 답은 나와있었다.
자신이 있는 이 세계는 내기의 신이 주관하는 공정한 '내기'다.
내기의 내용은 이호연이 메인 퀘스트를 해결하는 것.
내기 조건은 동등하게 맞춰주겠다고 중계자인 내기의 신이 확실하게 보장했다.
그런데, 이 세계의 신이 마왕에 빙의한 후 직접 이호연을 죽여버리고 내기를 끝낸다?
몇 번 만나보지 않았지만, 신이라는 놈들은 하나같이 평범하지 않다.
이호연이 아는 내기의 신이라면 이런 엔딩을 절대 용납하지 않을 거다.
벌써 8명이나 내기로 초대한 이 세계의 신을 죽여버리고 싶을 테니까.
"… 흥. 그렇게 끝내면 재미가 없어서 그런 것뿐이야."
내기의 신은 불쾌한 표정으로 고개를 훽 돌렸다.
행동거지를 보니 신이지만 정신 연령이 낮은 건 분명했다.
저런 놈이 야겜의 신인 것도 참 신기하다.
'뺨이라도 한 대 때리고 싶네.'
두근. 두근.
억지로 마력을 끌어올리려 해도 이 공간에서는 마력이 제대로 반응하지 않았다.
루시퍼에 이어 마왕까지 죽여버리면 정말 좋겠지만, 그건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대화로 정보라도 빼내 볼까?'
하지만 아무리 경박한 놈이라도 신은 신이다.
중요한 정보를 마구잡이로 줄 것 같진 않다.
'굳이 무리해서 캐낼 정보도 없긴 하고.'
정보는 모두 주어졌다. 골칫거리였던 루시퍼를 죽인 이상 남은 적은 눈앞의 마왕뿐.
이제부터는 판데믹의 테러를 막으며 마에스트로가 소환할 마왕의 침공 에피소드가 시작될 때까지 기다리면 된다.
마왕의 능력 정도는 알아두면 좋겠지만… 저 놈이 아무리 멍청해도 그런 걸 말해줄 리는 없다.
'그럼 탈출을 최우선으로 해야겠네.'
일단 이 상황을 피한다.
마왕에 대한 정보는 케이론에게 얻으면 된다.
스르륵-
고민을 끝낸 이호연은 개안으로 이 공간을 천천히 훑었다.
이호연의 정신만 납치당한 게 아니었으니, 놈의 말처럼 당연히 바깥과 동일하게 시간이 흐른다. 며칠이고 갇혀있기는 싫었다.
무언가 중요한 걸 고백할 것처럼 말해놓고 갑자기 사라졌으니 다른 히로인들이 걱정하겠지.
'마력으로 이루어진 이상 분명히 틈은 존재해.'
금빛 눈동자가 마왕의 마력을 읽어낸다.
이 공간 자체가 어떻게 존재하고, 무엇에 기반하고 있는지 밝힌다.
"둘러봐도 달라지는 건 없어. 이 심상 공간은 내가 허락하지 않는 이상 탈출할 수 없으니까."
"거짓말. 심상 공간이라니, 가당 치도 않은 눈속임이야. 진짜 내기의 신이 보여준 능력에 비하면 이건 쓰레기나 마찬가지거든."
이호연은 내기의 신을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지금보다 마법적으로 한참 부족하던 때라고 해도, 그 때 그가 보여준 공간은 전혀 해석할 수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해석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야말로 신만 가능한 행위였으니까.
"내기의 신…! 그 박쥐 같은 놈의 이름을 꺼내지 마!"
마왕은 눈을 번뜩이며 이호연을 노려봤다.
자신이 직접 마왕으로 이 세계에 행차한 것도 모두 내기의 신이 자신 몰래 내기를 조작했기 때문이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이대로 가다간 정말로 위험해질 수도 있다는 판단이 섰다.
이호연의 공략 속도는 비정상적이었고 히로인들의 높은 호감도와 이호연의 강함은 괴상할 정도였다.
"그놈만 아니었어도 너 같은 이레귤러는 존재하지 않았을 거다. 내가 만든 세계에서 나의 힘을 읽어내다니,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야?"
"무고한 사람을 끝도 없이 불러댄 네 잘못이지. 얼마나 화났으면 심판이 이런 일을 하겠어."
"내기의 신은 원래 그런 역할이야! 신들의 뒤처리나 하는 놈이 감히… 게다가 네 놈이 뭘 안다고 내가 만든 세계를 평가하는 거냐!"
"누가 보면 지가 제우스인 줄 알겠어. 신 중에서도 시골 촌놈 같은 새끼가."
아무리 그래도 내기라는 분야를 담당하는 내기의 신이 일개 야겜 세계관의 신보다는 높은 존재 아닐까.
이호연은 이 세계관의 히로인들과 사람들을 좋아하지만, 원작 게임은 확실히 쓰레기가 맞다.
아직도 자신의 악평을 후회하지 않는다.
"이… 이 자식이 지금 뭐라고…."
내기의 신의 모습을 한 마왕은 눈을 크게 떴다.
자신은 이 세계의 창조자이자 절대자다.
시골 촌놈 같은 신이라니, 그게 무슨 모욕이란 말인가.
"그래도 네가 나와준 덕분에 안심이다. 다른 속임수는 없는 모양이고, 마왕만 쳐 죽이면 되는 것 같네."
이호연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워낙 원작과 바뀐 내용이 많아서 끝까지 무슨 지랄을 할까 걱정을 많이 했거든.
이 정도면 만족이다. 그리고 마왕이 이 세계의 신이라는 확실한 목표도 생겼다.
내기의 신이 말했던 것처럼 저 놈을 꺾기만 하면 모든 게 해결된다.
물론 이 세계의 신이 직접 빙의한 만큼 원작보다는 훨씬 어렵겠지만, 난이도가 어려운 건 감안해야겠지.
루시퍼를 죽이는 것도 해냈으니 마왕도 죽일 수 있다.
이호연은 그렇게 생각하고 움직일 뿐이다.
'다른 변수가 없다면 놈이 이제야 내게 모습을 드러낸 이유는 하나뿐이네.'
루시퍼.
원작의 마왕이자 마에스트로가 소환한 사도 중 가장 강한 루시퍼가 죽으면서 시나리오의 다음 단계가 진행된 거겠지.
마지막 시나리오인 마왕의 습격.
지금까지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던 마왕이 루시퍼의 죽음으로 세계에 관여할 수 있게 된 거다.
"네가 무슨 짓을 해서 마왕의 몸에 잠입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많이 조급했던 모양이야."
"그건 무슨 소리지?"
"급하니까 마왕의 몸에 빙의한 것으로도 모자라 내 앞에 나타나서 그런 거짓말을 하려했던 거 잖아. 안 그래?"
이호연은 보란 듯이 미소를 지었다.
그게 아니라면 신이라는 작자가 직접 이 세계에 관여할 필요는 없겠지.
"… 마음대로 생각해. 어차피 내가 만든 세계의 운명은 변하지 않아."
"쓰레기 같은 원작에서도 주인공이 이기잖아. 네가 만든 세계의 결말도 모르냐?"
쾅. 콰앙-!
공간이 뒤흔들리며 바닥에 꽂혀있던 장병기들이 이호연을 향했다.
원작을 욕했다고 분노하는 모양이지만, 어차피 자신을 해할 수 없다는 건 알고 있다.
게다가 저런 시위를 할 수 있는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지직- 후드득-
새하얀 공간에 금이 가고, 천천히 붕괴하기 시작했다.
제한 시간 종료다.
이호연은 여유롭게 마왕의 분노를 받아냈다. 마왕은 분한 듯 얼굴을 구기며 말을 뱉었다.
"그런 엔딩은 더 이상 없어. 마왕은 방심하지 않을 것이고, 능력 없는 주인공은 여자들의 치마폭에 안겨 추한 죽음을 맞이할 거야. 내가 그렇게 만들어줄 거니까."
눈을 찌푸리며 악담을 내뱉는 마왕을 보며, 이호연은 미소와 함께 가운데 손가락을 세웠다.
"꺼져."
이호연과 마왕의 몸.
그리고 마력으로 이루어진 공간이 동시에 붕괴했다.
마왕의 모습이 사라지고, 새하얀 공간이 서서히 어두워진다.
갑작스럽게 만난 마왕과의 대화는 꽤 도움이 되었다.
자신의 성장은 이 세계의 신도 두려워할 만큼 가파르고, 이호연이 다급한 만큼 저 쪽도 다급하다.
'그래도 불리한 건 어쩔 수 없지만…. 이 정도면 만족해야지.'
메인 퀘스트의 클리어 확률은 6%
목숨을 건 싸움을 몇 번이나 반복했지만 그럼에도 부족했다.
마왕의 힘은 이호연과 비교해 압도적이었다.
'해내지 못하면 어차피 죽어.'
지금까지 성공했으니, 남은 한 번도 할 수 있다.
이호연이 할 수 있는 건 자신을 믿는 것 뿐이다.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이호연은 자신을 기다릴 히로인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갑자기 사라졌다고 너무 당황하진 않았으면 좋겠네.
이 세계의 신을 만나며 생긴 잡념들을 없앴다.
다시 히로인들에게 진심을 보여야한다.
'어쩌면 마왕을 잡는 것보다 중요할 수도 있어.'
어딘가로 빨려들어가는 감각을 느끼며, 이호연은 잠시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