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5화 > 신 (2)
텅 빈 공간을 채운 정체모를 마력이 몸을 휘감는다.
공간의 한가운데에 서있는 남자는 온몸을 황금으로 둘러싼 쾌남상의 남자.
내기의 신이었다.
이호연은 갑자기 나타난 내기의 신을 보며 반가움을 느꼈지만, 동시에 의문도 느꼈다.
"… 신 님이 왜 여기 있어요?"
"일단 앉아. 할 말이 많거든."
내기의 신은 보이지않는 의자에 앉아있었다.
할 말이 많은 건 이 쪽도 마찬가지인데.
이호연은 주변을 둘러보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흰색으로 끝없이 펼쳐진 공간은 왠지 기분 나빴다.
저번처럼 내 방에 불러줬으면 좋았을 텐데, 이 공간은 대체 뭘까.
"필요할 때는 없다가 갑자기 튀어나와서 깜짝 놀랐네요."
"네가 이상한 짓을 하려고 하니까 그렇지."
"제가요?"
이호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루시퍼도 잡았고, 이제 남은 적은 마왕뿐이다.
게다가 히로인들과의 관계까지 바로잡으면 자신에게 남은 장애물은 없어진다.
이상한 짓을 한 기억따위는 없다.
"너 지금 미쳤냐?"
"네?"
내기의 신은 눈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누구 맘대로 히로인들에게 네 비밀을 말하려고 하는 거야."
"아…."
이호연은 눈을 크게 떴다.
설마 그것 때문에 내기의 신이 직접 나타날 줄이야.
"하지만 메인 퀘스트에 나와있지도 않았고… 저번에 만났을 때도 한 마디도 없었잖아요."
"설마 네가 그렇게 멍청할 줄은 몰랐지."
내기의 신은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 모습에 이호연은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죄송하지만… 자세한 설명을 해주실 수 있나요?"
"너는 이 세계에 끼어든 불순물 같은 존재야. 이해했어?"
"네."
"다른 히로인들이 지레짐작하는 건 괜찮아. 하지만 네가 이 세계에 빙의했다는 비밀을 직접 말하는 건 세계의 법칙을 어기는 일이라고."
"… 빙의 사실은 원래 말할 생각이 없었는데요?"
이호연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가짜 던전 마법진의 진실을 밝히고 사과할 생각은 있었지만, 이곳이 게임이고 자신이 빙의했다는 걸 말할 생각은 없었다.
아무리 이호연이라도 그런 걸 말했을 때 후폭풍을 막을 순 없다.
당연히 자신이 나쁜 놈이 될 생각이었다.
"… 꼭 그게 아니더라도 웬만하면 히로인들에게 이상한 말은 안 하는 게 좋아."
"이상한 말이라는 게 뭔데요?"
"여러 가지 있잖아. 음, 애초에 왜 사실을 말하려는 거야? 히로인들이 가진 호감도라면 이번에도 그냥 넘어갈 수 있을 거야."
"그랬다가는 언젠가 터질 거라고 믿거든요."
이미 충분히 늦은 것 같지만, 그렇다고 더 미룰 순 없다.
루시퍼의 말대로 자신은 위선자였다.
세계를 구한다는 생각에 빠져 가까운 히로인들에게 상처를 줄 순 없다.
지금이라도 이 관계를 모두 고백하는 게 이호연의 목표였다.
"… 답답하군. 그리고 애초에 히로인들이 너무 많은 것도 문제야."
"히로인들이요?"
"그래. 왜 그렇게 많은 히로인들을 데리고 있는 거야?"
"그야 내기의 신님이 이 세계의 신과 내기의 조건을 맞추려면 다른 히로인들을 더 공략하라고 하셨잖아요."
"다 좋은데 너무 많다는 말이야. 이 세계의 신과 비율을 맞추려면 딱 3명만 더 있으면 충분해. 정말로 모든 히로인들을 데리고 내기를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해내야죠."
힘들더라도 자신이 한 짓에 책임은 져야지.
사과를 안 받아주면 받아줄 때까지 찾아가서 무릎이라도 꿇고 있을 생각이었다.
자신이 건드린 히로인들을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아니. 넌 못해. 그러니까 히로인의 수를 줄이도록 해."
"… 네?"
"히로인들을 줄이라고."
"아니요. 안되더라도 결과는 제가 책임질게요."
이호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히로인들을 줄이라는 말은 이호연을 화나게 하기에 충분했다.
"뭔가 단단히 착각을 하는 모양인데, 천천히 생각해. 히로인들을 조금 포기하고 이 세계를 구해야 그 히로인들도 살아남을 수 있는거야. 너는 지금 욕심때문에 히로인들까지 죽이려고 하는거라고."
"… 결국 제가 사실을 고백해야하는 건 맞잖아요. 설령 히로인들이 제 말을 듣고 거절하더라도 그건 그 때 생각할 일이고요. 모든 시도를 다 해보고 안되면 그 때 포기해도 늦지않아요."
"이호연. 이건 권유나 권장이 아니라 명령이야. 너는 지금 히로인들을 줄여야해. 그리고 이상한 말은 하지말라고 했잖아."
이호연은 내기의 신을 바라보며 눈을 크게 떴다.
명령이라니, 그럼 히로인에게 지금이라도 헤어지자는 말을 하라는 건가?
아니면 내가 개 같은 짓을 해도 계속 옆에 있어줄 히로인들만 데리고 있으라는 건가?
내기의 신이 꺼낸 말에 머리가 복잡해진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던 내기의 신이 마력을 일으켰다.
"아무튼, 할 말은 다 했으니까 돌아가 봐. 내가 한 말 절대 잊지말고."
지이잉-
이호연의 뒤에 문이 생겨났다.
어릴 적 만화에서 봤던 어디로든 갈 수 있는 문 같은 생김새였다.
"거기로 나가면 돼. 바깥의 시간은 그대로 흘렀으니까 당황하지 마."
이호연은 문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내기의 신이 한 말이 들리지 않는다.
지금 그의 머리를 채우는 건 하나의 생각.
'… 이상해.'
신은 이 세계에 간섭할 수 없다.
그게 기본적인 룰이다.
'내기의 신이 나타난 이유는 내가 히로인들에게 사실을 말하려고 해서라고 했어.'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이호연은 아직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사실을 말하려고 진지하게 생각했을 뿐이다.
그리고 이런 적은 예전에도 많았다.
외로움에 히로인들에게 몇 번이나 고백하려고 했으니까.
'… 물론 이번에는 정말 말하기 직전이긴 했지.'
딱 5초만 더 있었으면 히로인들에게 사실을 말했을 테니, 그 전과는 상황이 다르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머릿속을 채우는 찝찝함이 이호연의 걸음을 멈추게 했다.
'정작 불러놓고 확실하게 해결책을 제시한 것이 없잖아.'
일련의 대화의 흐름을 다시 기억해낸다.
내기의 신이 가진 권위에 짓눌려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지만, 사실 상대방도 제대로 된 해결책을 제시하진 못했다.
이상한 말을 하지 말라고 했으면서 이상한 말에 대한 기준을 제시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히로인들의 수를 줄이라는 말로 주제를 돌렸다.
3명이라는 확실한 기준이 있었으면 저번 만남에서 말하지 않은 이유가 뭐지?
'분명 다음에는 다 끝나고 만나자고 했어.'
이 세계의 신을 죽여달라고 부탁했었지.
지금처럼 다시 만날 수 있다면, 그런 말을 할 필요도 없었을 거다.
그때 내기의 신은 정말 모든 걸 쥐어짜내서 자신을 만나러 온 것이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있는 내기의 신에게는 여유가 넘쳤다.
몸이 스르르 사라지지도 않았고, 가만히 앉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안 가고 뭐해? 바깥의 시간은 멈춰있지 않으니까, 빨리 가야 할 걸?"
"…."
이호연은 주먹을 쥐었다 폈다.
손을 가득 채운 마력이 손가락 사이로 스르르 빠져나간다.
이 찝찝한 기분은 뭐지?
무언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것 같다.
지금 이 문 밖으로 나가면, 다시는 되돌릴 수 없을 것 같았다.
결국 이호연은 문 앞에 서서 말을 꺼냈다.
"이 공간에는 마력이… 느껴지네요. 굉장히 이질적인 마력이에요."
"당연하지. 난 신이니까."
내기의 신은 따분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저 표정과 말투.
눈앞의 내기의 신이 너무나 어색했다.
이호연은 저번에 만났던 내기의 신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그에게는 신다운 기품이 흘렀다.
그리고 내기의 신은 어디까지나 내기의 중재자.
히로인들을 줄이라는 '명령'따위는 하지 않는다.
"혹시 내기의 신님은 저한테 접촉하기 위해 내기에 관여한 건가요? 저번에 분명 마지막 만남이라고 했잖아요."
"그럴 리가. 네가 이상한 짓을 하길래 남아있던 힘을 전부 쏟은 것뿐이야. 이제부터는 소통도 불가능해."
"…."
이호연은 자신을 감싼 주변의 마력을 느꼈다.
자신이 가진 '기억 보완 능력'은 스쳐 지나간 모든 것들을 다시 떠올릴 수 있다.
스쳐 지나간 마력이라도 이호연이 놓쳤을 리는 없다.
만약 내기의 신을 만났을 때 마력이 있었다면 확실히 기억에 남았을거란 말이다.
하지만 지금 이 공간을 채운 마력은 이호연이 느껴본 적이 없는 마력이다.
'개안. 심.'
이호연은 이 공간을 가득 채운 마력을 읽어냈다.
처음 느끼는 마력이었지만, 비슷한 걸 꼽을 수는 있었다.
바로 루시퍼의 마력.
마력에서 옅은 지옥의 향이 흘러나왔다.
아마 예전의 자신이라면 눈치채지 못했겠지.
각성한 개안은 얕게 희석된 지옥의 향을 확실하게 캐치했다.
"… 저번에도 이런 공간이었는데, 여기가 힘의 소모가 적은 모양이네요."
"이 공간은 모든 신에게 있는 심상 세계거든. 상대를 부를 때는 자신의 심상으로 데려오는 것이 기본이야."
"아하…. 큭."
이호연은 헛웃음을 지었다.
월척이 걸렸다.
내기의 신을 만난 곳은 이딴 이질적인 공간이 아니다.
바로 빙의하기 전 자신의 방. 그 곳에서는 마력따위 느껴지지 않았다.
내기의 신은 힘의 소모가 많더라도 익숙한 공간에 불러서 자신을 안심시켰다.
뒤에 서있는 놈과는 다르다.
이호연은 몸을 돌려 의자에 앉아있는 내기의 신을 노려봤다.
자신을 쳐다보던 내기의 신은 이호연의 개안을 보고 눈을 찌푸렸다.
"뭐 하는 거야?"
개안에 내기의 신이 가진 힘이 보인다.
끝을 볼 수 없는 강한 마력과 압도적인 힘.
그리고 보이지 않는 수많은 요소들.
그야말로 신이라고 부를 수 있는 강한 힘이다.
하지만 이호연은 그 사실이 반가웠다.
개안은 기본적으로 루시퍼의 마안과 비슷하다.
모든 걸 읽어낼 수 있지만, 초월적인 존재와 관련되어있는 것은 보이지 않는다.
예를 들면 루시퍼가 읽어내지 못한 이호연의 힘.
초월적인 존재가 점지했기에 읽어내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내기의 신은 초월적인 존재 그 자체다.
개안에 보인다는 것이 이상한 일이다.
그 사실부터 사고의 갈래가 뻗어나간다.
처음 이 공간에 왔을 때도 이상했다.
자신의 몸을 '마력'이 휘감았다.
어째서 초월적인 신의 힘이 아니라 마력이 자신을 휘감았을까.
'신의 힘을 사용하면 내기에 간섭하는 것이 되니까.'
그렇다면 바깥의 시간이 그대로 흐르는 것도 이해가 된다.
이곳은 심상 세계 따위가 아니다.
신의 심상 세계를 따라한 마력의 공간.
그리고 마력에 흐르는 지옥의 마력. 루시퍼의 것과 비슷하다면 일개 마족이 아닐 터.
적어도 루시퍼와 비슷하거나 그 이상의 존재여야 한다.
하지만 마왕의 후계자는 모두 등장했다.
남은 건 딱 한 명.
"이클립스."
화르륵-!
뜨거운 검은 태양이 공간을 불태운다.
공간 내부의 마력을 집어삼킨 이클립스는 순식간에 몸을 불렸다.
이호연은 머리 위에 떠오른 검은 태양과 상대를 노려봤다.
"지금 무슨 짓이냐!"
"내가 할 말이지. 이 개새끼야. 아니, 개새끼라고 부르는 것도 개한테 미안할 일이지. 이렇게 불러줄까?"
이호연은 눈 앞의 내기의 신을 보며 이를 악 물었다.
저 모습을 흉내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그의 정체를 알려주고 있었다.
"마왕. 그리고 이 세계의 신."
내기의 신의 외형을 알고, 심상 공간이라는 존재를 아는 점.
신의 정보를 알고 있으면서 루시퍼와 버금가는 지옥의 마력을 사용하는 점.
본래 마왕이었을 루시퍼가 마왕이 아닌 점.
자신의 행보를 노골적으로 방해하려 하는 점.
눈 앞의 상대가 마왕에게 빙의한 이 세계의 신이라면, 모든 수수께끼가 풀린다.
이호연은 침을 삼키며 눈 앞의 적을 노려봤다.
그리고 이내 당황한 표정이던 내기의 신의 입꼬리가 서서히 올라갔다.
"… 이래서 눈치빠른 놈은 싫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