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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 야겜에 빙의했다-544화 (544/648)

< 544화 > 신 (1)

마지막 순간.

루시퍼는 등 뒤에 만들어진 위험한 마력을 감지했다. 평생 쌓아온 날카로운 감각이 피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곧바로 릴리아나를 붙잡는 것을 포기하고 몸을 비틀려했지만, 이미 코 앞까지 다가온 죽음의 기운을 피할 수는 없었다.

콰드드드득-!

결국 이호연의 스파이럴은 루시퍼의 육체를 꿰뚫었다.

릴리아나에게 팔을 뻗던 모습 그대로 굳어버린 루시퍼는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 대단하군. 이런 상처를 입은 건 처음이다."

나선으로 도는 스파이럴은 루시퍼의 몸을 찢어발겼고, 그의 자랑이었던 강인한 육체는 붕괴했다.

루시퍼가 가진 강한 재생력은 어떤 상처든 재생할 수 있지만 어디까지나 시간과 마력이 충분할 때의 이야기.

지금의 루시퍼에겐 몸을 치료할 수 있는 여유가 없었다.

쿵-

철옹성같던 루시퍼의 거구가 무너진다.

천천히 쓰러지던 몸은 릴리아나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눈앞의 것을 제대로 보지 못했구나. 너무나 멍청했다.'

루시퍼는 자신의 강함을 믿었다.

자신에게 확신이 있었기에 이호연과 인간들을 죽이지 않았다.

이호연이 인간이라는 종을 아득히 뛰어넘은 이레귤러라는 것을 알고도 끝까지 무시하는 태도를 관철했다.

'방금 전까지 몸을 채우던 분노가 사라졌다. 이것 또한 이호연의 수작인가?'

루시퍼는 죽음에 직면하고 나서야 자신의 감정이 지배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호연에 대한 평가는 완벽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과소평가였나.

어쩌면 처음부터 자신이 판단할 수 없는 존재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

루시퍼의 의식이 흐려진다. 몸에서 마력이 빠져나간다.

이대로, 이대로 끝낼 수는 없다.

"이호연… 확실히 기억해두겠다."

루시퍼는 흐려지는 의식을 붙잡고 고개를 돌려 이호연을 위아래로 훑었다.

마지막까지 그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다음에는 절대로 이렇게 끝나지 않…."

털썩-

루시퍼는 말을 마치지 못하고 바닥에 얼굴을 처박았다.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루시퍼는 눈을 감았다.

*

"… 죽은 건가?"

우드득-

루시퍼의 몸을 마력 밧줄이 칭칭 휘감는다.

사람 한 두 명은 지나다닐만한 구멍이 배에 뚫려있지만, 저 괴물이라면 일어날지도 모른다.

루시퍼가 절대 움직이지 못하게 포박한 후, 이호연은 루시퍼의 생사를 확인했다.

"하아…. 미친놈이 끝까지 지랄이네. 곱게 좀 뒤질 것이지."

이호연은 루시퍼의 숨통이 완전히 끊어진 걸 확인한 뒤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해냈어.'

원작의 마왕이자 가장 힘든 상대인 루시퍼를 쓰러뜨렸다.

몸 상태는 최악이었지만, 강적을 이겼다는 사실이 이호연을 위로했다.

루시퍼를 죽였으니, 당연히 생각나는 게 있었다.

'메인 퀘스트.'

이호연이 개고생을 하고 있는 이유인 메인 퀘스트였다.

『메인 퀘스트 : 모든 히로인들을 공략하고 게임의 엔딩까지 살아남으시오. 할 수 있으면. 실패 페널티 : 죽음』

이호연은 오랜만에 메인 퀘스트를 확인했다.

이 세계의 신의 인성을 보여주는 문장은 언제 봐도 기분나빴다.

'메인 퀘스트에 변화가 없는 걸 보면 역시 루시퍼는 마왕이 아니라는 건데….'

혹시나했지만 역시나.

루시퍼를 쓰러뜨린다고 메인 퀘스트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 세계선에 존재하는 마왕을 쓰러뜨려야 한다는 뜻이겠지.

'대체 왜 이렇게 된 거지? 내가 한 행동이 지옥까지 영향을 미칠 리가 없잖아.'

원작과 내용이 달라진 이유가 뭘까.

처음에는 시간의 차이라고 생각했지만, 직접 루시퍼를 상대해보니 시간이 문제가 아닌 것 같았다.

힘을 되찾은 루시퍼는 원작의 마왕이 강림했을 때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줬다.

물론 가짜 던전 마법진의 도움을 받은 거지만, 마왕이 되어 마왕성의 마력이 몸에 깃든 루시퍼라고 생각하면 마찬가지일 터.

거기서 문제가 생긴다.

케이론에게 루시퍼는 지옥의 최강자라고 들었다.

만약 루시퍼보다 마왕이 강하다면 후계자를 뽑을 이유도 없겠지.

그런데 왜 루시퍼는 아직도 후계자였을까.

원작의 마왕과 지금 마왕의 차이는 어째서 생긴 것일까.

이호연이 빙의하며 만들어진 나비효과는 분명히 있을 거다. 아니, 이호연이 빙의한 후 한 행동들을 생각하면 엄청나게 많다고 표현하는 게 맞겠지.

하지만 그 나비효과가 지옥에까지 영향을 끼쳐 마왕을 바꿀 수 있는 지에 대해서는 조금 더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 이럴 때가 아니지. 릴리아나. 괜찮아?"

"으, 아… 응…."

중요한 고민이지만, 이호연은 잠시 고민을 미뤘다.

눈앞의 릴리아나에게 손을 내밀어 바닥에서 일으켰다.

"잠깐 쉬고 있어. 금방 올게."

릴리아나는 아직도 어안이 벙벙한 듯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음 같아선 더 챙겨주고 싶지만, 다른 사람들도 급하다.

"아영 씨. 정신 차려요."

이호연은 근처에 있던 백아영의 어깨를 붙잡았다.

엘리스 자매를 치료하던 백아영은 루시퍼의 마력을 정통으로 맞고 쓰러져있었다.

백아영의 어깨에 손을 얹은 이호연은 천천히 자신의 마력을 주입했다. 백아영만큼 전문적인 힐러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치유는 할 수 있다.

"아… 고마워요. 여보. 으으."

"아니에요. 저야말로 고맙죠. 다 끝났으니까 천천히 몸 좀 추스르세요."

"으응. 후우. 몸을 추스를 시간이 없어. 정신 차려야지. 호연이 네가 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봐줘. 나는 솔이 쪽으로 가볼게."

백아영은 정신을 차리자마자 임솔 쪽으로 총총 다가갔다.

그녀의 말이 맞다. 지금은 다친 사람들을 확인해야 한다. 그쪽으로 날아간 레베카와 헤롱거리고 있는 수린 누나는 백아영이 챙겨주겠지.

이호연은 루시퍼의 뒤에서 힘들게 몸을 가누는 엘리스 자매에게 다가갔다.

"엘리스. 괜찮아?"

"… 루시퍼는 죽은 거야?"

"응. 확실하게 죽었어."

"하아…."

엘리스는 바닥에 쓰러진 루시퍼를 보며 몸의 긴장을 풀었다.

저 괴물이 죽었다는 게 믿겨지지가 않는다.

오랜만에 느꼈던 무기력함이지만, 지금은 자존심이 상한 것보다 살았다는 안도감이 앞섰다.

"아이린 씨도 일어나세요."

"언니. 괜찮은 거 맞아?"

"엘리스… 으응. 살아있어. 이호연 너도 고마워. 덕분에 살았네…."

"저보다는 레베카 씨랑 릴리아나한테 고마워하세요. 둘이 시간을 끌어줬거든요."

"그 둘 하고는 계속 같이 싸웠으니까. 결국 루시퍼를 끝장낸 건 너잖아. 오늘은 진짜 멋있었어."

"… 그래요?"

이호연은 떨떠름하게 웃으며 둘에게 응급처치를 했다.

활짝 웃어주는 아이린의 마음은 참 고마웠지만, 이런 싸움이 일어난 원인을 따지면 결국 자신이 문제였다.

이호연의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다.

'다들 정신을 차리면 던전의 진실을 말해야 하는데….'

자신의 잘못을 고백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루시퍼와 싸우느라 어떻게 말할지를 생각하지 못했다.

엘리스 자매의 응급처치를 마친 이호연은 가까이 있던 남다은과 릴리아나에게도 마력을 나눠줬다.

둘은 그나마 엘리스 자매 보다 상태가 좋았다.

"대단해. 저 괴물을 진짜 잡았잖아!"

"릴리아나 씨. 너무 움직이시면 상처가 벌어질지도 몰라요…."

남다은은 릴리아나를 걱정했지만, 릴리아나는 방방 뛰며 좋아했다.

루시퍼는 처음 봤을 때부터 기분 나빴다. 얼굴도 모르는 놈이 형제라며 친한 척하는 것도 마음에 안 들었는데, 그놈을 쓰러뜨렸으니 기쁠 수밖에.

게다가 무슨 이유인지 마력까지 강해졌다. 릴리아나의 입장에서는 축제나 다름없었다.

"맞아. 릴리아나 너, 그 마력은 어떻게 된 거야? 마력량만 따지면 나보다 많은 것 같은데."

"나도 몰랑."

"… 왜 모르는데."

"그냥 갑자기 되던데? 아마 내가 더 섹시해져서 서큐버스의 숨은 힘이 발현한 거겠지. 그나저나 우리 언제 나가? 쟤 잡으면 문이 열리는 거 아니었어?"

"나가는 건 금방 나갈 수 있어. 마법진을 장악했으니까."

지금 가짜 던전 마법진은 이호연의 소유였다.

원한다면 언제든지 출구를 만들어낼 수 있다. 지금도 실시간으로 중심부를 제외한 다른 구역의 사람들을 하나둘씩 던전 바깥으로 내보내고 있다.

"호연아. 이 마법진을 네가 만들었다는 말을 들었어. 그게 사실이야?"

그때, 옆에서 대화를 듣던 엘리스가 이호연에게 직구를 던졌다.

모두 눈치만 보고 있었지만, 엘리스는 자신이 가진 궁금증을 참을 수 없었다.

'역시 들었구나.'

이호연은 착잡한 마음으로 입맛을 다셨다. 중심부로 오는 길에 레베카나 아이린에게 들었겠지.

다른 히로인들도 내심 궁금했는지, 다들 몰래 이 쪽에 집중하고 있는 게 느껴졌다.

가까이 있는 사람들 뿐 만이 아니다.

지친 듯 누워있는 루시 루미 쌍둥이도. 탈진해있는 수린 누나도.

쓰러져있는 스칼렛과 레베카를 치료하는 백아영, 그 옆에 있는 임솔도.

모두가 이호연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산양 새끼가 말하는 거 들었어. 자기 마법진을 빼앗았다고 엄청 화냈잖아. 원래부터 그놈 꺼 아니야? 우리가 본 건 이호연 네가 폭주하는 마법진을 막으려고 한 거고… 응?"

"호연아. 정말 그런 거야?"

이호연은 릴리아나의 말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지금 릴리아나가 하는 말에 설득력이 없다는 건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애초에 루시퍼가 한 말은 감정 증폭을 당했을 때 마구잡이로 내뱉은 말이다.

그 말에 신빙성은 없다.

하지만… 히로인들은 그걸 모른다.

만약 이호연이 그 말이 맞다고 우긴다면, 다들 수긍해주지 않을까.

불편한 이 상황을 모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 그러면 아무 의미도 없잖아.'

루시퍼 저 괴물 새끼가 유일하게 도움이 된 것은 딱 하나.

이호연이 자신을 조금 더 객관적으로 보게 한 것이다.

모든 상황은 결국 이호연이 만든 것이다.

지금까지는 이런 상황을 피했지만, 더 이상 모르는 척 도망칠 순 없었다.

그 놈이 말한 것처럼 비겁한 위선자가 되기는 싫었다.

"하아."

이호연은 마음을 진정시켰다.

쓸데없는 생각은 버리자. 아직 행동하지도 않았는데 결과를 걱정할 필요는 없다.

어떤 말을 듣든 자신이 안고 가야 할 일이다.

"…."

다른 사람들도 입을 다문 이호연의 분위기를 읽었다.

무언가 중요한 말이 나올 거라는 것을, 다들 예상하고 있었다.

"음… 어떻게 얘기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첫 말을 고르는 게 어려웠지만, 이호연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정체불명의 마력이 이호연을 감쌌다.

"이, 이건 또 무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마력이었다.

이호연은 곧바로 마력을 끌어올리며 대항하려 했지만, 이질적인 마력은 저항을 무시한 채 이호연의 몸을 어딘가로 이동시켰다.

꽤 먼 거리를 이동했다고 느꼈을 때 즈음. 감겼던 눈이 자연스럽게 떠졌다.

"오랜만이네. 설마 또 보게 되다니."

"… 당신은?"

이호연은 뜬금없는 등장에 눈을 찌푸렸다.

온몸에 황금이 주렁주렁 달린 금발의 남자.

내기의 신이 이호연의 눈앞에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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