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3화 > 파멸의 루시퍼 (7)
원작의 마왕인 루시퍼가 무서운 점은 그의 마안 때문이다.
모든 것을 읽어내는 마안은 어떤 공격도 막아내며 최선의 대처를 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 마안에 의존하는 것이 곧 루시퍼의 약점이었다.
루시퍼의 마안은 모든 것을 읽어낼 수 있지만, 예외도 있었다.
바로 초월적인 존재와 관련이 있는 것들.
원작에서는 주인공인 이호연이 그 예다.
마왕 루시퍼는 자신의 마안이 통하지 않는 이호연의 마력을 결국 파훼하지 못한다.
하지만 지금의 루시퍼는 달랐다.
원작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지옥의 마왕성을 두른 정체불명의 마력과 마주쳤다.
마왕을 소환하고 죽어버린 마에스트로를 만나 마안이 통하지 않는 인간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렇기에 이호연을 처음 발견했을 때도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호연도 원작과는 달랐다.
이호연도 루시퍼가 원작과 다르게 마안에 의존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렇기에 이 작전을 끝까지 아껴둔 것이다.
"그럴 줄 알았지 새끼야."
루시퍼의 약점은 마안에 대한 의존.
마안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눈치챘더라도, 본능을 무시할 순 없다.
'위기 상황이 오면 가장 익숙하고 자신 있는 것을 믿기 마련이거든.'
뚜렷한 정신력이 있는 이호연이 자신의 감정을 속이는 것은 어렵지 않다.
만전의 상태라면 통하지 않았을 페이크지만, 루시퍼는 마지막 순간에 결국 본능을 포기하지 못했다.
"커흡…."
어깻죽지가 뜨겁다.
루시퍼는 날아간 오른팔 부근에 마력을 집중시키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호연의 힘이 이 정도란 말인가. 아직 그의 몸에는 자신이 만든 상처가 남아있다.
그 후유증에서 벗어나지도 못했을 터. 아까처럼 싸우진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잘못된 판단이었나?
치이익-. 루시퍼의 팔은 언제나처럼 재생을 시작했다.
팔이 통째로 잘려나갔으니 재생하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저 백색 번개가 그 시간을 기다려 줄지는 미지수였다.
"… 상관없다. 팔 하나가 없다고해서 내가 인간에게 패배 따위 할 것 같으냐? 내 이름은 루시퍼. 인간 따위가 날 막을 수 없다. 절대로!"
루시퍼는 이를 갈았다.
자신에게는 여력이 남아있고, 아직 싸울 수 있다.
냉정한 판단을 잃은 루시퍼는 마력을 일으키며 땅을 박찼다.
"그래. 계속 그렇게 덤벼라."
작게 속삭인 이호연은 몸 내부에 마력을 회전시켰다.
'블러드 비트.'
두근. 두근. 두근.
이호연의 마력 회로가 폭주한다.
지금 블러드 비트를 사용하는 것은 꽤나 무리였지만, 이호연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아크 컨저레이션."
머리 위에 3개의 마력 구가 떠오른다.
자신의 의지를 일부 떼어내어 만들어낸 아크는 핵심 술식을 집어넣는 것 만으로 마법진을 그려낸다.
이호연은 아크에 마력을 쏟아부으며 정면을 노려봤다.
공간에 가득한 마력의 흐름이 이호연을 스쳐 지나간다.
격렬한 싸움 중인데도 상쾌함이 느껴졌다.
촤아악-
이호연의 눈앞에 익숙한 마력이 펼쳐진다.
번뜩이는 전격이 공간을 질주하고, 다가오는 루시퍼를 향해 쏟아져내린다.
"크아아아!"
우드득!
루시퍼는 괴성을 지르며 주먹을 휘둘렀다.
엄청난 물리력이 담긴 공격이 이호연의 급소로 쇄도했다.
빠지지직-!
하지만 이호연의 주변을 둘러싼 번개는 루시퍼의 공격을 가볍게 흘려보냈다.
루시퍼의 주먹은 번개에 가볍게 스쳤을 뿐이지만, 마치 용암에 닿은 것처럼 뜨거웠다.
"크윽!"
두려움. 넘을 수 없는 벽.
루시퍼의 본능이 익숙하지 않은 신호를 계속 보내온다.
자신의 육체가 뇌의 명령을 거부하고 본능적으로 도망치려는 태세를 취하고 있다.
"감히…!"
루시퍼는 본능을 억누른 채 날개를 펼쳤다.
칠흑같이 어두운 깃털들이 하늘로 떠오른다.
지옥의 불길을 머금은 깃털과 함께, 루시퍼는 다시 거리를 좁혔다.
이성을 잃더라도 전투 본능은 살아있었다.
루시퍼는 본능적으로 이호연과 마법으로 싸우는 게 승산이 없다고 판단했다.
촤아악-
이호연에게 다가간 루시퍼의 깃털들이 본색을 드러낸다.
공간을 태울 기세인 검은 불꽃이 이호연을 감쌌다.
이호연은 곧바로 아크를 앞으로 내세웠다.
프로즌 블라스트.
이호연의 몸 주변을 떠다니던 아크에서 극저온의 냉기가 흘러나왔다.
루시퍼의 검은 불꽃이 냉기와 얽히며 힘을 겨룬다.
"이호연! 네 오만한 행동을 평생 후회하게 만들어주마!"
루시퍼는 이런 상황에서도 저력을 발휘했다.
불꽃과 대치하는 냉기를 억지로 뚫어내고 이호연에게 양팔을 휘둘렀다.
왼팔은 가속을 사용한 이호연이 피해냈지만, 방금 막 재생한 오른팔이 이호연의 몸을 강타했다.
쾅-!
"큽…!"
이호연은 주먹 한 방에 뒤로 날아갔다.
퉤. 마력으로 중심을 잡은 이호연은 검은 피를 뱉어냈다.
한 방 맞았다고 몸 내부의 상처가 벌어진 모양이다.
"진짜 더럽게 아프네."
그나마 아직 제대로 수복되지않은 오른팔이라 다행이지, 왼팔이었다면 정말 한 방에 쓰러졌을지도 모른다.
이호연은 루시퍼와 거리를 벌리며 아크에 마력을 더했다.
동시에 개안으로 검은 불꽃들의 약점을 찾아냈다.
촤아악! 아크가 뿜어내는 냉기가 사방을 채우던 루시퍼의 불꽃을 제압하고 얼어붙게 만든다.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냉기는 불꽃을 타고 올라가 술사인 루시퍼에게 역으로 들이닥쳤다.
콰앙! 새로 돋아난 루시퍼의 오른팔에 냉기가 스며든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팔이 갈기갈기 찢기고, 검붉은 피가 바닥을 흠뻑 적셨다.
"크아아! 이호연……!"
이호연은 루시퍼의 비명에 번개를 때려 박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으깨진 오른팔부터 타고올라간 번개는 루시퍼의 강인한 육체를 찢어발겼다.
상처를 후벼 판 번개가 루시퍼의 몸 내부를 진탕으로 만든다.
아무리 루시퍼의 육체가 튼튼하다고 해도, 이호연이 뿜어내는 최대 출력의 번개가 몸 내부에서 폭발하는 것까지 막을 순 없었다.
결국 루시퍼는 방어 결계를 펼치며 뒤로 물러났다.
"크읍, 크아악..!"
온몸이 타오르는 고통.
이대로는 오래 버티지 못한다.
어떻게든 승부를 내야 한다고 생각한 그때.
이호연의 등 뒤에서 검은 태양이 떠오른다.
이클립스(eclipse).
이호연이 만들어낸 최강의 마법.
루시퍼는 이클립스를 보자마자 직감했다.
자신은 저 거대한 태양을 막아내지 못한다.
이호연의 감정 증폭보다 강한 루시퍼의 생존 본능이, 이성을 짓눌렀다.
'… 아직 늦지 않았다. 후퇴할 수 있어.'
루시퍼는 곧바로 도망칠 루트를 찾기 시작했다.
생존을 위해 주변을 살피던 루시퍼는 아까 자신과 근거리에서 싸우던 여자들을 발견했다.
치료를 받고 있는 그녀들에게는 자신의 마력이 묻어있다.
'찾았다.'
화아악- 루시퍼는 곧바로 마력을 끌어올렸다.
루시퍼는 마음만 먹으면 자신의 마력이 있는 곳으로 이동할 수 있다.
이것 또한 자신을 마왕의 후계자로 만들어준 귀중한 능력이다.
이호연이 여자들을 소중히 하는 건 알고 있으니, 그녀들을 노리는 척 틈을 만들고 탈출한다.
스르륵-
루시퍼는 순식간에 자신의 잔여 마력으로 몸을 이동시켰다.
눈앞에 있는 금발의 자매가 자신을 보고 눈을 크게 뜨는 모습이 보인다.
"아…?"
"에, 엘리스! 크읏…."
엘리스와 아이린은 루시퍼를 보자마자 반응했지만, 둘은 싸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루시퍼가 가볍게 마력을 내뿜는 것으로 둘은 그로기 상태에 빠졌다.
'일단 사로잡고, 틈을 만든다.'
희망을 본 루시퍼는 둘에게 손을 뻗었다.
그때.
"이 자식!"
"나쁜 놈!"
빠르게 다가온 무언가에게 맞은 루시퍼는 균형을 잃고 휘청거렸다.
강한 데미지는 아니었지만 루시퍼의 신경을 긁기에는 충분했다.
뒤를 돌아본 루시퍼는 눈을 찌푸렸다.
룬의 결계를 휘감은 레베카와 릴리아나가 루시퍼의 뒤에 서있었다.
그녀들의 상태도 좋진 않았지만, 직접 루시퍼와 싸우던 엘리스 자매 보다는 나았기에 루시퍼에게 공격을 시도할 수 있었다.
"꺄아악!"
"레베카…!"
하지만 그것도 잠시.
눈을 찌푸린 루시퍼가 휘두른 팔에 레베카의 몸이 뒤로 날아갔다.
남은 릴리아나는 눈을 크게 뜨고 마력을 일으키려 했지만, 그것보다 루시퍼의 주먹이 더 빨랐다.
"아악!"
아무리 마력이 돌아왔어도 아직 릴리아나의 전투능력은 루시퍼에 비해 부족했다.
마법이라면 모를까, 이 정도로 가까운 거리라면 루시퍼가 훨씬 유리했다.
루시퍼는 배를 움켜쥔 릴리아나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 릴리아나. 그래. 너라면 데려갈 수 있겠군."
루시퍼의 능력은 자신의 마력이 있는 곳으로 순간이동 하는 것이다.
당연히 자신의 몸만 이동시킬 수 있지만, 릴리아나라면 자신의 마력으로 감싸 같이 이동할 수 있다.
비록 후퇴하더라도 릴리아나라는 성과를 챙긴다면 조금은 위안을 얻을 수 있겠지.
루시퍼는 릴리아나의 목으로 왼팔을 뻗었다.
그 순간.
릴리아나에게 향하던 루시퍼의 손이 정지했다.
루시퍼뿐 만이 아니다.
경악하던 릴리아나가 멈추고,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난 백아영의 몸이 멈추었다.
시간이 멈춘 것은 아니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이호연의 사고가 가속한 것이다.
'지랄하네 진짜.'
이호연은 루시퍼가 공간을 뛰어넘는 걸 보자마자 자신의 주변에 룬의 결계를 펼쳤다.
레베카와 릴리아나가 시간을 벌어준 덕에 사고를 가속할 시간도 얻었다.
하지만 상황은 여전히 암울했다.
'생각해. 어떻게 해야 하지?'
루시퍼의 능력은 이호연도 알고 있었다.
인간 세상 어딘가에 도망칠 곳을 남겨놨을 거라는 것도 예상했다. 그렇기에 감정 증폭을 사용해 도망치지 못하게 한 것이다.
그런데 히로인들에게 루시퍼의 마력이 남아있을 줄이야.
이호연은 히로인들의 안전을 위해 루시퍼와 싸움을 이어가며 히로인들과 거리를 벌렸다.
그 판단이 지금은 독으로 돌아왔다. 가속으로 다가가기엔 너무 멀었다.
'이동 지점에 룬의 결계가 없는 공간 도약…. 가능한가?'
마법진의 마력은 곧 이호연의 마력이지만, 루시퍼에게 다가가는 것은 다른 이야기다.
룬의 결계는 이호연의 몸을 간신히 감싼 게 전부였다. 루시퍼의 주변에는 룬의 결계가 없었다.
게다가 힘이 조금 떨어졌다고 해도 루시퍼는 마왕이 되기 직전의 괴물.
마력 자체가 진하고 파괴적이기에, 룬의 결계가 없는 곳으로 뛰어드는 것은 조금만 좌표가 망가져도 몸이 뒤틀리는 도박이다.
환경도 좋지 않다. 억지로 사고를 가속한 탓에 의식과 현실 간의 간극이 컸다.
하지만 이호연의 뇌는 사고를 멈추지 않았다.
각성한 머리가 팽팽 돌아가며 가능성을 계산했다.
'불가능은 아니야.'
가능성은 적지만, 불가능은 아니다.
중심부에 있는 마력은 자신의 것. 지금의 이호연이라면 루시퍼의 마력을 뚫고 그의 뒤를 노릴 수 있다.
이호연은 가능성이 있다는 걸 알아채자마자 마력을 끌어올렸다.
사고의 가속은 오래 지속할 수 없었고, 시간이 원래대로 흐르는 순간 릴리아나는 붙잡힌다.
고민할 여유 따위 없었다.
릴리아나에게 다가가는 루시퍼의 손을 노려본다.
놀라고 있는 릴리아나의 표정을 바라본다.
머리를 채우는 분노를 다스리며 마법진을 완성시켰다.
지금의 자신은, 절대 실패하지 않는다.
찰나의 시간.
이호연의 시야가 360도 회전한다. 온몸의 세포가 재구성되는 것 같은 이질적인 감각.
방금 전까지 까마득하게 멀던 루시퍼의 등이 눈앞에 나타났다.
주변의 시간이 원래대로 돌아오고, 루시퍼의 손이 릴리아나로 향한다.
'스파이럴.'
의식과 현실의 간극에 머리가 깨질 것 처럼 아팠지만, 이호연은 자신의 재능과 경험을 믿었다.
슈우욱-.
주변의 마력을 빨아들이는 강한 폭풍이 이호연의 손에 만들어졌다.
마법진의 마력을 머금은 스파이럴은 순식간에 압축되어 구 형으로 변했다.
"…?"
뒤에서 느껴지는 거대한 마력에 루시퍼도 이상함을 느꼈지만, 이미 늦었다.
루시퍼의 피부에 상처 하나 내지 못했던 저번과는 다르다.
강인함을 잃은 루시퍼의 육체와 다르게 스파이럴은 더욱 강해졌다.
까드드드드득-!
공간 전체를 울리는 끔찍한 굉음과 함께.
마법진의 마력을 잔뜩 머금은 스파이럴이 루시퍼의 몸을 꿰뚫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