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1화 > 파멸의 루시퍼 (5)
"인정 하마. 나는 너를 무시했다. 힘으로 찍어 눌러 생포하겠다는 과욕을 부렸다. 이제부터 진심을 다하도록 하지."
"지랄은."
이호연은 루시퍼를 노려보며 마력을 회전시켰다.
아직도 저런 소리를 하는 걸 보니 루시퍼도 정상은 아니다.
지옥 출신이 다 그렇지 뭐.
"… 이호연. 괜찮은 거 맞아? 움직여도 돼?"
"네. 나름 싸울만해요. 그보다 스칼렛은 어디 있어요?"
"뒤에서 쉬고 있어. 아마 성녀 님한테 치료라도 받지 않을까."
"다행이네."
스칼렛을 챙긴 아이린과 엘리스는 전방을 주시하며 이호연에게 다가왔다.
엘리스는 루시퍼가 어떻게 움직일지 대비하면서도, 이호연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그녀의 기억 속엔 피투성이였던 이호연이 생생했다.
"스칼렛은 그렇다 치고… 너는 괜찮은 거 맞아? 그 짧은 시간에 다 치료될 리가 없잖아."
"걱정해줘서 고마워. 엘리스. 근데 이 정도면 충분해."
몸 상태는 좋지 않지만 마음은 이전보다 편했다.
이호연은 혼자가 아니었고, 자신을 받쳐줄 사람들이 있었다.
게다가 루시퍼의 전력도 약해졌다.
이호연이 루시퍼를 이기지 못했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그중 가장 큰 게 가짜 던전의 무한한 마력이었다.
가짜 던전의 지원을 받는 루시퍼는 끊임없이 마법을 쏟아냈다.
비록 마법적 소양에서 이호연이 우세하다고 해도, 마력의 질과 양은 루시퍼가 압도적이었다.
그렇다고 거리를 좁히자니 체급 차이 때문에 상대가 되질 않으니 이호연은 몇 시간 내내 맞기만 할 수밖에 없었다.
'어쩐지 주먹질을 많이 하더니, 이유가 있었네.'
릴리아나 덕분에 루시퍼가 받는 마력이 줄어들었다.
… 사실 그 점에 대해서 의문이 있긴 했다.
'릴리아나가 갑자기 강해진 이유를 모르겠단 말이지. … 일단 좋은 게 좋은 거긴 한데.'
릴리아나와 이호연 사이에 맺어진 계약에 의해, 릴리아나는 이호연보다 강한 힘을 가질 수 없다.
그런데 지금 그녀의 마력량은 확연하게 이호연 이상이었다.
이 싸움이 끝나면 그 이유도 알아야겠지.
아무튼, 도저히 쓰러질 것 같지 않은 저 괴물도 한계가 생겼다.
마천궁을 펼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상대도 그만큼 약해졌다.
콰앙-!
루시퍼의 마력포를 피해낸 이호연은 공격 태세를 취했다.
사실 아무리 약해졌다고 해도 공격을 맞으면 안 되는 건 여전했다.
저 괴물의 공격은 스치기만 해도 치명타겠지.
"개안."
게다가 각성한 개안은 다른 곳에 사용해야 했다. 지금 당장은 시간을 끌어야한다.
이호연은 활짝 핀 루시퍼의 날개를 노려보며 땅을 박찼다.
그에 반응하듯 루시퍼의 검은 날개가 펄럭이며 마력의 파장을 발산했다.
"에잇!"
'지금.'
릴리아나의 마법이 타이밍 좋게 루시퍼의 마력의 기세를 꺾었다. 이호연은 곧바로 몸을 비틀어 루시퍼가 쏟아내는 마력의 틈을 파고들었다.
루시퍼도 곧바로 주먹으로 응수했지만, 이호연의 속도가 조금 더 빨랐다.
콰드드드득-!
찰나에 만들어진 스파이럴이 루시퍼의 팔에 꽂혔다.
두꺼운 강철을 가루로 만들만한 위력이었지만, 루시퍼는 순간 마력을 집중해 실드를 만들어냈고, 팔에는 가벼운 상처만 남았다.
쿠웅!
그와 동시에 루시퍼의 주변에서 꽃잎들이 폭발한다.
임솔이 만들어낸 마력은 루시퍼의 실드가 약해진 곳을 집요하게 노리며 폭발했다.
"… 흐음."
치이익-
루시퍼는 마력으로 상처를 치료하며 붉은 마안을 빛냈다.
이호연의 힘은 여전히 마안에 보이지 않았다.
싸움이 자신의 뜻과 다르게 흘러간다.
그것이 지금 루시퍼가 느끼는 감정이었다. 특히 눈앞의 이호연이 너무나 의문이었다.
'저 인간은 정체가 뭐지?'
'싸우면서 성장한다'라는 말이 있다.
사실 루시퍼에게는 그것이 당연한 말이었다.
상대의 강점과 약점을 알아내고, 약점을 파고드는 전투법을 만드는 것은 그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루시퍼가 타고난 전투의 재능은 그만큼 압도적이었다.
사실 눈앞의 인간들에게 흥미가 생긴 이유도 비슷했다.
처음에는 자신의 공격을 피하기 급급하던 인간들이 자신의 공격을 어느 정도 받아치고 있었으니까.
인간 주제에 굉장히 흥미로운 재능이었다.
그럼에도 루시퍼와 인간들 사이의 차이는 까마득했다.
루시퍼가 보기엔 강아지가 재롱을 부리는 정도일 뿐이었다.
귀찮긴 하지만, 전력을 다하면 치울 수 있는 존재였다.
그러나 이호연은 달랐다.
지금 눈앞에 있는 저 개체가 과연 한 시간 전의 이호연과 같은 존재인가?
외형과 마력 패턴이 같은 또 다른 이호연이 나타난 것은 아닌가?
그 정도로 이호연의 변화는 엄청났다.
'죽음에 가까워지며 각성했다고?'
사선을 넘는 것으로 격 자체가 달라지는 존재가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루시퍼가 갈망하던 초월적인 존재가 아닐까.
루시퍼는 이호연을 보며 얼굴을 구겼다.
이호연은 초월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저 모습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들 수 밖에 없었다.
'… 시간을 끌면 안 되겠군.'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지만, 이대로 싸웠다가는 정말 이상한 결과가 나올지도 모른다.
마법진이 붕괴하는 한이 있더라도 전투를 5분 이상 끌면 안 된다.
루시퍼는 실로 오랜만에 불쾌함을 느끼며, 심장 깊은 곳에 있던 마력을 내뿜기 시작했다.
자존심과 권위는 잠시 뒤로 미뤄둔다.
자신의 전력 그 이상.
위험한 한계까지 힘을 쏟아붓는다.
빠득.
카드드득.
루시퍼를 중심으로 검은 불꽃이 치솟았다.
지옥의 마력에 가득 들어찬 루시퍼의 권위.
가짜 던전 마법진이 거대한 힘에 반응해 떨리기 시작했다.
"으아악! 레베카! 결계 열어줘!"
"나도 노력 중이야!"
심상치 않은 힘을 느낀 레베카는 최고 강도의 룬의 결계를 펼쳤다.
하지만 저 마력이 떨어지는 순간, 룬의 결계로는 버티지 못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크읏. 호연아…."
문수린의 염동도 마찬가지.
루시퍼를 억누르던 문수린의 마력은 루시퍼가 진심을 다하자 순식간에 소멸했다.
"저, 저게 뭐야…."
"이런 미친."
이호연은 경악하는 아이린과 엘리스를 보며 마력을 일으켰다.
지금은 다른 마법을 만들 시간이 없었다.
루시퍼가 펼친 마법의 여파로 공간이 떨리고 있다.
모든 마력을 집중해 루시퍼의 공격에 대응해야 했다.
"이클립스."
이호연이 아는 마법 중 가장 파괴력이 강한 마법.
검은 태양이 머리 위에 떠오른다.
하지만 이클립스가 만들어졌는데도 부족했다.
마천궁을 전개하지 못했기 때문일까.
정면에서 느껴지는 터무니없는 마력에 이호연은 침을 삼켰다.
'턱없이 부족해.'
가진 마력을 전부 쏟아부었다.
검은 태양의 크기가 점점 불어났지만, 그럼에도 부족했다.
이호연의 검은 태양은 루시퍼의 마력을 이겨내기에 너무나 미약했다.
- 콰드드드드득
루시퍼가 서있는 공간이 일렁거린다.
가짜 던전의 중심부는 거대한 마력을 견디지 못하고 조금씩 붕괴하기 시작했다.
쿵.
루시퍼가 한 걸음을 내딛자, 거대한 힘의 덩어리가 루시퍼의 머리 위로 솟아올랐다.
마왕의 후계자의 권위가 담긴 전력을 다한 일격.
루시퍼는 한 걸음 더 나아감과 동시에 마력을 분출했다.
화아악!
거대한 마력의 폭풍이 이호연의 이클립스와 충돌했다.
뜨겁게 타오르는 검은 태양은 무서운 기세로 돌진했지만, 루시퍼의 마력은 검은 태양에 균열을 만들기 시작했다.
레베카의 룬의 결계는 충돌의 여파를 얼마 버티지 못하고 박살 났다.
'… 내가 밀려.'
이호연은 입술을 깨문 상태로 이클립스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부족하다.
남다은의 공간참이나 릴리아나의 마법도 이호연을 도왔지만, 위력이 약했다.
각성한 개안이 없다면 저 마력을 뚫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 더블 캐스팅은 무리였나.'
어쩔 수 없이 플랜 B는 폐기다.
개안을 사용한다면 어떻게든 막아낼 수는 있을거다.
물론 그다음 공격을 막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지만… 일단 개죽음을 당할 수는 없으니까.
이호연이 개안으로 루시퍼의 마력을 읽으려던 그때, 뒤에서 익숙한 마력이 터져 나왔다.
"공간왜곡(空間歪曲)."
쥐어짜낸 임솔의 푸른 마력이 순식간에 주변의 공간을 장악했다.
억지로 개방된 공간의 틈이 충돌의 여파를 흡수하고 파괴력을 줄였다.
"임솔 교수님…!"
"아. 서, 성녀님. 임솔 교수님이!"
"솔아!"
임솔의 몸이 휘청인다.
충돌의 여파를 전부 집어삼킨 마법은 서서히 압축되었고, 잠시 후 이클립스와 루시퍼의 마력이 충돌한 공간 자체가 접히기 시작했다.
이 세상의 물리법칙을 무시한 임솔의 경이로운 마법에, 루시퍼의 마력도 결국 허공에 흩어졌다.
"… 정말 저걸 막은 거야?"
엘리스는 눈을 크게 떴다.
절대 막을 수 없을 것 같았던 루시퍼의 마력을 막아냈다.
이거면 됐다.
아무리 루시퍼라도 설마 저런 마법을 몇 번이나 쓰진 못하겠지.
하지만, 엘리스의 생각과 다르게 루시퍼의 마력은 다시 피어올랐다.
"끝났군."
아무리 지쳤다고 해도 루시퍼는 지옥의 최강자.
루시퍼의 마력은 충분했고, 앞으로 이런 마법을 몇 번이나 때려박을 수 있다.
'내가 이겼다.'
눈 앞의 인간들은 자신의 마법을 감당하지 못했다.
처음은 막았지만, 그 다음은 막지 못하겠지.
이호연이 각성하기 전에 이렇게 했으면 좋았을 텐데.
"… 뭐지?"
뒤늦은 후회를 하던 루시퍼는 이질감을 느끼고 눈을 찌푸렸다.
자신의 마력이 새어나가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가짜 던전 마법진에서 뽑아낸 마력이 다시 돌아가고 있었다.
릴리아나가 가짜 던전과 통하는 마력을 일부 막긴했지만, 마력을 자유자재로 뽑아내지 못할 뿐 연결이 끊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그 연결이 완전히 끊어졌다.
"설마…."
말도 안되는 일이지만, 루시퍼는 최악의 상황을 상정하며 정면을 노려봤다.
*
"아, 아으읏…."
"루, 루시. 일어나!"
털썩.
무릎을 꿇은 루시는 눈앞이 뱅뱅 도는 것 같았다.
젖 먹던 힘까지 쏟아부었다는 게 이런 거겠지.
루시퍼의 공격을 막기 위해 임솔 교수님의 마법진에 모든 마력을 쏟아부었다.
더 이상은 서있을 수도 없었다.
"… 말도 안 돼."
꿀꺽.
임솔은 넋이 나간 눈으로 정면을 바라봤다.
공격을 막아도 막은 게 아니었다.
공간 왜곡 마법은 자신과 제자들의 모든 마력을 끌어 사용한 대마법이었다.
자신은 이제 파이어볼 하나도 소환할 수 없다.
마음 같아선 자신도 루시처럼 주저앉고만 싶었다.
"솔아. 괜찮아?"
"……."
백아영의 말에 대답할 힘도 없다.
정면의 루시퍼는 임솔과 다르게 마력을 풀풀 흘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장난이었다는 건가? 저런 힘을 가진 적을 어떻게 이겨야 하는 거지?'
절대 이길 수 없다.
지금이라도 제자만을 탈출시키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으응? 뭐야 이거."
그때, 릴리아나가 상황에 맞지 않게 이상한 소리를 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 왜 그래? 릴리아나."
"뭔가 이상해. 내 마력이 돌아오고 있어."
"마력이?"
옆에 서있던 레베카는 릴리아나의 말에 의문을 느꼈다.
릴리아나는 마력 대부분을 루시퍼와 가짜 던전 마법진의 연결을 끊는 데 사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마력들이 다시 몸으로 돌아오고 있다니.
루시퍼가 더욱 강해지기라도 한다는 건가?
"루시퍼가 끊은 건가? … 아니, 그럴 리가 없는데."
릴리아나가 펼친 마법은 루시퍼에게 마법진의 마력이 흐르지 못하게 막는 것이다.
그 마법 자체가 파훼당한 게 아니라 마력이 회수당하는 건 명백하게 이상한 일이었다.
릴리아나가 의문을 느끼고 마력을 다시 펼치려던 그 순간.
정면에서 푸른 마력이 폭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