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9화 > 파멸의 루시퍼 (3)
가짜 던전의 중심부.
루시퍼와의 치열한 전투는 한 시간이 넘도록 이어졌다.
"큿…."
문수린은 눈을 찌푸리며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루시퍼의 강함은 상상 이상이었다.
어떤 공격이든 튕겨내는 강한 육체와 마력을 가지고 있으며, 운 좋게 공격이 맞아 들어가더라도 금방 재생해버렸다.
'다들 상처가 늘어나고 있어.'
아까 루시퍼의 마력에 스쳤던 오른 팔이 아직도 얼얼했다.
백아영에게 지원을 받고 싶지만 그녀는 이호연의 치료에 전력을 쏟고 있었으니 여유가 없었다.
"학생회장. 괜찮아? 힘들면 조금 쉬어."
"아니요. 그럴 순 없어요. 게다가 저보다는 앞에 분들이 걱정되네요."
"… 응. 정 안되면 내가 나설게. 나도 근접 전투가 어느 정도는 가능하거든."
레베카는 정면을 바라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자신도 힘들었지만, 앞에서 루시퍼와 직접 공격을 교환하는 스칼렛과 엘리스. 그리고 아이린이 걱정이었다.
레베카가 할 수 있는 건 룬의 결계를 이용한 지원이다.
레베카는 심호흡을 하며 마력을 일으켰다.
숨을 쉬기가 점점 힘들어진다.
중심부를 채우고 있는 지옥의 마력 때문이다.
릴리아나 덕분에 루시퍼가 장악한 마력을 몰아내긴 했지만, 결국 릴리아나의 마력도 근본은 지옥의 마력이다.
여성진들에게 약간의 부담은 있을 수밖에 없었다.
"크아아아아아!"
콰앙-!
루시퍼가 날개를 펼치고, 강한 마력의 폭풍이 휘몰아친다.
'결계가 흩어지고 있어.'
레베카의 마력이 루시퍼의 마력에 압도당한다.
점점 영역 싸움이 힘들어진다. 룬의 결계와 염동력으로 지원해주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지구력 싸움으로 가면 루시퍼를 이길 수가 없었다.
"릴리아나. 조금 더 강한 공격은 안될까? 치명상을 입혀야해."
"나도 노력하고는 있는데… 으음. 마력을 몰아내는 것도 꽤 힘들어서."
릴리아나는 몸 안의 마력을 체크하며 고개를 저었다.
금제로 봉인당해있던 마력을 다시 사용하고는 있지만, 릴리아나의 실력은 루시퍼에 비해 현저히 모자랐다.
지금도 간신히 버티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럼 임솔 마법사 님이나 다은이한테 기대해야 하나…."
레베카는 고개를 돌려 뒤를 확인했다.
루시퍼에게 위협적인 공격이 가능한 것은 그나마 두 명정도.
문제는 그때까지 버틸 수 있냐는 것이다.
타앙-!
루시퍼의 위협적인 공격이 엘리스와 스칼렛에게 향했다.
스치기만 해도 치명상인 루시퍼의 공격은 근접진에게 엄청난 부담이었다.
"이런… 막을게요!"
마력을 끌어올린 문수린은 엘리스와 스칼렛을 급하게 끌어당겼고, 루시퍼에게 부담을 가했다.
잠시 후. 간발의 차이로 루시퍼의 신형이 둘이 있던 자리를 지나갔다.
루시퍼도 자신에게 데미지를 주는 공격이 어떤 것인지는 알고 있었다.
공격을 이어가면서도 마력으로 임솔과 릴리아나, 그리고 남다은을 노렸다.
루시퍼를 최대한 마크하려다보니 근접진의 부담이 너무나 심했다.
"스칼렛. 내가 맡을게. 잠시 뒤에 빠져있어."
"… 아니요. 아이린 님. 괜찮습니다."
스칼렛은 벌벌 떨리는 손을 등 뒤로 감추며 아이린의 말에 대답했다.
루시퍼와의 전투는 한순간도 방심하면 안 됐다.
단 한 번의 공격이라도 허용하는 순간 전장에서 이탈하게 되고, 자신 한 명의 빈자리는 다른 사람이 채워야 한다.
조금 힘들다고 징징댈 순 없다.
갑자기 납치당한 던전에서 목숨을 건 전투를 해야 하는 위급한 상황.
스칼렛은 답답함에 얼굴을 구겼다.
아이리스 길드의 정보원으로 일하며 갑작스럽게 전투가 일어난 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스칼렛은 실로 오랜만에 벽을 느끼고 있었다.
'진짜 괴물과… 진짜 천재들.'
루시퍼는 그녀가 살면서 만났던 적 중 가장 강했다.
아마 아이리스 길드의 간부들이 모두 덤벼들어도 이기기 힘들 것이다.
그야말로 인간 군단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괴물이다.
하지만 스칼렛은 저 괴물과 한 시간이나 대치하고 있는 여자들이 더욱 놀라웠다.
엘리스와 아이린 자매?
천재 자매라고는 생각했지만, 실제로 합을 맞춰보니 천재라는 말이 아까울 정도였다.
루시퍼의 공격은 스칼렛에게 코끼리나 마찬가지였다. 정통으로 막았다간 그대로 뭉개질 테니, 최대한 피해야 했다.
엘리스와 아이린은 달랐다.
시작은 스칼렛과 같았다. 그녀들도 루시퍼의 공격을 피하는 데에 집중했다.
하지만 지금 둘은 공격을 받아치는 수준까지 왔다. 전투가 이어지는 그 짧은 시간 사이에 성장한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생도인 남다은의 공격은 루시퍼에게 상처를 입히고 있고, 문수린은 전투 전체를 지휘하고 있었다.
레베카와 문수린의 백업이 없었다면 자신은 10번 이상 죽었겠지.
"스칼렛! 뒤 조심해!"
스칼렛이 그런 고민을 하는 동안에도 전투는 계속됐다.
엘리스는 한 손으로 검을 든 채 다른 손으로 루시퍼를 향해 마법을 펼쳤다.
"흐읍!"
왼쪽에서 다가오는 루시퍼의 어깻죽지에 검을 내려찍고, 마법으로 추가타를 견제했다.
날카로운 공격에 루시퍼도 순간 물러나며 재정비를 했다.
"… 귀찮게 하는 군."
루시퍼는 재생되는 어깨를 보며 눈을 찌푸렸다.
전투가 힘들다고 느끼진 않았지만, 시간이 오래 지체되고 있었다.
그나마 루시퍼에게 위협적인 공격을 하는 인간들을 우선적으로 잡으려 했던 루시퍼는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날파리들을 먼저 처리한다.'
루시퍼는 온몸의 근육에 마력을 주입했다.
눈앞의 인간들을 부수기 위해서 힘과 속도에 모든 것을 집중한다.
"인간들을 너무 무시했군. 이제부터 너희들은 나 루시퍼의 인정을 받은 인간이다."
"저 미친 산양 새끼가 뭐라는 거야?"
루시퍼의 근육이 더욱 우락부락해진다.
품위를 유지하는 건 잠시 미뤄놓는다.
루시퍼는 마력을 터트리며 첫 타겟을 찾았다.
펄럭-!
처음은 가장 마음에 안 드는 인간.
재빠르게 도망만 치던 금색 머리의 인간을 찢어버린다.
날개를 펼친 루시퍼가 잔상을 남기며 쏘아졌다.
"큽…!"
루시퍼의 공격을 간발의 차이로 피한 스칼렛은 입술을 깨물었다.
무슨 짓을 했는지 더욱 빠르고 강해졌다.
게다가 마력으로 멀리 있는 사람들을 노리지 않고 자신에게 모든 힘을 집중하고 있었다.
엘리스와 아이린이 합세해서 스칼렛을 도왔지만, 루시퍼의 공격은 스칼렛만을 노리고 있었다.
쿵-!
촤자작-!
한 번 발을 구르면 땅이 울리고, 사방에서 지옥의 마력이 압박한다.
수 십 미터나 거리를 벌려도 한 걸음으로 좁힌 뒤 거대한 주먹을 내려찍는다.
스르륵-
스칼렛은 문수린의 염동력을 이용해 루시퍼의 공격을 최대한 흘려냈다.
직격으로 맞았다가는 몸이 가루가 될 게 뻔하니, 시간을 끌 생각이었다.
'상처가 쌓이고 있어.'
루시퍼가 스칼렛을 노리는 동안, 다른 사람들이라고 가만히 있는 게 아니다.
견제가 없으니 훨씬 수월하게 루시퍼에게 데미지를 누적시킬 수 있다.
자신이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
"읏…!"
하지만 스칼렛이 루시퍼의 공격을 전부 흘려낼 순 없었다.
미처 피하지 못한 공격을 허용했고, 루시퍼의 주먹에 스친 스칼렛이 피를 토했다.
단 한 번.
공격에 스쳤을 뿐인데 시야가 흐려진다.
"스칼렛!!"
파아악!
동시에 다가오는 루시퍼의 마력포.
본래 루시퍼의 마력포는 강한 위력을 가진 대신 시간이 필요했는데, 이번에는 예측하지 못한 타이밍에 완성되었다.
'이건 피할 수 없…!'
루시퍼의 공격에 그로기 상태에 빠진 스칼렛은 마력포를 피할 여유가 없었다.
문수린의 마력이 스칼렛의 몸을 빼내고 있지만, 억지로 따라오는 루시퍼의 마력포가 그보다 훨씬 빨랐다.
불길함이 담긴 검붉은 마력이 스칼렛의 눈앞까지 다가왔다.
저걸 맞고도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질끈.
스칼렛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슬쩍 눈을 뜬 스칼렛은 푸르른 마력에 의해 두 동강 난 루시퍼의 마력포를 바라봤다.
그리고 자신의 앞을 지키듯 서있는 한 남자를 발견했다.
"프랑스에서 구해줬던 거. 지금 갚은 거다?"
고개를 돌린 이호연은 눈을 끔벅거리는 스칼렛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까칠한 스칼렛의 맹한 모습을 보는 건 꽤 재미있었다.
"… 가만히 있었다면 감동이었을 텐데 분위기를 깨는 말이네요. 그리고 그때 저는 죽을 뻔했습니다. 공격을 대신 맞았으니까요."
"지금 쟤한테 맞으면 즉사야 즉사."
이호연은 미소를 지으며 스칼렛을 바라봤다.
스칼렛을 보다 보니 예전에 수련장에서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애기 아빠의 삶은 공장에서 하는 단순 작업 같은 느낌이 들어.
레베카가 한 말을 그때는 제대로 체감하지 못했는데, 지금은 알 것 같았다.
이 여자들이 나를 보는 시선과 내가 여자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얼마나 달랐을까.
루시퍼와 싸움이 끝나면 이 관계를 더 진지하게 바라볼 수 있겠지.
"이 싸움이 끝나면 너에게 고백할게."
"…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시죠."
"그럼 밥이라도 사줄게. 치즈 순두부 같은 거 말고, 맛있는 걸로."
스칼렛은 이호연의 헛소리에 미소를 지었다.
이호연의 몸 상태는 정상이 아니다.
아무리 성녀라도 죽기 직전이었던 사람을 한 시간 만에 뚝딱 정상으로 만들 순 없다.
지금도 아픔을 참고 서있는 거겠지.
그런 상태인데도 평소와 똑같았다.
그 점에 안심이 된다.
'온몸이 아프긴 하네.'
꾸욱.
마력을 일으키는 이호연의 손가락이 부들부들 떨린다.
한 시간이나 백아영에게 집중 치료를 받았는데도 이 정도였다.
아니, 한 시간 만에 죽은 사람을 산 사람으로 만든 백아영이 대단한 거겠지.
"이호연. 괜찮아?!"
"응. 걱정하지 마."
다가온 엘리스에게 미소를 보낸 이호연은 떨리는 주먹을 꽉 쥐고 마력으로 몸을 감쌌다.
두려움이 아예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루시퍼에게 받은 고통은 아직도 생생했다.
하지만 지금 이호연은 혼자가 아니었다.
"겨우 인간들이 모여 내 앞에서 당당하게 가슴을 피는 건가?"
"그래. 이 새끼야."
두근.
이호연의 전투 감각이 몸을 예열하기 시작한다.
상태가 좋다고는 할 수 없다.
아직 마력 회로가 불완전했기에 출력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고, 블러드 비트는 조심스럽게 사용해야 한다.
이클립스나 마천궁은 꿈도 꾸지 말아야겠지.
그에 비해 루시퍼는 표정이 불편해 보였을 뿐, 겉으로 상처 하나 보이지 않았다.
아예 데미지가 없는 건 아니지만, 괴물 같은 재생력으로 모든 상처를 복구한 거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히로인들과 함께 있어서일까.
루시퍼의 앞에 섰는데도 머릿속에 패배라는 선택지가 그려지지 않는다.
남아있는 건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뿐.
"넌 뒤졌다. 이 산양 새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