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7화 > 파멸의 루시퍼 (1)
"과연… 내 마력을 역추적해 중심부로 통하는 길을 억지로 개방한 건가?"
루시퍼는 손상된 마법진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릴리아나 칼리오페의 파괴적인 마력은 루시퍼도 긴장하게 만들었다.
"파괴적인 마력… 하지만 아직 불완전하군. 금제를 제대로 깨트리지 못한 건가?"
칼리오페 특유의 파괴적인 마력이 느껴지긴 했지만, 예전에 느꼈던 그녀의 마력보다는 위력이 약했다.
마치 어린아이가 위험한 흉기를 들고 있는 느낌.
무기는 강하지만 제대로 컨트롤을 못 하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돌아왔구나. 릴리아나 칼리오페."
아직 완벽하지 않더라도 괜찮다.
그녀의 마력은 진짜.
루시퍼는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학살의 서큐버스가 자신에게 직접 찾아왔다.
자신의 마력으로 가득 찬 이 공간에서도 찌릿거릴 정도로 위험한 마력.
저것이 정녕 서큐버스가 뿜어내는 마력이란 말인가.
저벅. 저벅.
"뭐야?"
중심부로 들어온 릴리아나는 곧바로 루시퍼를 발견했다.
저번에 봤을 때보다 덩치가 크긴 했지만, 그 더럽고 기분나쁜 마력은 여전했다.
그리고 그의 손에 들려있는 남자의 정체도 바로 알 수 있었다.
피로 범벅이 되어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몸은 구석구석까지 알고 있으니 실루엣만 봐도 알 수 있다.
이호연.
자신의 주인이 루시퍼에게 잡혀있었다.
릴리아나는 얼굴을 찌푸린 채 루시퍼를 노려봤다.
"… 야."
"칼리오페. 너는 모르겠지. 내가 너를 얼마나 기다려왔는지. 이 순간을 얼마나 고대했는지!"
"헛소리는 됐고, 잡고 있는 거 안 놔?"
"응? 아, 이거 말인가?"
루시퍼는 그제야 잡고 있던 이호연의 존재를 인지했다.
조금씩 뛰고 있는 맥박은 아직 그의 목숨이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알려줬다.
"인간은 보기보다 튼튼하더군. 이런 상태에서도 목숨이 붙어있으니 말이야."
휙-. 휙-.
루시퍼는 이호연의 목을 잡고 좌우로 흔들었다.
몸이 인형처럼 이리저리 흔들리는데도, 이호연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흐음…."
릴리아나의 뒤로 들어오는 인간 여성들.
이호연이 한 곳에 모아놓은 여성체들이다.
몇몇의 얼굴은 본 기억이 있었다.
자신에게 상처를 입혔던 인간도 있었으니까.
루시퍼는 인간들을 훑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게 이호연의 여자들인가. 칼리오페. 너도 이 인간을 좋아하나? 참고로 이호연은 너에 대한 애정이 대단하더군."
"… 하."
루시퍼의 마안이 붉게 빛났다.
릴리아나의 분노하는 감정이 생생하게 전해졌다.
그녀에게 박혀있는 금제도 마안에 비쳤다.
'역시 저 금제는 완벽히 풀린 게 아니야.'
릴리아나의 금제에 손상이 간 것 같았다.
원인은 예상이 간다.
루시퍼가 진심을 보이며 퍼져나갔던 권위가 담긴 마력.
고위 귀족인 루시퍼의 마력을 정통으로 맞았으니, 릴리아나의 금제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즉, 초월적 존재가 한 짓이 아니다.'
릴리아나에게 걸린 금제가 최상위 마법인 것은 맞다.
그녀의 기억과 힘을 제한하는 것은 루시퍼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그런 금제도 자신의 마안은 피할 수 없었다.
"친한 척 하지말고 당장 그 손 놓으라고!"
이호연에 대한 정보를 더 끌어내야 한다.
이호연이 자신의 마안을 막아내는 원인을 알 수 있다면, 초월적인 존재들에게 저항할 가능성이 생길지도 모른다.
"왜 화를 내는 거지? 칼리오페. 혹시 정말로 인간을 사모하고 있는 것이냐? 지옥의 인간 노예가 기억나지 않는 건가? 인간은 버러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물론 이호연은 평범한 인간이 아니지만, 릴리아나 칼리오페도 평범한 서큐버스가 아니다.
마왕의 후계자가 인정하는 여자를 인간 남자에게 넘기는 것은 지옥의 수치다.
"그래. 말로 해서 통할 리가 없지."
릴리아나는 대화를 포기하고 곧바로 전투 태세를 갖췄다.
루시퍼는 릴리아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저 음란한 몸을 보더라도 음욕따위 들지않았고, 전투에 대한 기대감이 앞섰다.
이호연과의 전투에서 예열된 몸은 이미 준비가 끝나있었다.
몇 번이나 말했듯이, 릴리아나 칼리오페의 마력은 루시퍼에게도 위협적이었다.
하지만 이 가짜 던전은 루시퍼의 영역이다.
쿵-!
가짜 던전을 채우고 있는 짙은 마력이 루시퍼의 주변에 마력의 폭풍을 만들어낸다.
루시퍼의 강인한 육체에 마력이 스며든다.
지옥의 마력은 물리력마저 강화할 수 있고, 루시퍼의 육체는 더욱 강해졌다.
"릴리아나 칼리오페! 네 년을 생포하면 물어볼 게 아주 많다. 천천히 그 기억을 해부해주지."
드디어 오랜 숙원을 풀 시간이 되었다.
루시퍼는 확신에 찬 얼굴로 릴리아나를 바라봤다.
지금 그녀는 불완전하다.
후계자 경쟁 시절의 완벽한 컨디션의 릴리아나였다면 모를까.
자신의 힘을 제대로 컨트롤하지 못하는 반푼어치에게 질 리는 없다.
지금 그녀를 생포한다면, 할 수 있는 일이 굉장히 많아진다.
"… 짜증나네."
대체 뭐라고 저렇게 친한 척을 하는 걸까.
릴리아나는 자신만만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루시퍼를 보며 손을 들어 올렸다.
루시퍼는 큰 착각을 하고 있었다.
릴리아나는 불완전한 게 아니었다.
단순히 마력을 끌어올리는 과정이 귀찮았을 뿐.
그녀는 중심부로 찾아오기 위한 최소한의 마력만 사용하고 있었다.
"이제 이런 것도 쉽거든?"
우드득- 빠드득-
릴리아나를 중심으로 공간이 뒤틀린다.
사실 루시퍼의 추론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었다.
릴리아나는 힘을 되찾았지만, 지옥에서의 기억은 여전히 비어있었다.
그렇기에 단순한 마법을 사용해야 한다.
루시퍼의 마력으로 가득 차 있는 이 공간은 싸움에 적합하지 않다.
그러니까, 일단 마력을 날려버린다.
파지지직-!
루시퍼는 눈을 크게 떴다.
중심부에 있는 마력이 소용돌이친다.
자신의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던 마력이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사라지기 시작했다.
"무슨… 잔재주를!"
루시퍼는 오른팔에 힘을 집중했다.
우락부락하게 튀어나온 근육으로 마력이 잔뜩 뭉쳤다.
중심부 전체를 감싸는 릴리아나의 마력을 흐트러뜨리기 위해선 공간 자체를 건드려야 한다.
루시퍼는 최대한의 힘을 담아 바닥에 주먹을 내리꽂았다.
서걱-
"크아아악!"
하지만, 루시퍼의 주먹이 바닥에 닿음과 동시에 그의 가슴에 깊은 자상이 새겨졌다.
순간적인 고통 때문에 이호연의 목을 잡았던 손에 힘이 풀렸고 약속이라도 한 듯 부드러운 마력이 다가와 이호연을 데려갔다.
"잘했어. 다은아!"
"릴리아나 씨가 불쾧나 마력을 없애고 길을 터준 덕이예요. 한층 움직이기 수월해졌어요."
"호연이도 챙겼어. 성녀 님. 호연이를 부탁해요."
남다은과 문수린은 백아영에게 이호연을 맡긴 뒤, 릴리아나의 옆에 나란히 섰다.
"칼리오페…! 무슨 짓이냐!"
가슴을 부여잡은 루시퍼는 릴리아나를 노려보며 외쳤다.
던전을 채운 지옥의 마력이 절반 가까이 줄어들었다. 짜증나는 손실이었다.
"그건 내가 할 말이지! 이 산양 새끼야! 왜 남의 남자를 납치하고 지랄이야!"
"… 뭐라고?"
릴리아나는 루시퍼의 뿔을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저 튀어나온 뿔부터 우락부락한 몸.
더러운 마력과 터질 것 같은 턱시도까지. 전부 마음에 안 들었다.
"산양 새끼 주제에. 서큐버스의 남자를 건드려?"
인간 세상에서 이렇게 화가 났던 적이 있었을까.
릴리아나는 피투성이인 이호연을 바라보며 마력을 끌어올렸다.
*
새까맣던 이호연의 시야가 점점 밝아진다.
온몸에 느껴지던 고통이 점점 사그라들고, 따뜻한 빛이 전신을 감싼다.
"여보, 여보… 정신 차려요. 으, 으흑…."
먹먹한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 꿈인가?'
이호연은 밝은 빛을 느끼며 살짝 눈을 떴다.
눈앞에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백아영의 얼굴이 보였다.
백아영이 여기까지 올 리가 없는데.
하지만 몸을 감싸는 이 따뜻한 빛은 확실히 백아영의 것이었다.
'졸려….'
멍하니 따스함을 느끼던 이호연은 다시 눈을 감았다.
일어나려해도 팔다리가 말을 듣지 않는다.
화아악-
"여보, 여보…. 눈을 떠요…."
이호연이 의문을 느끼는 와중에도 백아영은 이호연을 치료했다.
성녀라고 불리는 백아영의 치유는 마치 시간을 되돌리는 것과 같았다.
죽어버린 몸의 세포들이 재생했고, 망가진 마나 회로에 마력이 스며들었다.
금이 가고 부서진 뼈가 맞춰졌고, 혈관에 피가 돌았다.
그리고, 극심한 고통을 버티지 못하고 망가진 신경도 복구되기 시작했다.
"커흡…!"
이호연은 심해지는 고통에 눈을 부릅 떴다.
한쪽 끝으로 몰아 놨던 고통이 한꺼번에 찾아온다.
"아, 아아악! 으아아악…!"
"괜찮아. 괜찮아. 여보, 조금만 참아요."
백아영의 치료과정은 이호연의 신경을 복구하며 오히려 정신을 바짝 차리게 만들었다.
코 앞까지 다가왔던 죽음이 멀어진다.
귓가에 들리는 백아영의 말이 메아리친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와중에 이호연은 지금 상황이 꿈이 아니라는 걸 인지했다.
눈을 뜬 이호연은 당황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아영 씨? 아영 씨가 왜 여기에…."
"여, 여보. 여보…! 흐윽. 흑… 살았어. 살아있어…."
"어, 어… 울지 마세요. 나 살아있으니까. 아, 아악…."
백아영은 이호연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은 채 눈물을 흘렸다.
딱 달라붙는 백아영이 아프긴 했지만, 이호연은 고통을 참으며 주변을 살폈다.
아직 시야가 제대로 돌아오지 않아서 먼 곳을 볼 순 없었다. 하지만 이호연이 직접 마법진에 새겨 넣은 히로인들의 마력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 다들 저를 구하러 온 거예요?"
"응."
히로인들의 마력과 강대한 루시퍼의 마력.
그녀들은 이호연을 대신해 루시퍼와 대치하고 있었다.
"저도. 아니, 제가 싸워야 해요."
"안돼. 지금 더 몸을 움직였다간 정말 목숨이 위험해."
"저만 쉬고 있을 순 없어요."
"그게 문제가 아니야. 여보. 정말, 정말로 죽는다고요. 우리가 1분만 늦었어도… 다시 눈을 뜨지 못했을거야. 흑. 지금도 정상은 아니야. 계속 내 치료를 받아야해."
"…."
이호연은 울먹거리는 백아영을 보며 침을 삼켰다.
가짜 던전에는 치유 공간이라는 곳이 있다.
생명체의 마력이 끊어지면 목숨이 위험하다고 판단해 자동으로 보내지는 공간이다.
본래 이 던전 내부에서는 누구도 죽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이호연의 몸 상태로 치유 공간에 들어간다고 해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공들여 만든 치유 공간이라해도 백아영의 치료보다는 부족할 게 뻔하다.
이호연은 전투 감각과 뚜렷한 정신력을 이용해 억지로 마력을 이어가고 있었다.
만약 치유 공간에 떨어진다면, 백아영의 말대로 정말 죽어버릴지도 모른다.
백아영은 이호연의 볼에 손을 얹고 미소를 지었다.
"다들 당신만 생각하고 여기까지 달려온 사람들이에요. 걱정되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모두 여보가 감당할 필요는 없잖아."
"… 아영 씨."
"믿고 맡겨요. 물론 여보를 독점할 수 없는 건 아쉽지만… 다들 진심이니까."
백아영의 말을 들은 이호연은 왠지 가슴이 메이는 것 같았다.
이 던전 자체를 만든 것은 자신이었다.
"아무튼 우리는 치료에 집중하자. 우리가 얼마나 강한데, 마인 하나를 못 잡을 리가 없어."
"… 네."
이호연은 천천히 몸 내부를 관조했다.
확실히 심각한 상태는 맞는 것 같았다.
극한 상황이 끝나자마자 몰려온 피로와 후유증에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조금만 더 회복하면 움직일 수 있어.'
두근. 두근.
여기서 포기할 생각은 없다.
전투 감각은 아직 꺼지지 않았다.
몸은 싸움을 원하고 있었고, 루시퍼와 전투는 이호연이 마무리해야한다.
자신이 뿌린 씨앗을 다른 사람들이 거두게 할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