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 야겜에 빙의했다-536화 (536/648)

< 536화 > 가짜 던전 (8)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는 것.

루시퍼는 그런 존재들을 싫어했다.

루시퍼는 태어날 때부터 남들과 다른 존재라는 걸 자각했다.

이 세계에서 갖아 강한 존재라는 걸 인지했고, 자신이 지옥이라는 세상을 지배하는 마왕이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자기 자신에게 당당하지 못한 자는 결국 뒤처지기 마련.

'그 놈들이 생각나는군.'

다른 마왕의 후계자들이 그랬다.

파멸(破滅)의 루시퍼.

패기(覇氣)의 켄타우로스.

악몽(惡夢)의 인큐버스.

그리고 학살(虐殺)의 서큐버스.

마왕의 후계자들에게는 여러 이명이 있었지만, 실제로 그에 맞는 행동을 보이는 후계자는 루시퍼와 릴리아나뿐이었다.

패기의 켄타우로스라는 놈은 일족이 전멸당한 뒤 은거해버렸고, 악몽의 인큐버스라고 불리던 놈은 릴리아나에게 추하게 패배해 도망쳤다.

루시퍼의 흥미를 채워준 것은 단 한 명.

학살의 서큐버스였다.

릴리아나 칼리오페만이 루시퍼를 만족하게 만들었다.

그렇기에 칼리오페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이호연과의 대화를 꽤나 기대했었다.

'아쉽긴 하지만 아직 시간은 많다.'

성격이 마음에 들지 않을 뿐, 이호연이라는 인간에 대해 흥미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마안을 피하면서 엄청난 전투력을 가지고 있는 이호연은 연구가치가 높다.

게다가 던전 안에 있는 인간 여성체와 릴리아나까지.

할 일이 많았다.

루시퍼는 마력을 끌어올려 이호연을 들어 올렸다.

아니, 들어 올리려 했다.

"네가 뭘 안다고 그런 소리를 하냐."

"… 어떻게 일어난 거지? 아직 몸이 회복되지 않았을 텐데."

루시퍼는 다리를 부들거리며 일어난 이호연을 보며 눈을 크게 떴다.

마안에 보이는 이호연은 아직 회복되지 않은 상태였다.

저렇게 서있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이다.

"씨발. 살다 살다 악마 새끼한테 인생 훈수까지 듣네."

이호연은 시야를 가리는 피를 닦아내며 정면을 바라봤다.

지금 어떻게 서있는지는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다. 극한 상황에서 나오는 아드레날린인가 도파민인가 아무튼 그 비슷한 거겠지.

아프긴 한데, 적당히 버틸만했다.

"기분을 나빠하는 것도 강한 자의 권리라는 것을 알고 있나? 간신히 일어나 있는 주제에 입은 살아있군."

"꼬우면 죽여보든가. 새끼야."

이호연은 루시퍼와 눈을 마주치며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떠드는 모습이 마음에 안 들었다.

"인간, 아니 지성을 가진 모든 생명체는 네 생각보다 단순하다. 감정과 생각을 약간만 읽으면 많은 정보를 파악할 수 있지."

"지랄하네."

"그렇다면 내 말이 틀렸다는 건가? 네 마음속에 들어찬 위선이 내게 똑똑히 보이고 있다."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헛소리하지 마."

"그렇다면 무슨 목적으로 인간들을 가둔 거지?"

말문이 막혔다.

가짜 던전 마법진을 이용해 무엇을 하려 했나.

물어보면 당당히 대답할 수가 없었다.

"… 후우."

이호연은 대답 대신 몸 안에 도는 마력을 확인했다.

아직 완벽하진 않지만, 충분히 싸울 수 있다.

"또 싸우려는 생각이군. 의지는 대단하지만, 대화를 회피하는구나."

"…."

짜증 난다.

저 몸에 묻어나는 여유로운 태도.

자신이 틀리지 않았다는 자신감.

그리고 반박할 말이 없는 자신까지.

이호연은 이 상황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굉장히 위대한 일을 하고 있다는 착각을 하고 있구나. 역시 인간은 가진 힘에 비해 자존심이 강해."

루시퍼는 이호연을 내려다보며 의문을 느꼈다.

분명 이호연의 집념은 대단했다.

쓰러지고 쓰러져도 다시 일어났고, 아무리 의지를 꺾어도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났다.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는 그 신념은 루시퍼도 놀라울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숭고한 정신과 대비되는 저 추악한 마음은 무엇이란 말인가.

루시퍼의 마안에 보이는 위선과 기분 나쁜 감정.

이호연이 가진 정신과 몸의 괴리감을 루시퍼는 이해하지 못했다.

"짊어지고 있다고 했었나? 네가 짊어진 게 무엇이란 말이지?"

"닥쳐. 넌 아무것도 모른다니까."

"위선자라는 말이 기분 나쁜가? 하지만 네 행동에서 보이는 이질감을 너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알고 있을 거다."

루시퍼의 마안은 진실만을 말한다.

이호연의 추악한 마음은 루시퍼에게 훤히 비치고 있었고, 그걸 이호연도 알고 있을 터.

"…."

이호연은 입을 다문 상태로 루시퍼를 노려봤다.

지금 이호연의 상황은 암울했다.

루시퍼와 전투는 길었다.

세 자릿수가 넘게 격돌했고, 대부분의 격돌은 이호연이 대미지를 받는 것으로 끝났다.

몸은 개박살이 났으며 정신도 피폐해졌다.

게다가 루시퍼가 하는 말에는 반박도 하지 못하고 있다.

이 전투에서 지면 이호연은 물론이고 세상이 끝난다.

도망칠 곳이 없는 상황인데도 상대와 싸워서 이길 확률은 1% 미만.

완전히 극한 상황에 몰렸다.

그리고, 이렇게까지 몰리고 나니 오히려 차분해졌다.

자기 자신을 조금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다.

"… 그래. 네 말이 맞긴 하네."

"음?"

"내게 주어진 게 많았거든. 다른 세상을 사는 것 같았으니까. 짊어진 게 많다고 말하면서도, 내심 주인공이 된 것 같아서 기분이 좋은 적도 있었어. 내 여자들의 정신을 주무르려는 생각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말해도 틀린 건 아니야. 세상을 구한다는 목표에 내 욕망도 섞여있었으니, 네 말대로 위선자가 맞지. 이걸로 됐냐?"

"무슨 소리인 지는 모르겠지만, 죽기 전에 회개하는 건가? 삶의 마지막 순간에 반성하는 놈들은 얼마 되지 않는다. 자신감을 가져도 좋다."

자신이 아무리 쓰레기인 것은 이미 충분히 자각했다.

우습게도, 죽여야 하는 적이자 원작의 마왕인 루시퍼에게 들은 말로 정신을 차렸다.

레베카와 스칼렛, 그리고 다른 여자들의 감정을 늦었지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억울한 게 있다.

"… 근데 있잖아. 내가 나쁜 놈인 것도 맞고, 나쁜 짓을 하려고 했던 것도 맞거든? 그렇다고 너한테까지 훈수를 들어야겠냐?"

지옥에서 수많은 생명을 죽이고, 인간 세상에서 인간을 벌레 보듯이 보며 지구를 지옥과 동화시키려는 게 저 악마 새끼다.

그런 놈한테 악인이니 위선자니 하는 개소리를 듣고 있다니.

내가 아무리 쓰레기여도 루시퍼에게 저딴 말을 들을 정도는 아니잖아.

이호연은 눈을 찌푸리며 마력을 끌어모았다.

"그래. 대화는 여기까지만 하는 게 좋겠군. 네 정신도 조금은 말끔해졌다."

"지랄하지말고 덤벼."

두근. 두근.

이호연은 몸 안의 전투 감각을 억지로 깨웠다.

천천히 심호흡하며 주변의 마나를 흡수한다.

꽤 많이 회복된 마나 회로에 조금씩 차오르는 마나가 몸에 생기를 부여했다.

"눈빛을 보아하니 사지를 부숴놓기 전까지는 계속 덤비겠구나."

하지만 더 이상의 시간낭비는 사절이다.

이호연이 전투 태세를 갖춤과 동시에, 루시퍼도 마력을 끌어올렸다.

대화에 어울려주는 건 끝이다.

우득- 우드득-

루시퍼의 근육과 날개가 점점 커지기 시작한다.

인간의 몸을 의태하고 있던 루시퍼의 본체가 세상에 드러난다.

촤르륵-

중심부에 가득 찼던 지옥의 마력이 루시퍼에게 빨려들어갔다.

이호연의 몸에 소름이 돋았다.

루시퍼. 저 미친 악마 새끼는 아직도 여력을 남겨두고 있었다.

뚜둑-

딱 좋은 사이즈였던 루시퍼의 턱시도가 거대해진 몸을 감당하지 못하고 터져나갔다.

"역시 거대한 몸은 품위가 없군. 악마보다는 인간 정도의 크기가 딱 맞아. 작으면 여러모로 편리한 점이 있으니."

"…."

스륵- 스르륵-

루시퍼의 검은 마력이 턱시도를 복구하기 시작했다.

이호연보다 조금 컸던 루시퍼의 키는 이제 올려다봐야 할 정도로 커졌다.

저벅. 저벅.

루시퍼는 걸을 때마다 주변의 마력을 흡수했다.

사실 크기가 조금 커진다고 해서 강함에 큰 변화가 있는 건 아니다.

루시퍼는 어떤 상태에서든 최강이었다.

다만, 이번에는 진심을 다할 생각이었다.

"마음에 들었다. 이호연. 태어날 때부터 완벽한 생명체는 아니지만, 인간은 본래 불완전한 법. "

쿵.

중심부가 울리기 시작했다.

루시퍼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마력들이 중심부에 가득 찼고, 하나로 연결된 것처럼 유기적으로 움직였다.

"하지만 넌 인간 주제에 마왕의 후계자에게 덤비는 만행을 저질렀다."

콰드득-

순식간에 쇄도한 루시퍼의 팔이 이호연의 목을 낚아채 높이 들어 올렸다.

"크읍…!"

반응할 틈도 없었다.

이호연도 마력을 끌어올렸지만, 이호연의 몸상태는 정상이 아니었다.

힘을 완전히 개방한 루시퍼의 속도에 전혀 반응하지 못했다.

"일어서있는 것도 벅찬 주제에 날 죽이려 한 것은 오만이자 나에 대한 모욕."

루시퍼는 이호연의 몸을 붙잡은 채로 마력을 흩날렸다.

콰득-! 까드득!

고통스럽다.

루시퍼에게 잡힌 목뿐만이 아니다.

사방에서 회전하는 날카로운 마력이 이호연의 몸을 베어낸다.

"벗어날 수 없을 거다. 하지만 자신감을 가져도 좋다. 내게서 이렇게 오래 버틴 상대는 처음이었으니까."

"커흑… 크, 크읍…."

"뛰어난 재생력이 있는 것 같으니, 죽기 직전의 상태로 만들어놓으면 되겠지."

쿵. 쿵. 쿵!

중심부를 가득 채운 마력은 이호연을 공격하면서도 점점 크기를 키웠다.

루시퍼의 본신이 드러난 순간 생겨나는 마력 폭풍은 루시퍼도 억제할 수 없었다.

콰앙-!

결국 중심부를 가득 채운 루시퍼의 마력은 중심부 바깥으로 퍼져나갔다.

이호연을 죽일 생각이 아니었으니, 살상력을 담은 마력은 아니었다.

오로지 루시퍼 자신의 권위가 담긴 마력.

"음?"

루시퍼는 자신의 마력에 닿은 생명체들을 느꼈다.

눈앞의 이호연에게 집중하다 보니 가짜 던전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었는데, 아주 가까운 곳에 누군가가 있었다.

"이 마력은…."

릴리아나 칼리오페의 마력.

루시퍼는 피 투성이가 된 이호연을 붙잡은 상태로 고개를 돌렸다.

중심부와 가까운 마법진이 엄청난 속도로 손상되고 있었다.

촤악-

중심부의 마법진이 강제로 역산되고, 문이 개방된다.

어두컴컴한 중심부에 한 줄기 빛이 비친다.

"호오…."

들어오는 생명체들을 확인한 루시퍼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이호연을 제압하자마자 나타난 릴리아나 칼리오페와 인간 여자들.

흥미로운 것들이 끊이지 않았으니, 이것은 마치 자신을 위해 만들어진 무대같았다.

"그때와 똑같구나. 칼리오페."

중심부로 들어온 릴리아나는 인간 세상에서 처음 마주쳤던 릴리아나와 전혀 달랐다.

루시퍼마저도 등골이 오싹하게 만드는, 서큐버스라고 볼 수 없는 파괴적인 마력.

학살의 서큐버스.

Killer Queen, 릴리아나 칼리오페가 다가오고 있었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