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3화 > 가짜 던전 (5)
쿵. 쿵.
일정하게 울리는 진동이 공간을 가득 채운다.
내부에 가득 찬 불길한 마력과 괴수들의 살기는 전투 능력이 떨어지는 일반인들에게는 엄청난 부담이었다.
"괜찮으세요? 천천히 눈 뜨고, 심호흡하세요."
"히이, 히이익…."
문수린은 사람들을 다독이며 비전투 인원을 체크했다.
본래 이런 건 의료팀인 백아영이 할 일이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녀는 중요한 인재다.
힘을 빼는 건 좋지않다.
"카페 사장님은 어디 계셨던 거예요?"
"저는 아카데미 정문 쪽에 있었습니다."
"으음…."
아카데미 정문과 학생회실은 꽤나 거리가 멀다.
그런데도 카페의 사장과 문수린은 같은 공간에 있다.
'위치가 기준이 아니라면 뭐가 기준인 거지?'
마지막에 같이 있었던 임솔과 백아영이 함께 던전에 휘말렸는데도, 학생회실에 있던 학생회 인원들은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문수린은 부족한 정보에 아쉬움을 삼켰다.
'아마 던전 내부에는 우리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있을 거야.'
이 던전에는 의문이 많았다. 하지만 확실한 건 여기 있는 인원들 말고도 다른 사람들이 많을 거라는 것.
그리고 그 사람들도 저 괴수들을 마주치고 있을 거라는 것이다.
쿵-. 쿵-.
귀를 때리는 저 불길한 소리도 그렇고, 여러모로 불길한 던전이었다.
문수린은 비전투 인원들을 챙기며 마력을 일으켰다.
"다른 사람들을 구해야 해."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걸려있다.
학생회장으로서, 아카데미에 발생한 테러를 막아내야 한다.
문수린은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여자들에게 다가갔다.
"그러니까… 중심부에 뭐가 있다는 거죠?"
"저 소리의 근원지가 던전의 중심부야. 거기 호연이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수상한 건 확실해."
"레베카 씨는 이 던전을 잘 아는 것처럼 말하네요."
"아, 아하하…. 임솔 마법사님도 참."
레베카는 아이린과 임솔을 보며 머쓱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가짜 던전 마법진 설계를 도왔다.
자세한 사항은 이호연이 숨겼으니 잘 모르더라도, 이 던전에 중심부가 있다는 정도는 알고 있다.
하지만 굳이 모든 정보를 말할 필요는 없었다.
그때, 비전투 인원의 케어를 끝낸 문수린이 다가왔다.
"다들 인사는 나누셨어요? 죄송해요. 비전투 인원들을 보호해야 해서요."
"아, 학생 회장님 안 그래도 잘 왔어요. 앞으로 어떻게 움직일지 고민 중이었거든요."
아이린은 다가온 학생회장에게 인사하며 가까이 다가갔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 말고도 구심점이 있는 건 편한 일이었다.
"던전의 다른 구역에 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아카데미에 있던 사람들이 전부 납치당했다면, 분명 전투 인원이 없는 곳도 있을 거예요."
"아하… 그것도 좋지만, 더 가능성이 높은 방법이 있거든요."
"학생회장. 이 쪽은 레베카라고 해."
문수린은 아이린과 임솔이 소개하는 붉은 머리의 미녀를 보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학생회장 님."
"반갑습니다. 레베카 씨."
사실 처음 보는 건 아니지만, 문수린은 굳이 트집을 잡지 않았다.
레베카는 문수린에게 인사를 건네며 던전의 중심부에 대한 설명을 했다.
"던전에 들어오기 전에, 호연이가 마법진을 컨트롤 하는 모습을 확인했어요."
"… 호연이가요? 이 대규모 던전이 호연이가 한 짓이라는 뜻인가요?"
"아니요. 호연이도 마법진에 휩쓸린 것 같았어요."
레베카는 침착하게 설명을 이어갔다.
탈출 방법을 아는 이호연을 찾아야하고, 저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곳에 이호연이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아까부터 들린 이상한 소리는 문수린도 알고 있었기에 금방 설명을 끝낼 수 있었다.
하지만 레베카가 모든 것을 설명한 게 아니었기에, 문수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호연이를 찾아야한다는 건 이해했어요. 그런데 소리가 들리는 중심부를 레베카 씨가 찾을 수 있는 건가요?"
"레베카 씨는 결계 마법에 능통해. 실력은 내가 보증할게."
"임솔 교수님이 보증한다면 괜찮겠지만… 이곳에는 비전투 인원들도 많아요. 이 사람들을 전부 데리고 가려면 시간이 꽤나 지체될 거예요."
사람이 많으면 당연히 이동 시간이 오래 걸리고, 비전투 인원을 안전하게 챙기려면 빈 틈이 없도록 전투 인원을 배치해야 한다.
그러다보면 여러 문제가 발생하기 마련.
레베카는 문수린의 말에 잠시 고민한 뒤 입을 열었다.
"거리가 가깝진 않아요. 적어도 한 시간은 넘게 걸어야 할 텐데."
"으음…. 그래도 챙겨서 데려가야 할 것 같아요. 저 괴수들이 지금은 덮치지 않지만 언제 태도를 바꿀지 모르니까요."
"… 응. 사람들을 버릴 순 없지. 나라도 남아있을까?"
"아영이 네가 남아있어서 뭐해. 차라리 나랑 같이 있자."
"하지만 인원을 나눴다가 중심부에 던전 보스라도 있으면 어떡해."
"예. 전력을 나누는 건 좋지 않아 보입니다."
레베카와 문수린.
임솔과 백아영. 아이린과 스칼렛 까지.
이런 비상사태 경험이 많은 그녀들은 금방 계획을 정리했다.
그리고 남다은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릴리아나는 눈을 깜박거리다가 손가락으로 괴수들을 가리켰다.
"그냥 저것들을 다 죽여버리면 되는 거 아니야? 우리가 훨씬 강해보이는데."
"… 그런가?"
아이린은 고개를 돌려 이 쪽의 전력을 확인했다.
임솔과 레베카, 아이린과 스칼렛은 말할 것도 없고, 엘리스와 문수린, 루시루미 쌍둥이와 남다은. 릴리아나와 그 유명한 성녀까지 있다.
여기 있는 인원들의 전투력이 아이리스 길드의 한국 지부보다 강할지도 모른다.
이 던전 자체가 익숙하지 않아서 문제지, 저기 있는 괴수들은 우습게 박살 낼 수 있다.
"학생회장. 일단 저것들 먼저 청소할까요? 무슨 선택을 하든 그게 좋아보이는데."
"나쁘지 않네요."
설령 모두를 챙겨서 움직인다고 해도 저 괴수들을 가만히 내버려 둘 생각은 없었다.
문수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마력을 끌어올렸다.
*
콰드득- 꽈직-.
괴수의 몸이 찢어지고 뼈가 부러지는 소름 돋는 소리가 들린다.
문수린의 마력에 잡힌 괴수가 바닥에 몇 번이고 쳐박힌다.
쿵.
마지막까지 버티던 거대한 놈이 쓰러지고 나서, 전투는 일단락되었다.
"루, 루미. 나 무서워…."
"괜찮아. 루시도 불화살도 멋있었어…!"
"으으. 루미의 실드도 강했어. 덕분에 살았어."
루시와 루미는 서로를 끌어안은 채 바들바들 떨었다.
어른들이 계획을 세우는 동안 남다은과 붙어있던 쌍둥이는 괴수들을 사냥한다는 말에 당황했지만, 금방 정신을 차리고 전의를 불태웠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싸움을 시작하자마자 괴수들을 학살하기 시작한 사람들을 보며 루시는 금방 겁을 먹었다.
"괴수들보다 우리 편이 더 무서웠어."
"사실 나도… 실드를 걸어주긴 했지만 다들 거의 다치지 않았어."
"… 신기하네."
그 중 압권은 당연히 문수린.
루시와 루미는 가장 앞에서 괴수들을 집어던지던 학생회장을 생각하며 파르르 떨었다.
"학생회장… 엄청 강하네."
"감사합니다. 아직 이곳에 익숙해지지 못한 게 아쉽네요. 레베카 씨는 많이 익숙한 것 같아요."
레베카는 문수린의 실력을 보며 내심 놀랐다.
생도 중에서는 이호연 다음으로 남다은이 가장 강하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저런 인재가 있을 줄이야.
"나는 예전부터 수련을 했거든. 그럼 나는 결계를 설치하고 올게."
"… 정말 놓고가도 괜찮은 거 겠죠? 역시 챙기는 게 좋아보이는데."
"너무 걱정하지 마. 레베카 씨가 설치하는 결계는 저 괴수들이 몇 시간을 두들겨도 부서지지 않을 만큼 강한 결계니까."
"으음. 임솔 교수님이 인정하셨다면 대단한 마법사인가 봐요."
임솔이 가진 마법에 대한 자부심은 문수린도 잘 알고 있다.
그녀가 인정했다면 엄청난 마법사라는 뜻인데도, 자신에게 정보가 없었다.
'이동하면서 천천히 물어볼까.'
그녀의 정체도. 이호연에 대한 것도.
문수린은 레베카의 뒷모습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
지이잉-
레베카는 마력을 흩뿌리며 길을 탐색했다.
그녀의 뒤에는 여자들이 줄줄이 따라가고 있었는데, 이것도 이호연이 그린 그림 그대로였다.
물론 원래 계획에 들어있지 않는 여자들도 있지만, 혹시 몰라 모든 히로인들의 마력을 입력해놓았기에 일어난 일이었다.
"레베카 씨, 확실히 대단하시네요. 마법진을 파악하는 속도가 남달라요."
"아하하… 호연이가 마법진을 건드리는 걸 본 게 도움이 됐어."
"호연이는 무슨 생각으로 이런 마법진을 만들었을까요?"
"그러게. 그건 나도 의문이야."
실제로 본 마법진은 엄청나게 정교했다.
레베카가 직접 참여하지 않았다면, 절대 길을 찾을 수 없었을거다.
'애기 아빠를 갉아먹은 건 무슨 고민이었을까.'
레베카는 자신이 내조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 같아서, 괜히 책임감을 느꼈다.
그때, 문수린의 말이 레베카의 고민을 파고들어왔다.
"그래서 말인데, 레베카 씨는 호연이랑 무슨 관계인가요? 호칭도 엄청 친숙하시네요."
문수린은 레베카의 표정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
마력 탐색을 잠시 멈춘 레베카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지금은 이호연이 없지만, 이럴 때야말로 남편을 내조해야 하는 법.
레베카는 자연스럽게 말을 돌렸다.
"음…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주제네."
"… 그럼 임솔 교수님은요?"
"나도 비슷해."
임솔도 어느정도는 레베카와 비슷한 위치였다.
자신을 받아줄 사람은 이호연 밖에 없으니, 굳이 긁어부스럼을 만들기 싫었다.
"…."
이 사람들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마음 같아서는 레베카를 붙잡고 이호연에 대한 정보를 뜯어내고 싶지만, 지금은 비상사태였다.
문수린은 이내 고개를 돌려 백아영을 바라봤다.
"성녀 님. 저희가 던전에 휘말리기 전에, 호연이의 신변 보호 요청서를 보고 엄청 화나셨던데…."
"그거야 당연히 엽… 호연이는 나랑 친하니까 걱정해서 그랬지."
"그러지 마시고 조금 더 자세히 말해주세요."
백아영도 문수린의 말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고민했다.
전부 우리 여보를 건드리는 여우들이라며 행패를 부리고 싶었지만, 지금 그렇게 해봤자 미친년 취급만 받겠지.
"…."
결국 백아영도 입을 다물었다.
"너희들 엄청 귀엽다. 나랑 친구 할래?"
답답함을 느낀 문수린이 여자들을 계속 건드리는 동안, 릴리아나는 만만한 루시와 루미를 건드리고 있었다.
저 작은 체구에 달린 거대한 가슴은 서큐버스에게도 미스테리였다.
"처, 처음 뵙겠습니다…."
"루미. 모르는 사람이잖아. 내 뒤에 숨어 있어."
"나 그런 이상한 사람 아니야! 다은아. 나 변호 좀 해줘."
"루시, 루미. 보기보다 착한 분이야. 릴리아나 씨라고 부르면 돼."
"다은이가 그렇게 말한다면야… 저는 루시에요."
"저는 루미라고 해요."
"그래그래. 나는 귀여운 애들이 좋더라. 근데 보기보다 착한 사람이라니? 나 정도면 착하게 생긴 편인데."
"그건 아닙니다. 릴리아나 님."
여자들은 서로 대화를 나누며 던전을 걸어갔다.
의외로 이호연에 대한 대화는 그렇게 많지 않았는데, 이호연의 생각과 다르게 하렘에 관대한 인원이 던전에 잔뜩 들어왔기 때문이다.
쿵- 쿵-
점점 가까워지는 소리와 진동.
대열의 뒤에 서있던 엘리스는 눈을 찌푸렸다.
"… 확실히 점점 가까워지고 있네."
"맞아. 소리와 진동이 점점 커지고 있어."
기분 나쁜 마력이 몸에 깊게 스며든다.
몸이 무거워지고, 마력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기분.
불쾌함에 시원한 물로 샤워라도 하고 싶었지만, 엘리스가 눈을 찌푸린 건 그게 이유가 아니었다.
"언니는 어이없지도 않아? 여기 여자들이 전부 이호연과 관련이 있어."
"그러게. 몸이 5개라도 되는 걸까."
"그냥 미친 바람둥이잖아. 언니는 짜증도 안나?"
"엘리스가 짜증나면 나도 짜증나지."
아이린은 이호연이 얼마나 바람둥이든 상관없었다.
그녀는 빨리 이 던전을 나가 일주일간 합숙을 즐기는 게 더 중요했다.
"하아…."
엘리스는 대열의 뒤를 지키며 생각했다.
'그래도 내가 생각한 만큼만 있는 것 같아.'
설마 더 나오진 않겠지.
이호연의 인간 관계는 전부 파악하고 있다.
유일하게 파악하지 못한 것이 이호연의 집이었으니, 이제 더 숨길 여자도 없다.
엘리스는 내심 자신의 능력에 감탄했다.
그리고, 막상 현실을 마주하고 가슴이 시원해진 자신이 가장 미친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뇌리에 스쳤다.
'미친 바람둥이랑 사귀니까 별 생각이 다 들어.'
엘리스는 쓸데없는 생각을 지우기위해 고개를 휘휘 저으며 걸음을 재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