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2화 > 가짜 던전 (4)
벌떡-
루시는 질끈 감았던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켰다.
분명 엘리스와 대화를 나누던 도중 남다은이 들어왔고, 그 직후에 무언가가 루시의 몸을 강타했다.
"이게 뭐야. 으으."
전신을 감싸는 기분 나쁜 마력.
루시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불쾌함을 견디며 바로 루미를 찾았다.
"루, 루미. 루미 어딨어?! 괜찮아?"
"나 여기 있어. 루시…."
"루미! 다행이다. 흐읏…."
"으으어. 으읍."
루시는 루미의 뺨을 마구 만지며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다행히 다친 곳은 없는 모양이다.
"여, 여긴 어디야?! 꺄악!"
"이런 미친…! 과제 저장도 못했는데 이게 뭐야!"
루미가 괜찮다는 걸 확인하자, 주변의 상황도 루시의 눈에 들어왔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 주변에 서서 패닉에 빠져있었다.
"… 뭐야?"
음산한 한기가 몸을 감싼다.
어두운 동굴같이 생긴 이 공간 내부에는 기분 나쁜 마력이 가득 차 있었다.
"으, 으읏…."
"아야…."
"엘리스? 다은아?"
"… 이건 무슨 상황이야? 갑자기 마력이 날 덮쳤는데."
"나도 순식간에 제압당했어."
엘리스와 남다은도 곧 정신을 차렸다.
그녀들이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던 때.
주변에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루시와 루미는 아무도 없는 곳에서 눈을 떴지만, 알고 보니 허공에서 뿅 하며 나타나는 거였다.
그리고 금방 익숙한 사람이 나타났다.
"에, 엘리스?! 네가 왜 여기에…."
"언니? 나야말로 묻고 싶은데.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알고 있어?"
아이린은 엘리스를 보자마자 눈을 크게 뜨며 다가왔다.
갑자기 휘말린 마력에는 그녀도 당황했지만, 그 안에서 엘리스를 만나는 건 더욱 놀라운 일이었다.
아이린은 이호연을 생각하며 주먹을 꽉 쥐었다.
"나도 정확히는 모르지만… 엘리스까지 휘말리게 하다니. 이호연 그 자식을 내가 어떻게든…."
"… 이호연이라고?"
엘리스는 지끈거리는 두통을 느끼며 이마에 손을 올렸다.
어쩐지 요즘 조용하더라니, 금방 사건을 일으켜버렸다.
"스칼렛. 이게 무슨 상황일까?"
"…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마지막 순간 호연 님은 마법진을 컨트롤하지 않았습니다. 그건 확실히 확인했어요."
"으응. 나도 그건 봤어. 마법진의 폭주인가? 하지만 애기 아빠가 그런 실수를 하진 않을 것 같은데."
스칼렛은 혼란스러운 분위기를 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고, 레베카는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릴리아나는 던전에 들어오자마자 운 나쁘게 돌에 머리를 박았다.
"아, 아야… 머리야. 돌이 왜 있는 거야. 흑."
릴리아나가 울상을 짓고있을 때.
레베카는 엘리스에게 달려 나간 아이린의 뒷모습을 보며 주변의 마력을 느꼈다.
루시퍼를 만난 이후로 지옥의 마력을 꾸준히 수련했기에, 폭주한 던전 내부에서도 주변 상황파악 정도는 가능했다.
"던전의 폭주 현상과 비슷해… 애기 아빠랑 함께 만든 마법진인 건 확실하네. 마지막 모습은 조금 의문이지만."
"호연 님은 이걸 무슨 목적으로 만든 걸까요. 설마 테러를 하고 싶었던 건 아닐 텐데…"
스칼렛은 주변을 둘러보며 눈을 찌푸렸다.
가짜 던전에는 아카데미의 생도나 교수들도 있었지만, 직원이나 노약자처럼 전투 능력이 없는 사람도 있었다.
그럴 이유가 없기도 하고, 아무리 이호연이 이상한 사람이라 해도 그 정도로 나쁜 놈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 크르, 크르륵…!
- 꾸으윽. 갸아아악.
"으, 으아아악!"
"괴물… 괴물이야! 도망쳐!"
그때, 던전의 한쪽 구석에서 괴상한 형태의 괴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카데미의 생도들도 경험해보지 못한 살기와 흉측한 외형.
사람들은 순식간에 혼란에 빠졌다.
"엘리스. 언니랑 같이 이 위기를 극복하자."
"… 언니.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일반인들 먼저 진정시켜. 나랑 언니라면 금방 사람들을 진정시킬 수 있어."
"아, 그럴까?"
"모두 당황하지 말고 침착하세요! 학생회장 문수린입니다. 침착하게 움직이세요."
엘리스의 말을 듣고 주변의 분위기를 잡으려던 아이린은, 던전을 가득 채우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이 곳에는 자신보다 사람들을 안심시킬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
"다들 이 주변으로 모여주세요. 전투가 가능한 인원은 따로 분류하겠습니다."
"솔아, 너도 무슨 상황인 지 모르는 거야?"
"조금 어색하긴 하지만… 아마 던전인 것 같아. 폭주 현상이 생기면서 던전도 불규칙해졌으니까. 거대한 던전의 폭주 현상에 휘말린 걸까?"
문수린과 함께 던전에 휘말린 임솔은 백아영의 말에 대답한 뒤,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자신도 막을 수 없었던 불길한 마력의 파동.
그 불길한 마력은 던전 내부에도 가득 차 있었다.
문수린은 사람들을 안심시키며 전투 인원과 비전투 인원을 분류했다.
사람들의 안전을 보장한 뒤에 문수린은 임솔에게 의견을 물었다.
"던전의 폭주 현상인 것 같습니다. 주변에 있는 생명체를 강제로 던전으로 끌어당긴 것 같아요. 지금까지 발견된 적이 없는 새로운 폭주 현상 같은데, 임솔 교수 님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던전 폭주와 비슷한 현상들이 관측되고 있어."
상황 파악은 금방 끝났다.
아카데미의 에이스들 답게, 몇 가지 현상만 읽고도 던전의 폭주 현상이라는 것을 금방 간파했다.
이호연의 의도와 딱 맞는 행동이었다.
"그래도 전투 인력이 많아서 다행이에요. 아마 아카데미 내부에 있던 사람들이 여러 갈래로 나뉜 것 같은데… 피해가 큰 곳이 없었으면 좋겠네요."
던전은 아카데미 전체를 덮쳤을 거라고 예상되고, 멀리 떨어져 있던 사람들이 랜덤하게 모였다.
아마도 아카데미에 있던 사람들이 던전 곳곳에 떨어졌을 거다.
다행히 문수린이 있는 곳은 괜찮지만, 만약 비전투 인원만 모였다면 어떤 끔찍한 일이 벌어졌을까.
던전 한 곳에 나타난 괴수들은 인간들을 바라보며 이빨을 드러냈다.
바닥에 뚝뚝 떨어지는 침이 굉장히 위협적이었지만, 이쪽을 덮치지는 않았다.
중요한 공간이라 이호연이 보안을 신경 썼기 때문이다.
"우연히도… 익숙한 얼굴들이, 음?"
문수린의 주도로 전투 인원과 비전투 인원이 나뉘었다.
그런데 전투 인원 중 아카데미에서 본 적이 없는 인물이 있었다.
"그러니까 이 쪽 분들은…? 아카데미 관련 인물은 아닌 것 같은데, 아이린 씨는 알고 있나요? 방금 전까지 같이 있었던 거죠?"
"응. 지인이야. 걱정하지 마."
"분명히 어디서 본 기억이 있는데… 앗."
눈을 피하는 스칼렛과 릴리아나.
어색하게 웃는 남다은과 레베카를 보니 기억이 났다.
문성민을 생포했던 레스토랑.
거기서 이호연과 데이트를 나누던 여성들이다.
문수린은 그제서야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처음 뵙겠습니다. 그때는 인사를 제대로 못 드렸었죠? 호연이랑 함께 식사를 하셨던 분들."
"… 반가워요. 학생회장 님."
"마음 같아선 조금 더 대화를 나누고 싶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네요."
그나마 문수린을 아는 남다은은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를 받았다.
문수린은 다른 전투 인원들의 얼굴도 살폈다.
1학년의 유망주 루시 루미 쌍둥이와 남다은.
아이리스 길드의 엘리스와 아이린 자매.
임솔 교수과 성녀 님.
그리고 얼마나 강한지 모르는 여자 세 명과 학생회장 자신.
"신기하게도 전부 여자네요. 저는 잠시 비전투 인원들을 살펴보고 올게요. 인사라도 나누고 있으세요."
""….""
학생회장이 떠나자마자,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여자들은 아직 서로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엘리스는 옆에 있던 아이린을 보며 속삭였다.
"언니. 이제 어떡하지?"
"모르겠어. 바깥으로 연락은 당연히 안 되고… 던전 내부도 연락이 안 되는 것 같아."
"이호연 때문이라면서. 언니는 자세하게 아는 거 있어?"
"마지막 모습을 보긴 했는데… 의문이 많아."
"뭐길래 그래? 자세하게 말해봐."
가짜 던전 마법진의 존재를 아는 엘리스도 이게 이호연의 마법진이라는 걸 믿지 못했다.
그 정도로 던전은 현실감이 있었다.
아이린이 엘리스에게 이호연의 마지막 모습을 설명하던 그 때.
가만히 있던 릴리아나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 나 엄청난 걸 알아냈어."
"네? 릴리아나 씨. 혹시 던전에 대한 정보라도 있는 거예요?"
"아이리스 길드가 아이린과 엘리스라서 아이리스 길드였구나? 어쩐지 익숙하더라. 응응."
"…."
남다은은 뜬금없는 소리를 하는 릴리아나를 보며 눈을 깜박거렸다.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던전에 갇힌 것과 아이리스 길드가 무슨 상관이 있는 걸까?
혼란에 빠진 남다은을 구해준 건 스칼렛이었다.
"다은 양. 릴리아나 님의 말은 신경 쓰지 마시죠."
"아, 네. 근데 다들 왜 여기 있는 거예요?"
"… 그건 저도 묻고 싶네요."
"여기 둘은 누구야? 다은이가 아는 사람?"
레베카는 남다은의 옆에서 눈치를 보고 있는 루시와 루미에게 다가갔다.
어린 나이부터 철이 들었던 레베카였기에 저런 아이들을 보면 괜히 마음이 따뜻해진다.
"안녕하세요. 루시라고 해요."
"처, 처음 뵙겠습니다. 루미에요."
"으응. 귀여운 아이들이네. 다은이 후배야?"
"저랑 같은 동기예요. 호연이랑도 같은 나이예요."
"… 그래?"
이 두 명은 예전에 본 기억이 있다. 애기 아빠의 여자친구였지.
레베카는 이런 작은 아이들이 이호연과 동기라는 것에 잠깐 놀랐지만, 쇄골 아래에 달려있는 커다란 덩어리 두 개를 보고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키가 작다고 나이가 어리다고 생각하는 나쁜 버릇은 버리자.
"레베카 씨.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요?"
"아, 임솔 마법사님!"
레베카는 다가오는 임솔을 보며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그나마 낯을 가리지 않는 레베카가 있었기에 분위기가 조금은 풀리고 있었다.
"지금 현상에 대해 아는 정보라도 있어요? 아까 말하는 걸 들어보니 뭔가 아는 것 같던데."
불길한 마력이 몸을 감싼다.
임솔은 몸을 움찔거리며 레베카에게 말을 걸었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가짜 던전은 임솔도 속아 넘어갈 정도였다.
애초에 가짜라고 생각할 이유가 없으니 그런 것도 크지만.
"으음. 네. 어느 정도는 알고 있어요."
레베카는 임솔을 보며 잠시 고민했다.
이호연에 대해서 말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어떤 선택이 이호연에게 더 도움이 될까.
'… 애기 아빠의 마지막 모습은 분명 이상했어.'
이호연의 의도가 뭐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일이 자신의 의도와 다르게 흘러간 게 분명하다.
그 원인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자신들이 도와줘야 한다.
"사실 여기 들어오기 전에 애ㄱ, 크흠. 호연이랑 만났어요."
"저, 정말요? 무슨 일이에요. 어째서?"
"으응. 아영 씨. 잠시만. 내 어깨 좀 놔줘."
레베카는 자신에게 달려드는 백아영을 떼어낸 뒤, 말을 이어갔다.
루시와 루미도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이 쪽을 바라봤고, 임솔과 남다은도 레베카의 말에 집중했다.
"… 그럼 제자가 우리를 함정에 빠뜨렸다는 소리예요?"
"아니요. 아마 호연이의 생각과 다르게 사고가 발생한 것 같아요."
조용히 말을 듣던 남다은은 레베카를 바라봤다.
이호연의 모습을 마지막까지 봤다면, 지금도 같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럼 호연이는 어디 있는 걸까요? 레베카 씨와 함께 있었다면 같이 휘말렸을 텐데."
"모르겠어. 정확한 상황을 물어보기 위해서라도 애ㄱ, 아니. 호연이를 찾아야 해. 이곳에서 탈출하는 방법도 호연이라면 알고 있을 거야."
"레베카 씨는 호연님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나요?"
"모르지. 하지만 감이 오는 곳이 있어."
"나도 어딘지 알 것 같아."
조용히 대화를 듣던 임솔은 레베카의 말에 대답하며 마력을 끌어올렸다.
- 쿵. 쿵.
마력에 민감한 임솔은 아까부터 느끼고 있었다.
아니, 애초에 어느 정도 이상의 실력자라면 당연히 느끼고 있을 터.
일정한 간격으로 던전이 울리고 있었다.
마치 지진이라도 나는 것처럼, 마력이 진동했다.
그곳에 무언가 있는 게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