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7화 > 엎질러진 물 (5)
빅토리아 아카데미는 수업에 있어서 교수들의 자유를 보장하지만, 정기적으로 각 학과의 대표들이 이사장에게 수업계획안을 보고해야 한다.
교수진뿐만이 아니라 수업이 없는 의료팀과 경비팀 등에서도 기획안을 제출하는데, 역시 대표 한 명을 뽑아서 보고한다.
"다음 대표직은 무조건 때려치울 거야. 퇴원하자마자 이게 뭐야."
"그래도 다들 솔이를 인정해주니까 다행이야."
"이제 와서 인정하는 게 멍청한 것들이지."
마법학 교수의 대표인 임솔과 의료팀 대표인 백아영은 정기 보고를 위해 학생회실로 들어왔다.
아카데미의 교수들과는 담을 쌓고 살았던 임솔이 학과의 대표가 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이호연과의 대련 패배 때문이었다.
- 임솔 교수가 정말… 천재 마법사는 맞군요. 인정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 그 대련을 보고도 임솔 교수의 실력은 인정하지 않는 자는 마법사의 수치요!
사실 임솔은 그 전에도 실력을 몇 번이나 증명했지만, 사람은 자신의 눈앞에서 일어난 일만 믿는다.
아카데미의 대련장에서 보여준 대련은 그녀를 무시하던 교수들의 콧대를 모두 꺾어버렸다.
그리고 임솔은 지원하지도 않은 대표 투표에서 만장일치로 대표가 되어버렸다.
"출마한 적이 없는데 투표에 포함시키는 게 어디있냐구."
"으음… 사실 나도 대표를 맡겠다고 말 한 적은 없는데, 어느 순간 그렇게 되어있었어."
"이 자식들 일부러 귀찮은 걸 맡기는 거 아니야? 심지어 대련도 졌잖아."
사실 대련의 승패는 상관이 없었다.
인간이 곰에게 졌다고 해서 인간을 약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이호연의 전투력은 이미 인간이상 취급이었다.
똑똑.
임솔과 백아영은 학생 회장실의 문을 두드린 뒤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임솔 교수님. 그리고 성녀 님."
"반가워."
"좋은 아침이에요. 학생회장."
학생 회장실에 있던 문수린은 자리에서 일어나 둘을 맞이했다.
저번 정기보고까지는 이사장에게 했지만, 이사장의 건강 악화로 학생회장 문수린이 대리를 하고있었다.
"두 분 다 차라도 한 잔 드세요."
"학생회장도 고생이네. 서로 귀찮은 일을 맡아서."
"솔아. 그런 말을 학생회장 앞에서 하면 안 되지."
"뭘요. 저는 괜찮습니다."
문수린은 아무렇지않은 듯 웃었고, 백아영도 미소로 화답하며 자리에 앉았다.
공적인 자리인 만큼 예의를 차리는 것이다.
홀짝.
예의상 차를 입에 갖다 댄 뒤.
백아영은 준비한 서류를 내밀었다.
"의료팀의 정기 보고예요."
"고맙습니다. 성녀 님에게는 언제나 감사하고 있어요."
"마법학 교수들의 수업계획서도 여기다 놓을게."
"네. 고맙습니다. 임솔 교수님."
임솔은 이 자리가 굉장히 어색했다.
문수린은 이사장의 대리였으니 그만큼 예의를 차려야 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제자이기도 했다.
스승으로서 제자에게 존칭을 하는 걸 임솔은 용납할 수 없었다.
백아영이 건넨 서류를 읽은 문수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확실히 양호실은 없애도 괜찮을 것 같아요. 이제 성녀님도 아카데미에 적응하셨을 테니까요. 주먹구구식으로 만든 자리다 보니 문제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괜찮아요. 그럴 수 있죠. 그때에는 여러모로 바빴으니, 오히려 저를 위해 그런 자리를 만들어준 아카데미에 감사해요."
"맞아. 그러고 보니 제대로 된 계약이 없이 오셨던데, 계약서에 빈 곳이 많더라고요. 저희 할아버지, 아니 이사장 님이 그런 곳은 좀 약하거든요."
"아… 아무래도 그 당시 급하게 전입 와서…."
이호연에 눈이 멀어 헌터협회를 때려치우고 아카데미에 온 것이 어끄제같은데, 벌써 아카데미에 적응해버렸다.
문수린은 보험설계사가 보험 계약서를 권유하듯 자연스럽게 계약서를 내밀었다.
"그럼 이번 기회에 계약서부터 다시 작성하시죠. 기간은 어느 정도로 하면 좋을까요?"
"네? 어… 음. 그럼 2년으로 할까요."
백아영은 어느새 자신의 손에 쥐어진 계약서를 보며 눈을 깜박거렸다.
'왜 이런 흐름이 된 거지…?'
자신도 모르게 계약서를 갱신하게 된 백아영이 의문을 느끼는 동안.
문수린은 임솔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임솔 교수님은 언제나 완벽하시네요."
"고마워요. 학생회장."
"말은 편하게 하셔도 돼요. 저도 교수님 아래에서 배운 적이 있으니까요."
"… 역시 그래도 되겠지? 내 제자잖아."
임솔은 그제야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학생회장의 인품은 완벽했다.
"두 분 다 딱히 문제 되는 곳은 없는 것 같고… 아, 요즈음 아카데미의 안전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시는 교수님들이 많으셔서요. 두 분에게도 알려드릴게요."
판데믹의 테러가 늘어나며 아카데미 내부에도 불안감이 점점 증폭하고 있다.
그에 따라 아카데미의 수뇌부도 대책을 마련했다.
"기본적으로 경비 병력을 2배 이상 늘렸습니다. 당연히 보안 마법진도 추가로 설치했고, 두 분은 VIP 전용 신변 보호를 요청할 수도 있어요."
문수린은 둘에게 서류를 보여주며 필수사항을 안내했다.
물론 임솔과 백아영에게 경비나 신변 보호가 필요하진 않겠지만, 그렇다고 소개를 안 해줄 수는 없으니까.
"… 응?"
그때, 문수린이 보여준 서류를 보던 백아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
- 신변 보호 요청서 -
1. 이호연.
2. 강효린.
.
------------
'신변 보호 요청서'라는 굉장히 불안한 서류에 이호연이라는 이름이 쓰여있었기 때문이다.
"… 이건 뭘까요?"
"아. 이 서류가 왜 여기에 들어갔지? 이건 신경쓰지않으셔도 돼요."
"잠시만요. 학생회장."
깜짝 놀란 백아영은 서류에 손을 얹었다.
이호연의 이름을 본 순간 그냥 넘어갈 순 없었다.
"호연이가 신변 보호라니… 사정이 있는 건가요?"
"우리 제자가 신변 보호? 제자한테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야?"
"으음… 잠시만요."
문수린은 서류를 갈무리하며 탄식을 뱉었다.
'이게 왜 여기 섞여 들어간 거지?'
개인 정보가 들어가 있는 서류는 따로 보관해야 하는데, 일이 너무 많아서 과부하가 온 모양이다.
하필 들켜도 이 두 사람에게 들키다니.
학생회장이라는 자리에는 들어오는 정보가 굉장히 많다.
임솔과 백아영이 이호연과 깊은 관계라는 건 문수린도 당연히 알고 있다.
둘의 반응을 보아하니 그 추측이 틀리진 않은 모양이다.
문수린은 표정이 굳은 백아영과 임솔을 보며 말을 이었다.
"루시퍼라는 마인을 들어보셨나요?"
"루시퍼…?"
"최근 한국에 들어온 위험한 마인이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맞아. 나한테도 뭐가 왔었어."
루시퍼는 임솔과 백아영도 들어본 적이 있는 이름이었다.
"최근에 아카데미에서 추적팀을 구성하기도 했고, vip분들에게는 정보가 갔으니까요. 아무튼 그 루시퍼라는 마인이 호연이를 노린다는 정보가 있어서, 제가 신변 보호를 권유했습니다."
"… 정말이에요?"
"신뢰할 수 있는 정보통에게 들었습니다."
"나한테는 그런 말 없었는데…."
백아영은 세상을 잃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 채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난 듯, 번쩍 고개를 들었다.
"… 최근에 호연이가 vip가 되었다길래 무슨 연유인가 했더니, 학생 회장이 주도한 거였군요?"
"네. 맞아요. 호연이는 vip취급을 받을 만한 인재니까요."
"사견이 들어가진 않았겠죠…?"
"성녀 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 지 잘 모르겠네요…?"
"…."
임솔은 갑자기 공격적이 된 백아영을 보며 눈을 깜박거렸다.
'아영이는 제자 얘기만 하면 저렇게 변한다니까.'
사실 임솔은 이호연이 안전해지면 그걸로 좋았다.
VIP가 되어서 호연이가 안전해졌다면 학생회장에게 감사해야겠지.
적당히 백아영을 말리고 연구실로 돌아가려던 그때.
사사삭-
"… 어?"
임솔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니까 호연이한테 vip를 주고 신변 보호를 해주면서 뭘 받거나 하지는…"
"… 아니요. 제가 그런 일을 할 리가 없잖아요."
"둘 다 조용히 좀 해봐."
임솔은 미간을 찌푸린 채 마력을 끌어올렸다.
몸을 채우는 이질적인 감각. 그리고 불안함.
전투 태세로 마력을 끌어올리자 그 원인을 알 수 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마력이 이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곳이 목표는 아니야. 중심지에서 구형으로 퍼지고 있는 건가?"
"솔아, 왜 그래?"
"학생회장, 잠시 결계 좀 펼칠게."
임솔은 빠르게 마법진을 구축했다.
지금 필요한 건 강한 결계.
모든 마법에 능통한 임솔에게는 어렵지 않은 과제였다.
촤르르르륵-
순식간에 펼쳐진 두터운 결계 마법진.
임솔은 다가오는 마력을 느끼며 결계에 마력을 보강했다.
'… 막을 수 없어?'
다가오는 마력 파동은 특이한 마력 패턴을 가지고 있었다.
이호연이 사용하던 검은 기둥과 같은 마력.
이제 막 퇴원한 임솔이 대비하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다들 피해야…."
콰가가각-
아직 백아영과 문수린이 눈치채지도 못한 시점.
무형의 마력이 학생회실을 덮쳤다.
*
빅토리아 공원에 들어온 이호연은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가짜 던전 마법진이 설치된 곳으로 향했다.
풀숲을 헤쳐 길이 없는 곳으로 들어가자, 자신이 뿌려놓은 마력을 감지할 수 있었다.
"더럽게 먼 곳에 설치해놨구나."
나무 너머로 검은 기둥의 윗부분이 보인다.
운 좋게도 헌터들은 대부분 검은 기둥 주변에 있었으니, 이 부근에는 인기척이 없었다.
"여기 있었지."
지이잉-
이호연의 마력에 반응한 마법진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룬의 결계를 펼쳤으니 천천히 마법진을 둘러볼 수 있었다.
"생각해보니 둘러볼 필요도 없구나."
평소처럼 점검을 하러 온 게 아니다.
오늘은 빠르게 마법진을 회수해야 한다.
스르륵-
이호연은 빠르게 마법진을 역산하기 시작했다.
마법진을 그렸을 때 사용한 마력의 길을 역으로 따라가는 역산 과정.
이호연의 특기였지만, 가짜 던전 마법진은 워낙 큰 마법진이라 시간이 필요했다.
'… 이걸 회수하면 이제 어떻게 해야 되냐.'
가짜 던전은 하렘 엔딩을 위한 준비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이게 없어지면 생각할 게 더욱 많아진다.
'아니, 쓸데없는 생각하지말고 정신 차리자.'
챱챱.
자신의 볼을 때린 이호연은 마력을 조종하는 데에 집중했다.
뚜렷한 정신력을 의식하기 시작한 그날부터였을까.
하렘이 더 걱정되곤 한다.
징징- 스르륵-
푸른 마력의 길이 마법진을 뒤덮었다. 마법진 역산은 금방 진행되었다.
이호연이 직접 만든 마법진이라 훨씬 쉬웠다.
"이대로 가면 5분 안에… 음?"
마법진을 절반 정도 회수했을 때.
이호연은 마법진 내부에 있는 이상한 마력을 감지했다.
이호연이 아니라면 눈치채지 못했을 정도로 교묘하게 섞여있는 지옥의 마력.
자신이 그리지 않은 획이 마법진의 핵심 술식 곳곳을 지나고 있었다.
'이건….'
가짜 던전 마법진은 이호연과 레베카가 합동해서 만든 것.
마법진에 들어가는 모든 지옥의 마력은 이호연이 직접 새겨넣은 것이다.
몇 번이나 점검하는 동안 핵심 술식을 수없이 확인했다.
자신이 모르는 획이 이제서야 발견될 리는 없다.
즉, 최근에 누군가가 마법진을 건드린 흔적이었다.
"이런 씨발."
촤악- 빠드드드득-
이상함을 감지하자마자 마법진을 뒤틀었다.
이호연이었기에 할 수 있는 즉각대처.
하지만, 가짜 던전 마법진은 이미 그의 의지를 벗어난 뒤 빛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