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6화 > 엎질러진 물 (4)
엘리스에게 시간은 금이나 마찬가지다.
그녀는 아침 일찍 일어나 잠들 때까지 쉬지 않고 움직인다.
이호연을 만나는 날에는 수면시간까지 줄여야 했으니, 그녀가 얼마나 바쁘게 사는지 알 수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집에 있었을 텐데.'
부지런한 엘리스였으니 쓸데없는 강의 시간이 아까운 건 당연했다.
1학년 생도에게 초청 강의는 필수 참여라지만 엘리스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와봤는데, 설마 아카데미 졸업 후 취업 고민에 대한 강의일 줄이야.
두 시간이 넘는 강의였지만, 엘리스에게 도움이 되는 내용은 단 하나도 없었다.
그렇다고 졸거나 스마트워치를 하는 건 품위 없는 행동이었으니 엘리스는 강의를 듣는 척하며 다른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호연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자리에서 일어난 엘리스는 강의 내내 자신의 머리를 채운 고민을 이어갔다.
얼마 전, 이호연의 동거녀들과 많은 대화를 나눴다.
엘리스도 이호연에게 무언가 있다는 사실은 당연히 알고 있었지만, 확실히 여러 사람이 모이니 혼자서 생각하는 것보다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같이 사는 여자들한테도 들키지 않은 걸 보면 잘 숨기고 있는 것 같긴 하네.'
들어보면 동거라고 해도 24시간 같이 붙어있는 건 아니라지만, 그래도 같이 사는 사람들에게 까지 비밀이 그렇게 많을 줄이야.
'죄가 많은데 비밀도 많은 남자.'
엄청난 정력의 반만큼이라도 양심이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엘리스는 부질없는 생각을 멈추고 강의실 앞자리에 잠시 앉았다.
"머리는 또 왜 이러는 거야. 잘라버릴까 정말."
쓸데없는 것 같아서 사지 않은 마법 머리핀이라도 써야 하는 걸까.
등받이에 오래 앉아있다 보니 머리가 헝클어졌다.
엘리스는 팔을 올려 자신의 금발을 다시 묶기 시작했다.
미래의 길드장으로서 카리스마를 위해 장발로 머리를 기르고 있지만, 가끔은 단발을 하고 싶어 진다.
관리가 편하기도 하고, 전투에 방해도 되지 않는다.
그래.
저기 보이는 저 쌍둥이처럼….
"응?"
엘리스는 텅 빈 강의실에서 멀뚱멀뚱 이 쪽을 바라보는 루시와 루미 쌍둥이를 발견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하는 거지?'
이 쪽을 보며 흠칫흠칫 하는 걸 보니 자신에게 용무가 있어 보였다.
루시와 루미.
둘은 엘리스도 요즘 눈여겨보고 있다
이호연의 여자라는 점뿐만이 아니다.
천 발이 넘는 불화살을 소환하는 루시의 공격성과 이호연의 공격도 막을 수 있을 거라고 평가받는 루시의 방어력.
입학 때에 비해 실력이 일취월장한 둘은 같이 붙었을 때 전투력이 극대화된다.
물론 둘이 한 명을 상대해야 하는 것 자체가 부족한 점이 있다는 뜻이지만,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둘이 팀을 이룬다면 그 가치는 더욱 높아지겠지.
'그래서 영입 제의를 해볼까도 했는데.'
아이리스 길드에 들어올만한 능력은 이미 충족했다.
문제는 저 둘이 이호연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
남다은에게 러브콜을 했을 때 거절당한 것처럼, 루시와 루미에게도 거절당할 것 같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상식적으로 이호연과 만나고 있는 엘리스를 상사로 두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총총.
엘리스를 보며 흠칫거리던 둘은 무언가 결심이라도 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할 말이라도 있나 보네.'
표정만 봐서는 싸움이라도 하려는 것 같지만, 저 둘이 자신에게 싸움을 거는 광경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엘리스는 머리를 묶으며 다가오는 루시와 루미를 바라봤다.
"저, 저기…. 이거 내 건데."
"아."
엘리스는 그제서야 자신의 옆에 있던 클러치백을 확인했다.
혼자 이상한 상상을 했다고 생각하니 괜히 창피했지만, 티내지않으며 말했다.
"응. 가져가. 있는 줄 몰랐네."
"고마워."
"감사합니다."
고개를 꾸벅 숙인 쌍둥이는 클러치백만 챙기고 강의실을 나가려 했다.
역시 자신에게는 아무 용무도 없는 모양.
쌍둥이의 뒷모습을 보던 엘리스는 문득 생각했다.
'저 둘에게도 내가 모르는 정보가 더 있을 것 같은데.'
레베카, 남다은, 릴리아나, 아이린 그리고 스칼렛까지.
모두 자신이 모르는 정보를 알고 있었다.
엘리스가 이호연의 일거수일투족을 쫒을 수 없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면 루시와 루미도 좋은 정보가 있지 않을까?
"얘들아. 잠시 물어볼 게 있는데, 시간 괜찮을까?"
"응?"
루시와 루미는 갑작스러운 부름에 엘리스를 돌아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다리를 꼰 채 벼와 겨드랑이가 드러나는 야한 옷을 입은 엘리스는 루시와 루미에게 부담스러운 상대였다.
"너희도 이호연하고 자주 만나잖아? 혹시 요즘 뭔가 이상한 점을 느낀 적 없어?"
엘리스는 꽤나 차분하게 질문을 던졌다.
큰 의미는 없었다.
나중에 신뢰를 쌓은다면 모를까.
이호연과 관계를 가지는 여자라고 해도 엘리스는 루시와 루미를 아직 신뢰할 수 없었다.
그러니 구구절절 사정을 설명하지 않았다.
도움이 되는 걸 말해주면 좋고, 아니면 말고.
한 번 던져보는 정도였다.
"정보라니…?"
"호연 씨의 어떤 걸 말하는 거예요?"
"음, 그냥 너희랑 만나면서 했던 이상한 행동 같은 거? 뭐든 괜찮으니까 알려주면 좋겠네. 아무것도 없으면 그냥 가도 괜찮아."
루시와 루미는 서로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엘리스의 생각과 남들이 보는 엘리스는 엄청나게 달랐다.
카리스마 있는 사람은 가만히 있어도 남들이 무서워하는 것 처럼.
다리를 꼰 채 고고한 태도로 무표정하게 이 쪽을 바라보는 엘리스는, 충분히 적대적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부담스러운 상대라도 엘리스는 이호연과 가까운 여자 중 한 명이다.
약하게 행동할 순 없었다.
마음을 강하게 먹은 루시는 언니로서 루미의 손을 꼬옥 잡았다.
안 그래도 평소 이호연의 주변에 여자들이 많은 게 짜증 났던 쌍둥이었기에, 둘은 엘리스와 거리를 벌리며 입을 열었다.
"… 경쟁자에게 말해줄 정보는 없어!"
"마, 맞아요."
"…?"
기대했던 것과 전혀 다른 대답을 들은 엘리스는 눈을 찌푸렸다.
갑자기 저게 무슨 소리지?
아무래도 그녀들은 큰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루시, 루미. 나는 너희를 경쟁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싸우고 싶지도 않고, 그냥 정보가 필요해서 그래."
이미 동거녀 4명을 본 순간, 엘리스는 반 정도 포기했다.
그의 저주에 대한 비밀을 풀기 전까지는 경쟁 같은 걸 할 시간이 없다.
- 너희를 경쟁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 너희와 나는 경쟁할 레벨이 아니다.
- 싸우고 싶지도 않고, > 경쟁도 안되는데 싸움이라니?
- 그냥 정보가 필요해서 그래. > 그러니까 정보만 내놓고 꺼져.
아쉽게도 루시와 루미는 또 한 번 엘리스의 말을 다르게 받아들였다.
"… 너무해. 우리를 얼마나 무시하는 거야."
"루, 루시. 화내지 마…."
루시와 루미는 울상을 지은 채 속닥거렸다.
그 모습을 본 엘리스는 일이 이상해진다는 걸 느끼고, 곧바로 해명을 했다.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나는 너희랑 다툴 생각이 없어. 정보가 없다면 그냥 돌아갈게."
"호연 씨를 제일 좋아하는 건 우리 둘이야!"
"마, 맞아요. 무시하지 말아 주세요…."
루시와 루미는 언제나 진지했다.
남다은처럼 루시와 루미를 잘 포용해주는 성격이라면 괜찮겠지만, 엘리스 같은 사람과는 잘 통하지 않았다.
"음…."
엘리스는 이호연이 걸린 저주를 알고 있다.
저 둘의 순수한 마음은 알겠지만, 지금은 경쟁자니 뭐니 할 때가 아니다.
중요한 건 누가 이호연을 좋아하는지 따위가 아니라 그 미친 바람둥이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 아는 것이다.
살짝 화가 올라온 엘리스는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다스렸다.
'…… 여기서 화를 내면 같은 수준밖에 안 되는 거야.'
다르게 생각해보면, 루시와 루미 쌍둥이는 아직 자신에 비해 정보가 많이 부족하다는 뜻.
그런 둘이 제대로 된 정보가 있을 리가 없다.
엘리스의 마음을 모르는 루시와 루미는 수상한 눈빛을 보내며 엘리스를 바라봤다.
"근데 이호연의 정보를 왜 우리한테 얻으려고 하는 거야?"
"엘리스 양은 아이리스 길드가 있는데…."
"… 아니야. 시간을 빼앗아서 미안. 나는 가볼게."
엘리스는 대화를 멈추기로 했다.
그녀는 이런 시간낭비를 원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루시와 루미는 자리에서 일어난 엘리스를 보며 땍땍거리기 시작했다.
"비겁하게 이호연을 빼앗으려 하다니."
"야한 옷을 입어서 꼬시려고…."
"이호연이 우리랑 같이 있는 걸 얼마나 좋아하는데!"
"맞아요. 섹스도 저희 둘이 제일 좋다고 했어요."
"루, 루미. 그런 건 말하면 안 되지!"
"흡…!"
엘리스는 서로의 입을 막는 쌍둥이를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대체 자신이 왜 저런 말을 들어야 하는 것일까.
'근데 쌍둥이랑도 하긴 하는구나.'
듣을 필요가 없는 정보지만, 들어버렸으니 자연스럽게 생각이 이어진다.
섹스가 문제는 아니다.
둘의 외모가 동안이긴 해도 서류상으로는 성인이다.
자신이 뭐라고 왈가왈부할 영역은 아니다.
문제는 그 뒤에 오는 저희 둘이 제일 좋다는 말.
'둘이 제일 기분 좋다는 건… 항상 셋이 한다는 거야?'
… 그게 말이 되는 건가?
쌍둥이라면 서로의 몸을 보는 게 거부감이 없나?
아니, 그전에 물리적인 문제가 있다.
저 작은 체구에 이호연의 자지가 다 들어간다고?
'… 그건 조금 궁금하네.'
엘리스는 이호연과 몸을 섞기 전에 먼저 봤던 비디오들을 떠올렸다.
한때 그의 섹스비디오를 훔쳐서 본 적이 있었다.
이호연을 만난 후에는 거의 본 적이 없는데, 그걸 보며 자위했을 때는 엄청 기분 좋았었지.
… 다음에 부탁해볼까.
"도망치는 걸 보니 우리가 이겼어 루미."
"으응. 승리! 다은 양한테도 자랑하고 싶어."
루시와 루미는 진심으로 기뻐하며 손뼉을 쳤다.
남다은은 친절하니까 봐주지만, 다른 여자들에게는 피도 눈물도 없게 대할 생각이었다.
"…… 너희들 진짜 이상해."
둘이 하이파이브를 하며 기뻐하는 걸 본 엘리스는 화를 참지 못하고 미간을 좁혔다.
방금 화내지 않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싸우려고 온 게 아니라고 말을 했는데도 계속 시비를 걸어대니 참기가 힘들었다.
게다가 침대 위에서의 얘기를 꺼낸 순간, 여자친구로서 그냥 넘어갈 수 없다.
이호연은 분명 자신과 있을 때 제일 기분 좋을 테니까.
*
"차, 창피하네…."
남다은은 얼굴을 붉힌 채 강의실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그녀는 카페에 가본 적이 몇 번 없었다.
이호연과 같이 가거나, 집에 사는 여자들과 같이 간 게 끝.
이호연과 갈 때는 항상 이호연이 결제를 했고, 레베카나 스칼렛이 있을 때는 그 둘이 결제를 해줬다.
"카페도 당연히 선불일 텐데… 왜 그 생각을 못했지?"
가서 쉬고 있으라는 루미의 말에 아무 생각 없이 카페에 들어가 앉아있던 자신이 떠올라 뒤늦게 창피함이 몰려온다.
"아직도 안 오는 걸 보면 클러치 백을 찾고 있는 것 같은데… 나도 도와야지."
그녀의 공간 장악이라면 의자 사이에 들어간 물건도 찾아낼 수 있다.
쌍둥이를 도와줄 생각으로 강의실 문을 연 남다은은, 서로를 마주 본 채 따박따박 말싸움을 하고 있는 셋을 발견했다.
"우리는 둘이야! 하나보다 둘이 좋은 게 당연하잖아. 이 바보."
"… 나도 무리하면 두 명이 될 수 있거든? 안 하는 것뿐이야."
"이상한 소리 하지 마세요…! 엘리스 양한테 쌍둥이는 없잖아요."
"무리하면 된다니까…. 아니, 애초에 나 혼자로도 감당할 수 있어!"
강의실에 들어온 남다은은 엘리스와 루시 루미 쌍둥이를 보며 눈을 깜박거렸다.
'다들 뭐 하는 거지?'
클러치백은 찾은 걸까.
남다은은 천천히 셋에게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