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5화 > 엎질러진 물 (3)
"흠흠. 좋은 하루의 시작이야."
아이린은 모닝커피를 마시며 늦은 하루를 시작했다.
본래 아이리스 길드의 1 팀장 시절에는 이런 늦잠은 상상도 해본 적 없지만, 한국에서 지내는 동안에는 할 일이 없으니 여유로운 아침을 시작할 수 있었다.
"오늘은 엘리스가 일찍 나갔으니까… 오랜만에 컬렉션을 구경할까?"
오늘은 아카데미에 초청 강의가 있는 날.
같이 아침을 먹지는 못했지만, 엘리스의 사복 차림을 본 것만으로도 만족이었다.
아이린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침대 밑에 봉인해놓은 상자를 꺼냈다.
보안을 건 장본인인 아이린의 마력으로도 여는 데에 30분 이상 걸리는 엄중한 보안.
끼이익. 콩.
몇십 분이나 걸려 간신히 연 보관함 안에는 소위 말하는 잡동사니들이 들어있었다.
오래된 물통. 리코더. 십 년 전 교과서. 구형 핸드폰까지.
모두 과거의 엘리스가 사용하던 물건이다.
"이건 엘리스가 3살 때 사용하던 물통이고, 이건 7살 때 처음 산 리코더…."
아이린은 팔짱을 낀 채 고민을 이어갔다.
상자를 열 때마다 자신의 보물상자에 넣을 다음 컬렉션을 무엇으로 정해야 할까 고민이 매우 많았다.
'아카데미에서 사용하던 검 정도면 좋을 것 같은데….'
다른 사람이 보면 미친 사람 취급을 할 수도 있는 행동이지만, 아이린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신과 엘리스.
이 둘의 행적은 하나하나 역사에 남겨야만 한다.
할 사람이 없으니 직접 할 뿐.
아이린은 엘리스의 모든 걸 사랑하며 공유하고 싶었다.
'… 이제 이호연도 여기 넣어야 하나?'
아이린의 컬렉션에는 본래 자신과 엘리스만이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요즈음 아이린은 이호연의 미모도 인정하고 있었다.
인정하기 싫어도 자주 보고 접하다 보면 눈에 띄는 건 사실이니까.
… 물론 이호연과 나눈 뜨거운 밤이 큰 요인이었다는 것도 부정하지 않았다
"일단은 다시 넣어놓자."
엘리스가 없을 때마다 상자를 열지만, 혹시나 컬렉션이 상할까 봐 손으로 건들진 못했다.
아이린은 보물상자를 다시 봉인한 뒤 침대 아래에 고이 모셔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띠디디딕- 띠디디딕-
"응?"
그때, 아이린은 스마트워치에서 울리는 긴급 신호를 확인했다.
"한국 지부장이 보내는 3번 신호면… 이호연이잖아?"
아이리스 길드는 현재 빅토리아 공원을 조사 중이었다.
당연히 아이린도 갈 계획이었지만, 더 이상 인력이 오는 건 인력낭비라며 강효린에게 거절당했다.
'이래서 나도 가야 했는데…!'
공원에 이호연이 오면 보고하라는 말을 몇 번이고 당부하며 부탁했다.
강효린이 장난스러운 표정을 하길래 진지하다고 반복해서 말한 게 다행이었다.
곧바로 옷을 입고 나가려던 아이린은 문득 생각했다.
'다들 부르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아이린은 예전부터 빅토리아 공원을 의심하고 있었다.
이곳에 분명 중요한 무언가가 있다.
이호연이 자주 들락거리는 것도 그렇고, 루시퍼와 마인들이 습격한 점도 그렇다.
빅토리아 공원에 아직 발견하지 못한 비밀이 있다고 확신했다.
"이번엔 진짜 무언가 있어…. 일단은 다들 불러야겠다."
아이린은 스마트워치를 급하게 두드리며 이호연의 여자들을 소집했다.
*
엘리스의 집 앞.
뜨거운 햇살이 두 여자에게 내리쬐었다.
"더워. 짜증 나."
"조금만 참으세요. 릴리아나 님."
"스카웃. 우리가 개도 아니고 부를 때마다 이렇게 와줘야 해? 그리고 나는 왜 부르는 거야. 저번에는 안 불러놓고서."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일단은 가보시죠."
스칼렛은 툴툴거리는 릴리아나를 감싸며 엘리스의 집으로 들어갔다.
평온한 낮 시간을 즐기던 스칼렛과 릴리아나는 아이린의 호출에 급하게 집에서 나왔다.
휴식 시간을 방해받은 릴리아나는 볼을 부풀린 채 집으로 들어갔다.
"왔구나! 빨리 이 쪽으로 들어와 봐."
집에 들어가자마자, 현관에서 기다리던 아이린과 마주했다.
아이린의 안내로 거실로 간 릴리아나와 스칼렛은 테이블에서 조신한 자세로 차를 마시는 붉은 머리의 미녀를 발견했다.
"다들 왔구나?"
"레베카 님은 왜 여기 계신 겁니까. 오늘 급한 일이 있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나도 바깥에 있다가 급하게 들어왔어. 아이린이 급한 일이라고 하던데?"
"나는 졸린데… 아이린, 우리는 차 없어?"
"그럴 시간이 어딨어. 릴리아나 너도 여기 앉아."
이호연의 집에 사는 여자들이 전부 모였다.
남다은과 엘리스가 없긴 하지만, 지금 아카데미에는 초청 강의가 열리고 있으니 어쩔 수 없었다.
아이린은 테이블에 앉은 여자들을 보며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이호연이 빅토리아 공원에 들어갔다는 보고를 받았어. 다 같이 빅토리아 공원으로 가보자."
"… 지금 말입니까?"
"응. 지금 당장."
아이린의 말을 들은 스칼렛은 눈을 끔벅거렸다.
사람을 불러놓고 전후설명 없이 저러면 어떻게 대답해야할까.
"단순히 애기 아빠가 빅토리아 공원에 갔다는 게 끝이야? 지금은 애기 아빠가 어디를 가든 의심해야 하는데, 모든 곳을 따라갈 순 없잖아. 확실한 증거는 있는거야?"
"빅토리아 공원은 달라. 예전부터 내가 주시하고 있었거든."
"그럼 증거도 있겠네요. 그런데 아이리스 길드의 조사에서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 거 아니었나요?"
"그렇긴 한데… 음? 스칼렛 네가 어떻게 아이리스의 정보를 아는 거야?"
스칼렛의 말실수를 눈치챈 레베카가 곧바로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이린.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애기 아빠의 일거수일투족을 전부 따라다녔다가는 무조건 들킬 거야."
"나도 알고 있어. 하지만 이번엔 분명 뭔가 나올 거야."
"그렇게 확신하는 이유가 뭔데?"
"여자의 감."
"…."
스칼렛은 아이린의 말을 듣고 눈을 끔벅거렸고 릴리아나는 레베카의 차를 슬쩍 훔쳐서 홀짝거렸다.
"홀짝. 으음. 아이린. 그냥 쉬는 건 어때? 이 차도 맛있는데 티타임이나 가지자."
"그러지말고 믿고 한 번만 가자. 나 혼자 가려다가 너희들이 생각나서 부른거야. 분명 나중에 후회할걸?"
아이린은 별 거 아니겠지라는 이호연의 생각과 다르게, 빅토리아 공원 출입을 엄청나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아이리스 길드에서 실전을 반복하며 쌓아올린 그녀의 감각이 수상하다고 외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으음. 나도 애기 아빠가 그 공원에 자주 가는 게 수상하긴 했는데."
레베카는 아이린의 말에 힘을 실어줬다.
사실 아이린이 저렇게 까지 말하면 한 번 정도는 해주고 싶었다.
증거가 없더라도 빅토리아 공원이 찝찝한 건 사실이니까.
"뭐… 그렇게 까지 말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잠깐 공원에 들르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니까요. 대신 들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텐데요."
"들키면 그냥 순찰이라고 우기면 되지. 일단 가보자."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요…."
조금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스칼렛은 아이린의 뒤를 따랐다.
자신만만한 모습을 보니 무언가 있는 것 같긴 했다.
"아이린 님. 그러고 보니 엘리스 양은 안계시는군요?"
"엘리스는 아카데미에 있지. 오늘은 우리끼리만 가는 거야."
"알겠습니다. 가시죠."
"귀찮다니까…."
"그러지말고 힘내봐. 릴리아나."
아이린과 스칼렛은 앞장서서 집 밖으로 나왔고, 그 뒤를 릴리아나와 레베카가 천천히 따라갔다.
*
잠시 후.
빅토리아 아카데미의 강의실 복도.
초청 강의가 끝나자마자 분주하게 사라지는 생도들 사이로 귀여운 쌍둥이와 남다은이 총총 걸어갔다.
어디에 있든 이목을 끄는 미녀가 셋 이나 같이 있었으니, 생도들이 힐끔거리는 건 당연한 일.
하지만 셋은 그런 시선에 익숙한 듯 걸어갔다.
"하으… 힘들어. 강사님 수업이 진짜 너무 길지 않아? 정규 수업이 아니라 자는 사람도 많더라."
"고생했어. 루시. 시원한 곳에 쉬러 가자."
"웅. 나한테 빅토리아 카페 쿠폰이 있으니까 점심시간은 쉬자. 다은이 너도 같이 갈래?"
"나도 가도 괜찮아?"
"당연하지."
셋은 강의실에서 나와 바깥으로 걷기 시작했다.
오늘은 아카데미의 초청 강의가 있던 날.
편한 복장이라 생도복을 입지 않은 건 좋았지만, 오랜 시간 앉아있기는 너무 피곤했다.
긴 강의에 몸이 찌뿌둥해진 루시는 기지개를 켜며 앞장서서 걸어갔다.
"다은아. 우리 앞에 있던 사람 얼굴 봤어? 졸려서 계속 고개 꾸벅거리던데."
"나는 강의가 재밌었어."
"다은 양은 집중력이 좋으니까요."
남다은은 다행히도 웬만한 일에는 지루함을 느끼지 않았다.
"이래서 우등생이… 응?"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던 루시는 지갑을 찾기 위해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지갑에 꼽아놓은 빅토리아 카페 쿠폰을 찾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상하게 손에 잡히는 게 없었다.
"엥? 앗. 큰일이야."
"왜 그래 루시?"
"지갑이 없어졌어…. 으, 어디지?"
루시는 눈을 찌푸린 채 주머니를 뒤졌다.
천천히 기억을 되짚어봤지만, 마지막으로 지갑을 꺼낸 게 언제인지 기억이 안 났다.
"지갑에 쿠폰이 들어있는데… 집에 두고 왔었나?"
"루시. 오늘 핑크색 클러치 백을 들고 오지 않았어? 루미랑 같이 샀다고 했잖아."
"… 아. 맞아. 강의실이다."
남다은은 강의실에서 봤던 것을 떠올렸고, 남다은의 말을 들은 루시도 뒤늦게 새로 산 클러치백의 존재를 떠올렸다.
귀여운 핑크색 클러치백이라 기분이 좋았는데, 설마 하루 만에 잃어버릴 줄이야.
"잠시 자는 동안 놓고 일어났나봐…. 흑."
"… 루시도 잤구나."
"누가 가져가진 않았겠지…? 우리가 맨 앞자리였잖아."
"빨리 돌아가 보자. 아, 다은 양은 먼저 카페에 가서 쉬고 계세요?"
"음. 알겠어."
남다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카페에서 쉬려면 당연히 쿠폰이 필요했지만, 그녀는 별 생각없이 카페로 걸어갔다.
온 길을 되짚으며 강의실로 향한 루시와 루미는 텅 빈 강의실의 문을 열었다.
강의가 끝났으니 남은 생도는 거의 없었는데, 루시와 루미의 자리는 맨 앞이었으니 곧바로 찾을 수 있었다.
"우리가 앉았던 자리가… 아, 루시. 저거 아니야?"
"앗. 진짜 저기 있네. 다행이다… 근데 옆에 사람이 있어."
루시와 루미는 강의실에서 앉았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여성을 발견했다.
오늘 온 생도들 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던 옷을 입은 금발의 여성.
옆에 놓여있는 날카로운 검은 멀리서도 그녀가 누구인 지 알 수 있게 했다.
"… 엘리스가 왜 우리 자리에 있지? 저건 내 클러치백이잖아."
"호, 혹시 도둑질?"
"엘리스가 그럴 것 같진 않은데… 일단 가보자."
루시와 루미는 어깨를 움츠리며 조심스럽게 엘리스에게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