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 야겜에 빙의했다-524화 (524/648)

< 524화 > 엎질러진 물 (2)

따분함.

그 감정에 익숙해지는 건 좋은 일이 아니다.

어떤 일을 하더라도 열정이 사라지고, 육체적/정신적 피로가 심해진다.

따분함을 벗어나기 위한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다.

그것이 자신의 직업이라면 번아웃을 벗어나기 위해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하고, 학업이라면 미래를 위해 노력할 의지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이 이 세상 전체에 느끼는 따분함이라면 어떨까.

자신과 견줄 수 있는 자가 없어서 느끼는 따분함을 범인(凡人)은 전혀 이해할 수 없다.

어떤 생명체든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바가 있다.

루시퍼는 태어났을 때부터 그것이 꽤나 달랐다.

남들이 즐기는 오락에서 재미를 찾지 못했다.

단란한 가정이나 사랑하는 연인을 원하지않았다.

그가 흥미를 느끼는 것은 자신보다 강한 강자.

그리고 자신이 알지 못하는 새로운 것.

루시퍼는 자신의 힘을 자각하고 나서 매일같이 따분함을 느꼈다.

모든 걸 꿰뚫는 마안과 타고난 강인한 육체.

육체파인데도 압도적인 마력의 적응도까지.

전투를 위해 태어난 루시퍼라는 생명체가 지옥의 최강자가 되는 건 당연한 결과였다.

지옥에서 자신보다 강한 자는 없었다.

혈육인 마왕의 자리는 이미 자신의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마왕의 마력을 얻는다면 루시퍼는 지옥의 모든 생명체 위에 군림하게 된다.

그렇기에 루시퍼가 따분함을 벗어나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얼마 전까지도 벗어나지 못했다.

완벽한 줄 알았던 마안이 통하지않는 것들.

그것이 루시퍼의 새로운 흥미요소였다.

마왕성에 생긴 미지의 마력.

그것은 그의 인생 처음으로 마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였다.

하지만 그것을 깊게 파고들 수는 없었는데, 마왕성의 마력을 이용한 봉인은 루시퍼도 뚫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재미있어. 신선하면서도 흥미로워."

루시퍼의 마안은 모든 걸 꿰뚫는다.

설마 그 대전제를 부숴버리는 첫 생명체가 지옥도 아니고 인간 세상에 있을 줄이야.

스륵- . 스르륵-.

루시퍼는 마인들이 구해온 이호연에 대한 신상정보를 확인하며 미소를 지었다.

천애 고아면서 가진 능력은 인간 중에서도 최상위.

특히 그의 마력은 루시퍼도 감탄할 정도였다.

"출신에 있어서 특이한 점은 하나도 없군. 그렇다면 순수한 인간이라는 건데…. 가끔씩 나오는 돌연변이인가?"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

적을 파악하는 것이 가장 쉽게 승리하는 길이다.

지옥에서는 그런 귀찮은 일을 할 필요가 없었지만, 미지의 상대라면 대비하는 게 당연한 일.

부끄럽거나 자존심이 상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일련의 조사과정에서도 흥미를 느꼈다.

"마에스트로. 그놈은 분명 어딘가 이상한 인간이었다. 하지만 이호연은 특출난 곳이 없군."

마에스트로.

자신을 인간 세상으로 부른 인간이다.

그를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속마음과 행동이 다른 빈 껍데기 같은 인간.

마왕을 소환하기 위해 모든 걸 바친 인간이다.

인간 세상을 어느정도 파악하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마에스트로가 하는 행동은 하나하나가 이질적이다.

그의 말투부터 행동, 마음가짐까지.

루시퍼도 그를 이해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인간처럼 무시하지도 않았다.

그도 자신의 마안을 일부 막아내는 변칙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세계의 검은 기둥과 던전의 폭주 현상도 밝혀내야 한다.'

루시퍼가 지옥에 있던 때.

마왕이 된다면 먼저 인간 세상 침략을 추진할 계획이었다.

지옥에서 더 이상 얻을 게 없으니, 다른 차원을 공략하고 싶었다.

당연히 차원을 잇는 연구도 멈추지 않았고, 루시퍼는 마력에도 재능이 있었기에 연구는 순탄하게 진행되었다.

그런데 인간 세상에서 본 검은 기둥과 던전의 폭주 현상은 루시퍼가 하던 연구를 비웃는 듯, 압도적인 성능을 보여줬다.

폭주하는 던전은 점점 지옥과 일체화하고 있다.

몇몇 던전은 이제 지옥이나 마찬가지.

당장 마수가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곳곳에 있는 검은 기둥은 인간 세상에 지옥의 마력을 퍼트리며 지옥과 비슷한 환경을 만든다.

처음에는 경계하던 인간들도 자신들에게 당장 해가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뒤로는 점점 경계가 옅어지고 있다.

아니, 그것 또한 이 현상을 만들어낸 자의 의도일지도 모른다.

"이런 일을 해내는 존재가 신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검은 기둥에서 뿜어 나오는 지옥의 마력.

그리고 지옥과 인간 세상을 직접 연결하는 던전.

그 두 가지 현상 덕분에 지옥의 동화 현상은 점점 빨라지고 있다.

'곧 마에스트로가 말하던 마왕이 소환되는 건가.'

마왕이 강림한다는 이야기를 할 때마다 자신을 바라보는 마에스트로의 눈이 떠오른다.

마치 자신을 탐내는 것 같은 그 눈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마왕을 소환한다면… 오랜만에 익숙한 얼굴을 볼 수 있겠군.'

갑작스럽게 마왕성에서 은둔에 들어간 자신의 아버지.

마왕을 본다고 생각하니 냉혈한인 루시퍼도 기대가… 되지는 않았다.

'굳이 마왕을 소환하고 싶지는 않다.'

루시퍼가 마왕이 되고 싶었던 이유는 따분한 지옥이 재미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지옥에서 얻지 못한 것은 마왕의 자리 뿐.

그렇기에 마왕을 탐냈던 것이다.

인간 세상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흥미로운 것을 찾기 위해서였다.

지금 자신은 인간 세상에 있고, 이제 따분한 지옥에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

이곳은 아직 자신이 모르는 흥미로운 것들이 많다.

인간의 성장은 놀라울 정도라, 강한 인간들이 튀어나와 자신을 위협할 지도 모른다.

루시퍼는 그것이 너무나 기대되었다.

마에스트로가 말하기를, 인간이라는 종을 세상에서 없애야 한다고했다.

만약 인간 세상이 멸망해 지옥의 식민지가 된다면 루시퍼는 다시 따분한 지옥으로 돌아가야 한다.

"다시 지옥의 마수들과 지내야 한다면 여기서 죽는 게 낫겠군."

재미없는 지옥의 마수들에게는 관심이 없다.

루시퍼는 손에 들려있던 이호연의 정보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해야 할 일은 이호연의 생포.'

루시퍼는 적에게 자비를 두는 편이 아니지만, 그는 인간 세상에서 가장 흥미로운 존재다.

게다가 마안을 가장 잘 막아내는 그에게서 조사할 것이 매우 많다.

'그 다음은 마에스트로다.'

그는 분명히 자신에게 숨기고 있는 것이 많다.

뒤통수를 맞는다고 질 것 같진 않지만, 인간에게 배신당하는 기분나쁜 경험을 하고싶진 않다.

"마에스트로는 아직 쓸 곳이 많으니… 먼저 이호연이다."

스르륵-

루시퍼는 손 위로 지옥의 마력을 떠올려 마법진 하나를 그렸다.

빅토리아 공원에서 확인한 이호연의 마법진을 간소화한 것이다.

"인간이 이런 마법진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은 정말로 축복이군."

루시퍼는 처음 마법진을 확인한 이후로 매일같이 공원에 가서 마법진을 체크했다.

처음 이틀은 단순히 마법진을 관측했다.

루시퍼의 마안은 상대에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 관측할 뿐.

그렇기에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마법진의 수준이 상상 이상이었기 때문에 시간이 생각보다 길게 필요했다.

그리고 오늘.

이호연의 마법진의 분석이 끝나고, 그의 마법진을 장악하는 데에 성공했다.

본래 루시퍼의 성격이라면 공원을 차지하는 거슬리는 인간들을 모두 죽여버렸겠지만 오늘은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지금까지 흔적을 남기지 않았는데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에 일을 망가뜨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 정도로 루시퍼는 이호연에게 집착하고 있었다.

"마법진을 작동하는 순간만을 기다려야겠군."

그의 염원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루시퍼는 턱시도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며 입꼬리를 올렸다.

*

빅토리아 공원을 지키던 강효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와준다면 고맙긴하지만, 지금은 인력 낭비라고 생각했다.

"호연 생도가 도와줄 필요가 있을까? 이미 충분히 많은 사람들이 있어서 괜찮을 것 같은데."

"음…. 그런가요."

이호연은 강효린 박사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사실 굳이 허락을 받을 필요가 없긴 하다.

빅토리아 공원이라면 몰래 들어가도 웬만하면 안 걸릴 자신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또 아니거든.'

이 세상이 자신의 마음대로 흘러갔다면 쓸데없이 머리아플 일도 없었겠지.

가짜 던전 마법진을 수습하는 건 꽤나 시간이 걸린다.

만약 그동안 발각되기라도 하면, 굉장히 일이 귀찮아진다.

'차라리 허락을 받았다면 변명이라도 가능하지.'

게다가 허락을 받는 순간부터는 마음 편하게 작업할 수 있다.

이호연이 빅토리아 공원에 자주 들어오는 건 아이리스 길드원들이 전부 알고 있으니, 자신이 구석에서 뭘 하든 신경쓰지않을거다.

천재 마법사의 마법 연구라는 무적의 변명이 있으니까.

'물론 불안한 감이 있긴해.'

조금 신경 쓰이는 건 아이린에게 아이리스 길드의 연락망이 있다는 것.

다른 여자들이 내 움직임을 신경 쓸 수도 있다.

'… 괜찮지 않을까?'

이호연은 금방 생각을 정리했다.

잠시 고민을 해봤지만 빅토리아 공원에 들어오는 것만으로 의심당할 것 같진 않았다.

애초에 지금은 어디를 가든 의심받게 되어 있다.

쓸데없는 생각을 할 시간에 빠르게 움직여 마법진을 회수해야한다.

"호연 생도?"

이호연은 눈을 깜박거리는 강효린 박사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사실 강효린 박사에게 인사를 건넨 순간 이미 늦었다.

이호연에게는 허락을 받는다는 선택지만 남아있다.

"큰 도움은 아니더라도 도와드리고 싶어요. 그날 있었던 전투를 복기도 좀 해보고 싶고요. 혹시 그 날 구했던 길드원들도 안에 있나요?"

"아아… 그렇게 말하면 거절할 수가 없네요. 호연 생도가 길드원들을 많이 구해줬으니까요. 대부분 아직 병원신세지만, 몸이 괜찮아진 사람 몇 명은 공원 안에 있으니 가서 인사라도 해요. 다들 고마워할거에요."

"고맙습니다. 강효린 박사 님.

강효린은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명찰을 건넸다.

고개를 꾸벅 숙인 이호연은 강효린 박사가 준 출입증을 목에 걸친 채 빅토리아 공원의 안으로 들어갔다.

'일단 인사는… 나중에 하자.'

알리바이를 위해 감사를 받긴해야겠지만,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가짜 던전 마법진을 회수하는 것.

이호연은 급하게 공원 구석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

이호연이 공원 안으로 들어간 뒤.

입구의 강효린은 슬쩍 고개를 돌렸다.

"… 진짜 왔네? 신기해라."

강효린은 공원 안으로 들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며칠 전부터 그렇게 당부했는데, 설마 진짜 올 줄은 몰랐다.

"그냥 마법 연구일텐데 1팀장님도 참 주책이야."

띡. 띠디딕. 띡.

강효린은 이호연의 모습이 사라지자마자 스마트워치를 조작했다.

그가 출입하면 곧바로 보고하라는 1팀장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게 사랑의 힘일까? 연인이 어디로 가는 지도 다 알고싶어하다니. 1팀장 님도 소녀같은 부분이 있다니까."

아이린에게 비밀 신호를 보낸 강효린은 미소를 지은 후, 다시 정면을 바라보며 벽에 등을 기댔다.

이제 다시 따분한 시간의 시작이다.

'누가 와서 말동무라도 해주면 좋겠네. 아, 나중에 스칼렛을 이걸로 놀리면 화내려나….'

방금 자신이 한 일이 무슨 짓인지도 모른 채.

강효린은 멍하니 푸른 하늘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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