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0화 > 잠시간 일상 (8)
꾸우욱.
이호연에게 당겨진 남다은은 몸을 돌린 채 이호연에게 등을 보였다.
대체 어떻게 안 건지 모르겠지만, 이호연이 자신을 의심하고 있었다.
'혹시 내 표정에서 들킨 건가?'
자신의 행동을 돌아본 남다은은 고개를 저었다.
남다은은 애초에 아이린에 대한 생각을 하지않고 있었고, 이호연은 방에 들어왔을 때부터 자신을 노리고 있었다.
그 전부터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 그럼 릴리아나 씨?'
사실 누가 유출했는 지는 간단하다.
남다희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고, 스칼렛이나 레베카일 가능성은 매우 적다.
자신은 아니었으니 당연히 릴리아나가 범인이라고 의심하는 게 합리적이다.
"…."
"다은아. 이 쪽 봐봐."
"… 미, 미안."
남다은은 눈을 질끈 감은 채 이호연의 말을 힘껏 무시했다.
이제 누가 범인인 지는 중요한 게 아니다.
이호연의 의심을 자신이 모두 감당해야하는 게 문제였다.
'스칼렛 씨가 절대 비밀로 하라고 했는데….'
이호연에게 비밀을 만든다는 것이 남다은의 상식과는 거리가 있지만, 스칼렛이 워낙 당부했으니 어쩔 수 없었다.
- 저, 호연이는 제 은인이고… 사랑하는 사람이라…. 비밀을 만드는 게 힘들어요….
- 다은 양. 그건 모두가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항상 하고 싶은 거만 할 순 없어요. 그리고 먼저 비밀을 만든 건 호연 님이니까요. 앞으로 미래를 위한 일입니다.
- 으으, 그래도 호연이가 물어보면 숨기기 힘들 것 같아요….
- 괜찮습니다. 먼저 말하지만 않으면 됩니다. 눈치 없는 그가 알아챌 확률은 낮으니까요.
- 알겠어요….
남다은은 늦었지만 스칼렛을 원망했다.
스칼렛 씨는 거짓말쟁이야.
호연이가 눈치 없다고 했으면서.
"다은아?"
"…."
스칼렛과의 대화를 떠올리던 남다은은 굼벵이처럼 몸을 말고 이호연의 시선을 피했다.
눈을 마주치고 대화하기는 힘들었으니 묵비권 행사였다.
"… 누가 보면 내가 겁이라도 준 줄 알겠네."
이호연은 머리를 긁적이며 남다은의 뒤통수를 바라봤다.
분명히 무언가 숨기고 있는 건 확실한데, 대화를 하면 숨길 자신이 없는 걸까.
아예 대화단절이라니.
남다은은 몸을 돌린 채 이 쪽을 바라보질 않았다.
'흠….'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이호연은 문득 남다은의 목덜미로 시선을 돌렸다.
눈을 뗄 수 없는 새하얗고 매끈한 살결.
만약 드라큘라가 세상에 있다면 저런 목덜미는 참지 못했겠지.
이호연은 남다은을 등 뒤에서 끌어안은 채 본능적으로 목덜미에 코를 가져갔다.
킁킁.
바디워시 향과 섞인 남다은의 달콤한 체향.
츄리닝을 입어도 부드러운 이 살결과 함께라면 이대로 코를 박은 채 잠들고 싶은 향기였다.
"아, 아앗. 왜 그래. 호연아… 부끄러워."
남다은은 그제서야 몸을 흔들며 고개를 돌렸는데, 이호연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다시 시선을 피했다.
"왜 피하는 거야. 다은아. 그냥 눈을 보면서 대화하자는건데."
"미안해. 미안…."
"피곤해서 그러는 거면 오늘은 그냥 잘까?"
"그건 아니지만…."
남다은도 오랜만의 잠자리를 피하긴 싫었다.
이대로 있으면 안 되는 것도 알고있다.
하지만 이호연의 얼굴을 보자마자 비밀을 숨기지 못할 것 같았으니,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스칼렛이나 레베카 씨가 숨기는 것도 슬픈데, 다은이까지 나한테 숨기는 거야? 다 같이 아이린 씨랑 이상한 계획 짜고 있는 거지?"
"그, 그런 건 절대 아니야… 믿어줘."
"그럼 아직 정보만 공유하고 있나 보네?"
"어떻게 알았… 읍."
이호연은 손으로 입을 막는 남다은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예전보다 많이 밝아졌지만, 어리숙한 모습은 그대로였다.
남다은은 자신이 한 실수를 깨닫고 눈을 크게 떴다.
"하아… 다은이까지 이러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으. 으음…."
"슬프다 슬퍼. 설마 다은이한테 까지 이런 취급을 받다니…."
"아… 미, 미안해."
남다은은 안절부절못하며 이호연의 눈치를 살폈다.
그 모습이 왠지 주인에게 버림받은 강아지 같아서 이호연도 가슴이 아팠다.
★ 히로인 상태창
[남다은]
- [ 호감도 : 100 ] ( + 2.1 )
- [ 성욕 : 87 ]
- [ 식욕 : 35 ]
- [ 피로도 : 45 ]
현재 상태 : 큰일, 큰일인데… 들켜버렸어.
'이제 다은이는 그만 괴롭혀야겠네.'
이호연의 예상이 맞았다.
그녀들은 아이린의 집에서 정보를 모으고 있었다.
이유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루시퍼일 수도 있고 자신이 보여준 태도 때문일 수도 있다.
어쩌면 자신이 여자를 많이 만나는 것 때문일 수도 있고.
'가짜 던전 계획까지 가까이 간 모양이지만… 아직 확신은 없는 거야.'
이호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들킨 건 아니었다.
자세한 사항을 모른다면 아직 기회는 있다.
모든 걸 되돌릴 수 있다.
"미안, 미안해…."
"아니야. 장난이었으니까 너무 미안해하지는 마."
이호연은 울상을 짓는 남다은을 뒤늦게라도 달래줬다.
필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미안하긴 하네.
"… 너무해."
"미안해. 그 정도로 슬퍼할 줄은 몰랐어."
"… 스칼렛 씨 한테는 비밀로 해줘."
"걱정하지마. 다은이 네가 얘기해줬다고는 말 안할게."
남다은은 서운함과 안도감을 동시에 느끼며 이호연의 얼굴을 바라봤다.
언제나처럼 웃고 있던 그였지만, 남다은은 스칼렛과 레베카에게 듣기 전까진 그의 사정을 모르고 있었다.
'호연이는 정말 무언가를 꾸미고 있는 걸까?'
최근 바빠서 자신에게 예전보다 대화를 많이 나누지 못하는 건 정말 아쉬운 일이지만, 중요한 고민이 있다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레베카나 스칼렛이 말해주지않았다면 남다은은 평생 눈치채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스칼렛 씨나 레베카 씨보다 호연이를 제대로 보고 있지 않는 것일지도….'
사실 이호연이 걸린 저주라는 것도 남다은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호연이 나쁜 저주에 걸렸다면 구해주고 싶다는 마음 뿐이었다.
자기 자신에게 실망한 남다은은 이호연의 품에 안긴 채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이린 씨랑 대화를 궁금해하는 걸 보면… 호연이한테 정말 뭔가 있는 거야?"
"응…? 아니, 무슨 소리야 그게. 릴리아나가 이상한 소리를 하길래 그런 거지."
남다은의 말을 들은 이호연은 몸을 살짝 굳혔지만, 티 내지 않고 반응했다.
"정말…? 다른 사람들은 호연이가 뭔가 숨기고 있다고 하던데… 거짓말이었던 거야?"
표정이 살짝 밝아진 남다은은 고개를 들고 이호연과 눈을 마주쳤다.
저 웃음을 보니 양심이 쿡쿡 찔렸지만, 이호연은 꿋꿋이 말을 이었다.
"거짓말이라기보단… 착각 아닐까? 내가 요즘 바쁘긴 했잖아."
"아… 다행이야."
남다은은 환하게 웃으며 이호연의 가슴에 안겼다.
얼굴을 부비부비 하는 게 굉장히 기쁜 모양이다.
이호연은 쓴웃음을 지으며 남다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양심이 너무 아프네.'
스칼렛처럼 장난을 걸어오는 사람한테 거짓말하는 건 몰라도, 남다은처럼 자신만을 바라보는 사람에게 거짓말을 하려니 가슴이 아프다.
특히 저렇게 기쁜 표정을 보여주니 더욱 죄책감이 든다.
"…."
양심을 찌르는 고통이 오늘따라 더욱 심했다.
며칠 전부터 [뚜렷한 정신력]을 의식하지 않도록 신경 써서 행동하고 있는데, 어쩌면 그것과 상관이 있는 걸 지도 모르겠다.
"호연아."
"응. 다은아."
이호연은 자신을 바라보는 남다은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비록 죄책감이 느껴지긴 하지만, 아직은 괜찮았다.
"… 내가 위."
"뭐라고?"
"… 오늘은 내가 위에서 해도 될까해서…."
"…?"
남다은은 조심스럽게 이호연을 올려다봤다.
붉게 물든 볼은 창피해하는 그녀의 감정을 알려주고 있었다.
이호연은 남다은의 말을 이해하는 데에 약간 시간이 걸렸다.
그녀가 원하는 바를 이해한 뒤.
남다은의 표정을 본 이호연은 결국 웃음을 참지 못했다.
"… 큭."
"왜, 왜 웃어…!"
"미안. 근데 지금 진지한 분위기 아니었어? 갑자기 그런 얘기를 하길래."
"내, 내일은 아카데미도 가야 하니까… 저번처럼 잠을 못 자면 안 되잖아……."
남다은은 이호연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눈을 피했다.
창피해도 할 말은 해야했다.
이호연과 자신은 아카데미의 생도.
우선해야할 것은 학업이다.
"아…. 그랬었지."
그러고 보니 저번 차례의 남다은과 잤던 날.
그날따라 발기가 풀리질않아서 해가 뜰 때까지 섹스를 했었다.
멈추려고 해도 남다은의 야한 모습을 보고 다시 흥분해서 서로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뜨거운 밤을 보냈다.
결국 다음날 둘 다 퀭한 눈으로 아침을 맞이했었는데, 그날의 기억이 선명한 모양이다.
이호연은 부끄러워하는 남다은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며 빙긋 웃었다.
"그래. 그것도 충분히 중요한 일이긴하지."
"으, 으음… 하아. 으응."
자연스럽게 남다은의 가슴에 손을 올린 이호연은 가슴을 주무르며 남다은의 위에 올라탔다.
얇은 츄리닝을 위로 벗기고, 부드러운 살결을 느낀다.
남다은은 이호연을 보며 긴장한 듯 양 팔을 벌렸다.
"사랑해. 호연아. 나 미워하지 말아 줘."
"안 미워할 거야."
"정말? 정말이지?"
"당연하지. 내가 널 왜 미워해."
"… 다행이다."
남다은은 이호연과 눈을 마주치며 환하게 웃었다.
똘망똘망한 눈을 보고 있자니 다시 가슴이 아파왔지만, 이호연은 마음을 다잡았다.
'… 거짓말이 아니게 하면 되잖아.'
꽤 많이 시간이 지났지만, 처음부터 없었던 일로 만들면 된다.
그러면 남다은이 슬퍼할 이유도 없다.
"응, 응. 츗…. 하후. 응읍…."
이호연은 남다은에게 키스를 하며 잡념을 지워냈다.
가짜 던전 계획에 대한 생각은 남다은에게 사랑을 준 이후에 시작해도 늦지 않는다.
"앗…."
평소처럼 관계를 리드하려던 이호연은 문득 들리는 남다은의 아쉬운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자신과 눈이 마주친 남다은은 고개를 돌렸는데, 잠시 생각하던 이호연은 눈을 크게 뜨고 남다은의 위에서 내려왔다.
"맞다. 오늘은 다은이 네가 위에서 한다고 했었지? 중요한 일이었는데, 순간적으로 깜박했어. 미안해 다은아."
"창피하니까 계속 말하지 말아 줘…."
얼굴을 붉히면서도 옷을 벗고 위에 올라오는 남다은을 보며, 이호연은 옅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