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9화 > 잠시간 일상 (7)
"… 지금 뭐라고 했어?"
이호연은 눈을 크게 뜬 채 릴리아나에게 다가갔다.
릴리아나는 이호연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살짝 놀랐지만, 눈을 깜박거린 뒤 방금 했던 말을 떠올렸다.
"응? 그러니까… 빅토리아 공원 하고, 저주… 그리고 가끔 네가 하는 이상한 개그를 못 받아주겠다는 말이었나?"
"아니, 그거 아니었잖아! 방금 뭐라고 한 거야!?"
"으악! 왜, 왜 그랭! 머리 아파!"
머리가 아득해진 이호연은 릴리아나의 어깨를 붙잡은 채 앞뒤로 마구 흔들었다.
릴리아나가 하는 말의 대부분은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이호연이지만, 방금 들은 말은 흘려 넘길 수 없었다.
특히 가짜 던전.
여자들이 그런 대화를 나눴다는 건 그냥 넘어가기엔 심각했다.
"방금 빅토리아 공원, 저주 그리고 가짜 던전이라고 했지? 응?"
"대충 그런 단어를 들은 거 같긴 한데…. 왜 그래? 화난 거야?"
"…."
이호연은 움츠려 든 릴리아나를 보며 감정을 가라앉혔다.
진정하자.
화를 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잖아.
천천히 상황을 되짚어봐야 한다.
'침착해야 해.'
사실 릴리아나가 말한 것들이 어마어마한 비밀이냐고 물어보면, 그건 아니다.
모두에게 진실을 숨겨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으니, 조금씩 사실을 말해가며 움직였다.
아이린은 루시퍼와 검은 기둥에 대한 조사를 도와줬고, 레베카는 가짜 던전 마법진을 같이 설계해줬다.
그러니 그녀들이 아는 건 당연한 일인데, 문제는 그 단어들이 릴리아나의 입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아이린만 알고 있는 '빅토리아 공원'
엘리스만 알고 있는 '저주'
레베카만 알고 있는 '가짜 던전'
자신은 릴리아나에게 이런 정보를 말한 적이 없으니, 분명 엘리스의 집에서 들은 거겠지.
그녀들이 만나면 무슨 대화를 나눌까 궁금했는데, 이제야 알았다.
'… 왜 친해졌나 싶었더니 나 때문이었구나.'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직 가짜 던전 마법진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
이호연이 마지막으로 확인했을 때만 해도 마법진을 건드린 흔적은 없었다.
'아니면 내가 너무 과민 반응하는 건가?'
어쩌면 별 일 아닐지도 모른다.
단순히 대화를 나누다가 스쳐 지나간 단어를 릴리아나가 기억한 걸 수도 있겠지.
'… 아니야. 의심은 해봐야 해. 그게 더 이상하잖아.'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너무 낮다.
빅토리아 공원까지는 어떻게 나올 수 있는 단어라고 쳐도, 가짜 던전은 레베카만이 알고 있는 정보다.
레베카와 마법진 작업을 할 때는 그녀가 직접 비밀을 지켜줬지만, 지금은 다르다.
비밀 유지 마법 같은 걸 걸어놓은 것도 아니니 레베카가 입을 연다면 막을 방법이 없다.
'비밀 유지 마법이라도 했어야 했나…? 아니, 그건 아니지.'
레베카가 허락할지 안 할지는 둘째치고 자신을 도와주는 사람한테 그런 걸 권하는 건 할 짓이 아니다.
"… 내가 뭐 잘못했으면 미안해."
"아니야. 내가 미안. 이상하게 흥분해버렸네."
이호연은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릴리아나는 아직도 주눅 든 상태로 이호연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호연의 급발진에 깜짝 놀란 것 같았다.
후우.
이호연은 심호흡을 했다.
지끈거리는 두통을 이겨내고 릴리아나의 어깨를 붙잡은 손을 놨다.
생각에 빠져서 아직까지도 어깨를 꽉 잡고 있었던 모양이다.
릴리아나한테는 잘못이 없다. 아니,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
굳이 따지자면 이호연의 잘못이다.
"릴리아나, 아까 말했던 대화는 확실한 거지?"
"으, 으으음… 아마 그럴 거야. 근데 왜 그러는데? 혹시 말하면 안 되는 거였어? 내 잘못은 아니지?"
"… 그런 거 아니야. 갑자기 이상한 짓 해서 미안. 걱정하지 마."
불안해하는 릴리아나를 보니 미안한 감정이 샘솟는다.
그녀 덕분에 사실을 알았으니, 감사해야한다.
이호연은 릴리아나의 상태창을 열었다.
★ 히로인 상태창
[릴리아나]
- [ 호감도 : 99 ] ( + 4.1 )
- [ 성욕 : 90 ]
- [ 식욕 : 50 ]
- [ 피로도 : 40 ]
현재 상태 : 내 잘못은 아닌 거 같긴 한데… 아이린을 납치한 게 잘못이었나? 하지만 지금은 사이가 좋으니까 괜찮겠지?
… 납치는 무슨 뜻이야?
언제나 하는 릴리아나식 헛소리인가?
상식적으로 납치를 당했다면 아이린이 그렇게 사이좋게 지낼 리가 없잖아.
게다가 이호연의 여자들이 그런 막장들은 아니다.
아마 여자들끼리 장난치는 걸 진짜로 오해한 거겠지.
'릴리아나가 아무것도 모르는 건 확실한 것 같고….'
지루해서 쫓겨난 것도 맞는 것 같으니 릴리아나에게 얻을 정보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다은이가 오면 슬쩍 떠보기라도 해야 하나?'
릴리아나에게 정보가 없다면 다른 여자를 노려야 한다.
스칼렛이나 레베카는 금방 눈치챌 것 같으니 순진한 다은이를 꼬셔야지.
"으음… 난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는뎅."
"이리 와. 실수였다니까."
"헤헤."
아직도 어깨를 움츠리고 있던 릴리아나의 목에 팔을 두르자, 릴리아나도 미소를 지었다.
이럴 때는 단순한 게 참 좋구나.
'그 일은 나중에 생각하고… 일단 여자들 앞에선 티 내지 말자.'
아무 생각도 없는 릴리아나와 다르게 스칼렛과 레베카는 자신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에게 처음 팩트 폭행을 날린 것도 그 둘이었으니까.
아이린의 집에서 시간을 보내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호연의 이름도 나올 테고, 그러다가 의심하게 된 걸지도 모르겠네.
릴리아나는 금방 미소를 지으며 이호연에게 달라붙었다.
"그러고 보니 편지에 답장은 안 왔어?"
"편지? 아… 응. 답장은 없었어."
"아쉽네…. 엄마가 바쁜가?"
지옥의 계약서를 통해 보내는 편지의 답장은 이호연에게 도착한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는데도 답장이 없는 걸 보면 답장을 보낼 의사가 없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서큐버스 퀸이니까….'
릴리아나 어머니의 정체를 알고 나니 뭐든 의심하게 된다.
마왕의 정부인 그녀를 실제로 만나면 어떻게 대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그녀가 뭘 원해서 릴리아나를 봉인한 건지도 알 수가 없다.
릴리아나는 답장이 안 와도 괜찮다는 듯 금방 미소를 지었다.
"나중에 같이 지옥에 갈 수 있으면 상견례도 하면 좋을 텐데."
"상견례? 지옥에도 그런 게 있어?"
"그건 아닌데, 여기서 보고 한번쯤 해보고 싶었거든. 젊은 인간 남자… 아니, 너를 데리고."
"… 젊은 인간 남자라 중요한 거 아니지?"
"그럴 리가 없잖아!"
품에 안기는 릴리아나의 머리를 쓰다듬은 이호연은 소파에 몸을 맡겼다.
사실 몸도 힘들고 머리도 아파서 한 숨 자고 싶었지만, 생각할 일이 꽤 많았다.
'… 만약 여자들이 눈치챈 것 같으면 어떻게 해야 하지?.'
가짜 던전 계획을 즉시 폐기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럼 히로인들을 공략해야 할 방법을 다시 찾아야 하는데….
띠리링-
"응? 스카웃이 왔나봐."
그때,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며 익숙한 발소리들이 다가왔다.
서로 재잘거리는 목소리는 덤이었다.
"다녀왔어~. 릴리아나, 미안해. 대신 치킨을 사왔… 응? 애기 아빠도 와있네?"
"그러게 말입니다. 오늘은 일찍 오셨군요."
"미안해. 호연아. 밥 먹었어? 같이 치킨 먹을까?"
이호연을 본 여자들은 반갑게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하지만 이호연은 그녀들의 눈치를 봐야했다.
진실을 안 순간 평소처럼 대하기는 힘들었다.
"… 아니에요. 근데 다들 어디 갔다 왔어요?"
"잠시 아이린을 만나고 왔어."
"아하. 아이린 씨는 왜요?"
"그냥 옆 집이니까 놀고 온 거지."
레베카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
은은한 미소까지 짓고 있었는데, 이호연이 아니었다면 깜박 속아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 히로인 상태창
[레베카]
- [ 호감도 : 100 ] ( + 1.1 )
- [ 성욕 : 60 ]
- [ 식욕 : 40 ]
- [ 피로도 : 30 ]
현재 상태 : 아이린 집에 가는 건 비밀로 하고 싶었는데… 애기 아빠도 별 신경 안 쓰겠지?
[호감도 100 달성시 이호연을 남편으로 섬기며 내조함]
레베카의 마음을 읽은 이호연은 침을 꿀꺽 삼켰다.
자신만 모르는 여자들의 비밀대화가 너무 신경 쓰였다.
"으, 으응. 그렇구나. 맞다. 다은아. 피곤해서 오늘은 조금 자고 밥은 이따가 혼자 먹을게."
이호연은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며 방으로 도망쳤다.
*
"… 으음."
결국 저녁을 먹지 못한 이호연은 침대에 누운 채 이불을 뒤집어썼다.
여자들과 얼굴을 마주치고 밥을 먹을 자신이 없었다.
표정관리를 한다고 해도 눈치 빠른 스칼렛이라면 걸릴 수도 있으니까.
"설마 눈치챘나? 진짜로?"
그녀들에게 정보가 그렇게 많았을까?
단편적인 정보들을 모아서 진실에 도달하기엔 이호연이 숨겨놓은 사실이 많았다.
'아직 정보를 모으고 있는 건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들이 진실에 도달할 수는 없다.
서로가 아는 것을 합쳐 자신의 비밀을 파헤치려고 하고 있는 중이고, 그 대화를 릴리아나가 주워들은 것 같았다.
하지만, 만에 하나라는 게 있다.
그녀들이 진실에 가까워졌을 가능성이 낮지만 존재한다.
그러니까 떠볼 수 있는 건 떠봐야겠지.
똑똑.
- 호연아. 들어가도 될까?
"응. 들어와."
끼이익.
문이 열리고, 편한 복장을 입은 남다은이 이호연의 방으로 들어왔다.
얇은 츄리닝이었는데, 펑퍼짐한데도 가슴이 부각되는 보기 좋은 복장이었다.
남다은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이호연에게 다가와 울상을 지었다.
"호연아. 몸은 괜찮아? 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
"아니야. 다은아. 잠깐 대화나 할까?"
"좋아."
스윽-
남다은은 침대에 걸터앉은 채 이호연의 손을 잡았다.
이호연과의 밤을 하루 씩 독점하는 건 여자들끼리 합의한 사안이다.
오늘 밤은 남다은의 차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남다은을 보며, 이호연은 생각했다.
그녀가 아는 정보를 모두 뜯어내겠다고.
"오늘은 아이린 씨를 만나고 온거야?"
"으응. 차를 마시고 왔어. 다희가 아카데미에서 친해진 친구하고 놀러갔거든."
"그래? 친구도 잘 사귀니 다행이네. … 근데 아이린 씨하고는 보통 무슨 말을 해?"
"음…. 그냥 잡담? 보통 레베카 씨랑 스칼렛 씨가 많이 말하고, 나는 구경하곤 해."
남다은은 이호연과 대화하는 게 마냥 좋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저런 순수한 얼굴을 하는 남다은에게 정보를 뜯어내는 게 양심에 걸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크흠. 그래? 나에 대한 얘기는 안했어?"
"… 호연이에 대한 말은, … 안하지."
"정말?"
"… 응."
이호연은 눈을 피하는 남다은의 옆얼굴에 시선을 고정했고, 남다은은 고개를 돌렸다가 힐끔힐끔 이호연을 바라봤다.
그럴 때마다 지긋이 자신을 바라보는 이호연을 보니 왠지 불안감이 엄습했다.
★ 히로인 상태창
[남다은]
- [ 호감도 : 100 ] ( + 2.1 )
- [ 성욕 : 85 ]
- [ 식욕 : 30 ]
- [ 피로도 : 35 ]
현재 상태 : 스칼렛 씨가 절대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으, 으으. 어떡하지.
[호감도 100 달성시 이호연에 대한 사랑이 매우 돈독해짐.]
상태창을 본 이호연은 미소를 지으며 남다은의 손을 꼬옥 잡았다.
따뜻한 손에서 그녀의 긴장이 느껴졌다.
"다은아. 나한테 숨기고 있는 거 있지?"
"아, 으응? … 그런 거 없어."
"내 눈 봐봐."
이호연은 남다은의 손을 잡고 그녀를 끌어당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