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5화 〉 515화. 잠시간 일상 (3)
* * *
"으으응… 힘들어."
"이제 익숙해질 때가 됐잖아."
"곧 퇴원할 텐데 내가 왜 익숙해져야 해."
몸에 주렁주렁 붙은 검사기기를 떼어낸 임솔은 기지개를 켜며 메디컬 체크를 마무리했다.
임솔이 거의 다 나았다길래, 검사도 짧을 줄 알았는데 완전히 잘못된 생각이었다.
설마 한 시간 가까이 기다려야 할 줄이야.
옆에 앉아 사과를 깎으며 기다리던 이호연은 검사가 끝난 둘에게 다가갔다.
"드디어 끝난 거예요? 생각보다 오래 걸리네."
"그러니까. 다 나았는데도 이런 검사는 너무 비효율적이야."
"스읍. 안하면 너만 손해야. 솔아. 저번에도 그러다가 마력 큐브를 놓쳤잖아."
"그건 왜 얘기하는거야…."
백아영은 어린아이를 가르치듯 임솔에게 말했다.
평소에는 백아영이 어린애 같지만, 병원에 있을 때는 백아영도 진지한 모습을 보였다.
사실 임솔이 무리하다가 쓰러지는 걸 본 기억도 있으니 나도 백아영의 말에 동의하긴 한다.
저 사람은 자신의 몸 상태를 잘 모르니까.
"하지만 나는 다 나았는걸."
"이런 대우도 VIP니까 받을 수 있는 거야. 세상에 아파서 죽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고맙게 생각해야지."
"원하지 않는 VIP 대우야."
저게 뭐라고 싸우고있는걸까.
이호연은 티격태격거리는 백아영과 임솔에게 다가갔다.
"빅토리아 아카데미의 VIP를 얻고 싶은 사람이 얼마나 많을 텐데 그런 말을 해요. 다 싸우지말고 끝났으면 사과나 드세요."
"아ㅡ."
"토끼 모양으로 잘라보려 했는데 그건 힘들더라고요."
이호연은 입을 벌린 임솔에게 사과를 손수 먹여줬다.
아이린이 자른 토끼 모양 사과는 엄청 반듯했는데, 자신이 자른 토끼는 야생에서 꽤 많이 구른 것 같았다.
옴뇸뇸.
투덜대던 임솔은 사과를 오물거리며 입을 다물었다.
"아…."
"아영 씨도 드세요."
"냠냠."
메디컬 체크 장비를 치우다가 임솔이 사과를 받아먹는 걸 보고 세상을 잃은 표정을 지은 백아영에게도 사과를 찍어주고 나니, 병실은 사과를 먹는 소리로 가득 찼다.
'평화롭고 좋네.'
사과를 먹는 것 만으로 모두가 행복해지면 얼마나 좋을까.
이호연은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귀가 없는 토끼를 집어먹었다.
귀는 없었지만 사과는 여전히 맛있었다.
그때, 사과를 다 먹은 백아영이 입을 열었다.
"맞아. VIP 하니까 생각났는데, 호연이 너도 이제 아카데미의 VIP야."
"네? 그건 뭔 소리예요?"
"이번에 추천이 올라왔어. 아카데미 테러 진압, 마법사 학회에서의 성과, 그리고 또 뭐였지… 1학년 수석이었나? 아무튼 여러 추천을 받았어. 딱히 반대하는 사람도 없으니 통과는 확정일 거야."
이호연은 뜬금없는 말에 눈을 깜박거렸다.
VIP가 된 건 사실 그럴 수 있었다.
자신이 봐도 한 일이 엄청나게 많았으니까.
하지만 아직 1학년이라는 문제도 있고, 아카데미에서 그런 언질도 없었으니 꽤나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VIP가 좋긴 한데… 누가 먼저 추천한 거예요?"
"아마 학생회장이었을거야."
"아."
수린 누나가 했다는 말을 들으니 의심이나 의문은 바로 사라졌다.
사실 자신은 필요한 게 있으면 문수린에게 부탁하면 되니, VIP나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병실도 VIP룸을 받았으니까.
그래도 서류상 VIP가 되면 편한 부분이 생기겠지.
문수린도 그런 생각으로 한 게 아닐까.
이따가 감사 인사라도 하러 가야겠다.
"이제 우리 제자도 VIP의 설움을 알게 되겠네."
"…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진료를 거부할 수 없는 설움이야."
"그건 솔이 네가 이상한 거라니까."
"으읍."
이호연은 고개를 저으며 임솔의 입에 사과를 집어넣었다.
아까부터 몇 번이나 말하는 걸 보면 진짜 서운한 모양이다.
애도 아니고 왜 저러는 거람.
"소, 솔이?"
한 편.
배시시 웃으며 둘의 이야기를 듣던 백아영은 솔이라는 단어에 몸을 굳혔다.
임솔이 솔이라고 부르게 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그녀는 잘 알고있다.
까칠한 성격인 임솔은 완전히 마음을 연 상대에게만 그 호칭을 허락한다.
이상한 건 아니었다.
솔이라고 부르는 걸 허락하는 사람은 몇 명 없지만 이호연이 거기 들어가지 않을 이유는 없다.
머리로는 이해가 되도, 그걸 눈 앞에서 보니 뭔가 기분이 찝찝했다.
가만히 있다가 펀치를 맞은 느낌?
한 번 맞았으니, 자신도 딱 한 대는 때려도 되는 거 아닐까.
백아영은 이호연의 옆에 딱 붙으며 입을 열었다.
"… 여보. 나도 사과 먹여줘요."
"응? 여기요."
"아."
냠냠.
이호연은 아무것도 아닌 듯 백아영에게 사과를 먹여줬다.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호칭이 잠깐 바뀐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 여보?"
하지만 침대에 누워있던 임솔은 여보라는 호칭에 눈을 크게 떴다.
여보는 보통 결혼한 사이에서나 쓰는 단어다.
백아영이 사용하기엔 어색한 호칭이다.
'여보라는 호칭이 입에 붙은 것처럼 자연스러워.'
임솔은 눈을 찌푸리며 백아영에게 물었다.
"아영아. 지금 여보라고 한 거야?
"으응? 아, 미안. 말실수였어."
"그렇다기엔 너무 자연스러워 보였는데. 혹시 단 둘이 있을 때 그렇게 부르는 거야?"
"그, 그게 뭐 어때서. 너도 솔이라고 부르면서."
"그거랑 그거랑은 다른 거지!"
임솔은 자신의 예상이 맞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자신이 솔이라고 부르라고 허락한 건 맞다.
하지만 여보는, 여보는… 너무 달콤하지 않나?
살면서 처음으로 백아영이 부러워 죽을 것 같았다.
"아영이 너…."
백아영은 임솔의 반응을 보고 슬쩍 눈을 돌렸다.
임솔과 싸우고 싶지는 않았다.
한 대 맞았으니 카운터 펀치를 날린 것뿐이다.
"뭐야. 방금까지 화기애애했는데 둘 다 왜 그러는 거예요."
때마침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한 이호연이 빠르게 끼어들었다.
""….""
서로를 째려보던 임솔과 백아영은 이호연이 끼어들자마자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입을 다문 채 다른 곳을 바라봤다.
*
다행히 둘의 싸움이 진심은 아니었는지 시간이 지나자 금방 풀렸다.
백아영은 그 뒤로도 잡담을 나누었고, 사과 3개가 동나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일이 있어서 슬슬 가볼게. 호연이는 언제쯤 돌아갈 거야?"
"아영 씨가 가면 저도 금방 가지 않을까요?"
"으음. 알겠어. 다음에 보자."
조심스럽게 양 팔을 벌리는 백아영을 한 번 안아주자, 그녀는 만족한 미소를 지으며 장비들을 가지고 병실 밖으로 향했다.
"잘 가. 아영아."
"응. 이따가 또 올게."
임솔의 배웅을 받은백아영이 나간 뒤.
이호연은 임솔의 이글거리는 시선을 받았다.
"호연아. 아영이랑 여보라고 부르는 거야?"
"… 넵."
"화 내는 거 아니야. 어쩌다가 그렇게 된 건 지 알려줄 수 있어?"
"이유를 설명하자면 좀 복잡해."
봉사활동을 가서 소꿉놀이를 하다가 그 호칭이 그대로 정착되었다.
물론 그 사이에 여러 일이 있었지만… 아무튼 그랬다.
이호연은 봉사활동에서 아이들하고 놀아주다가 그대로 입에 붙었다는 식으로 최대한 돌려서 설명했다.
"흐음…."
"솔이 너도 여보라고 불러줬으면 좋겠어?"
"그건 아니야. 그냥 궁금해서."
지금부터 여보라고 불러봤자, 백아영의 아류일 뿐이다.
자신은 다른 방법으로 이호연과 가까워지고 싶었다.
'분위기가 축 쳐졌네.'
이호연은 침울해하는 임솔을보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솔아."
"응."
"아까 하던 거나 이어서 할까?"
이호연은 임솔의 허벅지에 손을 올렸고, 임솔도 금방 이호연의 말을 눈치챌 수 있었다.
"지금…? 아영이가 방금 나갔잖아."
"딱히 할 것도 없잖아. 가기 전까지만. 싫어?"
"… 싫다는 건 아니야. "
서운해 보이면 기분 좋게 만들어줘야지.
자신도 사랑받고 있다는 걸 알려줘야한다.
이호연은 미소를 지으며 임솔의 옆에 몸을 눕혔다.
*
"기분이 풀린 것 같아서 다행이네."
뜨거운 정사가 끝나고, 이호연은 병실 밖으로 나오며 스마트 워치를 확인했다.
스마트 워치에는 빅토리아 아카데미의 VIP로 선발되었다는 알림이 와있었다.
"수린 누나나 보러 가 볼까."
VIP에 대한 감사도 해야 하고, 물어보고 싶은 것도 있었다.
판데믹의 동향이나 루시퍼를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것들.
개인적으로는 루시퍼에 대한 수사를 좀 더 집중해줬으면 좋겠지만… 사람 일이라는 게 마음대로 되지는 않으니 기대는 하지 말자.
남에게 과하게 기대면 될 일도 안된다.
직접 해결하겠다는 마음가짐으로 해야지.
이호연은 동아리 건물의 꼭대기에 있는 학생회실로 향했다.
룬의 결계를 치지 않았더니 엄청나게 많은 시선이 끌려서 꽤 부담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이호연은 오랜만에 보는 학생회 인원들에게 인사를 하며 학생회장실로 다가갔다.
똑똑똑.
"수린 누나. 저 왔어요."
"응! 잠시만!"
우당탕탕 하는 소리가 들리고, 곧 학생회실의 문이 열렸다.
"들어와도 돼."
학생회실 안에는 언제나처럼 서류가 쌓여있는 책상이 보였다.
옆에 떨어져 있는 잡동사니들을 보니 여전히 할 일이 많은 모양이다.
"수린 누나. 할 일이 많아 보이는데 제가 눈치 없이 찾아온 건가요?"
"괜찮아. 언제 찾아오든 똑같거든. 이건 오늘 안에만 끝내면 되는 거니까. 아, 거기 앉아. 호연아. 차라도 내줄게."
문수린은 반가운 미소를 지으며 이호연을 자리에 앉혔다.
동시에 바닥에 떨어져 있던 잡동사니들이 데굴데굴 굴러서 구석에 박히고, 찻잔과 주전자가 날아왔다.
문수린의 특기인 염동력이었다.
"고마워요.누나."
이호연은문수린이주는차를받아마셨다.
임솔의취향과는다른고급티의 향이 입안에맴돌았다.
문수린은 차를 마시는 이호연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몸은괜찮아?엄청걱정했어."
"네.이제…."
별생각없이대답하려던이호연은문득떠올렸다.
'수린 누나한테도 편하게 말하는 게 좋으려나.'
문수린에게도반말을해도된다는허락을받긴했다.
어색해서 잘 쓰진않지만, 임솔이 좋아한 것처럼 문수린도 좋아하지않을까.
"…이제괜찮아.걱정안해도돼."
"헤에…. 다행이야."
문수린은이호연의말을가만히듣다가, 미소를지으며이호연의 어깨에머리를기댔다.
'다행히좋아하는것같네.'
머리를 슥슥 비비는 게 애정을 갈구하는 애완동물 같아서 귀여웠다.
말을조금편하게한걸로이런 사랑을 받으면충분히남는장사아닐까.
어색해도참아봐야지.
"그래서 내가 호연이를 VIP로 승급시키자고 했는데, 1학년은 너무 이르다고 하는거야…."
이호연의 옆에 붙은 문수린은 재잘재잘 떠들며 대화를 이어갔다.
내용은 대충 자신을 위해 열심히 힘썼다는 것.
"수린 누나. 그러고보니 물어볼 게 있는데…."
"맞아.호연이널위해준비한서류가있어.한번확인해볼래?"
얼추 문수린의 말이 끝나고, 슬슬 중요한 이야기를 꺼내려는데 문수린이 선수를 쳤다.
챡챡챡.
문수린은책상위에고이모셔놓은서류를마력으로끌고와이호연에게내밀었다.
"음…이게뭐에요?"
이호연은문수린이내민서류를보며고개를갸웃거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