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3화 〉 513화. 잠시간 일상
* * *
오늘도 평화로운 날이었다.따뜻한 햇빛이 내리쬐는 빅토리아 아카데미의 VVIP 병실.
"흠흠. 흐으으음."
병실에 누워있던 임솔은 지루한 표정으로 침대에서 일어나 스트레칭을 했다.
헐렁한 환자복 사이로 새하얀 속살이 보였지만, 지금 이 곳엔 그녀 말고 아무도 없었다.
'너무 졸려….'
임솔은 하품을 하며 창문으로 다가갔다.
커텐 사이로 비치는 쨍한 아침햇살을 받자 조금 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그녀의 입원 생활은 안정적이었다.
마력은 꽤 많이 돌아왔고, 상처의 회복도 대부분 끝났다.
임솔은 퇴원을 원했지만, 백아영의 완고한 반대로 며칠간 더 안정을 취하기로 했다.
"하여튼 걱정이 많다니까. 괜찮다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안 보내주는거야."
그나마 다행인 건 보기만 해도 머리가 아파지는 마력 큐브는 더 이상 없다는 것.
재활 치료는 끝이다.
임솔은 창문 밖의 아카데미를 내려다보며 기지개를 켰다.
입원 생활은 챗바퀴를 도는 것 같이 일정하다.
'지루해. … 다시 마력 큐브라도 해야 되나.'
방금 전까지 마력 큐브가 싫었는데도, 할 게 없으니 찾게된다.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는데 재활치료도 없으니까 약간은 섭섭했다.
'오늘은 아영이가 늦네.'
매 시간마다 찾아오던 백아영의 방문 횟수가 확 줄었다.
백아영은 맹해 보이지만 남을 돕는 걸 좋아하고, 직업 정신이 뛰어나다.
임솔의 몸 회복이 거의 다 끝난 걸 보자마자 매정하게 다른 일을 맡기 시작했다.
끄응.
임솔은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고 마력을 몸에 순환시켰다.
온 몸에 마력이 돌며 기분 좋은 시원함이 몸을 감쌌다.
"아무리 봐도 호연이랑 한 뒤로 회복이 빨라지는 기분인데."
그날 이후로 몸 회복이 빨라진 것 같다.
혹시 제자의 정자에는 마력이 듬뿍 담긴 거 아닐까.
생각해보면 당 충전을 할 때마다 마력이 충전되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가?
에이. 자기야. 왜 그래.
치. 그래. 나도 안 할 거야. 치치.
멍하니 창문 아래를 내려다보던 임솔은 귀엽게 팔짱을 끼고 걸어가는 커플을 발견했다.
앞서가는 여자가 서운한 티를 내면 남자가 그 뒤를 따라가며 달래주는 어디에나 있는 커플의 애정행각.
자신이 생도일 때는 공부만 했는데, 다들 아카데미 생활을 저렇게 보냈구나.
임솔은 그 둘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생산적이지 못하네."
여자는 화가 난 게 아닌데도 삐진 척 걸어가고, 남자는 미안해하며 그걸 뒤쫓아가는 행위.
저걸 왜 교육 기관인 아카데미 내부에서 하는 걸까.
지루함을 느낀 임솔은 창문에서 고개를 돌리고 방 중앙에 섰다.
동시에 임솔이 그려놓은 마법진이 빙글빙글 돌아가며 그녀의 마력을 일깨웠다.
연구실에 갈 수 없으니 병실에 마법 연구 환경을 설치해놨는데, 처음에만 열심히 사용하고 그 뒤에는 제대로 쓰지 않았다.
스륵 스르륵
임솔의 손가락을 따라 마법진을 그리는 마력이 떠올랐다.
어떤 갈래로 나뉘냐에 따라 수백수천 개로 나뉘는 마법진은 임솔이 가장 좋아하는 취미였다.
"음…."
마법진을 그리던 임솔은 금방 흥미를 잃고 마력을 흐트러트렸다.
이상하게 집중력이 떨어졌다.
오늘뿐만이 아니다.
재활 치료가 끝난 뒤, 마력을 사용할 수 있을 때부터 계속 이런 상태였다.
사실 임솔이 마법에 흥미를 잃는다는 일 자체가 놀라운 일인데, 놀랍게도 임솔은 원인을 알고 있었다.
"마법보다는 우리 제자가 보고 싶어."
임솔에게 마법은 모든 것이었다.
그녀의 인생에서 마법이라는 단어를 지우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얼마 전부터 마법 연구를 하고 싶은 욕구가 싹 사라졌다.
그 대신… 제자가 생각났다.
뜨거운 밤의 열기도 그렇지만, 단순히 이호연이 보고싶었다.
"… 생산적이지 못하긴 하네."
임솔은 한심한 자신의 모습에 고개를 저었다.
지금이라면 아까 봤던 생도 커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인간은 지적 생명체기때문에 효율적인 삶을 살지만, 동시에 지적 생명체기에 항상 생산적인 일을 하진 않는다.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텐데. 알아버린 이상 어쩔 수가 없잖아."
늦게 든 바람이 더 무섭다고, 임솔은 제자와 첫 관계를 가진 지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이호연이 그리워졌다.
그의 부드러운 손길과 아래를 파고드는 커다랍고 뜨거운 물건.
임솔은 몸을 부르르 떨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아영이랑은 그런 일도 많이 했겠지…?"
임솔은 친구이자 경쟁자이자 동맹인 얼굴을 떠올렸다.
친밀감과 질투심이 동시에 드는 사람.
백아영이다.
어젯밤, 임솔은 메디컬 체크를 위해 병실에 온 백아영과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눴다.
사실 임솔도 백아영에게 이호연과 잠자리에 대해서 말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태도가 너무 수상했다.
무언가 숨기고 있는 게 분명해 보였기에, 계속 물고 늘어졌다.
처음에는 빼던 백아영도 벗어날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임솔에게 진실을 말해줬다.
너랑 호연이가 하는 걸 봐서….
… 정말?
응. 그래서 호연이랑 대화도 했어.
….
백아영의 말을 들은 임솔은 말문이 막히는 것 같았다.
정사를 친구에게 들키다니.
그것도 첫 경험이었는데.
거센 충격에 몸을 가누기 힘들었지만, 임솔은 금방 정신을 차렸다.
마법도 그렇다.
실험의 실패가 없으면 오히려 실전에서 불안하다.
이건 예방 주사일 뿐.
나중에 더 엄청난 걸 겪어야 할지도 모른다.
아영이 너는 얼마나 됐어?"
으응? 뭐가?
호연이하고 경험. 너도 해봤을 거 아니야.
… 나도 솔이 너랑 비슷해. 응. 최근이었어.
백아영은 임솔의 질문을 얼버무리고 넘어갔지만, 임솔은 바보가 아니었다.
뜨거운 시간을 보낸 그때.
이호연은 여자와 관계에 익숙해 보였다.
그 말은 자신 전에 경험 상대가 많았다는 것.
짐작 가는 여자는 많고, 백아영도 그중 하나다.
'나도 노력해야겠네….'
후발주자라면 더욱 노력해야 한다.
사실 이호연을 독차지하겠다는 마음은 애초에 없지만,그의 스승으로서 조금은 특별하게 봐줬으면 하는 마음은 있었다.
어떻게 보면 자기 합리화라고 볼 수도 있다.
독차지하겠다는 마음이 없다면서 특별하기를 바라니까.
'여기선 내가 을에 가까우니까 어쩔 수 없지.'
임솔은 선택지가 이호연 하나뿐이다.
자신보다 강한 남자를 만나고 싶다는 평생의 소원을 이뤄줄 만한 남자는 그 밖에 없다.
그에 비해 이호연은 선택지가 많다.
포기할 것은 빠르게 포기하고 자신이 노력하는 수밖에.
'… 아닌가? 이미 섹스까지 했으니 버리진 않을 것 같은데.'
이호연의 성격이 이상하긴 해도 그런 짓을 할 것 같진 않았다.
…잠시 나쁜 생각을 했던 임솔은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래.
이상한 짓을 하려는 것도 아니고, 좋아하는 남자가 자신을 더 바라봐주길 바라는 건 여자의 본능이다.
특별한 자리를 위해 노력하는 것 정도는 괜찮을 거다.
'노력을 한다고 쳐도, 무슨 노력을 해야 하는 걸까.'
마법 연구에 빠져 일주일 단식도 해본 게 임솔이다.
무엇이든 하는 건 자신 있지만, 그 '방법'을 알아야 했다.
'섹스 쪽에서 노력해야 하는 건가?'
그나마 이호연이 야한 걸 좋아한다는 정보는 있지만,임솔이 아는 건 마법 밖에 없다.
남자가 뭘 좋아하는지는 그녀의 지식창고에 들어있지 않다.
백아영한테라도 도와달라고 할까.
동맹인데 그 정도는 해줄 수 있는 거 아니야?
똑똑.
"응. 들어와."
임솔은 노크 소리가 들리자마자 생각을 멈추고 침대로 쏙 들어갔다.
괜히 마법 연구를 한 걸 백아영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또 잔소리를 듣고 퇴원이 미뤄질 테니, 안정을 취하고 있었다고 해야지.
눈을 감고 침대에 눕자마자, 그녀의 몸에 익숙한 마력이 닿았다.
"엥?"
"저 왔어요."
이호연은 느긋하게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임솔에게 줄 선물을 양손에 바리바리 싸들고 있었는데, 임솔은 자신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왜 그런 얼굴이에요. 저인 거 몰랐어요?"
"당연하지. 온다고 말 안 했잖아."
"어… 그렇긴 한데."
임솔의 병실에 방문한 건 갑작스러운 결정이었다.
어제 이호연이 집으로 돌아간 이후.
거실에서 쉬다 보니 릴리아나를 비롯한 여자들도 집으로 돌아왔다.
당연히 무슨 일이냐고 물어봤지만, 비밀이라며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
몰래 전해준다던 아이린까지 묵묵부답.
무슨 일인지 너무 궁금했지만, 분위기 상 캐물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자신에 대한 좋은 말이 오갔을 것 같지도 않다.
그 찜찜함은 오늘 아침까지도 가시지 않았고, 이렇게 갑작스러운 일정을 잡았다.
임솔의 품에 안겨 마음의 안정을 취할 생각이었다.
근데 저렇게 놀랄 줄은 몰랐네.
"제 마력 파장 아시잖아요. 딱히 숨기지도 않았거든요."
"회복에 집중하려고 마력 사용을 최소화하고 있어."
빅토리아 아카데미의 경비는 말할 필요도 없이 삼엄하다.
게다가 VVIP 병실이라면 더더욱.
개미 한 마리 들어올 수 없으니 마력 결계를 켜놓을 필요도 없다.
"아하… 뭐, 지금이라도 알았으니 괜찮죠? 제가 교수님 먹으라고 과일도 사 왔으니까 같이 먹으면서 놀아요."
이호연은 주섬주섬 사온 과일을 꺼냈다.
임솔이 밖에 나가서 이런 걸 사 먹지 않은 거라는 건 당연히 알고 있다.
병실에 박혀서 초콜릿만 먹는 것보단 이게 더 건강하겠지.
"…."
"왜요?"
과일을 테이블에 내려놓은 이호연은, 강아지처럼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임솔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 사과라도 깎아달라는 건가?
토끼 모양으로 깎는 건 자신이 없다.
"이제 솔이라고 부르는 거 아니었어?"
"… 아."
임솔의 시선을 받은 이호연은 과일을 든 채 그대로 굳었다.
저 말을 듣고 나서야 떠오른 건 아니다.
자신이 그 정도로 멍청하진 않다.
인지하고는 있었지만… 뭐라고 할까.
'분위기라고 해야되나?'
백아영의 예가 있다.
여보라고 하는 건 그렇고 그런 분위기가 흐를 때뿐이다.
문수린도 마찬가지.
수린아 라고 부르는 건 섹스할 때뿐.
평소에는 둘 다 아영 씨와 수린 누나로 부르니까 임솔도 자연스럽게 교수님이라고 불러버렸다.
"… 솔아."
"응. 호연아."
"진짜 이게 편해요? 그럼 계속 이렇게 부릅니다?"
"당연하지. 나를 편하게 부를 수 있는 사람. 이 세상에 얼마 없어."
임솔은 배시시 웃으며 이호연에게 다가왔고, 이호연은 옅은 미소를 짓는 임솔과 눈을 마주치다가 자신도 모르게 양팔을 벌려 임솔을 끌어안았다.
"으응…."
"그렇게 귀엽게 말하니까 안고 싶잖아. 솔아."
"나쁘지 않네. 우리 제자. 멋있어."
"… 크흠. 적응 시간이 필요할 것 같은데요."
왜 직접 했는데도 얼굴이 빨개지는걸까.
이호연은 왠지 모르게 부끄러운 감정을 느끼며 임솔의 부드러운 몸을 끌어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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